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문화유산 답사자료

오대산 상원사

추연욱 2009. 6. 22. 20:43

오대산 상원사

 

 

 

동정각일원각은 종각으로 상원사동종과 그 모조품을 보관하고 있다.

* 동종(국보 제36)은 성덕대왕 신종(국보 제29)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단 두개 남아있는 신라 범종이며, 용주사 범종까지 합쳐 국보로 지정된 종은 이 셋뿐이다.

높이 167cm, 밑지름 91cm, 무게는 3,300근이다. 명문에 성덕왕 24(725)에 주조했다고 했으니 771년 주조된 성덕대왕 신종보다 46년 앞서 제작된 것으로 현재 남아있는 우리나라의 범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종이다.

종을 매달은 고리 부분은 한 마리의 용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옆으로 음이 새어나가는 음통이 연꽃으로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몸통의 아래위로 띠를 두르고 유려한 당초문(덩쿨무늬)으로 채웠는데 성덕대왕 신종의 문양보다는 거칠다. 한가운데 주악비천상이 있는데, 성덕대왕신종의 비천상이 한 사람인데 비하여 여기는 두 사람이 연주를 하고 있다. 하늘에 날리는 천의와 영락으로 보아 하늘로부터 하강하면서 공후와 생이라는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조각한 것으로 보인다. 성덕대왕신종에 비하여 문양은 희미하게 조각되어 있다. 성덕대왕신종의 비천상은 둥실둥실 떠가며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주는 더 반해 상원사동종의 비천상은 얼굴 모습이 뚜렷하고, 악기를 다루는 팔과 손가락의 모습은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살아있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상부 네 곳에 연곽을 조성했고 각 연곽마다 아홉 개씩의 유두(연두)를 마치 도토리를 꽂아놓은 듯 볼록하게 주조했다. 한곳은 여덟 개로 한 개가 떨어져 나갔다. 이 떨어져나간 한 개의 유두가 간직하고 있는 비밀은 이러하다.

상원사종은 원래 상원사에서 만든 종은 아니다. 상원사가 조선조 세조의 발원으로 중수되자 8도에 영을 내려 상원사에 봉안할 좋은 종을 구했다. 마침 경상도 안동부의 본부 문루인 관풍루에 걸려있던 이 종이 선발되어 안동에서 상원사까지 험한 산길을 넘어 옮겨오게 되었다. 3,379근의 이 대종이 안동에서 영주를 거쳐 죽령에 이르러 장차 죽령을 넘으려고 하는데 종은 길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움직이려고 해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곳에서 고사를 지내고 종에 붙어있는 꼭지(연두) 하나를 따서 안동으로 보내자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하여 상원사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세조는 죽고 예종 원년(1468)이었다.

조선 초기에 안동의 본부 누문종으로 걸려있었음을 알 뿐 어느 절에서 만들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종의 명문에는 종을 주조한 장소나 종이 있던 절 이름이 없다. 본디 안동 근처의 어느 절이 봉안되어 있다가 관의 명령으로 징발되어 문루로 옮겼을 것이다. 안동 문루에 걸려있던 이 종이 왕명으로 상원사로 옮겨간 후에 그를 대체하기 위하여 지역 내의 고찰을 찾아 새로운 종을 걸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척불이 심해지면서 이 종 역시 관명으로 문루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적멸보궁(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8)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지고 온 부처님 정골사리를 모신 곳이다. 보궁은 선덕여왕 12(643)이 지었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전각이 있다. 건물 뒤쪽 석단을 쌓은 자리에 84cm 정도의 높이에 지붕돌을 갖춘 5층마애불탑이 돋을새김 되어 있다. 돌 앞면에 세존진신탑묘라 쓰여있다.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 하나로 이곳 외에 양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영월의 법흥사, 정선의 정암사에 있다. 정암사 적멸보궁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장이 당나라에서 가지고 온 부처의 정골과 불사리를 직접 봉안한 곳이다. 정암사의 것은 조일전쟁 때 왜적의 노략질을 피해 사명대사가 통도사의 것을 나누어 봉안한 것이다. 오대산의 적멸보궁은 불사리를 안치한 정확한 장소가 알려지지 않았다.

삼국유사에는 오대산 기록에 사리 이야기는 없다. 1307년에 민지가 지은 글 오대불궁산중명당조선불교통사에 실려있는데, “자장이 비로봉에 불뇌와 정골을 모신 뒤로 상서로운 일이 간혹 일어난다고 하였다. 고려 이래로 적멸보궁은 정골사리가 모셔진 곳으로 숭앙되어 왔다.

 

적멸보궁은 오대산의 주봉인 비로봉에서 흘러내린 능선 위에 있다. 이곳은 예로부터 천하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이며 적멸보궁은 바로 용의 정수리에 해당하는 자리라고 한다. 따라서 불교 성지로서 뿐만 아니라 도가들의 수도처로 인식되기도 했다. “택리지-복거총론설악산……남쪽은 오대산인데, 흙산이면서 천 바위 만 구렁이 겹겹으로 막혀져 있다. 맨 위에는 다섯 개의 경치 좋은 가 있어 각각 하나의 암자가 있고 중대에는 불골과 사리가 안치되어 있다. 상당부원군 한무외가 이곳에서 득도해 신선이 되었으므로 수단복지라고 일컬어 이 산을 제일로 삼았다. 예로부터 병란이 침입하지 않았으므로 국가에서는 산 아래 월정사 옆에다가 사고를 지어, 역조실록을 갈무리하고 관원을 두어 지키게 했다고 하였다.

영조 때 암행어사 박문수가 이곳에 와서 보고는 승도들이 왜 좋은 기와집에서 일도 하지 않으면서 남의 공양만 편히 받아먹고 사는가 궁금했더니 제 조상의 묘가 이렇게 훌륭한 명당이라서 그런가 보다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적멸보궁에서 중대로 내려가는 길에 용안수가 있다. 적멸보궁이 풍수지리상 용머리에 위치하고 이 우물은 그 용의 눈[龍眼]에 해당하는 곳이라 용안수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용의 눈이 두 개인 것처럼 용안수 역시 두 개가 있었는데 다른쪽 용안수의 위치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중대 사자암은 적멸보궁에 오르기 전에 있다. 신문왕 때 왕자 보천과 효명이 오대산의 오대를 참배하던 중 비로자나불과 일만 문수보살을 친견한 중대에 절을 지었다. 이때 문수보살이 지혜로운 동물의 왕인 사자를 타고 다니므로 사자암이라 하였다. 곧 이곳이 문수보살의 주처임을 상징하고 있다.

조선 태종 1(1401) 봄 조선 태종은 권근에게 중건을 명하여 불상을 봉안하고 요사채와 목욕소를 만들게 했다. 11월 낙성식이 있었는데 태종도 참석하여 성대한 법요식과 낙성식을 베풀었다. 이때 태종은 다시 권근에게 명하여 먼저 떠난 이의 명복을 빌고, 후세에까지 그 이로움이 미치게 하여 남과 내가 고르게 부처님의 은혜를 입고자 하니, 경은 이 일을 글로 적어 후세에까지 알게하라고 당부했다.

그뒤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현재 적멸보궁의 노전으로서 노전승이 거처하는 곳이며 향각이라고도 한다.

마당의 단풍나무1926년 방한암선사가 봉은사에서 이곳 상원사로 올 때 짚고 온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살아서 이처럼 자란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漢巖 重遠(1876~1951)이 입적할 때까지 산문을 나서지 않고 26년 동안 수도했다.

 

동대 관음암은 동대산 남쪽에 위치하며 월정사에서 2.5km쯤 떨어진 만월산 아래에 있다. 성덕왕 때 신문왕의 왕자 보천의 유언에 따라 왕실에서 창건하였다. 보천은 입적하면서 나라를 위해 오대산에 5개의 암자를 지어 기도와 수행에 열중할 것을 유언했다. 그는 동방에 관음방을 두고 圓像 관음과 함께 푸른 바탕에 만 명의 관음보살 모습을 그려 봉안하고, 복전 5인을 두어 낮에는 금광명경인왕반야경” “千手呪를 독송하게 하고, 밤에는 관음예참을 염하게 하라고 했다. 이 유언에 따라 왕실에서 관음보살상을 모시고 이 절을 창건했다.

그뒤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한국전쟁 때 작전상 이유로 불태웠다. 1971년 중건했다.

동대에 있다고 하여 동대암이라고 하며 관음보살이 상주하는 곳으로 알려져 오대산 신앙과 함께 불교 성지로 손꼽힌다.

본전 인법당에는 옛 전통대로 관세음보살상을 안치했다.

 

서대 수정암은 월정사에서 500m쯤 떨어져 있다. 상원사에서 남서쪽 2km 떨어잔 장령봉 아래 서대에 있다. 염불암, 서대암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에는 미타방 또는 水精寺라 하였는데, 요즈음에도 이곳을 수정암이라고도 한다. 권근의 오대산서대 수정암중창기에는 신라의 보천과 효명태자가 오대산에 입산했을 당시 이곳에 머물렀다고 했다.

신문왕 때 보천과 효명이 수도하기 위해 조그만 초암을 지어 창건했다. 보천은 서대에 미타방을 두어 백색의 원상 무량수불을 중심에 두고 만 인의 대세지보살을 그려 봉안하도록 했으며, 낮에는 법화경을 읽고 밤에는 미타예참을 하도록 했다. 성덕왕 때 보천의 유언에 따라 크게 중건했다.

조선 태조 원년(1392) 가을 원인 모를 불이 나 몽땅 타버렸다. 이듬해 우통수 옆으로 옮겨 중건을 시작하여 이해 가을 법당에 욕실을 낙성하고 미타 팔대보살을 그려 봉안했다.

건물로는 인법당이 있다. 안에는 아미타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수정암 조금 못미처 아래쪽에 우통수라는 샘터가 있다. 보천과 효명이 이곳에서 물을 길어 차를 끓여 문수보살에게 공양했다고 한다. 권근의 오대산서대 수정암중창기서대 밑에 檻泉이 솟아나는데 빛과 맛이 보통 물보다 뛰어나고 물의 무게 또한 무겁다. 우통수라 하며 서쪽으로 수 백리를 흘러 한강이 되어 바다로 흘러간다. 한강이 비록 여러 곳에 흐르는 물이 모인 것이나 우통수가 中泠이 되어 빛과 맛이 변하지 않아서 중국에 양자강이 있는 것과 같으며 한강이라는 명칭도 이 때문이다.”고 하였다. 권근은 우통수를 한강의 원류라고 명백하게 표현하지 않았다. 우통수가 한강의 원류[漢江之源]라고 명백하게 표현한 최초의 문헌은 단종 2(1530)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이다.

이형석은 <한국의 산하>에서 태백시 창죽동 금대산(1,418m) 북쪽에 있는 고목샘(해발 1320m)을 한강의 발원지라 하였다.

 

남대 지장암은 월정사에서 300km 떨어진 곳에 있다. 보천의 유언에 따라 왕실에서 창건했다. 보천은 남쪽에 지장방을 두고 원상 지장과 함께 붉은 바탕에 8대보살을 수반으로 한 만 인의 지장보살의 모습을 그려 봉안하며, 복전 5인을 두어 낮에는 지장경금강반야경을 독송하게 하고 밤에는 점찰예참을 염하게 하라. 그리고 그 결사의 이름을 금강사라 하라.‘고 유언했다. 왕실에서는 이 유언에 따라 남대 기린산 남쪽에 지장보살을 모신 이 절을 창건했다. 그 뒤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한국전쟁 때 불타고 다시 지었다. 현재는 비구니들의 수도처이다. 인법당을 비롯하여 삼성각, 六和寮, 요사 등이 있다.

 

북대 미륵암은 상원사에서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4km쯤 떨어진 상왕봉 중턱에 있 다. 본디 이름은 明堂庵이다. 신문왕의 아들 보천이 오백나한이 머문다는 이곳에 나한당을 지을 것을 유언하여 왕실에서 창건했다. 또 보천은 원상 석가와 함께 검은 바탕에 석가모니불을 수반으로 하는 오백나한을 그려 봉안하고 승려 5인을 두어 낮에는 불보은경을 읽고 밤에는 열반예참을 하도록 하고 신앙결사의 이름을 백련사라 하였다. 그 뒤 오랫동안 나한도량으로 법등을 이어왔다.

공민왕 7(1358) 원나라에서 돌아온 나옹화상이 1360년 이곳에 머물다가 이듬해 공민왕의 요청으로 개경으로 가서 왕사가 되었다. 당시 이름은 상두암이었다. 언제 미륵암으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설화로 미루어 보아 나옹이 머물 당시 나한상을 상원사로 옮기고 이어 미륵보살을 주불로 모시고 미륵암이라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뒤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한국전쟁 때 모든 건물이 불타고 근래에 중창했다.

본당 건물 인법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 팔작지붕에 너와를 올렸다. 산신각과 요사채가 있다. 가까이에 나옹화상이 참선했다는 나옹대가 있다.

 

靈鑑寺오대산 사고터(사적 제37)

선덕여왕 14(645) 자장율사가 월정사와 함께 창건하여 영감사라 했다. 고려 공민왕 18(1369) 나옹화상이 이곳에 1년 반 동안 머물며 후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조선 선조 25(1592) 조일전쟁 이후 풍수설에 따라 삼재가 들지 않는 오대산, 태백산, 마니산, 묘향산 4곳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할 목적으로 外史庫를 설치했는데, 선조 39(1606) 왕조실록을 보관할 장소로 선정되어 퇴락한 이 절을 중창하여 오대산 사고를 지었다. 건립 당시에는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건물인 璿源寶閣과 실록각, 그 옆에 수호사찰로서 영감사를 지었다. 영감사는 그 뒤로 사고를 돌보는 역할을 맡아 사고사라고도 했다.

숙종 43(1717) 당시 사고의 운영에 관한 應元 등의 상소문이 史庫節目에 남아있다. 상소 내용은 사고에는 위험이 따르기 때문에 봄, 가을로 20명씩 수직을 세워야 한다는 것과, 그들에 대한 처우가 개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상소가 받아들여져 이 절에는 60명의 수호군과 20명의 승군이 머물렀으며, 월정사 주지가 守護摠攝에 임명하여 사고수호의 책임을 맡겼다. 또 필요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位田을 주었다. 그후 참봉 2명을 임명하여 교대로 관리하게 했다.

191433일 오대산 사고본 <조선왕조실록> 787책은 조선총독부 관리 및 평창군 서무주임 등이 총독의 지시로 주문진으로 운반하여 배편으로 일본 동경제국대학으로 가져갔다.

19239월 일본의 관동대지진 때 모두 불타고 대출 중이었던 74책만 남아 화를

면했다. 그중 27책은 곧 회수되었으나 도서관이 불탔으므로 둘 곳이 없어 서울의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 와 현재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뒤늦게 회수된 나머지 47책은 돌아오지 못한 일본 땅에 남아 있다가 2007714조선왕조실록-오대산 사고본93년 만에 고국 땅으로 돌아왔다.

한국전쟁 때 사고는 불타고 터만 남아 있다가 1961년 비구니 雷黙이 사고터의 앞쪽에 절을 중건하고 사고사라 했다. 1989년 선원보각을 완공했으며, 1992년 실록각 자리에 있던 영감사를 선원보각 뒤로 옮기고 원래의 자리에 실록각을 세워 옛 모습대로 완전히 복원했다.

현재 영감사에는 원통전과 요사채가 있다.

 

 

 

 1951 1월 강원도,

중공군에 밀려 후퇴하던 국군 제1군단에게 명령이 떨어졌다.

작전지역 안에 있는 사찰을 포함한 모든 민간 시설물을 소각하라

 

산속에 있는 민가나 절이 절의 은폐물이나 보급기지로 사용될 가능성을 없애라는 가혹한 조치였다.

이런 소식이 알려지자, 오대산 입구에 있는 월정사 스님과 신도들은 북한군이나 인민군이 주둔지로 사용할 수 없게 되면 국군이 태우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들은 일주일 동안 절 건물과 방구들을 파내고 모든 문짝을 뜯어냈다.

마침내 국군이 들이닥쳤다. 이들도 천년고찰을 제 손으로 태우려니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민간인들을 시켜 잿더미로 만들었다.

월정사는 화강암으로 만든 팔각구층석탑(국보 제48)만 남기고 폐허로 변했다.

 

국군은 이어 오대산 중턱에 있는 상원사로 몰려갔다.

당시 오대산에는 주민들 대부분이 피난을 가고,

한국불교의 거목으로 우뚝 서게 되는 방한암스님만 상원사에 남아 있었다.

 

상원사로 들어온 군인들은 법당에 불을 지르려고 했다. 한암스님은 잠깐만 시간을 주게라고 이르고는 방에 들어가서 가사와 장삼을 입은 뒤 법당 안에 있는 불상 앞에 정좌했다. 그리고는 이제 불을 질러도 좋다고 말했다.

 

이를 본 장교가 스님, 이러시면 어떻게 합니까? 밖으로 나오세요라며 끌어내려고 했다.

한암스님은 단호하게 일갈했다. “그대가 장군의 부하라면 난 부처님의 제자야, 중이란 원래 죽으면 화장을 하는 법.

나는 여기서 힘 안들이고 저절로 화장을 할 터이니 당신들은 명령대로 어서 불을 지르게.

스님의 기개에 압도당한 군인들은 결국 법당의 문짝만 뜯어내 불을 태운 뒤 떠났다.

 

임기상, <신념과 용기로 문화재를 지켜낸 사람들>, 문화재 사랑, 통권 127, 문화재청, 2015 6.

 

 

사진-상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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