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여행/인도행

치술령/ 반구대-2010년 11월 17일

추연욱 2010. 11. 16. 15:10

치술령(766m)/ 반구대

 

10시쯤에 치산서원에 도착했다.

우리는 치산서원과 충렬공박제상기념관을 둘러 보았다.

 

치산서원 충렬묘에 박제상 위패와 영정을,

신모사에 박제상의 부인 치술부인의 위패와 영정을,

사효문 쌍정려에 박제상과 치술부인의 큰 딸 아기, 셋째 딸 아경의 위패와 영정을 모셨다.

치술령 정상에 있던 부인의 사당이 없어지고 이곳으로 옮겨 지은 것이다.

 

내가 보고  싶은 곳은 모두 문이 잠겨있어 껍데기만 보고 물러나야 했다.

 

치산서원

 

 

 충렬공박제상기념관

 

 

 

 

 

 

다시 차로 법왕사에 왔다. 10시 30분쯤 되었다. 

 

여기서 인사소개를 했다. 

 

법왕사

  

야외에 관세음보살상을 모셨다. 경전에 나오는 모든 관세음보살을 다 모신 듯하다.

 

 

법왕사에서부터 걷는다.

망부석까지 3.2km다.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야 한다.

 

 

이상하게 생긴 소나무 

 

 

망부석에 이르렀다.

망부석(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호)-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

 

바위 벽면에 '望夫石'이라 쓰여있다.

울산지역 사람들은 이곳이 아 바위가 망부석이라 주장한다.

망부석 같지 않은 망부석이다.

 

 

 

 

 

 

국수봉(603m)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국수봉 왼쪽 안부에 있는 은을암까지 간다.

 

 

치술령 정상이다.

 

'신모사지'라는 비가 있다. 1999년 5월에 세웠다.

 

이곳에는 본디 치술신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사당이 있었다.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스님도 보았고,

조선 영조때 사람 성호 이익(1681~1763)도 <鵄述怨>에서,

"至今神母祠 지금 신모 사당이 있어 蕙旂來依俙 향기로운 깃발 어렴풋이 나부끼네"라

읊은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는 있었을 것이다.

사당에는 치술부인과 큰딸 아기, 세쎄딸 아경의 위패를 모셨다.

그후 언젠가 사당은 사라지고 다시 이런 비석을 세웠다.

 

박제상의 아내 치술부인,

<삼국유사 왕력 제18 실성마립간>에 따르면, 그녀는 실성왕의 딸이다. 그녀의 언니 아노부인은 눌지왕의 비이다.

  

朴堤上은 삽량주(양산)의 태수이며, 눌지왕과 동서간이다.

 

신라 제19대 눌지 마립간(417~458 재위)의 동생 복호는 고구려에 인질로 간지 10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못했고,

미사흔은 왜국에 인질로 간지 30년이나 되었다.

 

눌지왕 10년(425),

당시 명망이 높고 외교에 능한 박제상은 왕의 명에 따라 고구려로 가 장수왕을 설득해 왕의 동생 복호를 데리고 온다.

 

다시 왜국으로 가 미사흔을 데려와야 한다.

그는 임금에게 하직하고, 집에 들르지도 않고 바로 율포(울산시 북구 강동면 정자) 갯가에 이르렀다.

그 아내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율포에 이르러 떠나는 배를 바라보고 대성통곡하며 말하기를 “잘 다녀오시오.” 하니

박제상이 그를 돌아보며 “내 큰 사명을 띠고 적국으로 들어가니 어찌 그대와 다시 만나보기를 기약할 수 있으리오.” 하며 떠났다.

 

왜왕은 고구려 왕과는 달리 교활하고 야만스럽다.

그래서 왜왕을 설득할 수는 없다. 고도의 전략을 세워 왕을 속여 탈출작전을 감행해야 한다.

박제상은 아내와 영영 이별을 이미 각오했다.

 

박제상은 미사흔을 탈출시키고 자신은 왜국에 남는다. 

그리하여 박제상은 왜국에서 참혹한 죽음을 당한다.

 

“처음에 제상이 신라를 떠날 때 부인이 남편의 뒤를 쫓아갔으나 따르지 못했었다. 이에 망덕사 문 남쪽 사장 위에 이르러 주저앉아 길게 부르짖었는데. 이런 일이 있었다 하여 그 사장을 長沙라 불렀다. 친척 두 사람이 부인을 부축하여 돌아오려 하자 부인은 다리를 뻗은 채 앉아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곳을 伐知旨('뻗치다'라는 뜻이다)라 이름지었다. 이런 일이 있은지 오래 된 뒤에 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고 말았다. 그래서 그를 치술신모라고 하는데, 지금도 그를 제사지내는 사당이 있다.”<삼국유사>

 

치술부인은 죽어 望夫石이 되었고, 남편과 그 지역을 수호하는 신이 되었다.

부인은 치술신모가 되어 모권적인 무속신앙으로 재창조 되어 ‘치술령의 신령한 어머니’가 되었다.

부인과 함께 첫딸 阿奇, 3녀 阿慶도 울다가 죽었다.

둘째 딸 阿榮은 어린 동생 文良을 위해 살아남았다고 한다. 아영은 미사흔의 아내가 되었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문량이 방아타령으로 유명한 백결선생이라는 전설도 있다. 

 

사람들은 박제상의 부인을 鵄述神母라 하여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는데 지금 비석이 있는 자리가 그 사당터이다.

조선시대에 이 산 아래에 치산서원이 세웠다.

 

鵄述怨

李瀷(1681~1763) 

 

有身莫作忠臣婦 충신의 아내는 되지마시오

夫去成仁婦失依 남편은 죽어 인을 이루었지만 아내는 의지할 곳 잃었네

婦去忘忘東海東 남편 떠난 동해 동쪽 멍하니 바라보니

婦哭兒啼怒拂衣 아내는 울고 아이 보채며 분노에 옷을 떨치네

………  

鵄述嶺頭望朝暉 치술령 꼭대가 아침 햇살 바라보니

朝暉有來不見往 아침 햇살 비추건만, 간 사람 보이지 않고

淚灑西風向天飛 흐르는 눈물 서풍이 하늘을 향해 날리네

……… 

至今神母祠 지금 신모 사당이 있어

蕙旂來依俙 향기로운 깃발 어렴풋이 나부끼네

 

<星湖先生全集> 제7권, 海東樂府

 

 

 

정상부에 또 망부석이 있다. 이곳은 경주시 외동읍으로 경주시에서 주장하는 망부석이다.

망부석 같지 않기는 이곳도 마찬가지다.

 

 

 

 

 

 

바위 아래쪽에 기도하는 자리도 보인다.

 

 

 

 

 

멀리서 바라보니 망부석은 이런 모습이다.

 

 

바람이 없는 억새풀 속에서 점심을 먹었다.

무엇보다 즐거운 시간이다.

여기에는 아듬다운 나눔과 다정한 이야기가 있다. 

 

 

다시 은을암을 향해서 걷는다.

 

 

 

 

 

 

 

 

 

 

낙엽을 밟는 발끝의 촉감이 마치 키페트를 밟는 느낌이다.

 

 

 

 

 

 

 

은을암 가는 길이다.

 

 

은을암의 법당 영산전

 

범종각 앞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일품이다.

 

 

 

 

치술부인의 넋이 새가되어 날아가 국수봉 바위굴로 숨어들었는데 그곳이 바로 隱乙岩이다. 은을암은 '새가 숨은 바위'란 뜻이다.

지금 이곳에는 은을암이란 암자가 들어섰다.

사람들은 그 동굴에 제각을 짓고 용당이라 하여 모시고 있다.

 

또 그 새가 날아와 앉은 자리를 비조(飛鳥)라 한다. 지금의 두동면 만화리의 비조마을이다.

 

은을암 용왕샘이다.

이곳에도 쌀바위전설이 있다. 

 

 

치술령을 바라본다.

 

 

 

 

 

 

반구대암각화 가는 길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울산시 언양읍 대곡리 반구동

 

오랜 세월 물속에 있던 것이 1972년 1월에 극심한 가뭄으로 수면 위로 잠깐 나타났다.

1995년 6월 23일 국보 제285호로 로 지정되었다.

 

바위 위나 큰 절벽, 동굴 안 벽면 등에 사물이나 기호를 쪼기, 새기기, 칠하기 등의 기법으로 그린 그림을 바위그림, 巖刻畵라고 한다.

바위그림은 후기 구석기시대(4만 년전~1만 년전)의 유적에서도 발견되지만, 전형적인 사례들은 신석기((BC 1만년 경~BC 10C) 및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주로 나타난다. 구석기시대(450만 년전~1만 년전, 전기(450만 년전~10만 년전), 중기(10만 년전~4만 년전))부터 신석기시대에 아프리카, 유럽 원시인들은 동굴에 많은 그림을 남겼다. 프랑스 남서부 라스코 동굴벽화, 스페인 북부 알타미라 동굴벽화 등이 대표적인데 공통 소재는 주로 그들의 사냥감이다.

 

반구대 암각화에는 모두 모두 300여 마리의 동물그림이 있다.

오른쪽은 육상동물, 왼쪽은 바다동물을 주로 그렸다. 약 5,000년 전 신석기 말기이거나 청동기초기의 그림으로 보인다. 고래 사냥 방법과 고래의 생태가 자세히 그려져 있다. 해안에서 물을 뿜는 고래, 고래잡이배의 모습, 심장부에 정확히 작살이 박힌 고래가 비틀거리는 모습, 새끼를 훈련시키기 위해 어미 고래가 새끼를 업고 있는 모습 등과, 분배 방식, 제례의식과 같은 사회적 습관도 그려져 있다. 특히 교미하는 자세를 취한 것도 있어 풍요, 주술적인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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