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시집 191

져녁의 소묘 5/ 한 강

져녁의 소묘 5 한 강 죽은 나무라고 의심했던검은 나무가 무성해지는 걸 지켜보았다 지켜보는 동안 져녁이 오고 연둣빛 는들에서 피가 흐르고어둠에 혀가 잠기고 지워지던 빛이투명한 칼집들을 그었다 (살아 있으므로)그 밑동에 손을 뻗었다 한강 시집, , 문락과 지성사, 초판 51쇄 2024. 초판 2013.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한강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사랑이란 무얼까?우리의 기슴과 가슴사이를 연결해 주는 금실이지. 1979년

여백/시집 2024.12.02

단풍이 물드는 이유/ 한승수

단풍이 물드는 이유 한승수마지막까지처절하게 울어대던 매미들도자취를 감추어 버리고높아진 하늘만큼잠자리의 날갯짓이 힘겹다붉게 타오르며하루의 대미를 장식하는 노을처럼진정한 아름다움은소멸의 순간 빛을 발하는가가장 아름다운 빛깔로가장 아름다운 몸짓으로가장 아름다운 언어로남은 날들을 채워가야 한다잎을 떨구기 전단풍이 곱게 물드는 이유를이제야 알 것 같다.

여백/시집 2024.09.13

주막에서/ 김용호

주막에서 감용호(1908~ 1967) 어디든 멀찌감치 통한다는길옆주막 그수없이 입술이 닿은이 빠진 낡은 사발에나도 입술을 댄다. 흡사정처럼 옮아오는막걸리 맛 여기대대로 슬픈 노정(路程)이 집산하고알맞은 자리, 저만치위의(威儀)있는 송덕비頌德碑 위로맵고도 쓴 시간이 흘러가고 세월이여!소금보다도 짜다는인생을 안주하여주막을 나서면 노을 비낀 길은가없이 길고 가늘더라만 내 입술이 닿은 그런 사발에누가 또한 닿으랴이런 무렵에 김용호, 날개>, 1956.

여백/시집 2024.07.10

이제 살 만큼 살았고 볼 만큼 보았다/ 장윤우

이제 살 만큼 살았고 볼 만큼 보았다 장윤우(1937~ )나이 칠십(七旬)이 되면 귀신이 돼간다눈치코치, 모두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체귀 닫고 눈도 아예 감는다이 나이에 무얼 더 바라겠나만왜 이리도 가슴은 답답한가 구절양장(九折羊腸) 굽이굽이 길 따라 돌고 돌아가는 그곳을나는 알아냈다'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갈 친구들은 이미 알아서 넘어갔다정다운 이웃, 아리따운 여인들죽마고우(竹馬故友)들사랑하는 이, 모두 나를헌신짝 차버리듯이 내차버렸다이젠 좇아갈 기력도 험한 돌길도 힘겹기만 하다만마지막 한 곳 꼭 보아야 할 곳이 어디에 있다기에나는 멈칫거린다, 갈까 말까나드디어 강원도 땅 무릉도원(武陵挑源)인가정선아라리에 묻어왔다'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아리랑 고개를 내가 넘어간다~'덩..

여백/시집 2024.05.17

산책/ 이성선

산책 이성선 안개 속을 들꽃이 산책하고 있다산과 들꽃이 산책하는 길을 나도 함께 간다안개 속 길은 하늘의 길이다하얀 무명천으로 몸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안에나도 들어가 걸어간다그 속으로산이 가고 꽃이 가고 나무가 가고 다람쥐가 가고한 마리 나비가 하늘 안과 하늘 밖을 날아다니는 길발 아래는 산, 붓꽃 봉우리들안개 위로 올라와서 글씨 쓴다북과 피리의 이 가슴길에골짜기 고요가 내 발을 받들어 허공에 놓는다써 놓은 글씨처럼 엎질러진 붉은 잉크처럼아침 구름이 널려 있다이 붓꽃에서 저 붓꽃으로 발을 옮길 때안개 열었다 닫았다 하는 세상이내 눈 안에 음악으로 산다안개 속을 풀꽃 산 더불어 산책을 한다 , 2000, 가을호

여백/시집 2024.05.17

낮은 곳으로/ 이정하

낮은 곳으로 이정하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낮은 곳이라면 지상의그 어디라도 좋다.찰랑찰랑 물처럼 고여들 네 사랑을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한 방울도 헛되이새어 나가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그래 내가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너를 위해 나를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나의 존재마저 너에게흠뻑 주고 싶다는 뜻이다.잠겨 죽어도 좋으니너는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여백/시집 2024.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