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여행/인도행

지리산 둘레길 제4구간- 2011년 11월 30일

추연욱 2011. 12. 1. 00:38

 

 [부산/ 11월 30일/ 수요일] 지리산둘레길 제4구간

 

자리, 유심초, 마미, 행복, 미산, 뿌리, 마술피리, 길벗따라, 디디. 조아해,
얼간이, 얼간이동행, 초록맘, 빛들, 별사모, 혜륜, 찌릉소, bonami, 동이생이, 동이생이동행,
소영이, 왕비, 결실, 달마루,

함양의 운월 님이 찾아와,
모두 25명이 함께했다.

 

비 온다는 예보가 있었지만 출발할 때는 하늘이 말짱했다.

진주쯤 가니 비가 오기 시작했다. 각오했던 일.

빗줄기는 점점 굵어졌다.

비는 하루종일, 밤 늦게까지 줄기차게 왔다.


 

의탄교

 

 

11시 15분에 의탄교에 도착했다.

 

 

의평마을 쉼터

당산나무와 크리스마스 트리가 사이좋게 서있다.

어떻게 보아야 할까?

우리의 품은 이렇게 넓다.

 

당산나무는 620살 자신 느티나무다.

둘레 6.4m, 높이 22m,

매년 정월 초사흘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비는 당산나무다.

함양군나무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우리는 까만 화살표 방향을 따른다.

 

 

우라는 서암정사로 간다.

 

 

작은 팻말에 의중마을길이라 쓰여있다.

 

  

 

 

 

의중마을, 11시 30분.

 

 

서암정사 가는길은 빨간 화살표 쪽이다.

 

의중마을은 함양군 마천면 의탄리다.

의중마을과 우리가 지나온 의평마을, 그리고 강 건너 금계마을을 합쳐 의탄리다.

 

 

"우리마을 이야기 중말[義仲]"이라 쓴 표지판이 있는데,

사진이 좋지않아 옮겨 적는다.

함양군 마천면 의틴리다.

고려시대 의탄소가 있었던 지역으로 추성리 칠선계곡 입구에 있다.

마을 안에는 800여 년 수령의 느티니무가 있어, 매년 음력 7월 7일에 당산제를 모시고 있다.

함양 박씨, 경주 정씨가 집성촌을 이루었고, 정조 때는 경주 이씨가 입촌 정착해 있다.

이 마을 출신인 은계 이진우 선생은 1897년에 태어나 천석지기를 한 향토교육가로서

사유재산 일천 두락을 저당하여 마천초등학교 설립에 공헌하였고,

현재 도계공원에 그를 기리는 송덕비가 마천면민의 이름으로 세워져 있으며,

그의 후손이 생가를 보존하고 있다.


 

의탄소의 '所'는 특정 기능을 가진 천민집단의 마을을 말한다.

그들은 이런 깊은 산골에서 어떤 물건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했다.

무엇을 만들었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의탄"이란 마을 이름에서 '탄'을 숯탄[炭] 자로 보면 숱을 구웠을 수도 있다.

또 이곳에 풍부한 옻나무를 이용하여 옻칠용 액을 생산했거나,

또 많은 닥나무를 이용하여 종이를 만들었을 수도 있다.

 

앞으로 엄천강이 흐르니, '탄'은 여울탄[灘] 자인지도 모른다.

엄천강은 운봉에서 흘러와 뱀사골, 백무동, 칠선계곡의 물을 모아 함양 산청을 지나 낙동강으로 든다.

 

벽송사옛길을 따라 서암정사 벽송사로 간다.   

 

제법 높은 대 위에 비를 세웠는데,

비제에 "竹圃臺",

비문에 "竹圃杖履所 慶州李公圭玹, 甲辰 三月"

"장이소"란 지팡이와 짚신을 놓아둔 곳이란 뜻이다.

경치좋은 쉼터라는 뜻도 있다.

 

죽포대에 관해서 이 이상은 알 길이 없다. 

 

 

이 나무가 800살도 더 자신 의중마을 당산나무다.

 

  

 

 

 

 

 

바위에 제액을 만들고,

"追慕臺"라 새겼는데, 구체적은 내용은 알아내지 못했다.

 

 

 

 

 

무덤 앞에 이런 잘 생긴 배롱나무가 있다.

 

 

 

義峯堂靈旨塔

아래 한 글자가 더 있는 듯한데 읽을 수 없고,

내용도 알 수 없으나 스님의 부도인 듯하다.

 

 

 

 

서암정사 마당에 들어왔다. 12시.

 

 

 

석굴 입구

바라보아 오른쪽에 "摩詞大法王",

인쪽에 "調御三天界"라 썼다.

"마하"는 '크다'는 뜻이니,

"크고 큰 부처님, 삼천대천세계를 다스리신다"는 뜻이다.

  

 

대방광문

 

 

 

 

서암정사는 석굴법당만으로 부족한지

또 이런 대웅전을 짓고있다.

 

 

 

대웅전 기단에서 앞을 바라보았다. 

 

 

 

 

 

 

서암정사를 돌아마와 벽송사로 간다.

 

 

서암의 산문인 듯하다.

벽송사에서 서암정로 갈 때 들어가는 문이다.

우리는 이 문으로 나왔다.

뒤돌아 보았다.

바라보아 오른쪽에 "百千江河萬溪流", "同歸大海一味水"라 쓰여있다.

멋지게 번역할 능력은 없고, 뜻을 풀이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모든 강물, 도랑물, 개천이 함께 바다로 들어 한 맛을 이룬다'는 뜻이다. 

 

벽송사에 들어왔다.

장승을 먼저 만난다. 12시 45분.

  

 

 

 

벽송사 법당 원통전이다. 

 

  

 

 

 

 

삼층석탑과 미인송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기 번거러워졌다.

여기서도 미인송은 보인다.

 

 

 

"송대마을 3.5km"

이 길은 가지 못한단다.

 

 

점심때가 되었다.

공양간에서 우리 도시락을 먹게 허락해 달라고 스님에게 부탁했다.

그런데 이 핑계 핑계를 대면서 "인연있는 곳으로 찾아가라"한다.

참 불교 교리에 맞는 말이다.

 

그러나 틀렸다. 

좋은 인연을 만들 생각은 전혀없는 것 같다.

좋은 인연을 만드는 것이 좋은 업을 짓는 것인 줄은 알것도 같은데.

성과 속이 하나라는 가르침은 모르는가?

고고한 이들이여.

 

빗속에 "연있는 곳"으로 찾아간다.

 

 

벽송사 주차장에 있는 매점이다.

참 좋은 장소에서 따뜻하게 점심을 먹었다.

우리는 체면상 라면 여남 그릇을 주문해 먹었을 뿐.

보살님같이 푸근한 인심이다.

 

그러고 보니 인연도 있었다.

왕비님과 전부터 알음이 있다고 한다.

 

 

 

 

 

 

 

 

 

점심을 먹고 계획을 수정하여

와룡대를 구경하기로 하고,

차를 탔다.

 

 

 

 

와룡대, 2시 45분.

 

 

 

 

    

  

 

 

 

 

 

 

비에 젖고,

상념에 젖고,

그리움에 젖어,

무거워질 것은 없다.

 

처라리 가벼워지자.

Frédréic Franois Chopin(1810∼1849)

 

Andante Spianato & Grande Polonaise Brillante
in E Flat, Op.22

 

Kun-Woo Paik/ piano
 Warsaw Philharmonic Orchestra

Antoni Wit/ cond.

 http://cafe.daum.net/P2M/Ki5O/1485


 

 

 

 

 

 

 

2010년 3월 18일 지리산둘레길 5구간을 걷고 나서 어느 카페에 올린 후기를 옮겨 적는다,

 

4시에 송문교에  도착했다.

臥龍臺란 것이 보인다.

  

시간에 쫓겨 자세히 살피지는 못하고 함양군에서 세운 안내판을 옮겨 적는다.

 

"文獻洞 계곡에 큰 바위가 있어 모양이 용이 서린 것 같다히여 고종 광무10년(1906)년 강신이 와룡대라고 명명하고 친구 7인과 해마다 계모임을 가진 곳으로 석대 위에는 1985년 8인의 후손 중 김희소가 세운 八公之 臥龍臺修契仗遺跡碑가 서있고. 그 아래 바위 면에는 8인의 명단이 있는데 허윤, 김기식, 강윤흠. 강신영, 강재성, 김경식, 김영현, 조병수이다.

바위틈에는 반송이 자라고 있고 바위는 평평하여 수백 명이 앉을 수 있으며 특히 강과 주변의 경치가 빼어나 여름철에는 많은 행락객이 찾아와 엄천강에서 레프팅을 즐기거나 구경하는 명소로서 옛적에 일두 정여창과 탁영 김일손,이 지리산을 등반할 때 이곳을 지나며 가히 살만한 곳이라 하여 可居洞으로 불리었다."

 

이들은 딴세상에 사는 신선들인가. 

1905년 11월 17일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이완용, 박제순 등 이른바 을사오적이라는 사람들을 매수하고, 대궐 주변에 군사를 배치하여 대신들과 왕을 위협하고 강제로 조약을 맺는다. 이것이 학교에서 배운 을사보호조약이다.

그러나 이 말은 맞지 않다. 그래서 새로운 역사관으로는 을사늑약이라 한다.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주장하던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은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그 유명한 <是日也放聲大哭>이란 사설을 썼고, 이해 11월 30일 민영환은 "이천만 동포에게 드림"이란 유서를 남기고 할복 자진했다.

 

이듬해인 1906년 일본제국주의는 통감부를 설치하여 우리의 내정권마저 빼았았다. 

그후 1910년 국권이 강탈될 때까지 전국각지에 항일 의병이 일어나 일본과 전쟁상태에 들어간다. 

 

나는 아직 이들의 모임의 성격을 확실히 알지 못한다.

이들의 계모임이 혹시 의병을 모집하기 위한 계라면 나는 그들에게 꿇어 업드려 그들이 용서해줄 때까지 손발이 닳도록 빌 각오가 되어있다.

 

우리는 송문교에서 오늘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송문교, 2시 45분.

 

 

네 분은 송문교에서 내렸다.

오늘 도보가 모자랐던지,

많이 웃고 싶어서인지,

아니면 미리 치밀한 계획을 세웠던지.

그분들의 속내를 알 수 없지만,

뜻한 바 있어서이리라.

 

 

가는 길에 들렀다. 3시 15분.

흑돼지가 맛이 좋다해서.

 

 

 

우중에 우리를 찾아 앞장서서 길 안내해 주신 함양의 운월님께 감사드린다.

맛있는 감귤 한 상자를 주신 마미 님께도 감사드린다.

 

돌아오는 차가 많이 막혔다.

일찍 마친 보람도 없이 늦게 도착했다.

비는 계속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