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여행/인도행

경주 선도산지역 답사도보- 2010년 9월 15일

추연욱 2010. 9. 15. 21:36

경주 선도산지역 답사도보-2010년 9월 15일

 

경주 시외버스 터미날 앞 서천 고수부지에서 바라본다.

가운데 보이는 산이 선도산,

 

가운데 산은 송화산 옥녀봉이다.  

 

 

■ 김인문 묘는 서악동 고분군 앞 차도를 건넌 곳에 있다.

마주보고 있는 두 기의 고분 중 큰 것이 김인문의 묘이고, 다른 하나는 김양의 묘로 알려져 있다. 문인석, 무인석, 석수도 없는 간소한 묘이다.

김인문은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며, 문무왕의 친동생이다. 진성여왕 5년(651)에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외교를 펼친 이래 일곱 차례나 왕래하며 삼국통일 전후 당나라와의 외교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다가 66세인 효소왕 3년(694) 당나라에서 죽었다.

다음해 유해가 본국으로 돌아와 西原에 묻혔다.

1931년 서악서원의 누문 아래에서 1/3가량 남은 김인문 묘비(보물 제70호)가 발견되어 경주박물관에 있다.

김인문은 글씨도 뛰어나 태종무열왕 비문도 썼다. 

 

 

묘 앞에는 비신과 이수가 없어진 귀부가 있다.

이 서악동 귀부는 거북의 발가락이 앞뒤 5개이다. 무열왕 귀부는 앞이 5, 뒤가 4이다.   

 

 

 

김인문 묘 앞에 김양의 묘라 전하는 고분이 있다.

김양은 무열왕의 9대 손으로 통일신라와 당나라와의 화평 교섭에 큰 역할을 했다.

 

김양의 무덤이다. 

  

 

 

 

 서악동고분군  

 

 

* 태종무열왕릉비(국보 제25호)는 문무왕 1년(661)에 태종무열왕을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비신은 조선시대까지는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비받침[龜趺]와 비머리[이首]만 남아있다. 국내의 많은 이수와 귀부 가운데 대표가 될 만큼 조각이 크고 뛰어나며, 남아있는 귀부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높이 2.1m이다.

비머리에는 양쪽에 세 마리씩 여섯 마리의 용이 서로 얽혀 여의주를 받들고 있는 한가운데 “太宗武烈王之碑”라는 글자가 두 줄로 내리 새겨져 있는데, 이는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이 쓴 것이라 한다.

비받침의 거북은 막 걸음을 떼려는 자세가 매우 생동감 있게 표현되었다. 머리를 치켜들고 네 발로 힘차게 땅을 밀치는 모습은 신라의 황금기를 여는 무열왕 시대의 사회적 분위기와 힘을 보여주고 있다. 거북이의 앞발가락은 다섯, 뒷발가락은 넷인데, 이는 거북이힘차게 나갈 때 뒷발의 엄지발가락은 안으로 밀어넣고 힘을 주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또 거북이가 힘을 줄 때 턱 밑이 붉어지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연석의 붉은 부분을 거북의 턱으로 삼았다. 거북의 등에 새겨진 구름무늬와 당초문, 보상화문, 머리와 목의 주름, 그리고 입가의 입김과 콧김까지 치밀하게 새겼다.

 

 

 

■ 태종무열왕릉(사적 제20호)은 경주시 서악동, 구릉 동쪽 사면에 있는 서악동고분군의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 5기의 원형분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있다.

높이 약 13m, 주위 둘레 112m의 큰 봉분으로 능선의 유연한 곡선이 아름답다. 능 둘레에 자연석으로 1m쯤의 석축을 쌓고 3m 간격으로 호석을 세웠으나 흙에 묻혀 잘 보이지 않는다.

장식 없이 규모가 큰 삼국시대 능으로는 마지막에 속하며 이후로는 호석을 세우는 등 화려하고 장엄한 멋을 살린 통일신라시대 능이 나타난다.

 

태종무열왕릉

 

 

 

 

서악동 고분군(사적 제142호)은 태종 무열왕릉 뒤에 있는 4기의 고분을 말한다.

능 네 기가 한 줄로 서있다. 누구의 무덤인지 밝혀지지 않았으나 무열왕릉과 같은 영내에 있고 더 높은 곳에 위치한 점으로 보아 무열왕의 선조인 법흥왕, 진흥왕, 진지왕, 용춘(문흥대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영내는 잘 자란 소나무들이 잔디와 어울려 깔끔한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태종무열왕 표준영정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613~661 재위) 김춘추는 용춘과 천명부인 사이에 태어났다.

김춘추의 증조할아버지인 제 24대 진흥왕(540~576 재위)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첫째가 銅輪, 둘째가 金輪(사륜)이다. 진흥왕은 동륜을 태자로 삼았으나 왕 33년(572) 동륜이 죽는다. 태자이며 다음 왕위 계승자인 동륜이 죽은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는 것은 이상하다.

<화랑세기>, 6세 풍월주 세종 조에 동륜태자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의 아들인 용춘과의 딸인 천명부인 사이에 태어났다.

 

"미실은 본래 동태자를…(판독이 불가한 부분)하였는데 정숙한 어머니가 전주로 들어가니 帝가 백 년 후…할까 염려하여 감히 태자를 거부하지 못하고 몰래 이어 서로 만났다. 태자는…함이 없이 구함이 더욱 심하여졌다. 미실은 심하게 많은 것이 드러날까 염려하여 미생과 의논하였다. 태자가 밖으로 나가 놀 때 유화 중 아름다운 사람을 많이 천거하였다. □자와 더불어 미생의 낭도가 날마다 밖에서 황음한 짓을 일삼았다. 鴻濟(진흥왕의 연호) 원년(572) 3월 동태자가 보명궁에서 큰 개에 물리는 일로 인하여 죽었다." 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화랑세기>, 소나무, 1999.

 

동륜은 색탐하다가 개에 물려 죽었다는 것이다.

 

진흥왕이 죽고 금태자(금륜)가 (왕위에) 올랐다. 인하여 미실을 받아 들였는데 세상의 여론으로 황후로 봉하지 못했다. (진지왕은) 또 다른 사람에게 빠져 미실을 심히 총애하지 않았다. 미실은 그 약속을 어긴 것에 노하여 마침내 사도태후와 함께 낭도를 일으켜 왕을 폐하고 동태자의 아들 백정공을 즉위시키니 이이가 진평대제이다. 제는 어리고 미실은 이미 늙었기에 스스로 후궁 일을 맡아 조정의 일을 제 마음대로 함이 많았다.

<화랑세기>, 6세 풍월주 세종 조에. 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화랑세기>, 소나무, 1999.

 

그리하여 금륜이 거칠부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이가 제25대 진지왕(576~579)이다. 미실은 진지왕이 자신을 왕비로 맞아주지 않는데 앙심을 품고 거칠부의 도움으로 진지왕을 페위시켰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진지왕이 음탕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폐위되었다고 했다.   

 

이렇게 진지왕은 4년만에 폐위되고, 동륜의 아들 백정이 즉위하여였는데 이이가  제26대 진평왕(579~632)이다.

이 사건은 진흥왕 사후 왕실에서는 왕위 계승을 두고 직계와 방계 간에 암투가 벌어졌다는 것을 암시한다. 진평왕이 사륜인 진지왕을 물리치고 즉위하였어도 사륜계가 몰락한 것은 아니었다. 진지왕의 아들 용춘이 살아 있었고, 그  지지세력도 있었을 것이다.

 

<삼국유사> 제2권 도화녀 비형랑 조에,

사량부의 어떤 민가의 여자 하나가 얼굴이 곱고 아름다워 당시 사람들은 도화랑이라 불렀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궁중으로 불러들여 욕심을 채우고자 하니 여인은 말한다. “여자가 지켜야 하는 것은 두 남편을 섬기자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있는데도 남이게 시집가는 일은 비록 만승의 위엄을 가지고도 맘대로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왕이 말한다. “너를 죽인다며 어찌 하겠느냐?”  "되겠스습니다" 왕은 그를 놓아보냈다.

이해 왕은 페위되었고, 죽었는데, 그후 2년만에 도화랑의 남편도 도한 죽었다. 10일이 지난 어느날 밤중에 갑자기 왕은 평시와 같이 여인의 방에 들어와 말한다. "네가 옛날에 허락한 말이 있지 않느냐, 지금은 네 남편이 없으니 되겠느냐?" 여인은 쉽게 허락하지 않고 부모에게 고하니 부모는 말하기를 "임금의 말씀인데 어떻게 피할 수 있겟느냐" 하고 딸을 왕이 있는 방에 들어가게 했다. 

왕은 7일동안 머무는데 오색 구름이 집을 덮었고, 향기는 방안에 가득하였다. 7일 뒤에 왕은 갑자기 서러졌으나 여인은 이내 택태기가 있었다.  달이 차서 해산하였는데 천지가 진동하더니 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이름을 비형이라 하였다.

진평대왕이 그 이상한 소문을 듣고 아이를 궁중에 데려다 길렀다. 15세이 執事라는 벼슬을 주었다.   

 

 

비형은 도깨비 무리를 거느리고 하룻밤 사이에 흥륜사 남족 문루를 세우는 등 신통한 제주를 부렸다.

용춘이 비형랑이란 견해와 아니라는 견해가 있다.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용춘이 유복자인 것은 틀림없다.

 

이 용춘과 진평왕의 딸 천명공주 사이에서 춘추가 태어난다.

할아버지가 왕위에 좇겨나고, 왕통은 진평왕 곧 동륜계로 넘어갔으니 김춘추는 왕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그러나 지헤있고 야심만만한 이 사나이는 가야게 김유신과 손을 잡고 세력을 키우며 당대 동아시아 외교계를 주름잡으로 한 시대 주역으로 등장한다.

이리하여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이 되었다. 

김춘추가 왕위에 오른 것은 우리만족으로서는 큰 행운이었다.

증조할아버지 진흥왕 때부터 게확된 삼국통일 프로젝트를 영웅 김신과 함께 구체화하여 660년 백제를 정복였다. 

그러나 고구려 정복이라는 과제는 아들 문무왕에게 넘기고 661년 세상을 떠났다.  

 

■ 선도산 마애삼존불(보물 제62호)은 경주시 서악동 선도산(서악) 정상에 있는 암벽 거대한 바위면에 남향하여 주존 아미타불을 새기고, 그 좌우에 화강암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새겼다. 양쪽 보살상은 화강암을 산 정상까지 옮겨 조각하였다. 통일신라시대 초기에 만든 불상으로 높이는 본존 6.85m, 오른쪽 협시보살 4.62m, 왼쪽 협시보살 4.55m이다.

 

본존은 암벽의 파손 때문에 머리와 신체 각 부분이 많이 손상되었는데, 특히 얼굴의 손상이 심하여 눈 이상의 얼굴과 머리는 모두 없어져버렸다. 코는 큼직하며 입은 꽉 다물었고, 턱은 날카로워 박력 있는 윤곽과 함께 힘이 충만한데, 고졸한 미소가 남아 있다. 또한, 목은 긴 편이나 삼도가 잘 나타나지 않았으며, 목에서 내려온 어깨선은 둥글어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과 비슷하지만, 어깨를 움츠린 것은 군위삼존석굴의 본존과 비슷하다. 신체는 양감이 거의 없이 그냥 원통형으로 되었으며, 이것은 장대한 체구, 시무외인, 여원인의 수인과 함께 부처의 위엄과 힘을 나타내고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가슴부근에 떨어져 나간 부분이 많아 옷주름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U자형의 옷주름이 가슴 부근부터 성글게 표현되어 있다.

 

왼쪽 협시보살은 대좌까지 모두 4조각으로 파괴된 것을 복원하였다. 머리에는 중앙에 화불이 조각된 삼산 보관을 쓰고 있다. 얼굴은 갸름하며 윤곽선이 부드럽고 적당히 살이 쪄서 복스럽고 우아한 얼굴이다. 눈은 가늘고, 코는 큼직하고 시원스러우며 입술은 살짝 다물었는데 은은한 미소가 감돌고 있다. 신체는 본존불에 비해 훨씬 섬세하고 부드러운 편으로, 상체는 굴곡도 잘 나타나 있다. 왼손은 내려 정병을 잡고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있다. 양팔에는 천의가 감겨 있으며, 여기서 내려 3단의 옷주름이 다리 상단과 하단에 걸치고 있어, 군위삼존석굴의 관음상보다 훨씬 아래로 내려져 있다.

 

오른쪽 협시보살은 다섯 조각을 이어붙였다. 왼쪽 팔은 거의 떨어져나갔다. 얼굴은 왼쪽 보살과 비슷하지만 사각형에 가깝디.

세 불상 모두 복련대좌 위에 서있다.

 

이 삼존상은 조선 후기에 크게 파손되었다고 한다. 1970년 12월 경주박물관에 의해복원되기 전만 해도 두 협시보살은 형체가 사라진 채 주존 아래 누워 있었다고 한다.

 

선도산 아미타삼존은 신라 최초의 아미타불상이다. 미륵신앙 시대는 끝나고 아미타시신앙 시대가 시작됨을 보이고 있다.

삼국통일 후 가장 많이 만든 불상이 아미타불이다. 삼국통일은 현세에 불국정토를 이루고자 한 것이며, 전쟁으로 돌아간 분들이 내세에 서방정토에 화생하도록 아미타불에 천도하고자 살아있는 친지들의 아미타불을 다투어 조성했다. 그 첫 작품이 선도산마애삼존불이다. 이곳 선도산은 신라인들이 염원하던 극락세계를 표현하기에는 적합한 장소라 생각했던 것 같다. 

 

선도산 마애삼존불 모사도

 

 

 

보살의 대좌 

 

 

* 성모사는 선도산 정상 바로 아래 있는 선도성모의 유허지와 그 위폐를 모신 사당이다. 현재의 사당은 1975년에 새로 옮겨 지은 것이다. 이 성모사는 박혁거세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성모사 부인 봉참회가 신축했다. 원래의 사당은 지금의 사당 북쪽 150m의 거리에 있는 봉우리에 있었다. 원래의 사당이 있던 자리에는 성모사 유허비가(1977년 건립)있다. 지금도 매년 음력 3월 10일에 박혁거세의 후손들이 제사를 지낸다. 

 

 

▴ 선도산은 경주시 서쪽에 있는 높이 390m의 산이다. 이 산은 신라의 진산이며, 신라의 건국신화와 관련이 있는 선도산 신모가 신라 개국 이전부터 이곳에 살면서 신라를 지켜 주었다는 전설이 있다.

 

<삼국유사> 제5권 감통 제7, 선도성모 隨喜佛事에,

① 신모는 본디 중국 제실의 딸이며 이름은 사소였다. 일찍이 신선의 술법을 배워 해동에 와서 머물러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았다. 이에 父皇이 소리개 발에 매달아 그에게 보낸 편지에 말했다. “소리개가 머무는 곳에 집을 지으라.” 사소는 편지를 보고 소리개를 놓아 보내니 이 선도산으로 날아와서 멈추므로 드디어 거기에 살아 지선이 되었다. 때문에 이 산 이름을 西鳶山이라 했다. 신모는 오랫동안 이 산에 살면서 나라를 진호하니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이 매우 많았다. 때문에 나라가 세워진 뒤로 항상 三祀의 하나로 삼았고 그 차례도 여려 望(望祭 가뭄이 심할 때 北郊에 나가서 嶽, 海, 瀆, 名山, 大川 따위의 19 神位에게 비를 내려 달라고 빌던 제사)의 위에 있었다.

 

그가 처음 진한에 와서 성자를 낳아 동국의 처음 임금이 되었으니 필경 혁거세와 알영의 두 성군을 낳았을 것이다. 때문에 鷄龍 鷄林 백마 등으로 일컬으니 이는 닭이 서쪽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성모는 일찍이 諸天 선녀에게 비단을 짜게 하여 붉은 빛으로 물들여 조복을 만들어 남편에게 주었으니, 나라 사람들은 이 때문에 비로소 신비스러운 영험을 일게 되었다.

 

또 <국사>에 보면 사신이 말했다. “김부식이 정화연간(송나라 휘종의 연호)에 사신으로 송나라에 들어가 우신관에 갔더니 한 당에 여신의 상이 모셔져 있었다. 관반학사(사신을 모시는 사람)가 말하기를 ‘이것은 귀국의 신인데 공은 알고 있습니까’ 했다. 그리고 이어 말하기를 ‘옛날에 중국 제실의 딸이 바다를 건너 진한으로 가서 아들을 낳았더니 극 k해동의 시조가 되었고, 또 그 여인은 지신이 되어 길이 선도산에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여인의 상입니다’ 했다.”

또 송나라 사신 왕양이 우리 조정에 와서 동신성모를 제사지낼 때 그 제문에 “어진 사람을 낳아 비로소 나라를 세웠다.”는 글귀가 있었다. 성모가 이제 황금을 주어 부처를 받들게 하고, 중생을 위해서 향화법회를 열어 진량을 만들었으니 어찌 다만 오래 사는 술법만 배워서 저 아득한 속에만 사로잡힐 것이다.

 

선도산성모는 서라벌 근처의 산신이면서 나라의 어머니로 숭앙되었다. 육촌 촌장이 산봉우리에 내려왔다고 하는 데서 산신신앙이 보인다. 고조선에서 전파되었을 것이다. 환웅이 태백산에 내려왔고, 다시 산신이 되었다고 하는데서 보듯이 건국시조를 산신으로 숭앙하는 습속은 고조선에서부터 나타났던 것이다. 조선의 유민이 남쪽으로 내려와 육촌을 이루었다는 말에 근거가 있다 할 것이다.

혁거세를 낳았다고 하며, 베를 짜서 남편에게 주어 관복을 짓게 했다는 데서는 혁거세의 아내 알영과도 동일시된다. 건국신화에 깊이 관여한 신격이 신화시대가 지난 다음에도 계속 숭앙된 것이다.

그러나 시대 상황이 달라지자 본디의 모습이 유지될 수 없었다. 중국 제실의 딸로 신선술을 습득해 신라에 와서는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 데서 중국과 관련시켜 격을 높이려고 한 것이다.

 

 제54대 경명왕이 매사냥을 좋아하여 일찍이 여기에 올라가서 메를 놓았다가 잃어버렸다. 이 일로 해서 신모에게 기도했다. “만일 매를 찾게 된다면 마땅히 성모에게 작을 봉해드리겠습니다.” 이윽고 매가 날아와서 책상 위에 앉으므로 성모를 대왕에 봉작했다.

 

지신으로 혁거세와 알영을 낳았다 하여 경명왕대 대왕으로 봉작하였다. 주몽의 어머니 유화, 알영이 농업, 풍요, 다산과 관련된 여신으로 보이는 만큼 거인신의 인격화이다.

 

진평왕 때 지혜라는 비구니가 있어 어진 행실이 많았다. 안흥사에 살았는데 새로 불전을 수리하려 했지만 힘이 모자랐다. 어느날 꿈에 모양이 아름답고 구슬로 머리를 장식한 한 선녀가 와서 그를 위로했다. “나는 선도산 신모인데 네가 불전을 수리하려 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여 금 10근을 주어 돕고자 한다. 네가 있는 자리 밑에서 금을 꺼내 주존 삼상을 장식하고 벽 위에는 오삼불, 육류성중 및 모든 천신과 오악의 신군을, 그리고 해마다 봄과 가을의 10일에 남녀 신도들을 많이 모아 널리 사람들을 위하여 점찰법회를 베푸는 것으로써 일정한 규정을 삼도록 하라.”

지혜가 놀라 꿈에서 깨어 무리들을 데리고 신사 자리 밑에 가서, 황금 160냥을 파내어 불전 수리하는 일을 완성했으니 이는 모두 신모가 시키는대로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 사적은 남아있지만 법사는 폐지되었다.

 

부처를 장식할 금을 마련해주었다는 데서 부처가 성모보다 높다고 한 것이다. 이렇게 격이 낮아졌지만 민간에서는 전과 다름없이 숭앙되었을 것이다. 선도산 성모는 웅녀나 유화와 마찬가지로 나라 전체의 성스러운 지모신 구실을 했다.  

 

 

우리는 성모사 앞에서 경주시를내려다 보며 점심을 먹었다. 점심시간은 즐겁고, 내려댜보는 조망은 시원하다.

 

가운데 돌아앉은 추계소문님부터 시계방향으로,

두걸음님, 백연님, 약수터님, 백일봉님, 도날드김님, 찌릉소님, 수초님, bonami님, 사이언스님, 나 달마루까지 모두 11명이 참가했다.

  

 

  

여기가 선도산 정상이다. 

 

 

 

지나가는 길에 선원사 약수터가 있었고, 

 

 

 

 

아무도 모르라고

김동환 작시, 임원식 작곡

 메조 소프라노 이정희

http://cafe.daum.net/wmfrjdnstkscor/OtnP/11
 
멋진 별장 같은 곳에이렇게 수련도 피어있었다. 

 

 

 

 

 김유신 장군 무덤으로 간다.

 

김유신 장군 무덤 

 

김유신의 무덤(사적 제21호)은 송화산 줄기가 동쪽으로 뻗은 끄트머리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있다. 서천교에서 김유신 무덤으로 가는 길을 특별히 만들어 흥무로라 부른다.

 

지름이 30m에 달하는 원형분이다. 봉분 둘레에는 호석과 돌난간을 둘렸고, 호석에는 십이지신상을 새겼다. 십이지신상은 일반적인 경우와는 달리 갑옷을 입지 않고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었다. 몸체는 모두 정면을 보고 서 있으나 고개는 오른쪽으로 돌려 注視하는 모습이 특이하다. 

 

 

 

 

 

혼유석이 정남향임을 표시하는 말[午]이 있는  방향보다 조금 동쪽으로 향라여 있는 데 이것은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다. 

 

 

  

 

 

 

 

김유신의 증조할아버지는 금관가야의 금관가야의 제10대 仇衡王(金仇亥 521~532)이마지막 왕이다. 신라 제23대 法興王(514~540 재위) 19년(532)  왕비와 아들 셋과 함께 나라의 보물을 가지고 신라에 와서 항복하였다.

 

김유신의 할아버지 武力은 新州都行軍摠管이었다. 그는 관산성(충북 옥천 일대) 전투에서 크게 이겼다. 이때 백제 제26대 성왕(523~554)과 佐平 4명, 병졸 2만 9,600명이 모조리 죽음을 당하였다.

무력은 신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으나 경주 출신들에게는 따돌림을 당했다. 그는 출세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활동하였다. 이 전쟁의 공로로 무력은 지위를 단단히 굳혔고, 그의 손자 유신의 출세도 보장받았다.

 

아버지 舒玄은 벼슬이 蘇判, 大梁州(陜川) 都督, 安撫大梁州諸軍事에 이르렀다. 어머니는 萬明夫人이다. 만명의 증조부는 제22대 智證麻立干(500~514), 할아버지는 진흥왕의 아버지인 立宗葛文王, 아버지는 肅訖宗이다.

 

 

김유신은 신라 제26대 진평왕(579~632) 12년(590)에 태어났다. 

15세에 화랑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모여들어 잘 따랐는데, 그 무리를 龍華香徒라 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김춘추와 손을 잡고 한 평생 나라 위에 몸바치며 때로는 모진 고생을 하며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한다.

 

660년 백제를 정복한 직후 대각간에 제수된다. 이 자리는 이때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군사, 행정의 푀고 책임자다.

 

김유신은 673 7월 1일 79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자 왕은 성대한 의장을 갖추어 金山原에 장사지내게 하고, 비를 세워 공적을 기록하게 했다. 뒤에 제42대 흥덕왕(826~836)은 그를 興武大王으로 추봉하였다.

 

 

 

비각이다.

 

 

비각 안에는 비머리가 화려한 비가 있는데,

"新羅太大角干"이란 재액만 읽을 수 있었다.

 

 

 

흥무공원은 안에서부터 밖으로 나오면서 관람하였다.

 

  

金山齋는 김유신무덤을 지키는 시설이다.

 

 

편액에

"金山敎育館 1998년 仲秋 國務總理 金鐘泌"이라 썼다.

 

 

 

 

앞에 있는 이 느티나무는 참 아름답다.

 

"흥무공원", 군사문화의 금방 소산임을 알겠다.  

 

 

 

흥무공원 앞 차도를 건너 경주 시내를 바라보았다. 

 

 

차도를 피하여 강변으로 내려갔다.

억새가 무성하게 피어 운치있는 길이다.

 

  

 

 

지난 4월 정국 정기도보 때 어지러게 피었던 벚꽃길을 걸어, 서천교를 건너 경주시외 버스터미날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