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여행/인도행

소금강산, 굴불사터, 백률사, 탈해왕릉-2010년 9월 8일

추연욱 2010. 9. 8. 23:11



백률사-2010년 9월 8일

 



음력 팔월 초하루, 오늘 백로다.

어제까지 태풍 3개가 이땅에 생채기를 남기고 지나갔다.

그 위대하던 여름도 그 위력을 잃어가고 있다. 이제 곧 쓸쓸한 가을이 칮아올 것이다.

 

형산강 강변길을 걷는다. 상쾌한 기분이다. 

 

 

 


가운데 바위가 있는 곳이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와 <을화>의 무대 애기소다.

모화는 "예수귀신을" 믿는 이들 욱이를 실수로 칼로 찔러 죽이게 된다.

그리고 이곳 애기소에서 굿을 하다가 물에 빠져 죽는다. 그녀의  마지막 굿이었다.

 


북천이 형산강으로 드는 곳이다. 건물은 경주 문화원이란다.

 


북천을 따라 걷다가,

 


북천을 건넌다. 아이들 발걸음에 맞춘 돌다리가 정겹다. 

 


황성공원에 있는 체육관이다. 한류 드림 무슨 행사로 어수선하다. 

 

 

공원을 지나간다. 

 

 

 

 

 

  

 

 

 

소금강산 굴불사터

 

■ 굴불사터 경주시 동천동 소금강산 서쪽 기슭에 있다.

<삼국유사> 제3권, 탑상 제4 사불산 ․ 굴불산 ‧ 만불산 조에 다음과 같은 굴불사 창건설화가 있다.

 

……경덕왕이 백률사에 거동해서 산 밑에 이르렀더니 땅 속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들리므로 그곳을 파게 했더니, 큰 돌이 있는데, 사면에 사방불이 새겨져 있었다. 여기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掘佛寺라 했으나 자금은 잘못 전해져 掘石寺라 한다.……

 

굴불사는 신라 경덕왕(742~165 재위) 때 창건되었다. 그후의 연혁은 전하지 않고, 언제 폐사되었는지도 알지 못한다. 현재는 굴불사의 자취는 찾아보기 어렵고 자연암석에 조성된 사면석불이 있다.

 

사면석불(보물 제121호)은 일제강점기 반쯤 묻혀있던 것을 파냈다. 1985년 3개월간의 발굴조사로 석불 전체의 모습이 드러났다.

바위 서쪽 면에 아미타불과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셨다. 중앙의 아미타불은 높이 3.9m로 다른 불상들보다 크며 바위 자체를 몸체로 삼고 바위 위에 머리는 따로 둥글게 조각하여 얹었다. 오른손은 떨어져 나갔다. 

바위 면을 최소한으로 가공하고 옷주름도 얇게 표현하였다.

이렇게 큰 바위를 신으로 모시고 경배하는 암석신앙과 불교가 융합된 형식의 불상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이 불상이 그 대표젹인 예다.

왼쪽 관세음보살은 三屈 자세를 취하였다. 삼굴 자세는 삼국시대부터 나타나 통일신라시대 유행한다. 불상의 자연스러운 자세를 나타내고, 균형있는 신체 비례를 보여준다. 오른쪽 대세지보살은 머리 부분이 깨어졌다. 두 보살은 환조로 새겼다.

 

 

동쪽의 크고 웅장한 약사여래상은 결가부좌하였으며 왼손에 약합을 들었고, 오른손은 시무외인인 듯하나 파손되었다. 

 

 

남쪽에 남아있는 불상과 두 보살상은 몸체의 굴곡 표현이나 옷주름 등이 균형이 잘 잡혀있다. 불상의 광배는 1.6m 가량 되는 주형신광이다. 두광에는 연꽃무늬, 빗살무늬, 당초무늬가 차례로 새겨져 있고, 이 주위로 불꽃무늬가 둘러져 있다. 크기는 작지만 매우 세련된 삼존불이다. 오른쪽 협시보살 전체와 왼쪽 벽시보살 머리가 없어졌다.

 

 

북쪽의 보살입상은 높을 돋을새김이다. 높이 틀어올린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다. 손을 든 자세나 천의를 두른 모습의 남쪽 보살상과 비슷하나 보존 상태가 좋지않다. 왼쪽에 선각으로 된 보살상은 6개의 손에 11면의 얼굴을 가진 관음보살상이다. 이것은 8C 통일신라시대 밀교적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왼쪽 선각보살상이다. 바람님이 찍었다.

 

 

 

토착신앙과 관련된 알터도 부처님들과 함께 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부처님에게 복을 빌고, 아울러 신이 깃들어 있는 비위에게도 빌었다. 

 

위에서 내여다 보았다. 군데군데 주춧돌이 보인다.  

 

 

이 상들은 모두 양식과 크기가 다르다. 서쪽면과 동쪽면의 조각상은 우람하고 힘이 있는데 비해 남쪽면과 북쪽면의 조각상은 작으면서 세련된 조각 솜씨를 보여 중국의 성당 양식의 영향이 엿보인다. 아마 같은 시대 함께 조각된 것이 아니고 시대를 달리하여 완성했을 것이다.

 

사면에 불상을 조각하는 것은 사방정토를 상징하는 것으로 대승불교의 발달과 더불어 성행한다. 신라의 사방불은 대체로 동쪽에 약사여래불, 서쪽에 아미타불, 남쪽에 석가모니불, 북쪽에 미륵불을 모신다.

남산 칠불암마애불상군(국보 제312호), 안강 금곡사의 사방불과 함께 신라의 사방불 신앙을 알려준다.

암벽을 신체로 삼고 머리를 올린 것은 굴불사가 최초이다.  

 

■ 자추사는 신라 법흥왕 14년(527) 이차돈의 순교를 기념하기 위하여 창건했다.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 법흥왕 조에 “김대문의 <계림잡전>에 기록된 글에 의지해 적은 것이다” 라 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법흥왕 15년(528)에 이르러서 곧 불교를 펴보려고 하였으나 군신들이 이를 믿지 않고 이러니저러니 떠들며 말썽이 많으므로 이를 펴기가 어려웠다. 이에 근신 이차돈이 왕에게 아뢰기를 “청하옵건데 소신을 참형함으로써 중의를 결정하옵소서.” 하였다. 왕은 말하기를 “내 본시 불도를 일으키고자 함인데, 어찌 무고한 사람을 죽이겠는가?” 하니, 이차돈은 대답하여 말하기를 “만약에 불도를 행할 수 있사오면 신은 비록 죽더라도 유감이 없겠나이다.” 하여 굳은 결의를 보이자,

왕은 곧 군신들을 불러놓고 불법공행을 물으니, 모든 사람들은 “지금 승도들을 보면 머리를 깎고 이상한 의복을 입고 의논이 기궤하고 떳떳한 도리에 어긋나오니 지금 만약에 이를 그대로 내버려 두시면 후회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신등은 비록 중죄에 처하더라도 감히 분부를 받들지 못하겠나이다.” 하였다. 이때 이차돈만이 홀로 말하기를 “지금 군신들의 말은 옳지 아니합니다. 대저 비상한 사람들이 있은 연후에야 비상한 일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듣사옵건데 불법은 교리가 심오하다 하오니 이를 가히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나이다.” 하였다. 왕은 말하기를 “여러 사람들의 말을 깨뜨릴 수 없는데 너만 홀로 다른 말을 하니 두 가지 의논을 좇을 수는 없다” 하고 드디어 형리에게 명하여 곧 그를 죽이게 하였다. 이차돈은 죽을 때 말하기를 “나는 불법을 위하여 형을 받기로 하였다. 만약에 불법이 신령이 있다면 나의 죽음에는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차돈을 참형하자 짤린 자리에서 피가 용솟음쳐 나오고 그 빛이 희어 마치 젖과 같았다. 이를 본 여러 사람들은 이를 이상하게 여겨 다시는 불법을 시행하는 일에 대하여 반대하지 아니하였다.

왕 16년(529) 왕은 살생을 금하라는 분부를 내렸다.

 

<삼국유사> 제3권 흥법 제3 원종흥법 조에,

 

그(이차돈)의 머리가 날아가서 북산 서쪽 고개(금강산)에 떨어지니 그곳에 장사지냈다. 나인들은 이를 슬퍼하여 좋은 땅을 가려 절을 세우고 이름을 刺楸寺라 했다. 이로부터 집집마다 부처를 받들면 반드시 대대로 영화를 얻게되고 사람마다 불도를 행하면 이내 불교의 이익을 얻게 되었다.

544년에는 대흥륜사를 세웠다.

547년에 양나라 사신 심호가 사리를 가져오고 565년에는 진나라 劉思가 중 명관과 함께 불경을 받들고 오니 절과 절이 별처럼 벌여있고, 탑과 탑이 기러기처럼 줄을 이었다.[寺寺星張 塔塔鴈行]

<삼국유사>의 기록만으로 자추사의 위치를 알기 어렵다. 마애삼존석불이 있는 곳이라는 설과 백률사가 자추사라는 설이 있다. 이차돈의 순교 장면을 조각한 석당이 있는 백률사가 자추사일 가능성이 크다. 창건 당시에는 刺楸寺라 했는데, ‘刺’는 ‘잣’이니 ‘柏’이고, ‘楸’는 밤이니 곧 ‘栗’이다. 그러니 자추사나 栢栗寺나 같은 이름으로 볼 수 있다.

 

 

■ 백률사는 경주시 동천동 金剛山 기슭에 있다.

창건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효소왕 2년(693) 백률사 대비전(관음전) 얽힌 이야기가 전하는 것으로 보아 삼국통일 전후한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절의 대비상(관음보살상)은 중국의 장인이 만든 것이라고 하는데, 693년 국선 부례랑이 말갈족에 잡혀가자 그의 부모가 이 대비상 앞에 기도하여 돌아오게 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삼국유사> 제3권, 탑상 제4 백률사 조에,

계림 북쪽 산을 金剛嶺이라 하고 산의 남쪽에는 백률사가 있다. 그 절에 부처의 상이 하나 있는데, 어느때 만든 것인지 알 수가 없으나 영험이 자못 뚜렷했다. 혹은 말하기를 “이것은 중국의 神匠이 중생사 관음소상을 만들 때 함께 만든 것이다.” 하고 또 속전에는 이렇게 말한다.

“이 부처님은 일찍이 도리천에 올라갔다가 돌아와서 법당에 들어갈 때에 밟았던 돌 위의 발자국이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고 남아있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이 부례랑을 구출할 돌아올 때에 보였던 자취이다.” 한다.

또 이차돈의 목을 배자 흰 피가 솟았고 그의 목이 하늘로 치솟아 올라갔다가 이곳에 떨어지는 이적이 생기자 법흥왕 때 불교를 공인하게 되었으며, 이곳에 절을 세우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상당히 번창한 큰 절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 태종 12년(1412) 구리 개경사의 주지 성민이 조정에 요청해 이 절의 栴檀관음상을 개경사로 옮겼다고 하였다. 이 관음상이 대비전 관음상인지는 알 수 없다.

조일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조일전쟁이 끝난 뒤 경주 府尹 尹承順이 중수한 기록이 있다. 이때 대비상이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호)은 약 3m 높이의 축대 위에 있다. 조선 선조 때 중건한 것이다. 다포집으로 정면, 측면 3칸의 맞배지붕집이다.

 

 

대웅전 기단은 신라 때 것을 그대로 섰다.

 

 

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이다. 

 

 

대웅전은 덤벙주초 위에 약간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썼다.

 

 

대웅전 앞 바위에 신라시대 새긴 삼층 마애탑이 있는데 높이는 3.2m이다. 대웅전 앞에 탑을 건립할 자리가 없어 암벽에 탑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 1972년 대웅전 동쪽 바위에 신라시대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칠층탑이 음각되어 있는데 상륜부를 제외하고는 알아보기 힘들다.

 

사진/ 바람님 

 

 

이처럼  좁은 공간에도 이런 유현한 모습도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선원, 요사채가 있다. 경내에는 옛 건물에 쓰였던 것으로 보이는 초석과 석등의 지붕돌 등이 남아있다.

 

<동경잡기>에 고려 충숙왕 때 문인 朴孝修(?∼1377)가 백률사 서루에 올라 바라본 풍경을 읊은 시가 있다.

……

眺望登西樓 서루에 올라 멀리 둘러보니

簷楹若飛舞 처마와 기둥이 날아 춤추는 듯

南曠人烟稠 남쪽 트인 곳에 인가가 조밀하여

文物舊羅土 문물은 신라의 옛 땅일세.

金刹間人廬 금찰이 인가 사이에 섞여 있어

算得十中九 아마도 열에 아홉은 되는 듯

聖跡雜凡蹤 성인의 자취 세속에 섞여 있으니

過客奔看取 지나는 손이 구경하기에 바쁘네.

甲第與珠宮 큰 저택과 아름다운 절들이

亂後成野圃 전란 뒤에 채마밭이 되었구나.

堂有白衣尊 본당에 백의관음이 있으니

妙化無雙伍 묘한 조화가 비할데 없네.

……

현재의 종각과 요사채가 있는 자리에 서루라는 누각이 있었는데, 1917년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뒤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던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과 이차돈공양석당은 1930년에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겼다.

 

* 금동 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은 높이 1.77m로 현존 통일신라시대 최대의 금동 입상이다.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 26호),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과 함께 통일신라시대의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사각형에 가까운 둥근 얼굴에 눈썹은 길고, 입은 작은 편이다. 얼굴과 신체의 비례는 잘 맞다.

    상체가 뒤로 젖혀지고 아랫배가 나와 우람해 보인다. 하지만 어깨는 빈약하고 몸에 힘이 빠졌다.  

손은 없어져 손모양을 알 수 없으나 남은 팔로 보아 여원시무외인인 것 같다.

얼핏 보면 통견 같지만 우견편단이다. 어깨를 드러내기 싫어 오른쪽 어깨에 편삼이라는 천을 덮은 2중 착의법을 택했다. 이런 점은 경주 남산 보리사 불상, 장흥 보림사 불상과 같다.

어깨에서 두 팔로 내려온 옷자락이 발 위에서 U자 모양을 이루면서 질서있게 흘러내렸다. 이 주름은 하나씩 엇갈리면서 가운데가 끊어진다. 이런 옷주름은 광선에 따른 명암 대조의 장식 효과를 노린 듯하다. 그것은 곧 내면적인 것으로부터 외면적인 것으로 중점이 이동한 것이다.

넓적한 얼굴, 맥이 빠진 축 늘어진 도식화된 대의의 주름, 그 밑에 엿보이는 힘없는 체구 등 그러면서 형식화된 인상이 8C 후반이나 아니면 9C 초의 불상임을 말해준다. 근엄한 얼굴이면서 인간미, 불성이 모두 줄었다. 완성형 불상인 석굴암으로부터 벗어나 신라양식화 한 한국인의 얼굴이다. 

 

8C 말부터 9C에 걸쳐 많이 만들어지는 이러한 약사여래불의 유행은 아마 당시 계속되는 흉작과 유행병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도식화되어, 괘체감의 둔화하고, 이에 대한 흥미 감퇴는 돋을새김의 마애불 발전의 계기가 된다.

 

 

 

 

 

* 이차돈공양석당은 이차돈의 순교를 추모하는 공양비이다. 높이 106cm이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육각의 기둥 모양으로 되어있는데, 비의 밑부분에 다른 돌로 만든 대석이 있고, 위에는 지붕돌을 끼운 자리가 보인다. 한 면에 순교 장면에 돋을새김하였고, 나머지 다섯 면에는 명문이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거의 읽을 수 없다.

허리를 약간 굽힌 사람의 머리는 땅에 떨어져 있고, 목에는 피가 솟아오르고 있으며.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는 모습을 추상적으로 표현하였다.

만든 연대도 만든 사람도 일 수 없으나 비문에 혜공왕 2년(766)이라는 말이 있어 이 무렵이거나 그후 어느때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비문은 김생의 글씨라 한다.

 

  

 

 

소금강산으로 오른다.

 

  

 

 

* 마애삼존불좌상(유형문화재 제194호)은 소금강산 정상에서 북쪽 30m아래 지점에 있는데 아미타삼존불상이다.

얕게 돋을새김한 조각 솜씨가 우수하다. 보존 상태가 좋지않다. 손이나 얼굴모습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마멸되었다. 석불이 새겨진 바위 왼쪽에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불상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가 있었던 것 같다. 이 아미타 삼존상은 암석신앙의 표현이다.

 

 

  

 

이런 설명이 있다.

 

 

이곳이 소금강산 정상이다. 정상석은 없고, 삼각점만 있다.

 

 

 

 

▴ 소금강산은 경주시 북쪽에 있는 높이 280m 산이다.

     이곳은 진한 6촌 중 명활산 고야촌 촌장 虎珍이 내려와 습비부 설씨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금강산은 옛 신라 오악의 하나인 북악으로 성스러운 곳으로 여겨왔다. 그러다가 신라 제23대 법흥왕(514~540 재위) 때 이차돈의 순교 이후 불교 경전에 나오는 이름을 따 금강산이라 부르고 성지가 되었다.

 

신라에는 네 곳의 신령스러운 산이 있어서 나라의 큰일을 의논할 때면 대신들은 반드시 그곳에 모여서 일을 의논했다. 그러면 반드시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이 네 곳의 첫째는 동쪽의 靑松山, 둘째는 남쪽의 亏知山, 셋째는 서쪽의 皮田, 넷째는 북쪽의 金剛山이다. 진평왕 대 閼川公, 林宗公, 述宗公, 虎林公(자장율사의 아버지), 廉長公, 庾信公이 있었다. 이들은 남산 우지암에 모여서 나랏일을 의논했다. <三國遺事> 券1 기이 1, 진덕왕 조

 

본디 경주평야를 중심으로 한 오악이 있었는데, 삼국통일 이후 문무왕 말년 혹은 신문왕 대 신라 영토의 확장에 따라 국토의 사방 끝에 있는 산악으로 확대되어, 東岳은 吐含山, 南岳은 地理山, 西岳은 鷄龍山, 北岳은 太伯山, 中岳 父岳(八公山)으로 바뀐다.

 

 

정상에서 서쪽 경주시가지를 내려다 본다. 

 

 

  

 

 신발을 벗고 개울을 건너,

 

 

 

다시 산으로 올랐다.

 

 

 

 

 

우리는 표암재로 내려왔다.

 

표암재는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가지 못했고, 표암재 뒤에 있는 표암도 보지 못했다.

 

■ 표암은 금강산 자락에 있는 작은 봉우리이다. 瓢巖은 박바위란 뜻인데 이는 ‘밝은 바위’란 말이다.

신라 건국 이전 진항 땅에 살았던 6촌장들의 강림지 중의 한 곳으로 알천양산촌의 시조 이알평공이 하늘에서 이곳으로 내려왔다는 곳이다. 알평공은 경주 이씨의 시조이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조에,

진한 땅에는 옛날에 여섯 村이 있었다. 1은 알천양산촌이니…… 촌장은 알평이니 처음에 하늘에서 내려와 표암봉에 내려왔으니 이가 급량부 이씨의 조상이 되었다.(유리왕 9년에 部를 두어 급량부라 했고, 고려 태조 5년(940)에 중흥부라 이름을 고쳤다.……위의 글을 상고해 보건데 이 여섯 부의 조상들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다. 유리왕 9년(32)에야 비로소 부의 명칭을 고치고 또 그들에게 여섯 성을 주었다.……

 

고조선은 漢族과의 투쟁에 밀려, 남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조선족의 이동결과, 북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등의 나라가 형성되었고, 남에도 칠십여 나라가 생겼다. 그 중에서 다시 백제, 가야의 여러 나라와 신라 등이 형성되었다. 신라의 前身인 六村도 조선족의 이동결과 생긴 한 집단이었다.

이들 육촌은 국가의 필요성을 느껴 촌장들이 閼川 언덕에 모여, BC 57년 朴赫居世를 추대하고 나라를 세웠다. 이것이 진한 12개국의 하나인 서라벌, 즉 사로국이다. 국왕을 선출한 알천 언덕의 회의를 和白이라하여, 촌장과 그 자제들이 참가하여 만장일치로 국가의 대사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구로 성장하였다.

 

3대 유리왕 9년(32)에는 국가가 확장되고 행정기능이 강화되자, 육촌을 六部로 개편하고 여섯 가지 성을 각각 내려 주었다. 그래서 육촌 전체가 나라의 중심촌, 즉 수도가 되고, 육촌은 수도의 행정구로 격하되고, 육촌의 지배세력은 중앙귀족화하여 왕 밑의 관료로 재편성되었다. 따라서 부락 연맹체의 일원이었던 촌의 이름은 행정구에 합당한 이름으로 개명되었는데, 그것이 육부이고, 촌장 이하의 상류층을 위해서 마련된 것이 十七等의 官等이다.

 

1670년 경주 부윤 민주면이 편찬한 <동경잡기> 산천 조에 “신라 때 이 바위가 서울에 해를 끼친다 하여 박씨를 심어 바위를 덮었으므로 이런 이름이 생겼다.” 하였다.

 

표암 아래에 1925년에 건립한 표암재가 있다. 표암재가 건립된 뒤 전사청, 내외삼문, 경모대비, 천강지 등이 건립되었다. 매년 3월에 향사를 지낸다. 이병철이 세운 알평경모비가 있다.

박바위 꼭대기에 조선 순조 6년(1806)에 세운 알평공 유허비가 있다.

 

 

 

 

■ 탈해왕릉

<삼국사기>에 왕 24년(80) “8월에 왕이 돌아가시므로 성(경주) 북쪽 壤井 언덕에 장사지냈다.”고 했고, <삼국유사>에는 “재위 23년만인 79년에 죽어서 疏川丘에 장사지냈다. ……뼈를 부수고 소상을 만들어 대궐 안에 모셔두었다. 그랬더니 신이 말하기를 ‘내 뼈를 동악에 안치해두어라’ 했다. 그래서 거기에 봉안케 했다.”고 하였다.

 

탈해왕릉은 신라 초기 왕릉들이 모여있는 시내 중심부에서 떨어진 산기슭에 있다. 높이는 4.5m로 다른 초기 왕릉들에 비해 적은 편이다. 1974년 도굴되면서 석실 내부가 들어났는데, 6세기 이후 묘제임이 밝혀졌다.

 

<삼국유사>에 문무왕 때 무덤에서 뼈를 추려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봉안하고 나라에서 제사지냈다는 기록으로 보아 탈해왕릉은 문무왕 때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탈해왕릉 옆에 있는 소나무는 모질게도 꺾어졌다. 언제인지는 몰라도 태풍에 꺾였을 것이다.  그래도 본디의 그 우람한 모슴은 여전하다.

 

 

 

 

 

 

 

 2003년 7월 20일 찍은 사진이다.

 

 

 탈해왕릉 앞 소나무숲이다.

 

 

 

신라 제4대 탈해니사금(57~80)은 부모가 누구이고,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왕이 되었는지에 대해 <삼국사기>와 <삼국사기>에 기록이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것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① 신라 제2대 남해차차웅 때(4~24) 어느날(삼국사기에는 혁거세 39년, BC 19년 임인이라 했다) 가락국 앞바다에 어떤 배가 정박하고 있으므로 수로왕과 백성들은 북을 치며 맞아하여 머무르게 하려 하였지만 배는 달아나 계림(신라) 동쪽 아래 서지촌 아진포에 이르렀다.

그때 포구에는 혁거세에게 바닷고기를 잡아 바치는 아진의선이라는 할미가 있었는데, 할미가 배를 끌어올려 살펴보니 까치가 배 위에 모여 있었다. 배에는 궤짝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궤짝을 열어보니 단정한 사내아이와 칠보와 노비들이 그 속에 있었다.

② 할미는 이래 동안 먹을 것을 대주며 돌보았다.

사내아이는 말한다. “나는 용성국 사람입니다.(삼국사기에는 다파나국, 용성국은 완하국이라고 하고 왜국 동북쪽 1천리 떨어진 곳에 있다.) 나의 나라에는 28용왕이 있습니다. 용왕들은 사람의 탯줄을 빌려 태어나 대여섯 살부터 계속 왕위에 오르며 만민을 가르쳐 성명을 닦게 하여 백성을 바로잡습니다. 나의 부왕 함달파는 적녀국의 공주를 왕비로 맞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없어 신사에 기도하여 자식을 구했는데, 7년 뒤에 큰 알을 낳았습니다. 이에 대왕께서는 신하들을 불러놓고 물어보았는데 사람이 알을 낳은 일은 고금에 없는 일이니 좋은 징조가 아닌 듯하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궤짝을 만들어 나를 앉히고 칠보와 노비를 함께 실어 바다에 띄웠습니다. 그리고는 인연이 있는 곳에 닿아 나라를 세우고 집을 이루라고 빌었습니다. 곧 붉은 용이 나타나서 배를 호위하여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③ 사내아이는 말을 마치자 두 종을 거느리고 토함산에 올라 돌집을 만들고 이래 동안 머물렀다. 그는 성 안을 바라보며 살 만한 곳을 살펴보았다. 한 봉우리를 보니 초승달 같아서 오래 살 만한 곳이었다. 바로 내려가 그곳을 찾아보니 호공이란 사람의 집이었다.

④ 사내아이는 숫돌과 숯덩이를 몰래 그 집 곁에 묻었다. 아침에 그 집에 가서 “이 집은 우리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집이니 비워주시오.” 호공이 들어줄 리 없다. 두 사람은 말싸움을 하다가 관가에 고발했다. 관리가 무슨 증거로 너의 집이라 하느냐 묻자 사내아이는 “나는 본디 대장쟁이로 잠시 이웃 고을에 나간 사이에 다른 사람이 빼앗아 살고 있었소. 땅을 파서 증거를 찾아보시오.”라 대답하자 그대로 하였더니 과연 숫돌과 숯덩이가 나와 사내아이가 그 집을 차지하게 되었다.

⑤ 남해차차웅은 탈해가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맞공주를 아내로 삼게 하니 그녀가 아니부인이다. 탈해를 등용해 대보로 삼았다.

⑥ 어느날 탈해는 동악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하인을 시켜 물을 떠오게 했다. 하인은 물을 떠 가지고 오다가 중로에서 먼저 마시고는 탈해에게 드리려 했다. 그러나 뿔잔[角盃] 한쪽이 입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탈해가 꾸짖자 하인은 맹세했다. “이 뒤로는 가까운 곳이거나 먼 곳이거나 감히 먼저 마시지 않겠습니다.” 그제야 뿔잔이 입에서 떨어졌다. 이로부터 하인은 두려워하고 복종하여 감히 속이지 못했다.

지금 동악 속에 우물이 하나 있는데 세상에서 遙乃井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마두식 각배(복천동고분 출토-5~6C) 

 

 

⑦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이때(44년) 갑자기 완하국 함달왕의 부인이 아기를 배어 달이 차서 알을 낳으니 그 알이 화해서 사람이 되어 이름을 탈해라했는데, 바다를 좇아서 가락국에 왔다.……그는 기꺼이 대궐로 나아가 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소” 하니 왕이 대답했다. “하늘이 나를 명해서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장차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려함이니, 감히 하늘의 명을 어겨 왕위를 남에게 줄 수도 없고 도 우리 국민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탈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술법으로 겨뤄 보려는가?” 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 잠깐 동안에 탈해가 변해서 매가 되니 왕은 변해서 독수리가 되고, 또 탈해가 변해서 참새가 되니 왕은 새매로 화하는데 그 변하는 것이 조금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에 탈해가 엎드려 항복한다. “내가 술법을 겨루는 마당에 있어서 매가 독수리에게, 참새가 새매에게 잡히기를 면한 것은 대개 성인께서 죽이기를 미워하는 어진 마음을 가진 때문입니다. 내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툼은 실로 어려운 입니다.”

탈해가 문득 왕께 하직하고 나가서 이웃 교외의 나룻터에 이르러 중국에서 온 배가 닿는 물길을 따라 갔다. 왕은 그가 머물러 있으면서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급히 수군 500여 척을 보내 쫓게 하니 탈해가 계림의 땅 안으로 달아나므로 수군은 모두 돌아왔다. 그러나 여기에 실린 기사는 신라의 것과 많이 다르다.

탈해는 스스로 다파나국에서 왔다고 했고, 그가 도착한 곳은 ‘하서지촌 아진포라’라 했다. <삼국유사> 신라시조 혁거세왕 조에 한기부 배씨의 영역 중에 “上西知, 하서지, 乃兒 등 東村이 여기에 속한다”고 하였다. 이 지명들은 지금도 남아있다. 하서지촌은 지금 경주시 양남면 하서리 일대의 진리 혹은 하서천 일대로 비정되고, ‘내아촌’은 곧 나아리이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탈해는 외국에서 온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면 多婆那國(龍城國)은 어디 있을까? 분명히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김병모는 위에 인용한 ⑥의 뿔잔에 근거하여 기록을 그대로 인정하여 다파나국을 흑룡강 하구로 보았다. 각배는 동물의 뿔로 만든 잔인데 신라와 가야의 옛 땅에서만 발견되고 왜는 물론 고구려나 백제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각배는 고대 이란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유행한 물건인데 징키스칸의 탄생 지역인 헨티시 박물관에서 무당의 옷 허리띠에 각배가 달려 있었는데, 2000년 전 신라나 가야의 토제 각배와 똑같다고 하였다. 김병모, 초원 지석묘와 흉노 각배, <바람의 고향 초원의 말발굽>, 조선일보사, 1993.

 

 

그러나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뿔잔은 스키타이를 비롯한 유목민족의들이 술잔으로 쓴 것을 로마인들이 받아들여 한층 더 발전시켰다. 로마에서는 그리스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소재를 이용해서 다양한 장식의 뿔잔을 만들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짐승의 뿔은 코르누코피아 곧 풍요를 상징하기 때문에 가야 신라는 이 잔을 받아들여 토기로 변형하여 다양한 크기의 뿔잔을 만들었다. 기원 후 로마는 전성기를 맞아 남해로를 통해 동방무역을 극동까지 확대했으며 흉노와 북위 등 유목 민족 국가들은 북방 초원로를 따라 서역과 교류하였다.

 

다파나국이 흑룡강 하구라면 금관국 수로왕과 왕자리 다툼은 설명되지 않는다. 또 북방에는 용에 대한 신앙이 없었다. 은 탈해의 출생국이 아니라 탈해 집단이 이주해 오는 과정에 정복한 동해나 남해에 있는 어떤 섬이란 견해도 있다.

탈해가 숯덩이와 숫돌을 묻었다는 것은 그가 대장쟁이임을 말한다. 철기문화 초기 단계에는 대장쟁이는 신분이 높았다. 당시 서라벌은 철기 제작 기술 수준이 낮았다. 이런 상황에 우수한 선진 철기 제작 기술을 가진 탈해 집단은 역할이 컸을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 기반을 다졌을 것이다.

 

다파나국을 음이 비슷한 일본의 但馬國(다지마국), 肥後國 玉名郡(다마나국)에 비정하기도 하고, 서역의 소국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함달파가 불교 음악의 신으로 서역에서 주술적 악인을 가르치는 용 신앙과 결부되어 있다. 수장은 신라에는 없는 장법으로 서역 누란, 사천성 지방에 퍼져있고, 유골을 부수어 소상을 만든 예도 서역에 볼 수 있는 장법이다.

이처럼 탈해 신화에는 북방적 冶匠신화와 남방계 난생신화가 모두 들어있다. 두 요소가 함께 들어올 수 있는 경유지는 중국 동남부 해안이다. 왜의 소재지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다파나국이 동해에 있는지는 의문이다. 다파나국은 서역에서 중국 남부 해안지역을 경유해서 뱃길로 신라로 도달하기 까지 어느 지역에 위치한 소국일 것이다. 탈해는 어쩌면 용성국에서 못된 일을 저지르고 쫓겨나 보배와 노비들을 싣고 중국 남쪽 해류를 타고 가락국을 거쳐 사로국으로 왔을 것이다. 났을 것이다. 탈해가 수로왕과 술법을 겨누다가 패하여 “중국에서 온 배가 닿는 물길을 따라 갔다”는 기록은 이를 뒷받침한다.

 

유리니사금(24~57)은 남해차차웅의 태자로 당연히 왕위에 오르게 되어있다. 그런데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제3대 노례왕(유리왕) 조에 “처음에 매부 탈해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탈해는 일부러 사양하고 ‘대개 덕이 있는 이는 이[齒]가 많은 법이오. 그러니 잇금을 가지고 시험해 봅시다.’ 이리하여 떡을 물어 시험해 보니 왕의 이가 더 많았기 때문에 먼저 왕위에 올랐다. 이런 일로 인하여 왕을 尼師今(齒叱今, 尼叱今)이라 한 것이다. 尼叱今이란 칭호는 이 왕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尼師今, 尼叱今, 齒叱今’ 등은 우리말 ‘닛금’을 이두로 표기한 말이다. ‘닛금’은 당시 방언으로 ‘이빨이 많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연장자’라는 뜻을 것이다. 오늘날 ‘임금’이란 말이 여기서 나온다.

 

탈해는 옛집을 찾았다는 뜻에서 昔자, 혹은 까치가 모여 울었다고 하여 까치작[鵲]자에서 새 조[鳥]자를 떼고 성으로 삼았고, 알이 궤짝에서 나왔다고 하여 脫解라 이름지었다.

 

석탈해는 지략과 음모를 지닌 사람이다. 우수한 철기문화를 익혀 정치적으로 성장하여 왕의 사위가 되어 신임을 얻었으며, 유력한 호공의 도움을 얻어 6부의 정치권력을 제한한 뒤 마침내 석씨 왕조를 만들어냈다.

탈해니사금은 즉위하지마자 호공을 대보로 임명하였다. 탈해와 호공의 체제는 6부장들의 정치적 세력을 억누르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석씨 왕은 기존 박씨 세력을 완전히 누르지 못하였다. 신라 56왕 중 석씨왕은 겨우 8왕에 불과하다.

탈해가 동해에 도착한 시기를 일연은 남해왕 때라 했고, 김부식은 혁거세 39년 임인(BC 19년)이라 했다. 그가 처음 왔을 때 아이였다 했으니 열 살쯤으로 보아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85세쯤 되고 죽은 나이는 107세쯤 된다. 그런데 김부식은 탈해가 62세에 즉위했다고 하였고 일연스님은 고본에 기록된 임인년은 잘못된 것이라 했다. <삼국사기>는 지금은 전하지 않는 기록인 고본을 옮기면서 실수를 했고, 일연은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이로 인해 김부식은 신라의 역사연대를 끌어올렸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 新羅昔脫解誕降遺墟碑(경상북도기념물 제79호)는 경주시 월성군 나아리 월성원자력발전소 남문 왼쪽 숲속에 있다. 조선 현종 11년(1845) 나아천 하구를 탄강지로 지정하고 하마비와 땅을 조정으로부터 하사받아 석씨 문중에서 세우고 비각을 지었다.

그런데 이곳은 탈해가 도착했다는 下西知村 阿珍浦에서 북쪽으로 10리이상 떨어진 곳이다. 하서지 일대에 도착한 탈해집단은 양남면 나아리 일대에서 세력을 키운 후 서라벌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