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시집 191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도종환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도종환 가지 않을 수 없는 고난의 길을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 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 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은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 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패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

여백/시집 2021.01.23

행여 지리산에 오실려거든/ 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실려거든 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 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 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유장한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온 몸이 달아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불일폭포의 물방이를 맞으러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세석평전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진실로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섬..

여백/시집 2021.01.23

어느 대나무의 고백, 낙엽/ 복효근

어느 대나무의 고백 복효근(1962~ ) 늘 푸르다는 것 하나로 내게서 대쪽같은 선비의 풍모를 읽고 가지만 내 몸 가득 칸칸이 들어찬 어둠 속에 터질 듯한 공허와 회의를 아는가 고백컨데 나는 참새 한 마리의 무게로도 휘청댄다 흰 눈 속에서도 하늘을 찌르는 기개를 운운하지만 바람이 거세게 불라치면 허리뼈 뻐개지도록 휜다 흔들린다 제 때에 이냥 베어져서 난세의 죽창이 되어 피를 흘리거나 태평성대 향기로운 대피리가 되는, 정수리 깨치고 서늘하게 울려퍼지는 장군죽비 하다못해 세상의 종아리를 후려치는 회초리의 꿈마저 꿈마저 꾸지 않는 것은 아니나 흉흉하게 들려오는 세상의 바람소리에 어둠 속에서 먼저 떨었던 것이다 아아, 고백하건데 그놈의 꿈들 때문에 서글픈 나는 생의 맨 끄트머리에나 있다고 하는 그 꽃을 위하여 ..

여백/시집 2020.12.18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정희성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정희성 어느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산 눈을 들여다 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여백/시집 2020.09.20

독작/ 류근

獨酌 류근 獨酌(독작) 류근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믿는 사람은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사람은 진실로 작별과 작별한 사람이 아니다 진실로 사랑한 사람과 작별할 때에는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이승과 내생을 다 깨워서 불러도 돌아보지 않을 사랑을 살아가라고 눈감고 독하게 버림받는 것이다 단숨에 결별을 이룩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아 다시는 내 목숨 안에 돌아오지 말아라 혼자 피는 꽃이 온 나무를 다 불지르고 운다 살아서 악마들에게시달리느니 죽어서 신에게 심판받길 선택한 건가. 인간이 조금 더 줄어든 지구, 입과 성기만 남은 자들끼리 모여서 모든 정의와 도덕을 입과 성기에 갈쳐놓고 삶과 죽음을 심판하는 나라. 그대 잘 가시라. 뒤도 돌아보지 말고 가시라. 그..

여백/시집 2020.07.14

직소포에 들다/ 천양희

직소포에 들다 천양희(1942~ ) 폭포소리가 산을 깨운다. 산꿩이 놀라 뛰어오르고 솔방울이 툭, 떨어진다. 다람쥐가 꼬리를 쳐드는데 오솔길이 몰래 환해진다. 와! 귀에 익은 명창의 판소리 완창이로구나. 관음산 정상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정상이란 생각이 든다. 피안이 이렇게 가깝다. 백색 淨土! 나는 늘 꿈꾸어왔다. 무소유로 날아간 무소새들 직소포의 하얀 물방울들, 환한 水宮을. 폭포 소리가 계곡을 일으킨다. 천둥소리 같은 우레 같은 기립박수 소리 같은 - 바위들이 몰래 흔들한다. 하늘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무한천공이란 생각이 든다. 여기 와서 보니 피안이 이렇게 좋다. 나는 다시 배운다. 절창의 한 대목, 그의 완창을.

여백/시집 2020.06.11

五月消息/ 정지용

五月消息정지용(1902~1950)梧桐나무 꽃으로 불밝힌 이곳 첫여름이 그립지  아니한가?어린 나그내 꿈이 시시로 파랑새가 되여오려니.나무 밑으로 가나 책상 턱에 이마를 고일 때나,네가 남기고 간 記憶 만이 소근소근 거리는구나.모초롬만에 날러온 소식에 반가운 마음이 울렁거리여가여운 글자마다 먼 黃海가 남실거리나니.……나는 갈매기 같은 종선을 한창 치달리고 있다.……快活한 오월 넥타이가 내처 난데없이 順風이 되여,하늘과 딱닿은 푸른 물결 우에 솟은,외따른 섬 로만튁을 찾어갈가나.일본말과 아라비아 글씨를 아르키러 간쬐그만 이 페스탈로치야, 꾀꼬리 같은 선생님이야,날마다 밤마다 섬둘레가 근심스런 風浪에 씹히는가 하노니,은은히 밀려 오는 듯 머얼리 우는 오르간 소리……

여백/시집 2019.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