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시집 191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申夕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申夕汀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대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들장미 열매 붉어. 멀리 노루 새끼 마음놓고 뛰어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지지 타고 내려오면 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 소리 구슬피 들려 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심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그 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여백/시집 2022.09.18

인연설/ 만해 한용운

인연설 만해 한용운 인연설 1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사랑한다는 말은 안 합니다. 아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 사랑의 진실입니다. 잊어버려야 하겠다는 말은 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정말 잊고 싶을 때는 말이 없습니다. 헤어질 때 돌아보지 않는 것은 너무 헤어지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웃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과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알수 없는 표정은 이별의 시작입니다. 떠날 때 우는 것은 잊지 못하는 증거요, 뛰다가 가로등에 기대어 울면 오로지 당신만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인연설 2 함께 영원할 수 없음을 슬퍼 말고 잠시라도 함께 있음을 기뻐하고 더 좋아해 주지 않음을 노여워 말고 이만큼 좋아해 주는 것에 만족하고 나만 ..

여백/시집 2022.08.04

마중/ 허림 시, 윤학준 곡, 바리톤 권오윤

마중 허림 시 사랑이 너무 멀어 올 수 없다면 내가 갈게 말 한 마디 그리운 저녁 얼굴마주하고 앉아 그대 꿈 가만가만 들어주고 내 사랑 들려주며 그림다는 것은 오래 전 잃어버린 향기가 아닐까 사는 게 무언지 하무뭇하니 그리워지는 날에는 그대여 내가 먼저 달려가 꽃으로 서 있을게 꽃으로 서 있을게 흐뭇하다, 흡족하다.

여백/시집 2022.07.14

김미선/ 시작 노트, <뜨거운 쓸쓸함>

시작노트 김미선 꽃들은 어디로 갔나 그늘 얻지 못한 여윈 어깨가 햇살을 구경한다. 서늘한 오후 3시의 풍경이 어긋난 조화 속에서도 담장을 쌓아 올린다 시동인지 가변차선 제5호 2018 , 도서출판 전망. 뜨거운 쓸쓸함 김미선(1959~ ) 멀리서 비에 젖은 바퀴소리가 붉은 눈망을의 길을 연다 길게 쓸려가는 사랑이 다시 돌아서는 착각으로 가슴이 뛴다 등불 멀어진 길 끝에서 터진 물집이 통점을 찍는다 세상의 뒷덜미에 나무들의 완벽한 일체는 더 이상 의미가 아니다 수많은 갈등과 명치 끝에 올라 탄 울렁증이 단 순간 먼 거리를 뛰어 넘는 사랑으로 핀다 발효되지 못한 난생의 외로움 분홍 모자를 찾아 길을 나서면 오래 수태 중이던 서늘한 그림자가 지퍼를 열고 수많은 모르스 보호를 쏟아낸다 김미선, , 지혜, 201..

여백/시집 2022.06.15

유월에 꿈꾸는 사랑/ 이채

유월에 꿈꾸는 사랑 이채(1961~ ) 사는 일이 너무 바빠 봄이 간 후에야 봄이 온 줄 알았네 청춘도 이와 같아 꽃만 꽃이 아니고 나 또한 꽃이었음을 젊음이 지난 후에야 젊음인 줄 알았네 인생이 길다 한들 천년만년 살 것이며 인생이 짧다 한들 가는 세월 어찌 막으리 봄은 늦고 여름은 이른 6월 같은 사람들아 피고 지는 이치가 어찌 꽃뿐이라 할까.

여백/시집 2022.06.15

그대 가까이 1~ 5/ 이성복

그대 가까이 1 바람에 시달리는 갈대 등속은 저희끼리 정강이를 부딪칩니다 분질러진 다리로 서 있는 갈대들도 있엇습니다 그대 가까이 하루 종일 햇빛 놀고 정강이가 부러진 것들이 자꾸 일어서려 합니다 눈 녹은 진흙창 위로 꺾인 뿌리들이 꿈틀거립니다 그대 가까이 하루 종일 햇빛 놀고 그대 가까이 2 자꾸만 발꿈치를 들어 보아도 당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때로 기다림이 길어지면 원망하는 생각이 들어요 까마득한 하늘에 새털구름이 떠가고 무슨 노래를 불러 당신의 귓가에 닿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만나지 않았으니 헤어질 리 없고 헤어지지 않았어도 손 잡을 수 없으니 이렇게 기다림이 깊어지면 원망하는 생각이 늘어납니다 그대 가까이 3 나무 줄기 거죽이 자꾸 갈라지고 읽을 수 없는 글자가 새겨집니다 저희는 알 수 없습니다 밥..

여백/시집 2022.03.21

다시 봄이 왔다 · 꽃 피는 시절

다시 봄이 왔다 · 꽃 피는 시절 다시 봄이 왔다 이성복 비탈진 공터 언덕 위 푸른 풀이 덮이고 그 아래 웅덩이 옆 미루나무 세 그루 갈라진 밑동에도 푸른 싹이 돋았다 때로 늙은 나무도 젊고 싶은가 보다 기다리던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가 누구의 목을 껴안 듯이 비틀었는가 나도 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때로 우리는 묻는다 우리의 굽은 등에 푸른 싹이 돋을까 묻고 또 묻지만 비계처럼 씹히는 달착지근한 혀, 항시 우리들 삶은 낡은 유리창에 흔들리는 먼지 낀 풍경 같은 것이었다 흔들리며 보채며 얼핏 잠들기도 하고 그 잠에서 깨일 땐 솟아오르고 싶었다 세차장 고무 호스의 길길이 날뛰는 물줄기처럼 갈기갈기 찢어지며 아우성치며 울고불고 머리칼 쥐어뜯고 몸부..

여백/시집 2022.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