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시내 근현대사 골목문화 투어/ 대구 토요반나절 2주년 기념도보- 2010년 2월 12일
2시에 bomami님과 대구역에 도착했다.
먼저 동성로 입구 어느 찻집에서 커피 한잔.
동성로는 대학 4학년 때부터는 거의 매일 왔다.
티파니 다방의 커피맛과 클라식곡 LP 원판 음악을, 죽치고 앉아 문학을 이야기 했다.
동성로를 따라 경상감영공원(중구 포정동)에 이르렀다.
'경상감영', 경상도 도청 정도의 뜻인데도 무슨 감옥같아 어감이 별로 좋지 않다.
안동에 있던 경상감영은 조선 선조 34년(1601) 이곳 대구로 옮긴다. 경상 좌우도의 행정 ·사법·군사를 총괄하는 관청이 되었다.
하마비다.
"節度使以下皆下馬 절도사 이하 신분의 사람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오시오"라 썼다.
시간이 남아 미리 돌아보기로 했다.
이 건물 宣化堂(대구시 유형문화재 제1호)은 경상감사의 집무실이고,
澄淸閣(대구시 유형문화재 제2호)은 관찰사의 생활 공간이다.
선정비들도 모여 폼을 잡고있다. 27개나 된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선정비을들은 대부분 엉터리, 사기다.
현대의 조각 작품도 있다.
3시에 대구 벗님들이 모두 모였다.
걷기를 시작한다.
다시 경상감영공원을 돌아보고,
바로 옆에 있는 근대역사관(중구 포정동)에 갔다.
마침 대구근대사진전이 있어서 눈복이 좋았다.
이곳에 옛날 러시아식 빨간 이름다운 건물이 있었다. 은행이 확장되면서 뜯어냈다.
나는 친구들과 그 건물이 뜻기는 것을 바라보며 아쉬워하며, 분노한 적이 있다.
이 근처에 대구읍성이 있었다.
만경관은 이른바 일류극장이었다. 주로 국산 영화를 개봉했는데, 가끔 외국영화도 했다.
중학생 때는 극장에서 교외지도 선생님에게 들키면 교칙으로는 정학이었다.
2학년 때던가 오디 머피가 주연한 <지옥의 전선>을 보구싶었다.
학생이 아닌 척 교복 웃통을 벗고 런닝 바람에 까까머리로 극장에 들어갔다.
똑똑해서 그랬을까?
영화는 좋았고, 다행히 들키지 않았다.
화교학교
정소아과ㅂ병원
대구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며, 최초의 서양식 2층집이라 한다.
"대구부성 영남제일관터"라 쓴 작은 표지석이 있다.
대구 약령시- 중구 남성로
조선 효종 9년(1658) 대구읍성 안 객사 부근인 이곳에서 매년 봄·가을에 1개월씩 주기적으로 한약재를 거리하였다.
그후 국제적인 약재시장이 되었다.
염매시장
옛 대구제일교회
제일교회는 동산으로 옮기고 지금은 빈집이라고 한다.
이런 설명이 있다.
오른쪽 이 벽돌집이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라 한다.
이상화 고택-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 2가.
"龍鳳麟鶴"은 이상화 형제 4명을 말한다.
이상화는 이 집에서 1939부터 1943까지 살았다 한다.
가운데가 이상화, 왼쪽은 공초 오상순(1894~1692), 오른쪽은 조석기.
사진은 인터넷에서 빌렸다.
당대 최고 멋쟁이, 댄디 보이들이다.
상량문에 "乙丑七月初四日立柱上梁"라 했다.
집기들이 고급품이다.
상화가 이런 가구를 섰을지는 의문이다.
徐相敦(1850~1913)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한 사람이다.
감신정변 무렵의 개화파 김옥균, 박영효 등이 일본의 돈을 많이 빌려썼다. 이것은 일본이 놓은 미끼였다. 빌린 돈이 1,300만 원이었다고 한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빚을 받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니, 빚을 갚아야 떳떳한 나라가 된다고 생각하여 이 운동을 시작했다.
담배를 끊고 그 돈을 모으자는 斷煙會를 설립하여, 돈을 모으고, 시민운동으로 발전하여 큰 돈을 모았다.
그러나 일제는 그 돈을 받지 않고 미루다가, 국채보상 운동 주동자들을 사기꾼으로 몰아 투옥하였다.
이렇게 흐지부지해지고, 일제는 저들의 각본대로 착착 식민정책을 진행해 나갔다.
도심 골목을 따라 동산으로 간다.
앞에 새 대구제일교회가 바벨탑처럼 우뚝하다.
계산성당(사적 제290호)- 중리 계산2가
조선 고종 23년(1886) 조선과 프랑스의 조약 체결을 계기로 천주교 포교를 위해 지었다.
1899년 한식 목조 십자형으로 지었다가, 그후 증축하여 1918년 현재의 모습으로 증축하였다.
성당 안 이 스테인드 글라스는 스텐드글라스가 아니고 그림자다.
동산에 올랐다.
고등학교 시절 우리 학교에서 언제나 보이는 곳이었다.
이제 처음으로 올라보았다.
'동산'이 산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우리는 가끔 물리실의 망원경을 가지고 나와서 이곳에 있는 여학교를 바라보기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동산은 이름만 산이지, 산 같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이국적인 모습 그대로였다.
제일교회는 교세가 커진 탓인지, 이곳 동산으로 옮겨 크게 지었다.
여러 차례 추악한 내분이 있었던 일을 기억한다.
이곳이 청라언덕이란다.
이은상 시, 박태준 작곡의 <동무생각> 가사에 나오는 "靑蘿언덕"이 이곳인 줄 이제 처음 알았다.
자주 불렀던 노래에 나오는 청라언덕은 그저 시인의 상상 속에 있는 언덕인 줄만 알았다.
눈만 돌리면 이곳이 보이는 학교에서 3년을 살았다.
보일 뿐만 아니라 틈만 나면 바라보았다. 이 옆에 신명여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건 다 옛날 지나간 이야기이고, 청라언덕을 몰랐다니 참으로 어리석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옛말 틀린 것이 없구나.
|
|
동산에서 '3·1운동길'라는 좁은 길을 내려오면 대신동에서 대명동으로 이어지는 큰 길이 나온다.
큰 길 건너 이 학교, 나는 3년동안 다녔다.
잠깐 대열을 이탈, 학교에 들어가 보았다. 겨우 교문 까지만.
오르내렸던 50개의 계단이 보이고,
이 반달 모양의 건물은 강당이었다.
당시 대구에는 변변한 공연장이 없었다.
대구의 거의 대부분의 음악회를 여기서 했다.
전교생, 한 반에 대략 60명, 한 학년 8학급인 전교생이 모여 행사하고도 남는 넓이였다.
학교를 졸업한 지 4년째, 모교에 실습생으로 왔을 때는 그 좋은 의자들과 steinway피아노와 하몬드 오르간은 어디로 가버리고,
체육관이 되어있었다.
강당 안은 이런 모습이었다.
저 많은 학생들 중에 나도 어딘가에 있다.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에 잠길 틈도 없다. 길잡이 청춘님은 늣었다고 깝치고, 길은 상전벽해가 되어,
길잡이를 놓치면 이제 나도 길을 잃을 것이 뻔하다.
서문시장- 중구 대신동
대구 성곽 서쪽인 서문 밖에 있어서 서문시장이라한다.
조선 헌종 10년(1669) 전국 3대 장터의 하나로 대구 경제의 중심이 되었다.
이 큰 길은 옛날에는 차가 다니지 않았다. 좀 떨어진 정류장에 내려 걸어다녔다.
그때도 좁을 길은 늘 붐볐다. 서문시장 때문이었을 것이다.
학생이 서문시장에 갈 일은 없었다. 나도 시장 안에 들어가본 적은 없다.
이곳이 바로 우리 교실과 담 하나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교실과 접한 곳에 건어물상이 있었던지 수업시간에도 자주 오징어 냄새가 났다.
서문시장에 처음으로 들어가 보았다. 말끔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여러 차례 불이난 후 이렇게 정리된 것이라 한다.
달성공원(사적 제 62호)- 중구 달성동
서기 261년에 축성한 토성이라 한다.
삼한시대 달구벌의 성터다. 고려 중엽 이후에는 달성 서씨가 대대로 살아 그들의 사유지가 되었다.
조선 세종 때 나라에 헌납하여 국유지가 되었다.
1967년 대구시가 종합공원으로 조성하였다.
觀風樓(문화재 자료 제3호)는 경상감영의 정문이다.
편액은 죽농 서동균이 썼다.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1924~1864)상이다.
"大神師水運崔濟愚像"라 썼다.
수운 최제우는 경상감영에서 처형당했다. 그래서 이곳에 상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영남을 대표하는 서예가 竹農 徐東均(1902~1978) 예술비
성을 따라 걷는다.
|
|
이상화 시비
|
|
나의 침실로
'마돈나' 지금은 밤도 모든 목거지에 다니노라 피곤하여 돌아가련도다.
아, 너도, 먼동이 트기 전으로 수밀도(水蜜桃)의 네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오너라.
'마돈나' 오려무나. 네 집에서 눈으로 유전(遺傳)하던 진주는, 다 두고 몸만 오너라.
빨리 가자. 우리는 밝음이 오면, 어딘지 모르게 숨는 두 별이어라.
'마돈나' 구석지고도 어둔 마음의 거리에서, 나는 두려워 떨며 기다리노라.
아 어느덧, 첫닭이 울고 - 뭇 개가 짖도다. 나의 아씨여, 너도 듣느냐.
'마돈나' 지난 밤이 새도록, 내 손수 닦아둔 침실로 가자, 침실로!
낡은 달은 빠지려는데, 내 귀가 듣는 발자국 - 오 너의 것이냐?
'마돈나' 짧은 심지를 더우잡고, 눈물도 없이 하소연하는 내 맘의 촉(燭)불을 봐라.
양털 같은 바람결에도 질식(窒息)이 되어, 얄푸른 연기로 꺼지려는도다.
'마돈나' 오너라 가자, 앞 산 그르매가, 도깨비처럼 발도 없이 이곳 가까이 오도다,
아, 행여나, 누가 볼는지 - 가슴이 뛰누나,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마돈나' 날이 새련다, 빨리 오려무나, 사원(寺院)의 쇠북이, 우리를 비웃기 전에
네 손이 내 목을 안아라, 우리도 이 밤과 같이, 오랜 나라로 가고 말자.
'마돈나' 뉘우침과 두려움의 외나무다리 건너 있는 내 침실 열 이도 없으니,
아, 바람이 불도다, 그와 같이 가볍게 오려무나, 나의 아씨여, 네가 오느냐?
'마돈나' 가엾어라, 나는 미치고 말았는가, 없는 소리를 내 귀가 들음은 -,
내 몸에 피란 피 - 가슴의 샘이, 말라 버린 듯, 마음과 몸이 타려는도다.
'마돈나' 언젠들 안 갈 수 있으랴, 갈 테면, 우리가 가자. 끄을려가지 말고!
너는 내 말을 믿는 마리아 - 내 침실이 부활의 동굴임을 네야 알련만…….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얽는 꿈, 사람이 안고 궁그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는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
'마돈나' 별들의 웃음도 흐려지려 하고, 어둔 밤 물결도 잦아지려는도다.
아, 안개가 사라지기 전으로 네가 와야지,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백조 3호>, 1923년 9월.
李相和(1901~1943), 호는 尙火)다.
뒤에 2층 누각이 있는 이 어름에 이상화시비가 있었다.
그때는 보충수업도, 야간자습도 없었다.
4시쯤 수업을 마치면 우리는 곧장 달성공원 이상화시비 앞으로 갔다.
이상화를 알아서도, 좋아서도 아니다. 당시 고등학생이 갈 곳은 거기밖에 없었다.
여기서 한참 놀고 떠들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가운데 친구는 동인동에 살았는데, 나는 대신동에서 바로 버스를 타지 않고 중앙통 한국은행, 곧 경상감영공원이 있는 곳까지 함께 걸어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갔다.
한 2년쯤 그렇게 한 것 같다.
오늘, 이 나이에 처음 해본 일이 또하나 있다.
뒤풀이에서 돼지껍데기를 처음 먹어보았다.
시 한 편을 더 읽는다.
세월이 가면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박인환 시집>, 1955.
"아! 옛날이여"가 아니다.
그때는 모두 가난해도, 공부 말고는 걱정이 없었다.
멋도 좀 부렸고.
'도보여행 > 인도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금정산 둘레길 3- 2011년 2월 19일 (0) | 2011.02.19 |
|---|---|
| 감은사지 ·대종천, 울산 대왕암 공원-2011년 2월 16일 (0) | 2011.02.16 |
| 경주남산 답사도보- 2011년 2월 13일 (0) | 2011.02.14 |
| 거제 대금산 답사 도보- 2011년 2월 9일 (0) | 2011.02.09 |
| 금정산둘레길 1(범어사길) 확인도보- 2011년 2월 6일 (0) | 2011.0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