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답사도보/ 제7차- 2010년 9월 1일
백운암 주차장,
여기서 시작한다.
교통이 불편한 이곳까지 백일봉님, 비주류님의 승용차로 올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 심수골 석조여래좌상
8각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항마촉지인을 한 모습은 석굴암 본존을 닮았다.
8각하대석은 지름 1.2m, 대부분 땅에 묻혀 자세한 모습은 알 수 없으나 8잎의 엎어진 연꽃이 새겨져 있다.
그 위에 8각의 중대석을 얹고 다시 그 위에 상대석을 올렸다.
상대석은 지름 1.8m, 높이 35cm로 하대석에 비해 지나치게 커 균형이 맞지 않다.
불상의 어깨에서 무릎까지 95cm, 양 무릎의 너비가 98cm다.
가슴은 여자같이 불쑥 솟았지만 몸체는 빈약하고. 기둥처럼 굳어있다.
우견편단으로 입은 가사의 옷주름은 섬세한 맛이 없고, 억세게 표현되었다.
오히려 등의 왼쪽 어깨에서 무릎 위로 흘러내린 가사 자락이 사실적이고 더 아름답다.
항마촉지인을 맺은 왼손은 배꼽 아래 있어야 하는데, 오른쪽 옆구리에 있어 이상하다.
이런 점으로 보아 9세기 이후에 조성했을 것으로 보인다.
대좌와 함께 넘어져 있던 것을 영험있는 부처님이라 하여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이 자리에다 세웠다.
머리가 없어져 참으로 아쉽다.
불상 옆에 이런 기와조각들을 모아두었다.
■ 양조암골 절터 석탑부재
근래까지 이곳에 陽朝庵이란 작은 암자가 있어 양조암골 절터라 부른다고 한다.
탑이 서있던 자리에는 무덤에 들어서고 탑재들은 모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탑재들은 금방 다듬은 것처럼 하얗다.
지나가는 길에 무덤 2기가 있었는데, 상석을 살펴보니 탑의 부재들을 갖다 쓴 것 같다.
바위와 소나무가 절묘하에 어울렸다.
바위의 이끼는 마치 추상화 같다.
날씨 탓인가, 부처님의 傘蓋처럼 생긴 버섯이 눈에 확 들어온다.
열암골로 올라간다.
마을은 내려다 보았다.
■ 열암골 석조여래좌상
앞에 이런 설명이 있다.
경주 열암곡석불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13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 산 119
남산 열암계곡 7부 능선쯤에 자리한 이 불상은 촉지항마인을 맺고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한 석불좌상이다. 불두와 대좌의 중대석이 결실되고 광배는 여러 조각으로 파손되어 주변에 흩어져 있었으나 2005년 주변에서 불두가 발견된 것을 계기로 보수 · 정비하였다.
이 불상은 육계가 낮고 넓으며, 나발이 약간 큼직하게 표현되어 있다. 얼굴은 상당히 양감이 있지만 코와 입 주변은 마멸이 심하다. 불상의 몸은 당당하면서도 안정감 있는 신체 비례라 할 수 있다. 가사는 양쪽 어깨에서 상반신을 모두 덮는 통견식으로 걸쳤는데, 이 가사는 비교적 얇게 표현되어 신체의 윤곽 등이 들어나고 있으며, 옷주름은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다.
광배는 화염문과 당초문과 함께 8구의 화불을 새겼는데, 섬세하고 치밀하여 우수한 조형성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연화좌는 상대에 앙련을 3단으로, 하대에는 복련을 각각 새겼고, 팔각의 중대석은 새로 만들어 끼웠다.
이 불상은 풍만하면서도 당당하고 안정감 있는 신체 표현, 대좌와 광배의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조각 수법, 몸에 밀착하여 입은 가사 등으로 보아 석굴암 본존불상과는 다른 요소도 지니고 있는 바, 조성 시기는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 2007~2008년 경주시의 의뢰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불두와 광배를 접합하고 중대석을 새로 만들어 보수 정비하였다.
■ 열암곡 마애불
2007년 5월 열암곡 제3사지 발굴조사 중 발견했다.
발견 당시 이런 모습으로 있었다.
마애불은 밑둥이 갈라져 넘어진 것으로 보아 당시 잦았던 지진의 영향으로 추정한다.
45도로 엎어진 마애불의 솟아오른 코와 바닥의 암반 사이는 5cm,
육계가 솟아오른 암반에 걸리면서 생긴 5cm의 공간에 마애불의 코와 손가락, 옷주름이 완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
2007년 9월 10일 옷주름만 보였던 마애불의 아랫부분의 흙을 파내면서 얼굴이 드러났다.
일으켜 세우면 이런 모습일 것이다.
마애불의 전체 높이 560cm, 머리에서 발끝까지 460cm, 연화대좌 높이가 100cm이다.
민머리에 육계가 높다. 들어올린 왼손과 내려뜨린 오른손이 모두 손등을 바깥으로 하였다.
이런 형식의 불상은 왕정곡, 문수사지 등 산속의 절터에서 주로 발견되는 한 시대 유행한 상서로운 불상의 하나로 추정된다.
눈꼬리가 올라간 점, 뺨의 살이 통통한 점, 통견식 가슴이 파인 옷 형식 등으로 미루어 8C 후반~9C초반, 혹은 9C말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는 이런 모습으로 굵은 잠을쇠로 굳게 잠갔다.
열암골 석조여래좌상 옆 너럭바위 위에서 점심을 먹었다. 우리 모두 앉기에 알맞은 공간이었다.
왼쪽 앞부터 시게 방향으로 도날드 김님, bonami님, 화명님, 영순님, 백일봉님, 비주류님, 얼굴이 가린 미산님, 약수터님, 라일릭님,
그리고 나무 젓가락이 도시락에 꽂힌 곳이 달마루.
■ 봉화대터
봉화대는 사라지고 축대만 남아있따.
■ 백운재
■ 백운암
삼성각 앞에 이런 그윽한 풍경이 있었다.
맷돌 수망이 암망으로 변했다. 세수대야를 얹는 받침으로 쓰고 있었다.
천년 후에도 남을 유산은 오직 이 맷돌일 것이다.
영화, <마농의 샘> OST
Sigmund Groven 연주
http://cafe.daum.net/kossgko/2SqK/1417
백운암 마당에서 앞을 바라보았다. 왼쪽 멀리 보이는 산이 치술령이다.
■ 천룡사터
고위산 천룡사
<삼국유사-제3권 塔像 제4> 天龍寺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東都(경주)의 남산 남쪽에 봉우리가 하나 우뚝 솟아있는데 세속에서는 高位山이라 한다. 산 남쪽에 절이 있는데, 속칭 高寺, 또는 天龍寺라 한다.
<討論三韓集>에는 이렇게 말했다. “계림에는 두 줄기 客水(딴 곳에서 흘러온 물)와 逆水(거꾸로 흐르는 물)가 있는데, 그 객수와 역수의 근원이 天災를 진압하지 못하면 천룡사가 뒤집혀 무너지는 재앙이 생긴다.”
俗傳에는 이렇게 말한다. “역수는 이 고을 남쪽 馬等烏村의 남쪽을 흐르는 내인데, 이 물의 근원이 천룡사에서 시작된다. 중국에서 온 使者 樂鵬龜가 와서 보고 말하기를 ‘이 절을 파괴하면 이내 나라가 망할 것이다’라 했다.”
또 전하기를 “옛날 檀越(布施를 행하는 사람)에게 두 딸이 있어서 이름을 天女· 龍女라 하였는데 부모가 두 딸을 위해서 절을 세우고 딸들의 이름의 첫 글자를 따서 천룡사라 이름지었다.”
이곳은 境地가 이상하고 불도를 돕는 곳이었는데, 신라 말년에 파괴되어 이미 오래 되었다. 衆生寺 관음보살이 젖을 먹여 키운 崔殷諴의 아들 承魯가 肅을 낳고 숙이 侍中 齊安을 낳았는데 제안이 이 절을 중수하여 없어졌던 절을 일으켰다. 이에 釋迦萬日道場을 설치하고 조정의 땅을 받았으며, 다시 信書와 願文까지 절에 남겨두었다. 그는 세상을 떠나자 절을 지키는 신이 되어 매우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을 많이 나타냈다.
1. 위의 기록으로 보아 초창 시기는 사천왕사(문무왕 19년 679년 창건)나 망덕사 창건 시기와 같은 7세기 말에 세워졌다. 당나라 예부시랑 樂鵬龜가 사신으로 서라벌에 온 것은 통일신라 초기이다.
창건 당시에는 절 이름은 수리사[高位寺]라 했다.
2. 신라 말에 허물어진 것을 고려 靖宗 17년(1040) 崔齊顔이란 사람이 고려의 번영과 왕실의 만수무강을 위하여 옛 절 수리사를 수리하여 큰 절 천룡사를 세우고 여러 부처님을 모시고 석가만일도량을 설치하였다. 여러 법당과 회랑 · 주방 · 창고 등을 갖추고, 돌부처, 흙부처 등 많은 불상을 모셨다 한다.
천룡사라는 이름은, 이 절을 지은 최제안에게 두 딸이 있었는데 큰딸은 天女, 동생이 龍女였다 한다. 이 두 딸을 위하여 지은 절이기 때문에 天龍寺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3. 천룡사에서 발행한 <대각 제95호> “금오산중 고위산 천룡사”에는 무학대사가 그 제자를 보내 조선왕조를 위해 3창했다고 기록하였다.(7쪽)
4. 愚潭 丁時翰(1625~1707) 1686년 5월 17일 이곳을 찾아와 여기서 묵었다. “절 뒤에 있는 석봉은 매우 뛰어나고 스님들의 품격도 좋다”라고 <산중일기>에 적었다.
5. 절은 200년 전까지도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 부근에 신라 · 고려 · 조선의 기와조각들이 남아있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 지역은 땅이 기름져서 밭농사며, 담배농사가 성하여 오래 전부터 마을이 생겨서 많은 건축터는 모두 파괴되어 버렸다. 여기저기 옛 기와조각, 돌 축대들이 보이지만 건물들이 어떻게 배치되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다.
6. 천룡골은 수리산 정상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흘러내려 도중에 와룡계곡과 틈수골의 계곡을 합하여 기린내로 흘러드는 계곡이다. 수리산 정상 조금아래 천룡사터가 있고, 산기슭에 와룡사가 있다.
최제안의 증조부 최은함은 신라 제55대 경애왕 때 사람이다. 그는 자식이 없어 중생사 관음보살 앞에 지성으로 기도를 드렸다. 지극한 정성에 감응이 있었던지 부인은 아들을 낳았다. 부처님께 감사하며 소중히 길렀다. 그러나 아기가 태어난지 석 달만에 후백제 견훤이 쳐들어와 신라왕을 죽이고 서라벌에 들어와 마음대로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했다. 이 난리통에 최은함의 부인도 죽었다.
최은함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칼을 들고 나섰다. 어쩔 수 없이 갓 태어난 아들을 포대기에 싸서 중생사 관음보살 앞에 나아가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기의 생명을 지켜주시어 부자가 다시 만날 것을 간곡히 빌었다. 그리고는 아기를 관음보살상 대좌 아래 두고는 전쟁에 나갔다. 그후 한 보름쯤 지나 적병이 물러가자 최은함은 곧바로 중생사 관음전으로 달려들어왔다. 놀랍게도 아들은 향을 피우는 탁자 아래 잠자고 있었다. 입에서는 젖 냄새가 났다. 최은함은 관음보살상에게 무수히 절을 하고는 아들을 데려와 길렀다. 이 아이가 최제안의 할아버지 崔承老(927~989)이다. 그는 고려조에 正匡이란 벼슬을 지냈다. 제안의 아버지는 崔肅으로 郎中 벼슬을 지냈다. 최은함은 신라의 마지막 제 56대 경순왕(927~935)을 따라 고려에 들어와 大姓이 되었다.
최제안은 內史侍郞同內史 門下平章事 柱國이라는 벼슬에 올랐다. 1040년 고려의 번영과 왕실의 만수무강을 위하여 폐사된 옛 절 수리사를 수리하여 큰 절 천룡사를 세우고 여러 부처님을 모시고 석가만일도량을 설치하였다.
최제안은, 천룡사의 주지는 절의 승려들 중에서 덕이 높고 존경받는 이를 추천하여 세우라는 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나 절을 지키는 신이 되었다고 한다.(<삼국유사-제3권 三所觀音과 衆生寺>)
중생사 관세음보살상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제3권 탑상 제4>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신라 古傳에 이렇게 말했다. 중국 천자에게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 아름답기가 비할데가 없었다. 이에 천자가 말하기를 “고금에 있는 그림으로도 이같이 아름다운 것은 적을 것이다.” 하고 화공을 시켜 그녀를 그리게 했다. (그 화공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데 혹은 張僧繇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그는 吳나라 사람으로 梁나라 天監연간에 武陵國王의 侍郞直秘閣知畵事가 되었고, 右將軍 吳興太守를 지냈다. 그러니 여기에 말한 천자는 중국 梁 · 陳무렵의 천자일 것이다. 그런데 傳에 唐나라 황제라 한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을 가리켜 모두 당이라 하는 까닭에서일 것이다. 실상은 어느 시대의 帝王인지 알 수 없다. 여기서는 두 가지 말을 모두 적어둔다-일연스님의 註)
그 화공은 천자의 명을 받들어 그림을 다 그렸으나 붓을 잘못 떨어뜨려 배꼽 밑에 붉은 점을 찍어놓았는데, 고쳐보려 하였으나 고쳐지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붉은 점은 반드시 날 때부터 있는 것인가 보다 하고 황제에게 그림을 바쳤다. 황제는 그림을 보고 “모양은 실물과 똑 같으나 배꼽 밑의 점은 속에 감추어진 것인데, 어떻게 알고 이것까지 그렸느냐” 하고 황제는 크게 노하여 화공을 옥에 가두고 장차 형벌을 주려고 하니 승상이 “저 사람은 마음이 아주 곧은 사람이오니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고 아뢰었다. 이에 황제는 “만일 저 사람이 어질고 곧다면 내가 어제 꿈에 본 사람의 형상을 그려 바치게 하라. 그 그림이 꿈에 본 얼굴과 틀림이 없다면 용서해줄 것이다.”하였다. 이에 화공이 십일면관음보살의 상을 그려 바치니 꿈과 맞는지라 황제는 그제야 마음이 풀려 그를 용서해 주었다.
화공은 죄를 면하자 博士 芬節과 약속했다. “내가 들으니 신라국에서는 불법을 존경하여 신봉한다 하니 그대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그곳에 가서 함께 佛事를 닦아 그 나라를 널리 이롭게 하는 것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소.”
이들은 드디어 신라국에 이르러 중생사의 관음보살상을 만들었는데 나라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보고 기도하여 복을 얻었으니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三所觀音은 세 곳에 나타난 관음보살상이란 뜻이다.
1. 고려 성종 11년(992) 3월 이 절의 주지 性泰가 시주가 없어 절을 유지할 수 없음을 걱정할 때 관음보살상이 金州(김해) 사람들의 시주를 얻어 주었다.
2. 절에 불이 났을 때 관음보살상이 스스로 절 마당으로 옮겨 화재로부터 재난을 피했다.
3. 고려 명종 3년(1173) 문자를 모르는 占崇이 주지로 있었는데, 한 승려가 점숭을 몰아내고 자신이 주지직을 맡으려고 나라에서 보낸 사신에게 점숭을 모함했으나 점숭이 축원문을 거꾸로 들고도 잘 읽어내자 사신은 ‘이 스님은 관음대성이 보호하는 분’이라 하여 점숭을 그대로 이 절에 머물게 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나라의 은혜를 빌고 복을 구하는 역할을 했다.
중생사는 경주시 배반동 낭산에 있다. 신라때 창건되었음은 분명하지만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940년대 옛 터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다.
건물로는 법당과 삼성각, 요사채 2동이 있다. 유물로는 마애삼존불(보물 제665호), 불상대좌, 석탑 지붕돌, 석탑 부재, 석조관음보살상 등이 있다. 석조관음보살상은 불두는 이곳에 없고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 삼층석탑은 헐려진 농가의 담 밑에 뒹굴던 것을 1991년 동국대학교에서 발굴 복원하였다.
천룡사터 흩어져 있는 석물들
석등 하대석, 간주석, 상대석, 그리고 석조.
천룡사터에서 수리산을 바라본다.
왼쪽 봉우리가 고위산 또는 수리봉이다. 가운데 아래로 내려오는 듯한 바위가 천룡바위이다.
수리산 정상에서 천룡사 쪽으로 뻗어내린 바위 능선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용 같다하여 용두암이라고 하고,
가까이서 보면 큰 배가 파도를 헤치고 출범하는 모습 같다 하여 雲棹巖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백일봉님과 비주류님은 차를 가지러 출발점인 백운암 주차장으로 가시고,
우리는 틈수골로 해서 용장3리로 내려온다.
내려오는 길에,
이런 백일홍꽃도 있고,
도라지꽃도 있고.
이런 못도 있다.
용장3리 마을 앞을 흐르는 기린내다. 북쪽으로 흘러 경주 시내를 거쳐 형산강으로 든다.
백일봉님을 따라, 인생길 따라 도보여행의 몇몇 벗님들과 함께 7차례 경주 남산 답사도보를 마무리하면서,
이제 남산에 대한 공부를 다시 시작하기 위해 남산에 대한 일반적인 정리를 할 필요를 느꼈다.
1. 남산은 경주시의 남북으로 길게 뻗어 내린 타원형으로 약간 남쪽으로 치우쳐 정상을 이룬 직삼각형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북쪽의 金鰲山(해발 468m)과 남쪽의 수리산[高位山](해발 494m)을 잇는 산들과 40여 계곡 전체를 통틀어 南山이라고 한다. 남북의 길이는 8km, 동서 너비는 약 4km이다. 완만한 동남산과 골이 깊고 가파른 서남산으로 나누어진다.
金鰲山 정상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냉골 암봉과 想思岩이 기묘한 형상으로 장엄하게 솟아있고 그 뒤에 둥글게 蟹目嶺이 솟아있다. 해목령 너머로 펼쳐진 넓은 벌판이 서라벌 옛 터인 慶州平野이다. 동으로는 吐含山이 길게 가로놓여 있고, 서쪽으로는 웅장한 斷石山과 치술령이 아득하게 마주 보인다.
남산의 모든 봉우리들은 저마다 다른 높낮이와 특색을 가지고 있어 한 봉우리에 올라 바라보면 다른 봉우리들이 개별적이면서도 서로 중첩되어 자유로운 배치와 곡선을 이룬다. 40여 개의 골짜기들은 저마다 하나씩 봉우리들을 지니고 있다.
산 아랫부분은 대부분 소나무 숲으로 덮여 있으며 산 중간쯤부터는 화강암과 토산이 어우러져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신라인들은 그들의 불심을 남산에다 표현하였다. 골짜기마다 불상을 만들고 탑을 세웠다.
2. 남산의 선사문화 유적
왕정곡에서 발굴된 빗살무늬 토기편은 6000년전 신석기시대의 유적이다. 까치봉이나 황금대 근처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돌도끼 · 반달형돌칼 · 돌살촉 등이 발견되었고, 오산골 어귀와 국사골, 용강곡 등지에서는 고인돌 8기가 남아 있다. 초기 철기시대의 유물로 청동제 칼, 말 재갈 등이 있다. 또 암석신앙의 유적인 남산부석 · 천룡암 · 큰지바위 등이 있다.
3. 남산 기슭 장창곡에는 朴赫居世가 태어난 羅井이 있다. 그러므로 나정에서 신라가 태동한것이다. 혁거세(BC 57~AD 4 재위)는 BC 57년 즉위하여 거서간이라 하고 국호를 서나벌이라 하였다. 나정은 송림에 쌓여있다. 지금 우물은 없고 우물터로 추정되는 곳은 화강암으로 덮여 있다. 발굴 결과 우물터는 건물터이다. 건물터는 8각형이다. 삼국시대 8각형 건물은 탑과 제사시설이다. 기와, 토기 파편이 나왔는데 대부분 통일신라 때의 것이다. <삼국사기>에 제2대 남해차차웅(4~24)의 누이 아노에게 제사를 맡겼다 한 것으로 보아 시조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제22대 지증마립간(500~514)은 나을에 신국을 세우고 제사지냈다고 하였는데 나을은 나정으로 추정된다.
4. 남산은 신라 四靈地 가운데 한 곳이다. 사영지는 동에 靑松山, 서쪽의 皮田, 남쪽의 오지암, 북쪽의 금강산이다. 지금 정확한 자리는 모른다. 다만 오지암은 도당산에 있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왕정골을 우지암이라고도 한다. 우지암과 오지암은 음이 비슷하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곳에서 모임을 가지고 나랏일을 의논하면 반드시 성공한다고 하였다.
5. 식혜골 오릉(원형봉토분)에서 신라의 초기 국사가 이루어졌다. 남산은 시조신이고, 곧 신라였기 때문이다. 숭덕전은 조선시대 혁거세에게 제사지냈다.
6. 창림사는 원래 궁궐터이다. 궁궐 금성은 혁거세 21년에 지었다. 제5대 파사니사금(80~112) 때인 101년 궁궐을 반월성으로 옮겼다. 또 정치 중심이 이곳 월성으로 옮긴다. 반월성은 6만평이나 된다. 남산과 반월성 사이에 남천이 있다. 다른곳에는 해자가 있었다.
760년 월정교와 일정교를 세운다. 월정교지는 인왕동에 있었다. 반월성 서문과 연결된다. 교각은 4개, 교각의 폭은 13m(왕복 4차선)이며, 교각 사이 길이는 12m, 총 길이는 63m이다. 다리 위는 기와집으로 덮었다. 일정교는 동남쪽에 있다. “南宮之印”이란 명문 기와가 나왔다. 이로보아 월성 옆에 남문이 있었을 것이다. 왕족들은 신라 중심지 남산을 드나들기 위해 일정교를 건립했다.
통일 후 해자를 메우고 건물을 세웠다.
지금 일정교와 월정교 복원 사업을 하고 있다.
창림사 근처는 왕릉터가 된다. 남산 기슭에 알영릉을 포함해서 왕릉 13기가 있다.
7. 장창곡의 양산재는 씨족사회 사로 육촌장의 위폐를 모신 곳이다. 도당산(95m)은 화백회의가 이루어진 곳이다. 곡신에게 제사지내는 곳이고, 왕이 취임하는 곳이다. 도당은 도당정치라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정치기구인 것으로 보인다. 고려때까지 존재했다.
8. 남산에는 4개의 산성이 있다. 먼저 도당토성, 남산토성, 남산신성, 고허산성을 차례로 세웠다.
남산신성은 591년 진평왕 때 건립했다. 능선을 따라 둘레 4km, 성의 너비 1km이다. 높이는 남아있는 것이 4m이다. 당시에는 10m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26대 진평왕(579~632)대는 개혁작업을 마무리하고 왕권이 안정되어 새로운 사회가 출발한다. 영토확장에 따라 새로운 성이 필요하게 되었다. 전시에는 왕이 피란하는 산속 비상왕궁의 기능을 했다. 남산신성비에 의하면 5개월만에 쌓았다. 일꾼들의 출생지, 축성 거리 등을 기록하였다.
북문지는 월성과 가장 가깝다. 본디 문은 모두 6개였다.<삼국사기>에 왕이 정기적으로 호국신인 남산신에게 제사지냈다고 하였다.
중창지는 3개의 창고 중 가운데의 것이다. 길이 107m, 너비 17m이다. <삼국유사>에 663년 창고를 지었는데, 좌우중 창고가 있다고 하였다. 곡식과 무기를 저장하였다. 건물지 한가운데 바위가 있는 것으로 보아 바위의 홈은 기둥 자리이다.
탄화미(쌀, 보리)가 발굴되었다. 탄소연대 측정 결과 680~770년 사이로 추정된다. 768년 각간의 난에 불탔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9. 왕정곡의 상서장은 최치원(857~?)이 헌강왕 11년(885년) 28세의 나이로 당나라에서 돌아와 이곳에 자리잡는다. 신라왕에게 개혁안을 올린 곳이다. 왕건에게 “鷄林黃葉 鵠嶺靑松”이라는 글을 올린 곳이 아니다.
10. 제49대 헌강왕(875~885) 때에는 남산의 산신이 현신하여 나라가 멸망할 것을 경고했다는 전설이 있다. 남산의 산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왕만이 그 의미를 알고, 좌우 사람들에게 그 춤을 추어 보여주었는데, 사람들은 이를 오히려 祥瑞롭게 여겨, 더욱 방탕한 생활을 해서, 마침내 나라가 멸망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신라인의 산악숭배에 있어서, 남산은 특히 호국의 신으로 존중되었다.
11. 제55대 景哀王(924~927)이 견훤의 손에 죽은 포석정은 나정에서 1km 떨어진 곳에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경애왕 4년(927년) 왕이 술잔치를 벌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헌강왕이 남산신을 보았다는 기록과, <화랑세기>에 포석사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포석정은 성지이다. 성지인 남산에 있기 때문이다. 또 신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견훤이 쳐들어오자 위급해진 경애왕은 시조신을 모신 포석사(사당)에서 호국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이곳에 왔을 것이다. 이곳은 신과 만나는 곳이다.
신라는 BC 57년 남산에서 시작해서 935년 남산에서 끝난다.
12. 남산은 신라가 처음 일어날 때부터 토착신앙의 근거지였다. 국사골 부석, 상사바위, 부처골 불곡 성혈 등의 유적이 있다. 바위는 인간보다 우월하여, 풍요, 다산 등 신앙의 대상이었다. 이것은 무속과 연결되었다. 서라벌 사람들은 남산을 신성한 산으로 받들었다.
처음에는 나라에서 산신을 제사하기도 하고 중요한 국사를 의논하는 장소로 삼았다.
초기(삼국시대), 불상 조각은 북남산에서 시작한다. 부처골 감실여래좌상이 가장 먼저 조성되었다. 삼화령 미륵 삼존불은 7세기 초의 것으로 고신라 양식의 대표한다. 선방골(배리) 삼존불은 고신라 양식의 완성이다. 굴곡없는 신체, 단순, 화려, 자연과 인공의 조화 등이 통일 이전의 특징이다. 이들은 7세기 전형양식이다.
다시 동 · 서남산으로 내려가면서 통일신라시대 불상이 조성된다. 칠불암 불상은 삼국통일 이후 세로운 불상 양식의 시도이다. 미소는 사라지고 근엄한 인상에, 뚜렷한 세부 묘사, 높은 돋을새김 등은 통일신라 양식이다. 통일 이후 대형화 된다.
탑골 부처바위는 다채로운 부처의 세계의 표현이다.
마애불은 구체적인 시간이 아닌 궁극적 시공, 초월적 신비감, 자연 속에 존재한다. 이것은 자연에 속해있다. 이는 신라인의 심성을 대변한다. 바위 속에 있던 부처님이 나타난 것이다.
13. 신라 사람들의 신앙은, 부처는 법당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잘생긴 바위나 속세와 절연된 깨끗하고 아늑한 곳에 머물면서 가끔 필요할 때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사람들과 사귀면서 중생들을 濟度하는 것이라 믿었다.
남산은 온 산이 불적이다. 40여 개나 되는 골짜기마다 절을 짓고, 바위마다 부처님의 모습을 새겼다. 지금까지 발견된 절터가 147곳(신라절의 66.8%), 석탑이 96기, 불상이 118구가 있어, 그대로 하나의 큰 박물관이며, 미술의 보고인 성산이다.
8, 9세기에는 부처님이 하강하는 산으로 여겨, 화장한 뼈를 꽃무늬로 장식한 항아리에 넣어 수없이 묻었다. 이들은 미륵보살의 淨土인 도솔천에 묻혔다가 미륵보살이 부처가 되어 지상으로 내려올 때 함께 태어나 지상의 행복을 다시 누리고자 하는 꿈을 간직하고 잠들어 있는 것이다. 신라인들에게 있어서 남산은 바로 부처의 산인 須彌山이었고 하늘 위 도리천이었으며, 또한 兜率天이었던 것이다.
3. 남산이 유적은 이렇게 파괴되었다.
신라가 망하고 도읍을 개경으로 옮긴 후 경제적 · 문화적 기반을 잃은 경주는 변두리 도시로 전락하였고 유적들은 버려지게 된다.
1) 조선의 억불 숭유 - 태종은 절을 242개만 남기고, 세종은 36개만 남긴다. 조정의 조직적인 사업으로 절들을 불태운다.
2) 기후적 풍화가 심하다. 기반암이 돌출된 지형으로 식생이 어렵다. 형산강지구대를 통해 강한 바람이, 분지이어서 연교차가 심하다.
4. 경주시 인왕동을 비롯한 4개 동과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 등의 지역이 1985년 사적 제311호 경주남산일원으로 지정되었다.
5. 1999년 “경주역사유적지구”와 “고창, 강화, 화순 고인돌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 추진하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올라 있었다. 이 유적을 인류의 공동문화유산으로 지정하기 위한 유네스코 자문기관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소속 조사관 2명이 2000년 2월 10일부터 17일까지 실사를 하였다.
경주지구는 당초 잠정 목록에 올랐던 남산 이외에도 첨성대 등 월성 지구 유적 5곳, 미추왕릉 · 황남리 고분군, 대릉원 지구 등이 역사 유적 지구로 묶여져 심사를 받았다.
2000년 11월 27일부터 호주 케언즈에서 열린 세계문화유산위원회(WHC)는 11월 29일 총회를 열어 이들 지구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기로 의결했다.
경주지구는 남산지구, 월성지구(첨성대, 계림 등 사적 4건), 대릉원지구(미추왕릉 등 사적 7건), 황룡사지구(황룡사 및 분황사터), 산성지구(명활산성) 등 2880㏊에 52점의 문화재가 포함된다.
경주유적은 신라 천년의 문화와 불교유산이 뛰어난 곳으로 평가받아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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