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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율사/ 불국토 사상 · 오대산신앙

추연욱 2009. 6. 22. 22:10

자장율사/ 불국토사상 · 오대산신앙

 

 

 

자장율사 전기

자장율사의 행적은 <삼국유사> 3권 탑상 제4 “황룡사구층탑”, “전후소장사리”, “臺山五萬眞身”, “대산월정사 오류성중”, 4意解, 5 “慈藏定律등과 閔漬1307년에 지은 <오대산월정사사적> 가운데 자장의 전기인 <奉安舍利改建寺庵第一祖師傳>,

그리고 중국에서의 활약에 대해서는 645년 당나라 釋道宣이 지은 <唐高僧傳-24唐新羅國大僧統釋慈藏傳>등에 보인다.

 

1. 자장은 본명은 金善宗으로 선덕여왕의 친족이며 진골인 蘇判 武林공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늦도록 자식이 없어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을 조성하여 자식 낳기를 빌며 만약 자식을 낳으면 진리의 바다[法海]로 갈 수 있는 징검다리가 되게 하겠다는 약조를 하였다.

 

그 뒤 어머니가 별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자장을 낳았다. 바로 4월 초8일이었다.

자장의 여동생 南澗夫人(혹은 法乘娘)과 그녀의 남편 沙干 才良 사이에서 明朗法師가 태어났으니 명랑은 자장의 甥姪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는 세속의 번거로움을 피하여 처자를 버리고 스스로 전원을 희사하여 元寧寺를 만들었다고 했다. 일찍 부모를 여의었다는 말은 맞지 않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진덕왕> 조에 四靈地에서의 회의 장면이 있는데, 여기에 자장율사의 아버지 무림공이 虎林公이란 이름으로 나온다. 그는 진덕왕 대(647~657 재위)까지 살아있었다. 872년에 기록된 <황룡사구층탑찰주기>에는 자장이 어렸을 적에 사냥을 좋아하여 매를 놓아 꿩을 잡았는데, 꿩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감심하여 출가했다고 한다.

 

그후 그는 홀로 험한 산골짜기를 찾아다니며 枯骨觀을 닦았다.

고골관이란 앙상하게 뼈만 남기고 썩어가는 시체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진리를 터득하려는 수행 방법이다. 간혹 피곤하고 권태로울 때는 조그만 집을 지어 가시덤불로 둘러막고 벗은 몸으로 그 속에 앉아 움직이기만 하면 가시에 찔리도록 하는 한편 끈으로 머리를 천장에 매달아 정신의 혼미함을 물리치기도 했다.

 

이 무렵 台輔라는 벼슬자리가 비어있어 자장의 문벌이 그에 해당하므로 소환을 받았으나 자장은 거절하였다.

왕이 크게 노하여 취임을 않거든 참형하라 하였다. 이 말을 듣고도 자장은 내 차라리 하루 를 지키다가 죽을지언정 백년을 파계하고 살기를 원치 않는다하고 거절하였다. 결국 왕도 출가를 허락하였다.

이에 자장은 산속 깊이 숨어들었다. 먹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이상한 새가 과일을 물고 와서 자장에게 주었다.

천인이 와서는 그에게 오계를 주는 꿈을 꾸었다.

자장은 산속에서 나왔다. 각처의 남녀들이 그에게 와서 계를 받았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졌다.

 

2. 그는 변방에 태어난 것을 탄식하여 선덕여왕 7(638)년 당나라로 갔다. 대략 25세 쯤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처음 문수보살이 머물고 있다는 청량산(오대산)에 가서 제석천이 공인을 데려와서 만들었다는 문수보살 소상 앞에 엎드려 은밀한 감응을 기도했다.

 

<삼국유사-3권 탑상 제4> 臺山 五萬眞身 조에,

산중에 있는 古傳을 상고해 보면 이렇게 말했다. 이 산을 眞聖 곧 문수보살이 살던 곳이라고 이름지은 것은 자장법사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 법사가 중국 오대산 문수보살의 진신을 보고자 하여 신라 선덕왕 때인 貞觀 10년 병신(636, “당승전에서는 12년이라 했다)에 당나라로 들어갔다. 처음에 중국 태화지 가의 돌부처 문수보살이 있는 곳에 이르러 공손히 7일 동안 기도했더니 꿈에 갑자기 부처가 네 를 주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어서도 그 네 구의 글은 기억할 수가 있으나 모두가 범어여서 그 뜻을 전혀 풀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에 중 하나가 붉은 비단에 금색 점이 있는 가사[緋羅金點] 한 벌과 부처의 바리때 하나와 부처의 머리뼈 한 조각을 가지고 법사 곁으로 와서는, 어찌하여 수심에 쌓여 있는가 하고 물으니 법사는 대답한다. ‘꿈에 네 구의 게를 받았으나 범어로 되어 있어서 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중은 그 글을 번역하여 말했다. ‘呵囉婆佐囊이란 일체의 법을 깨달았다(了知一切法)는 말이요, 達㘑哆佉嘢란 본래 성품은 가진 바 없다(自性無所有)는 말이요, 囊伽呬伽囊이란 이와같이 법성을 해석한(如是解法性)다는 말이요, 達㘑盧舍那란 노사나불을 곧 본다(卽見盧舍那)는 말입니다’ (번역문은 669년 번역된 화엄경 16권의 문구이다) 말을 마치자 자기가 가졌던 가사 등 물건을 법사에게 주면서 부탁했다. ‘이것은 본사 석가세존이 쓰시던 道具이니 그대가 잘 보호해 가지십시오.’ 그는 또 말했다. ‘그대의 본국 동북방 명주 경계에 오대산이 있는데 1만의 문수보살이 항상 그곳에 머물러 있으니 그대는 가서 뵙도록 하시오.’ 말을 마치자 보이지 않았다. 법사는 두루 보살의 유적을 찾아보고 본국으로 돌아오려 하는데 태화지의 용이 현신해서 재를 청하고 7일 동안 공양하고 나서 법사에게 말한다. ‘전일에 게를 전하던 늙은 중이 바로 진짜 문수보살입니다.’ 이렇게 말하며 또 절을 짓고 탑을 세울 것을 간곡하게 부탁한 일이 있었는데……

 

보원사지 탑에서 나온 금동제 사리기 윗면에는 자장이 보살로부터 게를 받는 장면,

밑면에는 이 이야기와 諸法從緣起 / 如來說是因 / 彼法因緣盡 / 是大沙門說라는 연기법송이 음각되어 있다.

그것은 <화엄경> 을 압축한 연기송으로 석가가 보리수 밑에서 깨달은 연기의 법칙을 노래로 만든 것이었다.

 

그는 당나라 서울 장안으로 갔다. 당태종은 사신을 보내 그를 위로하고 勝光別院에 머물게 하여 후한 대접을 했다.

어느날 그를 찾아온 한 장님이 그의 설법을 듣고 참회하자 곧 눈을 뜨게 된 일이 있었다. 그러자 소문이 퍼져 자장을 찾아 계를 구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후한 대접을 받으며 편안하게 지내는 것이 그가 원하는 바는 아니었다.

그래서 자장은 태종에게 글을 올려 허락을 받아 장안의 남쪽 50리쯤에 있는 종남산 운제사 동쪽의 산기슭으로 들어가 바위에 집을 짓고 살았다.

종남산 지상사는 중국 화엄종의 초조 杜順(557~640)이 있었고, 풍덕사에는 훗날 남산종이라는 계율종의 한 종파를 연 道宣律師(596~667)가 있었다.

자장이 종남산에 머무는 3년 동안 이들 중국 고승들과 교유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자장이 귀국한 후 <화엄경><보살본계>를 강의한 사실로 알 수 있다.

 

다시 장안으로 간다. 태종으로부터 비단 200필을 받는 등 후한 대접을 받았다.

자장의 중국에서의 행적은 645년 당나라 釋道宣이 지은 <唐高僧傳-24唐新羅國大僧統釋慈藏傳>에 보인다. 이 책에 기록된 자장의 행적은 <삼국유사> 등 우리나라의 기록과 다른 점이 많다. 자장이 중국에 간 연대를 우리나라의 기록들은 대체로 636년이라 하였다. 신종원의 <신라초기불교사연구>에 자장의 전기를 분석한 논문이 있는데. 그는 자장이 638년에 당나라에 갔으며, 종남산 운제사에서 3년간 거주했을 뿐 오대산을 순례한 적도 없다는 것이다.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의 감응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우리나라 오대산에서 비롯된 설화라는 것이다. 종남산에 있던 것이 청량산의 일로 바뀌고 이에 따라 중국 청량산 순례 기간을 산정해 넣기 위해서 2년을 앞당겨 643년이 중국에 긴 것이라고 하였다.

또 중국 숭배의 관념이 성행하면서 예전부터 우리나라에 있던 사리를 가지고 고려시대에 와서 이것을 과장하여 중국 오대산 문수보살에게서 얻은 것이라고 선전했다. 아울러 자장이 사리와 함께 받은 불의라는 것은 실은 당 황제가 내린 하사품이라고 한다.

 

3. 선덕여왕은 왕 12(643) 당태종에게 글을 보내 자장을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신라 조정에서 이같이 자장의 귀국을 요청한 것은 당시 통일직전의 어려운 국내 사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덕여왕 7년에는 고구려의 군사가 신라의 칠중성을 공격해 왔고, 9(640)에는 당시 신라의 정신적 기둥이었던 원광법사가 돌아갔으며, 117월에는 백제에게 40여 성을 빼앗겼으며, 대야성을 함락당하는 등 신라로서는 매우 위급한 상황이었다.

당태종은 선덕여왕의 요청에 따라, 자장을 궁중으로 불러 비단 가사 1, 비단 500, 장경 1부 및 각종 불구를 주었고, 당시 태자였던 고종도 비단 200필과 기타 많은 예물을 주었다. 자장은 신라에 아직 불경과 불상이 구비되지 못함을 알고 대장경 한 질과 幡幢, 華蓋, 붓다의 진신사리, 정골, 가사 등을 골고루 갖추어 귀국하였다.

 

<삼국유사-3, 탑상 前後所將사리> 에는 부처의 머리뼈와 어금니와 사리 l00, 부처가 입던 붉은 비단에 금색 점이 있는 가사[緋羅金點] 1벌을 가지고 왔는데, 사리를 셋으로 나누어 하나는 황룡사 탑에 두고, 하나는 울산에 있는 大和寺 탑에 두고 하나는 가사와 함께 통도사 계단에 두었으나 그 나머지는 어디에 있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고 하였다.

 

3-1. 귀국하여 먼저 분황사에 머물렀다. 곧 제3대 대국통이 되어 황룡사 寺主로 황룡사에 머물렀다.

국통은 승통 또는 사주라고도 한다. 국통의 처음은 진흥왕 12(551) 고구려에서 온 惠亮법사이다. 선덕여왕 때 자장을 대국통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대국통이란 명칭이 나타나다. 대국통은 국가 위기에 임명된 임시 비상직으로 승단의 최고 통솔자이다. 전교단의 모든 기강과 규범을 세우고 승단의 제반사를 주관하고 통제하는 국민적 지도자였다. 또 친당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는 궁중에서 <섭대승론>, 황룡사에서 7일간 밤낮으로 <보살본계>를 강의했다. 강의가 끝나면 계를 받는 자가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3-2. 자장은 당나라에서 귀국하던 해인 정관 17(643)에 강원도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려 했다. 그러나 3일 동안이나 날이 어둡고 그늘져서 보지 못하고 돌아갔다. <대산오만진신> 조에 의하면 문수보살을 친견한 곳은 오대산이 아니라 그의 사재를 털어 세운 경주의 원녕사에서였다. 자장이 오대산에 불우를 세웠다는 기록도 나타나지 않는다. 자장이 오대산 순례 후 원령사에 머문 적은 없다. 원령사에 머문 것은 통도사 창건 이후이다. 원령사 낙성이 관한 기록은 자장이 신라땅에 화엄사상을 펼치는 이야기라 생각된다.

 

자장이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지 못했다는 설화는 자장이 수입한 중국 오대산 신앙이 당시 불교계 또는 토속적인 산악숭배 신앙과 어떤 갈등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3-3.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울 것을 건의하여 643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2년 후인 선덕여왕 14(645)에 완성한다.

이로써 호국불교의 기틀을 잡았다. 대외적으로는 고구려 백제 일본 등 이웃 오랑캐들이 날뛰고 대내적으로 위엄이 부족한 여왕에 대한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삼국유사-3권 황룡사구층탑> 조에 자장이 중국 태화지를 지날 때 갑자기 神人이 나타난다. ‘어째서 여기 왔느냐?’ 자장이 대답한다. ‘보리를 구하러 왔습니다.’ 신인이 예배하고 또 묻기를 너희 나라에 어떤 곤란이 있느냐?’ ‘우리나라는 북으로 말갈에 이어 있고 남으로 왜인에 인접되었고 또 고구려, 백제 2국이 변경을 차례로 침범하는 등 이웃 외구가 종횡하니 이것이 백성들의 화난이 됩니다.’ ‘지금 너희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아 덕은 있으되 위엄이 없어 이웃 나라가 빨리 도모하려는 것이니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라.’ ‘고향에 가서 무엇을 하면 됩니까?’ ‘황룡사 호법용은 곧 나의 장자로 범왕을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 그 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 나라가 항복하고 九韓이 와서 조공하여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요 탑을 세운 후에 팔관회를 베풀고 죄인을 사하면 외적이 헤치지 못할 것이며, 다시 나를 위하여 경기 남쪽에 한 정사를 짓고 함께 나의 복을 빌면 나도 또한 덕을 갚으리라.’

 

선덕여왕은 왕 12(643)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백제의 공격에 대한 구원을 청하자 당태종이 선덕왕을 폐위할 것을 종용하는 말이 <삼국사기-신라본기 선덕왕>조에 있다.

 

그대 나라는 여자로서 임금을 삼아서 이웃나라의 업신여김을 받는다.…… 내가 친척 한 사람을 보내 그대 나라의 임금으로 삼되, 그러나 홀로 가 있을 수 없으므로 군사를 파견하여 임금을 호위하게 하고 그대 나라가 안정되는 것을 기다려 그대들 스스로 지키게 하려 한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선덕왕>조에, 선덕왕 “12(643) 6월 비담, 염종 등이 여왕은 능히 선정을 베풀지 못한다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였다.

 

황룡사 창건과 경영은 이같은 귀족집단의 전횡을 극복하고 왕권 지배 체제를 확립하려는 전환기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왕의 존엄성이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국왕을 정점으로 각 계층은 연결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에 필요한 사상이 요구된다. 그 이념은 화엄사상이다. 황룡사 경영은 그와 같은 사상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비담의 난에 왕은 돌아가지만 김유신이 국왕측에 가담하여 국왕측이 승리한다.

이 승리로 신라 사회는 또 다른 전개를 보인다.

 

3-4. 불교 홍보를 통한 국민교화와 불교 기반 확립에 힘썼다. 선덕왕의 후원 아래 전국의 승니의 모든 규범을 정리하고 교단을 강력하게 이끌어갔다. 황룡사의 제2대 주지가 되어 전국의 불교를 조직적으로 확장했으며, 전국 사찰과 승려를 통제하고 감찰했다. 겨울과 봄에는 시험을 보게 하여 계율의 준수여부를 알게 하며, 사람을 두어 관리 유지하게 했다. 또 순찰사를 보내 지방사찰을 두루 살펴서 승니의 과실을 경계하며 불경과 불상을 엄숙히 모시게 했다.

 

3-5. 붓다가 상주한다는 인도의 기사굴산 곧 영취산의 형상과 같은 산을 양산에서 찾아 영취산이라 이름하고 그곳에 절을 짓고 석가모니의 정골과 사리, 석가모니가 입었던 가사를 봉안함으로써 신라에도 불신이 상주하는 영취산이 있음을 표방한다. 646년 이곳에 통도사를 창건하고 계단을 쌓아 사방에서 오는 사람들을 제도했다.

 

中古시대가 시작되는 법흥왕대에 이르러서는 신라는 고구려의 군사적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 영토확장을 꾀하게 된다. 그러나 단순한 영토확장만이 아니라 국내의 제도 정비가 급속도로 진행된다.

 

520년 율령이 반포되고 官府가 정비되면서 최고 행정관인 상대등이 두어지고 행정관청으로 병부가 처음 설치되었다.

이렇게 새로운 법질서를 수립하게 된다. 이러한 법질서에는 충효와 같은 도덕률이 요망되는데 중국에서는 전통적인 유교 기반 위에서 지식인들이 이 사상을 확립함으로써 신민의 교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신라 유학승들이 배워 온 불교는 이미 중국화된 불교로서 국가통치에 상당히 부합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중고시대 승려들은 종교적 차원뿐 아니라 국가 사회적으로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담당하였다.

 

계율이란 본디 승려의 청정행과 승단유지에 필요한 규범이다.

신라에는 이미 승단이 방대해져 이를 유지하기 위한서 계단이 필요했고, 계율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이루어져 있었다. 이에 따라 불교의 계율사상도 승단유지라는 본래의 영역을 넘어서 도덕률로서의 몫을 담당하였다. 이무렵 신라는 제도를 정비하고 율령적 질서를 지향하던 때인 만큼 계율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있었다.

 

중고시대 불교는 시대적 요구에 적극 부응하여 신라 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고승들은 계율의 진작에 힘쓰고, 불국토 사상을 제시하였다.

 

3-6. 신라는 진덕왕 3(649) 처음으로 중국의 의관을 입고 그 이듬해에는 당 고종의 永徽 를 썼다.

<삼국사기-5권 진덕왕 2> 조에 김춘추가 신라의 章服을 중국 것으로 바꾸고자 하여 珍服을 얻어왔다고 하였다.

<삼국유사>에는 그 시행 연대의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이것이 자장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밝히고 있다.

650년을 전후한 시기 김춘추와 김유신이 추진한 정치 외교 정책의 배후에 자장이 있었을 것이다.

 

3-7. 만년에 경주를 떠나 태백산과 오대산을 순례하였다.

신라가 불국토임을 신봉하여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서라 한다. 그러나 경주를 떠난 것은 자장의 계율종 세력이 약해져서 중앙 무대에서 이탈되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진덕왕 5(651)에 명주(강릉)水多寺를 세우고 살았는데,

하루는 중국에 갔을 때 꿈에 범어로 된 게와 가사를 주었던 그 스님이 다시 꿈에 나타나 내일 大松汀에서 그대를 만날 것이다하였다. 수다사는 월정사에서 50리쯤 떨어져 있다. 송정은 수다사에서 월정사로 가는 중간에 있는데 현재 지명은 松亭里이다. 자장이 문수보살을 보려고 머물렀다는 월정사터가 곧 松汀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자장이 일어나 놀라 송정에 가니 과연 문수보살이 감응하여 왔다. 法要를 물으니 태백산 葛蟠地에서 다시 만나자하고는 자취를 감추었다. 큰 구렁이가 나무 밑에 서리고 있는 것을 보고 이곳이 갈반지임을 알고 석남원(정암사)을 세우고 문수보살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늙은이로 변해 찾아온 문수보살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의 我相에 낙망해 3년 뒤를 기약하고 몸은 남겨둔 채 정신만 산으로 들어갔으나 몸이 다비되는 바람에 현실로 돌아오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삼국유사>드디어 몸을 던져 죽으니 화장하여 유골을 石穴 속에 모셨다한 것으로 보아 절망하여 자결한 것으로 보인다.

 

문수보살이 자장의 오만불손한 태도를 꾸짖고 떠나버렸다는 이야기는 당시 사람들의 자장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진골이라는 그의 신분과 신라사회에서의 행적이 서민대중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장의 불교는 지배층 중심의 불교이다. 신라불국토사상 또한 왕족의 신성함을 강조한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정치적 색채가 농후하다. 자장이 서민불교, 대중불교의 여망을 저버린 결과 문수보살이 자장에게서 떠난 것을 설화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 자장의 성지순례는 서민대중의 신앙적 요구와는 근본적으로 동떨어진 것이었다.

 

왕권에 밀착하여 누렸던 대국통으로서의 명예와 권세는 김춘추가 즉위한 후 신진세력에 의해 잃었다고 한다.

정치적으로 몰락한 후에도 여전히 과거에 집착했기 때문에 아상을 가졌다고 비난받기도 한다.

자장계 화엄밀교가 쇠퇴하고 의상계 화엄사상이 부상됨을 전하는 기사가 <삼국유사-자장정률> 조에 보이고, “義湘傳敎조에 의상이 제자들이 밀의를 행하는 것을 보고 세상에 이를 가르치지 말라고 하고 있다.

 

자장은 화엄사상을 최초로 신라에 소개했다.

화엄사상은 뒤에 통일신라가 지향하는 정치 이념이 되었다. 불국토사상을 완성했으며, 신라에 오대산 신앙이 뿌리 내리도록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자장이 650년대 전반에 죽었다는 견해도 있다.

저서로 <阿彌陀經疏>, <阿彌陀經義記> 10여권이 있다 하나 전하는 것은 없다.

 

 

불국토사상

신라에 불교가 전래되기 위해서는 많은 진통을 겪었다.

그러나 일단 진통을 겪고난 뒤 수용한 불교는 사회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전개되어 신라 사회 전구조적 면에서 파급되어 나간다. 곧 사회의 필요에 응하여 신라사회에 알맞은 독자적 전개를 보인 것이다.

 

이 시기 자장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9층탑을 세워 면모를 일신한 황룡사의 새로운 경영을 통해서 불국토사상은 실천을 보게된다.

백제에는 불국토사상과 관련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고구려에는 불국토사상과 관련되는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3遼東城 育王塔> 조에,

……그 곁에는 세 겹으로 된 토탑이 있는데, 위는 솥을 닮은 것 같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이에 다시 가서 중을 찾아보았으나 다만 거친 풀이 있을 뿐이다. 거기를 길 깊이나 되게 파 보았더니 지팡이와 신이 나오고 더 파 보았더니 이 나왔는데, 명 위에 범서가 있었다. 侍臣이 이 글을 알아보고 불탑이라 말하였다. 왕이 자세한 것을 묻자 시신은 대답한다. ‘이것은 한나라 때 있었던 것으로 이름을 蒲圖王(본래는 休屠王이라 했는데 하늘에 제사지내는 金人이다)’이라 합니다. 聖王은 이로부터 불교를 믿을 마음이 생겨 칠중의 목탑을 세웠고 뒤에 불법이 비로소 전해오자 그 시말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지금 다시 그 탑이 높이를 줄이다가 본탑이 썩어서 무너졌다. 阿育王이 통일했다는 염부제주에는 곳곳에 탑을 세웠으니 괴상할 것은 없다.”

 

옛 전설에 불교전래 이전에 요동성 근처에 불탑이 있었는데,

이 탑은 아소카왕이 귀신의 무리를 시켜 세운 84천 개의 탑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불교 전래 이전에 이미 佛緣이 있었다는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1. 신라왕들은 전륜성왕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실현하려 했다. 5C 중엽부터 왕명에 자비왕, 지증왕, 법흥왕 등 불교 용어가 쓰여왔다. 그러다가 불교를 왕실에 끌어들인 제23法興王(514~540) 이래 불교문화가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그 가운데 정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려 했던 왕은 제24대 진흥왕(540~578)이었다.

그는 영토를 넓히는 과정에서 늘 승려를 동반했으며,

불법을 널리 펴려 한 의지를 진흥왕순수비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재세기간 동안 흥륜사와 황룡사의 완성에 온 힘을 기울였다.

법흥왕과 진흥왕은 모두 출가해 승려가 되었다.

 

전륜성왕 출현에 의한 이상국가를 실현하려는 의지가 진흥왕 이후에 보이기 시작한다.

진흥왕의 아들 진지왕(576~679)의 이름은 舍輪 또는 金輪, 진지왕의 형이며,

진평왕의 아버지는 銅輪, 진평왕의 이름은 白淨(석가의 아버지 이름), 그의 첫째 비는 麻倻夫人(석가의 어머니), 둘째 비는 勝鬘부인(석가 당시 사위국 파사익왕의 딸로 <승만경>을 설한 승만부인) 등으로 불렀다.

진평왕의 동생 白飯國飯도 정반왕의 동생 白飯斛飯에서 각각 따왔을 것이다.

 

왕족은 자신의 출신신분을 남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종교적으로 불교적으로 성화하여 신성가족이라는 골품상의 관념을 세웠다. 왕족들은 인도 사종성의 왕족계층인 크샤트리아라 한 것으로 보아 불경에 나타나는 진종설을 그대로 가져 온 것이다. 개조가 크샤트리아 출신인 불교는 개인의 힘을 자각하는 종교이다.

신라 왕족은 자신들을 석가 및 전륜성왕과 동일시했다. 이 크샤트리아와 전륜성왕은 통일국가의 이념의 지향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신라왕들이 이상적인 국가의 실현에 적극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삼국유사-3권 황룡사구층탑> 조에 자장이 당나라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했는데,

문수보살은 자장에게 너희 나라 왕은 刹利種王으로서 일찍이 불교를 받았다.

그러므로 특별한 인연이 있어 여타 동이족과 다르다.”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2. 신라 불교 전래 설화에 따르면 아도의 어머니 고도령이 신라에 과거세의 절터가 있었다는 前佛時伽藍之墟를 말한다.

<삼국유사-3興法 3 阿道基羅>조에,

 

……아도는 고구려 사람이라……아도가 다섯 살이 되자 어머니는 그를 출가시켰는데, 나이 16세에 나라에 가서 崛摩(曹魏의 사람으로 定時연간(240~248)에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高道寧과 간통하고 아도를 낳았다)를 뵙고 玄彰화상이 강독하는 자리에 나가서 불법을 배웠다. 19세가 되자 또 돌아와 어머니께 뵙자 어머니가 말했다. ‘이 고구려는 지금까지도 불법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앞으로 3000여 달이 지나면 계림에 聖王이 나서 불교를 크게 일으킬 것이다. 그 나라 서울 안에 일곱 곳의 절터가 있으니 하나는 金橋 동쪽의 천경림(지금의 흥륜사, 금교는 서천교로 우리 속명에는 솔다리이다. 절은 아도화상이 처음 그 터를 잡았는데, 중간에 폐지되었다가 흥법왕 정미(527)에 이르러 공사를 시작하여 乙卯년에 크게 공사를 일으키고 진흥왕 때 이루어졌다)이요, 둘은 三川의 갈래(지금의 영흥사), 셋은 龍宮의 남쪽(지금의 황룡사)이요, 넷은 용궁의 북쪽(지금의 분황사)이요, 다섯은 沙川의 끝(지금의 영묘사)이요, 여섯은 신유림(지금의 天王寺)이요, 일곱은 婿請田(지금의 담엄사)이다. 이것은 모두 전불 때의 절터이니 잎으로 길이 전해질 것이다.……

 

붓타 교화의 인연은 반드시 천축에만 있는 것이 아니 신라땅 곳곳에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신라 땅에도 붓다와 인연은 수없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오만진신이 상주한다는 오대산설화를 비롯하여 文殊岾, 阿尼岾(삼국유사 제5避隱 8), 관음보살과 정취보살이 산다는 낙산, 붓다가 袈裟를 빨던 곳이 있는 만어사(삼국유사 제3권 탑상 제4 魚山佛影), 전대 가람처인 鵲鴨寺 등은 우리땅에 붓다와의 인연을 이끌어온 설화들이다. 또 우리 산 곳곳에 비로봉, 세존봉, 나한봉 등 불 보살의 이름이 붙은 것도 이런데 기인한 것이다.

신라는 국가적 이념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불국토화 하였다. 종교적 이념을 정치적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함으로써 적극적인 현실화의 길을 모색했다. 불국토화 된 신라에서는 나무, 풀 삼라만상이 그 어느 하나도 불연이 닿지 않음이 없으며 발길 닫는 그 어느곳도 붓다의 교화가 미치지 않음이 없다는 생각으로 나아갔다.

불국토 안에서의 산천은 유람하는 것은 그대로 불연에 접하는 것이며 일종의 성지순레적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3. 황룡사 가섭불연좌석

중국 오대산에서 자장에게 현신한 문수진신이 신라의 황룡사는 가섭불이 강연한 땅으로 그 때의 연좌석이 지금도 남아있다고 했다. 가섭불은 과거7불 중 6째 부처로 석가모니불 바로 앞의 부처이다. 연좌석은 좌선하던 돌이다.

<삼국유사-3塔像 4 迦葉佛宴坐石> 조에,

 

신라 월성 동쪽 龍宮 남쪽에 가섭불의 연좌석이 있으니 이곳은 곧 前佛 때의 절터이며 지금 황룡사 터는 곧 일곱 절 중의 하나이다.……연좌석은 불전 후면에 있었다. 일찍이 한번 본 적이 있는데, 돌의 높이는 5-6척이나 되었으나 그 둘레는 겨우 서 발밖에 되지 않았으며 우뚝하게 서있고 그 위는 편편했다. 진흥왕이 절을 세운 이후로 두 번이나 화재를 겪었으므로 돌이 갈라진 곳이 있다. 그래서 절의 중이 여기에 쇠를 붙여서 보호하게 했다.”

 

……뒤에 대덕 자장이 중국으로 유학하여 오대산에 이르렀더니 문수보살이 현신해서 감응하여 비결을 주면서 그에게 부탁한다. ‘너희 나라의 황룡사는 바로 석가와 가섭불이 강연하던 곳으로 연좌석이 아직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도의 無憂王(아소카왕)이 황철 몇 근을 모아서 바다에 띄웠던 것인데 1,300여 년이 지난 뒤에야 너희 나라에 이르러서 불상이 이루어지고 그 절에 모셨으니……

 

4. 황룡사 금동장육존상

<삼국유사-3권 황룡사 장육상> 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황룡사……己丑(553)에 이르러 담을 쌓아 17년 만에 완성하였다. 그후 얼마 안되어 바다 남쪽에 큰 배 한척이 나타나서 하곡현 사포(지금의 울주 谷浦)에 닿았다. 배를 검사해보니 公文이 있는데, 쓰기를 서축 아육왕이 누른 쇠 57천 근과 황금 3만 푼을 모아 장차 석가의 존상 셋을 부어 만들려고 하다가 이루지 못해서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빌기를, 부디 인연있는 국토로 가서 장육존상을 이루어 주기를 바란다고 했고, 부처 하나와 보살상 둘의 모형도 함께 실려 있었다. 의 관리가 문서를 갖추어서 보고하자 왕은 사자를 시켜 그 고을 성 동쪽의 높고 깨끗한 땅을 골라서 東竺寺를 세우고 불상을 편안히 모시게 했다. 그리고 그 금과 쇠는 서울로 보내서 太建(남조 陳 宣帝의 연호) 6년 갑오(574)에 장육존상을 부어 만들었는데 공사는 금시에 이루어졌으며 그 무게는 35,007근과 황금 1136푼이 들었고, 두 보살상은 쇠 12천 근과 황금 1136푼이 들었다.’“

 

인도의 護法王인 아육왕(아소카왕, 273~232 BC)鑄成에 세 번이나 실패하고 띄워 보낸 황철 등 불상을 만들 재료들이 1300여 년간 남염부제의 크고 작은 여러 나라와 팔만 취락을 떠돌아 다녔지만 모든 곳에서 모두 주성에 실패했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북을 한 번 울리고[一鼓而就] 성공하였는데, 이것은 신라 황룡사가 불연의 땅이기 때문이라 했다.

西竺(인도)에 대한 동축이라는 대등한 위치를 넘어 오히려 신라야말로 천축 이전에 붓다의 전세 인연의 땅이라는 것이다. 신라가 붓다와 인연이 있는 국토라는 점을 암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신라야말로 천하사방에 유일한 佛緣의 나라라는 생각이 나타나 있다.

 

5. 오대산에 문수진신이, 낙산에 관음보살 상주하며, 금강산의 법기보살 주처 등으로 이어진다. 화엄사상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을 이룸과 동시에 일체의 도량이 함께 정각을 이루기 때문에 누구든지 성불하여 붓다가 될 수 있다. 오대산, 낙산사 등에서 보듯이 어디서나 불 보살의 진신이 나타날 수 있다.

 

6. 강우방은 석굴암 본존이 조성됨으로서 불국토사상은 완성되었다고 보았다. 석가가 정각을 이룬 부다가야 보리수 밑에 조성된 항마촉지인상과 그 주변의 상황을 그대로 살려서 토함산에 그것과 같은 크기, 같은 수인, 같은 상의 성도상을 조성하여 그 불상을 신라 땅에 재현함으로써 석가가 이곳에서 정각을 이룬 것과 같음을 나타냈다. 석가의 생애에서나 불교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순간인 정각의 상황을 충실히 재현하여 신라가 세계의 중심임을 전세계에 알리고자 하여 그토록 숭고하고 독창적인 예술품을 만든 것이다. 그리하여 사상적으로나 예술적으로 완성한 것이다.

 

오대산 신앙

1.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산악을 신성시하고 숭배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산을 신비로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경건한 마음으로 숭배하였다. 단군할아버지가 은퇴한 후 아사달의 산신이 되었다는 데서부터 시작해서, <삼국사기-제사> 조에 고구려는 항상 33일 낙랑의 구릉에 모여 사냥하고 돼지, 사슴을 잡아서 하늘과 산천에 제사한다.”고 했으며, <삼국유사-남부여전백제북부여> 조에 부여 안에 日山, 吳山, 浮山 3개의 산이 있어 백제의 전성기에는 신들이 그 산 위에 살면서 서로 날아 왕래하기를 조석으로 끊임없이 하였다고 했다.

 

2. 신라에서도 선도산의 성모, 가야산의 正見母主, 지리산의 聖母 등 산신이 있으며, 탈해왕은 바다에서 와서 토함산 산산이 되었다.(三國遺事 1, 第四, 脫解王) 경덕왕은 五岳三山들이 대전 뜰에 나타난 것을 보았고(三國遺事 2, 景德王, 忠談師), 헌강왕은 포석정에서 남산신이 춤추는 것을(三國遺事 2, 處容郞, 望海寺) 보았고, 금강령에서 北岳의 신이 춤추는 것을 보고 그 춤을 따라 추었다.

산을 신의 거처로 파악하고 나아가, 산 자체를 신성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삼국유사-진덕왕조에는 신라에는 4곳의 신령스런 땅[四靈地]이 있는데, 나라의 큰일을 의논할 때는 대신들은 반드시 동쪽의 청송산, 북쪽의 금강산(지금의 영천시에 있는 산)에서 모여 의논했으며 그러면 반드시 이루어졌다고 했다. 사령지는 동쪽에 靑松山, 서쪽의 皮田, 남쪽의 오지암, 북쪽의 금강산이다. 지금 정확한 자리는 모른다. 다만 오지암은 도당산에 있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왕정골을 우지암이라고도 한다. 우지암과 오지암은 음이 비슷하여 오지암은 왕정골로 비정히기도 한다.

 

3. 삼국 가운데 신라는 가장 먼저 산악신앙 구조를 체계화했다. <三國遺事 第一券 金庾信> 조에 따르면 신라 사람들은 奈林(경주의 狼山), 骨火(영천의 금강산), 穴禮(청도의 梟山, 오리산) 등 삼산에 호국의 신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삼국을 통일한 뒤에는 이 삼산에 대해서 大祀를 지냈고, 토함산, 지리산, 계룡산, 태백산, 부악(팔공산)의 오악에는 중사를 지냈으며, 霜岳(高城郡), 雪岳, 紺岳 24개 산에는 소사를 지냈다.

 

4. 불교가 들어오면서 이와같은 전통적 산악신앙과 서로 습합되어 신라는 과거부터 불교와 인연이 있는 땅이라는 불국토사상이 발전한다. 7C 중엽부터 이 땅의 명산들에 불 보살상이 하나 둘 모셔지기 시작했던 사실 등이 산의 신비성을 불교화한 실례인 것이다.

<삼국유사-3권 탑상 제4-臺山 五萬眞身>조에,

 

산중에 있는 古傳을 상고해 보면 이렇게 말했다. 이 산을 眞聖 곧 문수보살이 살던 곳이라고 이름지은 것은 자장법사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 법사가 중국 오대산 문수보살의 진신을 보고자 하여 신라 선덕왕 때인 貞觀 10년 병신(636, “당승전에서는 12년이라 했다)에 당나라로 들어갔다. 처음에 중국 태화지 가의 돌부처 문수보살이 있는 곳에 이르러 공손히 7일 동안 기도했더니 꿈에 갑자기 부처가 네 를 주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어서도 그 네 구의 글은 기억할 수가 있으나 모두가 범어여서 그 뜻을 전혀 풀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에 중 하나가 붉은 비단에 금색 점이 있는 가사 한 벌과 부처의 바리때 하나와 부처의 머리뼈 한 조각을 가지고 법사 곁으로 와서는, 어찌하여 수심에 쌓여 있는가 하고 물으니 법사는 대답한다. ‘꿈에 네 구의 게를 받았으나 범어로 되어 있어서 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중은 그 글을 번역하여 말했다. ‘呵囉婆佐囊이란 일체의 법을 깨달았다(了知一切法)는 말이요, 達㘑哆佉嘢란 본래 성품은 가진 바 없다(自性無所有)는 말이요, 囊伽呬伽囊이란 이와같이 법성을 해석한(如是解法性)다는 말이요, 達㘑盧舍那란 노사나불을 곧 본다(卽見盧舍那)는 말입니다’ (번역문은 669년 번역된 화엄경 16권의 문구)말을 마치자 자기가 가졌던 가사 등 물건을 법사에게 주면서 부탁했다. ‘이것은 본사 석가세존이 쓰시던 道具이니 그대가 잘 보호해 가지십시오.’ 그는 또 말했다. ‘그대의 본국 동북방 명주 경계에 오대산이 있는데 1만의 문수보살이 항상 그곳에 머물러 있으니 그대는 가서 뵙도록 하시오말을 마치자 보이지 않았다. 법사는 두루 보살의 유적을 찾아보고 본국으로 돌아오려 하는데 태화지의 용이 현신해서 재를 청하고 7일 동안 공양하고 나서 법사에게 말한다. ‘전일에 게를 전하던 늙은 중이 바로 진짜 문수보살입니다이렇게 말하며 또 절을 짓고 탑을 세울 것을 간곡하게 부탁한 일이 있었는데…… .

 

중국에서 문수신앙이 오대산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북위 효문제 18(494)에 낙양으로 천도한 후 부터라 한다. 오대산이 문수보살의 정토로 믿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동진 때인 418년에 佛陀跋陀羅가 번역한 <六十華嚴經>부터이다. <육십화엄경-菩薩住處品 27> 동북방의 청량산이라는 곳에 옛날부터 모든 보살이 머무르고[止住] 있는데 현재는 문수보살이 계시면서 1만의 권속을 거느리고 항상 설법한다고 했다. 문수사리보장다라니경에는 내가 멸도한 후 남섬부주의 동북방에 나라가 있어 대진국이라 이름한다. 그 국토 중에 五頂이라는 산이 있고 문수사리 동자가 유행 거주하여 모든 중생을 위하여 설법할 것이다고 하였다.

 

산악숭배 사상은 중국에도 있었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새로운 형태의 산악 불교로 발전하였다. 나중에 몇몇 산은 모든 불보살의 근거지 또는 시현의 장소로 숭배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중국인들은 화엄경의 청량산을 실재하는 오대산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오대산 신앙이 생기게 된 것이다. 오대산은 수도 낙양 동북방, 산서성 태원과 북경의 중간 지점에 있다. 이 산은 동 중의 다섯 봉우리가 있는데, 그 봉우리는 삼림이 없이 누대처럼 되어 있어서 오대산이라 불리었다. 또 고원지대인 청량한 산이기 때문에 화엄경에서 말하는 문수보살이 사는 淸凉山으로 비정하고 문수신앙의 근본 도량으로 삼았다. 문수보살이 상주한다고 믿은 오대산, 보현보살이 머무는 아미산, 관세음보살이 상주한다고 믿은 普陀山은 중국 삼대 영산이다.

 

자장은 중국에 설정되어 오는 오대산에 만족하지 않고 신라땅에도 경전에 설해진 문수보살의 상주처인 오대산이 있어야 한다는 종교적 신념 아래 국토의 동북방에 신라의 오대산을 설정한 것이다. ‘그대의 본국 동북방 명주 경계에 오대산이 있는데 1만의 문수보살이 항상 그곳에 머물러 있으니 그대는 가서 뵙도록 하시오라 한 중국 오대산에서 만났던 문수보살이 깨우쳐 준 데서 비롯한다.

우리나라에 오대산의 문수 신앙이 성행한 것은 신라 말부터이다. 중국의 오대산 문수신앙이 본격적으로 성행한 것은 당나라 대종(736~779)때부터이다. 중기밀교의 종사 不空(705~774)과 화엄종주 澄觀(738~839)이 오대산에 머물면서 오대산 문수신앙은 전성기를 맞이한다. 불공은 밀교의 종주였는데, 766년 오대산에 호국의 근본 도량이자 국가 중심 사찰이 된 金閣寺를 건립하고 전국에 문수원을 세우게 하여 밀교 신앙의 중심지로 발전시킨 것이다. 또한 징관은 밀교나 선 등 모든 불교학에 정통했으나 특히 화엄학에 뛰어나 화엄종주가 된 당대 최고승이다. 776년 오대산 대화엄사에 머물며 화엄을 밀교와 융합시켜 독특한 화엄교학을 펼치면서 文殊止住 신앙에서 오대산 자체가 문수정토라는 오대산 신앙을 한 차원 높은 새로운 오대산 신앙을 창출해냈다.

 

오대산 신앙은 8C 초에 이르면 더욱 구체화, 신비화 된다. 寶叱徒孝明 두 신라 태자에 의해 五類聖衆이 거처한다는 것이다.

<삼국유사-3권 탑상 제4” 溟州 五臺山 寶叱徒太子傳記>조에,

 

형제 사람이 오대에 나아가 공경 예배했다. 청색방인 동대 만월산에는 관음진신 1만이 언제나 머물러 계시고, 적색방인 남대의 기린산에는 팔대보살을 수반으로 1만 지장보살이 언제나 계시고, 백색방인 서방의 장령산에는 무량수여래를 수반으로 1만 대세지보살이 언제나 계시고, 흑색 방향인 북대의 상왕산에는 석가여래를 수반으로 오백나한이 언제나 계시며 황색방인 중대의 풍로산은 혹 지로산이라고도 하는데 비로자나를 수반으로 1만 문수가 상주하고 진여원에는 문수대성이 매일 이른 아침에 현신하여 36형으로 나타나 보였다.

두 태자가 함께 예배하고 아른 아침 골짜기의 물을 길어다가 차를 다려 1만 진신의 문수에게 공양하였다.”

 

풍로산 또는 지로산이라 불리던 오대산 주봉이 비로봉으로 바뀐다. 우리나라 산에는 비로봉이 많다. 이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한 1만 문수보살이 상주했다는 오대산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보천은 그로부터 오대산에서 50여 년을 더 살았다. <삼국유사>에는 특이한 예화를 들어그가 높은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려준다. 여러 신들이 보천의 설법을 들으러 모여들었고, 가지고 있는 지팡이가 하루에 세 번씩 소리를 내며 방을 둘러싸고 돌아 이에 맞추어 때를 삼았으며, 어떤 때는 문수보살이 물을 길어 이마에 부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아우 효명은 성덕왕이 되어 재위 4(705) 진여원을 창건했다.

 

보천은 임종할 당시 나라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오대산의 청방인 동대에는 觀音房을 두고 관음보살 圓像과 푸른 바탕에 그린 1만 관음보살상을 모시고 觀音禮懺을 행하면서 이름을 圓通社라 하고, 적방인 남대에는 지장방을 두어 점찰예참을 행하면서 金剛社라 하고, 백방인 서대에는 미타방을 두어 미타예참을 행하면서 水精社라 하고 흑방인 북대에는 나한당을 두어 열반예참을 행하면서 白蓮社라 하며 황처인 중대 진여원에는 문수예참을 행하면서 華嚴社라 하며, 자신이 거주하던 보천암은 華嚴寺로 고쳐 화엄신중을 생각하면서 매년 화엄회를 하하고 이름은 法輪社라 하며 화엄사를 본사로 하고 하원문수갑사를 각 結社의 도회처로 하여 주야로 화엄신중을 예참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각 암자에는 거기에 적합한 결사의 명칭과 행사를 열거해 두고있다. 복전을 두어 낮에는 일정한 경을 독송하고 밤에는 특정한 예참을 행할 것을 부탁했다.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와 암자
봉 우 리 암 자
옛이름 현재이름 옛이름 현재이름
동대 - 만월봉 동대산 관음암 관음암
서대 - 장령봉 상왕봉 미타암 수정암
남대 - 기린봉 두로봉 지장암 지장암
북대 - 상왕봉 비로봉 나한당 미륵암
중대 - 지로봉 호령봉 보천방 사자암

 

가 아닌 라는 이름의 신앙결사는 본디 일정한 사찰을 중심으로 조직된 재가신도 공동체로서 그들의 신앙을 두터이 해 가는 한편 공덕을 쌓는 여러 가지 행사를 수행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불교를 수용한 이래 그 유포와 더불어 재가신도들에 의한 신앙결사가 형성되었다. 사찰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사경, 독경, 강경, 염불 등의 수행과 건탑, 조상, 수사 등의 불사도 행했다. 삼국시대 신앙결사는 제재소복의 성격을 띠고 무속적인 것과 관련이 있었으나 통일신라시대에는 국가와 왕실의 복을 비는 호국적인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었던 듯하다. “精行福田에게 명하여 오래오래 향화를 받들게 하면 국왕이 장수하고 백성이 크게 편안하며, 문무가 화평하고 백곡이 풍요할 것이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신라 중기는 자장이 당나라에서 돌아온 후 불교를 신라 사회 전구조적으로 파급시켜 나가려 한 시기이다.

이를 위해 불국사상이 필요했다.

 

불국토사상은 황룡사구층탑을 세워 면모를 일신하면서 그 실천을 보게된다. 신라는 오래 전부터 불연이 깊은 나라이며, 과거불인 가섭불의 연좌석있고, 과거세의 일곱 군데 절터가 있고, 오대산에는 일만 문수보살이 산다는 일련의 설화는 신라가 과거부터 불교로 영화를 누려왔던 고토임을 말하고 있다.

이런 생각은 화엄사상에 근거한다. 본격적인 화엄사상이라기보다 화엄신중사상에 의한 화엄 밀교의 수용단계이다. 자장이 구층탑을 세울 것을 권유받은 곳은 당나라 화엄밀교도량이다. 밀교신앙은 재래 토속신앙의 불교적 전개로 현세적 이익을 기원한다. 특히 호국과 치병에 목적을 둔다. 주요경전으로는 <인왕경>, <금강명경>이 있으며, 신앙의 대상은 사천왕, 호법용이 주류를 이룬다. 화엄신중은 범천, 제석천, 사천왕, 팔부중, 금강역사, 용신 등 모든 불법수호신을 포함해 하나의 거대한 호법신 내지 호국신의 종합을 보여준다. 의상의 주위에는 항상 화엄신중이 그를 보호한다든가 화엄 홍진대사가 천관사에서 화엄신중을 예참하여 김우징을 도와 훗날 신무왕이 되었다든가, 신라말 승통 희랑이 해인사에 머물며 화엄신중삼매를 얻어 왕건의 군사를 도왔다든가 하는 것들은 화엄신중의 위신력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신라시대 신중신앙이 고려 때의 많은 화엄신중도량의 법회로 이어지고 있다.

 

화엄밀교는 재래의 토속신앙을 하나의 사상체계로서 수용한다. 이같은 사상 체계에 의하여 모든 재래 신앙이 불교에 수용될 수 있다. 따라서 재래의 토속신이 비로자나불에 통합되어 하나의 거대한 체계를 이룬다. 사회적으로는 모든 계층을 포용할 수 있는 문화능력을 지니게 된다. 즉 국왕을 정점으로 각 계층의 무한히 전개하고 다시 하나로 통일되는 원리를 지니게 된다. 오대산 신앙은 자장이 당나라에서 배운 화엄사상에서 비롯되지만 신라의 오악의 성립과 관계있다.

오대산 신앙은 불교가 재래신앙을 포섭하여 불교화라는 만다라적 의미를 지닌다. 만다라는 다양한 신앙 형태를 통일하는 원리이다. 또 미술적으로는 그같은 원리를 상징적, 체계적으로 표현한 불화이다.

 

황룡사는 종교적으로는 당시까지의 다신교적 신앙 양상을 화엄의 원리에 의하여 통섭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국토사상에 의하여 민심을 통일하려는 폭넓은 문화역량의 표현이다. 호국불교의 본산이다. 원광법사를 비롯한 고승대덕들이 인왕법회 및 팔관회, 인왕백고좌강회 등 이를 통해 국가를 보호한다는 종교적 의미와 더불어 사회를 운영하는 보다 바람직한 원리를 황룡사 경영에서 찾을 수 있다.

황룡사는 자연을 한 손에 움켜잡을 수 있는 자신있는 문화역량의 소산이다. 따라서 자연 현상에 골고루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보천이 죽은 해는 대략 755년경이다. 경덕왕이나 혜공왕 때이다. 경덕왕(742~764) 대는 문물이 최성기에 이른 때이지만 왕권 전제화를 강화하려는 개혁 정책이 단행되어 전통적인 귀족 세력의 반발이 심하여 사회적 혼란이 일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하다. 보천의 제안은 이같은 사회적 혼란기를 배경으로 한다. 집권정치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자장계 화엄사상을 부흥시켜 왕권을 강화하여 사회의 안정을 기할 수 있다고 믿었다.

 

보천이 임종시 남긴 것은 오대산 성소신앙에 대한 만다라적 재조직이다. 만다라는 다양한 신앙형태를 통일하는 원리이다. 불교 세계의 중심에는 근원적인 여래가 있어 많은 여래를 출현시키기도 하고, 이를 통합하기도 한다. 이런 생각은 비로자나불의 출현으로 가능해졌다. <화엄경> 성립부터이다. <화엄경>에 나타난 비로자나불 사상 다음 단계로는 재래 신앙을 더 조직적으로 통일할 수 있는 원리로 발전시킨 것이 <대일경>, <金剛頂經> 등에 의한 대일여래이며 그 원리를 양부만다라라 한다. 이에 비해 <화엄경> 비로자나불에 의하여 모든 재래 신앙을 통일하는 원리를 화엄만다라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불국사의 창건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불국사의 가람구성은 오대산의 화엄만다라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비로전을 중앙에 두고, 대웅전, 극락전, 관음전 등을 사방에 두었다. 지장전도 있었다고 한다.

 

참고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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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불국토사상․오대산신앙.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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