여백/시집 191

김미선/ 랩소디 풍으로, 어느 자화상, 4월 소나타

랩소디 풍으로 김미선 걸으면서 난 생각해요 바람에 말 건네지 않아요 하늘에 닿으려 하지도 않아요 단지 나는 걸을 뿐이죠 길이 아름다워요 살아가는 일처럼요 나 혼자인 채로 걸어가요 누군가의 미소는 흘려보내도 좋아요 격려도 때론 무겁거든요 껍질을 깨고 나가는 나무의 허공을 올려다 보아요 꽃이 지는 이유도 잊어버려요 오직 길과 함께 있어요 햇살을 헤치며 푸른 그리움이 이제는 떠나는 것을 깨달아요 숨겨진 희열이 눈길의 틔우고 숨결을 있는 듯 없는 듯 눈부시게 빛나는 길의 영혼을 노래해요 김미선, , 작가마을, 2022. 어느 자화상 김미선 나의 영혼은 대부분 잿빛이다 나를 펼쳐보는 사람들은 언제나 나를 떠나간다 쏟아지는 비를 역행할 수 없어 기적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가벼운 구름의 예감이 좁은 통로에 빨려 절망..

여백/시집 2023.03.12

정호승/ 산산조각, 택배

산산조각 정호승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 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가 있지. 택배 정호승(1950 ~) 슬픔이 택배로 왔다 누가 보냈는지 모른다 보낸 사람 이름도 주소도 적혀 있지 않다 서둘러 슬픔의 박스와 포장지를 벗긴다 벗겨도 벗겨도 슬픔은 나오지 않는다 누가 보낸 슬픔의 제품이길래 얼마나 아름다운 슬픔이길래 사랑을 잃고 두 눈이 멀어 겨우 밥이나 먹고 사는..

여백/시집 2022.11.11

김관식/ 居山好

居山好 김관식 耕稼陶漁의 시 산에 가 살래. 팔밭을 일궈 곡식도 심우고 질그릇이나 구워 먹고 가끔, 날씨 청명하면 동해에 나가 물고기 몇 놈 데리고 오고 작록(爵綠)도 싫으니 산에 가 살래 居山好 2 김관식 오늘, 북창을 열어 장거릴 등지고 산을 향하여 앉은 뜻은 사람은 맨날 변해 쌓지만 태고로부터 푸르러 온 산이 아니냐. 고요하고 너그러워 수(壽)하는 데다가 보옥(寶玉)을 갖고도 자랑 않는 겸허한 산. 마음이 본시 산을 사랑해 평생 산을 보고 산을 배우네. 그 품 안에서 자라나 거기에 가 또 묻히리니 내 이승의 낮과 저승의 밤에 아아(峨峨)라히 뻗쳐 있어 다리 놓는 산. 네 품이 고향인 그리운 산아 미역취 한 이파리 상긋한 산 내음새 산에서도 오히려 산을 그리며 꿈 같은 산 정기를 그리며 산다.

여백/시집 2022.10.27

朴鍾和/ 十一面觀音菩薩, 石窟庵 大佛

十一面觀音菩薩 朴鍾和 1 千年(천년) 大佛(대불)을 聖處女(성처녀)로 모시우다. 胡蘆(호로) 한병으로 東海(동해) 물을 불리시다. 웃는듯 자브름하신가 하면 조는듯이 웃으셨네 담은듯 열으신듯 어여쁜 입술 귀 귀울여 들으면 향기로운 말씀 도란도란 구으는듯 하구나. 2 圓光寶冠(원광보관)이 모두 다 거룩하다. 부드러운 두 볼 날씬한 두 어깨 春山峨眉(춘산아미)가 의젓이 열리셨네 결곡하게 드리우신 코 어여쁘다 방울조차 없구나. 3 고운지고 보살의 손 돌이면서 白魚(백어)같다 新羅(신라) 옛美人(미인)이 저렇듯이 거룩하오? 무릎 꿇어 우러러 만지면 薰香(훈향)내 높은 나렷한 살 기운 당장 곧 따스할듯 하구나. 石窟庵 大佛 朴 種 和 천년을 지키신 沈默(침묵) 萬劫(만겁), 無恙(무양)쿠나. 태연히 앉으신 자세 배..

여백/시집 2022.09.18

관세음의 노래/ 서정주

관세음의 노래 서정주 그리움으로 여기 섰노라 호수와 같은 그리움으로, 이 싸늘한 돌과 돌 사이 얼크러지는 칡넝쿨 밑에 푸른 숨결은 내 것이로다. 세월이 아주 나를 못 쓰는 티끌로서 허공에, 허공에, 돌리기까지는 부풀어오르는 가슴속에 파도와 이 사랑은 내 것이로다. 오고 가는 바람 속에 지새는 나달이여 땅속에 파묻힌 찬란한 서라벌. 땅속에 파묻힌 꽃 같은 남녀들이여. 오 생겨났으면, 생겨났으면, 나보다도 더 나를 사랑하는 이 천년을,천년을, 사랑하는 이 새로 햇볕에 생겨났으면 새로 햇볕에 생겨나와서 어둠 속에 날 가게 했으면,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이 한 마디 말 님께 아뢰고, 나도, 이제는 바다에 돌아갔으면! 허나 나는 여기 섰노라. 앉아 계시는 석가의 곁에 허리에 쬐그만 향낭을 차고 이 싸늘한 바위 속..

여백/시집 2022.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