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여행/인도행

경주남산 칠불암/ 안압지 연꽃구경- 2011년 8월 17일

추연욱 2011. 8. 17. 20:26

 

경주남산 칠불암/ 안압지 연꽃구경- 2011년 8월 17일

 

서출지에 도착했다. 10시.

 

앞줄 왼쪽부터 자리, 미산, 조롱이, 행복, 민우,

뒷줄 왼쪽부터 고인돌, 가리온, 유비동생, 소영이, 뿌리, bonami,

그리고 사진에 없는 달마루, 이렇게 12명이 함께 했다.

 

오늘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었다.

비에 대한 준비도 했고, 아주 많이 올 경우에 대한 대안도 세워두었다.

 

종일 비는 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루 종일 견디기 힘든 무더위가 우리를 지치게 했다.

차라리 비를 기다릴 지경이었다. 

 

배롱나무 꽃도 시들해져 간다.

비야흐로 그 위대한 여름도 막바지로 향하고 있다.

 

 

 

 

 

 

 

 

서출지 연꽃은 다 졌다.

 

 

 

■ 서출지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射琴匣 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신라 제21대 비처왕(소지왕)은 즉위 10년(488년)에 하늘샘[天泉亭]에 행차하였다. 이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 보시오" 한다.

왕은 신하에게 명령하여 까마귀를 뒤쫓게 했다. 신하가 남쪽 피촌(지금의 양피사촌이니 남산 동쪽 기슭에 있다)에 이르러 보니, 돼지 두 마리가 싸우고 있었다. 이것을 한참 보고 있다가 그만 까마귀가 날아간 곳을 잊어버리고 길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이때 한 노인이 못 속에서 나와 글을 올렸는데, 겉봉에 "이것을 떼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떼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 開見二人死 不開一人死"라고 쓰여 있었다.

 

신하가 돌아와 왕에게 바치니 왕은 말했다. "두 사람을 죽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떼어보지 않아 한 사람만 죽게하는 것이 낫겠다."고  하였다.

이때 日官이 아뢰었다. "두 사람이라 한 것은 백성이요, 한 사람이란 바로 임금을 말한 것입니다."라 하니,

왕이 그 말을 옳게 여겨 글을 떼어 보니 "거문고 갑을 쏴라 射琴匣"라 쓰여 있었다.

 

왕이 궁궐에 돌아가서 거문고 갑을 보고 활을 쏘았다. 그 거문고 갑 속에는 내전에서 焚香하던 수도승과 宮主가 거문고 갑 속에서 은밀히 간통하고 있었다. 두 사람을 곧 사형에 처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나라 풍속에 해마다 그해 정월 첫 돼지 · 쥐 · 말 날에는 모든 일을 조심하며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15일을 烏忌日이라 하고 찰밥을 지어 제사를 지냈으니 이런 일은 지금도 행해지고 있다.

 

노인이 나온 못을 書出池라 하였다.

 

* 사금갑 설화는 정월 대보름날 찰밥, 오곡밥을 먹는 풍속의 기원을 설명하고 있다.

  이후 까막까치를 위해 오곡밥을 조금씩 담 위에 얹어 놓는 풍속이 생겼다.  

 

*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것은 법흥왕 15년(528년)이다.

  불교가 공인되기 전에,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갈등을 보여주는 설화로 이해할 수 있다.  

 

※ 신라 제21대 소지마립간 10년(488)에 대궐을 명활산성에서 반월성으로 옮겼다.

고구려는 장수왕 15년(427)에 도읍을 평양성으로 옮겼는데 그것은 중원을 포기하고 남으로 진출하겠다는 것이다. 장수왕은 475년 백제 서울(지금의 서울)을 침공하여 백제 제20대 개로왕을 죽였다.

소지왕의 아버지 자비마립간(458~479 재위)은 나라를 다스리기는 불편하나 험준한 명활산성으로 궁성을 옮기고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비마립간은 약 15년간 버려두었던 대궐을 반년동안 수리 정비하여 488년 정월 초 반월성으로 이사한 것이다.

그리고 정월 보름날 天泉亭으로 행차하였으니 이는 나라의 태평을 기원하는 기도차 행차한 것으로 짐작된다.

 

 

■ 二樂堂(사적 제138호)

철와골 입구 남쪽 마을인 안마을 앞에 있는(통일전 남쪽), 연꽃과 배롱나무가 우거진 숲 속의 못에 정면 삼칸 측면 두칸의 기역자형의 정자로, 반은 땅에 반은 물위에 떠 있다. 1664년에 세웠다.

 

 

무량사 구경, 10시 15분. 

 

 

 

남산리삼층석탑을 찾아 한참 헤맸다.

 

남산리삼층석탑(보물 제214호), 10시 45분.

 서탑

 

동탑

 

두 탑 사이에 있는 석등 대좌 

 

 

 

 

 

 

 

양기못, 10시 50분.

양기못에는 아직도 연꽃이 남아있다. 

 

옛 기록에는 양피제라 했고, 마을 사람들은 양기못이라 한다. <三國遺事>, 射琴匣 條에 나오는 서출지가 바로 이 양기못이다.

통일전 남쪽 이요당이 있는 못이 서출지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일제 때 못 이름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윤경렬, <겨레의 땅 부처님땅>, 불지사, 1993. 95~96쪽. 

 

 

11시. 불탑사.

최근 복원한 탑 2기만 덩그렇게 서있고, 그 옆에 염불사가 있다.

 

 

또 길이 꼬였다.

남산리삼층석탑에서 찾아 헤매다 보니 그만 지바위골 진입로를 놓쳐버렸다. 

 

이제 어쩔 수 없이 칠불암으로 가기로 했다.

그 다음 일은 그 다음 생각하기로 하고.

 

칠불암 가는 길, 

 

 

 

 

칠불암, 12시 5분.

 

 

칠불암마애불상군(국보 제312호) 

 

 

 

 

 

 

 

 

신선암마애보살좌상(보물 제199호), 12시 30분.

 

 

 

 

 

 능선에 올랐다. 12시 40분.

 

 

 

 

 

 

 

 

 

여기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 사진을 찍는다고 찍었는데, 사진이 없어졌다.

 

사과, 포도, 복숭아, 자두,

bonami님이 사 오신 샌드위치,

미산님이 손수 만들어준 비빔국수,

자리님이 준비해 온 연잎 밥.

여러 가지 많이도 먹었다.

 

 

 

봉화대능선을 따라 이영재로 간다.

 

 

 

 

상사바위, 3시 15분.

 

 

 

 

 

 

 

 

 

 

 

 

 

 

 

 

금오정, 3시 35분. 

 

 

늠비봉 가는길

 

 

 

 

 

늠비봉오층석탑, 3시 50분. 

 

 

 

 

복원한 탑이 하도 어설퍼서 이번 태풍에 무사한지 궁금했다.

다행히 그대로 있었다.

 

 

 

 

 

 

부흥사, 4시.

 

 

 

 

 

4시 40분에 포석정에 도착했다.

 

안압지로 갔더니 연꽃은 다 져버렸다.

 

남산리삼층석탑에서 헤맸고, 계획에 없던 칠불암으로 가는 바람에 많이 힘들었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을지 몰라도 진행자로서는 큰 실례다.

이점 깊이 사과드린다. 

 

 

오늘 4시간 40분 동안 12.5 km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