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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월정사

추연욱 2009. 6. 22. 22:08

오대산 월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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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월정사

 

 

 

 

오대산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도암면, 용평면, 홍천군 내면, 강릉시 연곡면에 걸쳐있다. 이곳은 한반도 중동부 태백산맥과 차령산맥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남쪽으로는 두타산, 태백산으로 이어지며, 서쪽으로는 치악산과 광덕산을 넘어 성주산에서 마무리하는 차령산맥의 시발점이다. 전통적인 지리 개념에 따르면 백두대간의 중간쯤이며, 설악산과 태백산의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다.

197521일 청학동 소금강과 함께 국립공원 제11호로 지정되었다. 오대산 국립공원은 진고개를 사이에 두고 월정사 지역과 소금강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월정사 지역은 평창군과 홍천군에 속해 있는데, 해발 1,563.4m인 비로봉을 중심으로, 호령봉(1560m), 상왕봉(1493m), 동대산(1433.5m), 두로봉(1421.9m) 등 다섯 봉우리가 고리 모양으로 편안한 누대를 이루고 있어 오대산이라 한다.

동쪽의 소금강 지역은 강릉시에 속해 있는데, 노인봉(1338.1m), 백마봉(1094m), 황병산(1407.1m), 매봉산(1173.4m), 천마봉(999.4m) 등이 소금강을 둘러싸고 완만한 능선을 이루고 있다.

국립공원 경계 밖에는 계방산(1577.4m), 소계방산(1456m) 등이 있다.

주요 계곡으로는 월정사 지역에 신선골, 동피골, 조계골, 작은북대골, 동역골, 소금강 지역에는 청학동계곡, 구룡계곡 등이 있고, 6번국도 주변에는 성천과 안개자니계곡이 있다. 월정사 지역의 신선골, 동피골, 조계골과 안개자니계곡은 오대천의 상류를 이룬다. 정선군 북면 나전리에 이르러 북동쪽에서 흘러온 골지천과 만나 아우라지가 되고, 정선읍에 이르러 동대천과 합류하여 조양강이라 불린다. 이어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한편 소금강 지역의 청학동 계곡, 구룡계곡, 용수계곡 등은 동쪽으로 흘러 연곡천을 이룬 뒤 동해로 흘러든다.

 

월정사 -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1. 월정사를 창건한 이는 자장율사이다. 자장은 선덕여왕 12(643)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다. 그는 오대산이 문수보살이 머무는 성지라 생각하고 643년 이곳으로 와서 임시로 초막을 짓고 머물면서 문수보살의 진신을 친견하고자 했다. 그러나 3일 동안이 날이 어둡고 그늘져서 친견하지 못했다. 閔漬가 지은 <奉安舍利改建寺庵 第一祖師傳>에 이때 그가 머물던 곳이 바로 현재의 월정사 자리이며 자장은 훗날 다시 와서 8척 방을 짓고 7일 동안 머물렀다고 했다. 황룡사 구층탑을 완성한 뒤인 선덕여왕 14(645)에 다시 지금의 월정사자리에 와서 7일 동안 머물렀을 것이다.

이휘진이란 사람이 1752년에 쓴 <월정사중건사적비>에 의하면,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수도를 마친 뒤 643에 붓다의 사리를 모시고 돌아와, 오대산 비로봉 아래 붓다의 정골사리를 모시고 적멸보궁을 창건하였다. 2년 뒤에 동대 만월산 아래 월정사를 짓고 팔각구층탑을 세우고 그 안에 진신시리를 봉안했다. 이곳에 정골사리를 모셨다는 기록은 <조선불교통사> 하편에 실려있는 閔漬의 글 五臺佛宮山中明堂에도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전후소장사리>에는 적멸보궁에 불사리를 모셨다는 기록이 없다. 자장이 당나라에서 사리 100알을 얻어와 황룡사구층탑, 통도사 계단, 대화사 탑에 나누어 봉안했다고 했다.

 

2. <삼국유사>에 따르면 자장법사가 처음에는 초막을 지었으며, 이후 문무왕 때 信孝居士가 이곳에 와서 살았고, 그 다음에는 通曉大師 梵日(810~889)의 문인인 信義頭陀가 와서 암자를 지어 살았다. 신의가 죽은 후로 오랫동안 황폐한 채로 남아있었는데, 水多寺의 장로 유연이 새로 암자를 짓고 살면서 비로소 절다운 면모를 갖추었다. 수다사는 지금의 평창군 진부면 수항리에 있는 절터라는 설과, 강릉시에 있는 낙가사라는 설이 있다.

신라시대 월정사에 살았던 이 승려들을 四聖이라 했지만 그들에 대하여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다만 신효거사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간략한 전기가 있다. 그는 공주사람으로 효도로 이름난 이었고, 幼童(또는 儒童)보살(석가모니가 전세에 보살로서 수행할 때 연등불에게 공양했다는 설화가 있는데 그 당시의 이름이다)의 화신이라 하는 사람이다. 그는 이리저리 살 곳을 찾아다니다가 늙은 부인으로 변신한 관음보살이 가르쳐 주는 대로 이곳 월정사 지리에 왔다고 한다.

월정사는 사성시대는 암자정도였으며, 신라말까지도 은자들의 주처였을 것이다.

 

3. 고려시대의 자료는 거의 없다. 충렬왕 33(1307) 화재로 전소한 것을 而一이 중창했다. 팔각구층탑과 석조보살좌상이 고려시대의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 고려 때 대규모 중창이 있었을 것이다.

 

4. 愚潭 丁時翰(1625~1707)<산중일기>에는 月精寺라는 금자로 쓴 편액이 걸려있다. 범종각과 정문을 지나 七佛寶殿이라 쓴 편액이 있는데, 안에는 7불좌상이 있다. 스님이 말하기를 칠불은 중국에서 가져온 것이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순조 33(1833) 화재로 전소한 것을 헌종 10(1844) 중창했다.

5. 1911년에는 31본산의 하나가 되어 강원도 남부의 절을 총괄했다.

6. 1951년 일사후퇴 때 국군이 작전상의 이유로 칠불보전을 비롯하여 영산전, 光應殿, 진영각 등 10여 동의 건물을 불태웠다. 소장 문화재들과 사료들도 모두 불탔다. 이때 선림원에서 출토된 후 이곳으로 옮겨온 범종도 완전히 녹아버렸다.

 

7. 현재 월정사 당우들은 불탄 자리에 새로 건립한 것이다. 처음 승방인 동별당이 세워지고, 1964呑虛 宅成(방한암선사의 제자)이 적광전을 중창하였다. 이후 萬和가 꾸준히 중건하였으며 1993년에는 지장전을 건립하였다.

현존 건물로는 적광전, 보장각, 삼성각, 대강당, 심검당, 승가학원, 진영각, 범종각, 湧金樓, 천왕문, 일주문, 서별당 등이 있다.

 

적광전은 월정사의 금당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남향 건물이다. 적광전에는 일반적으로 비로자나불을 모시지만, 이곳에는 석굴암 본존불의 형태를 본뜬 석가여래상을 협시불 없이 단독으로 모셨다. 각 건물의 현판과 주련은 모두 탄허가 썼다.

 

* 팔각구층석탑(국보 제48)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은 적광전 앞에 있다. 전체적인 형태는 낮은 탑신에 지붕돌이 중첩되고 상륜부가 높이 뻗어있어 상승감이 강조되었다. 각 층의 체감률은 작지만 기단부가 안정된 편이어서 경쾌하게 하늘로 솟는 듯하다. 높이는 15.2m이다.

 

4장으로 짜여진 지대석 위에 2중기단을 만들었다. 하층기단 면석 각면에는 안상이 2구씩 음각되어 있고, 덮개돌은 연화문으로 장식되어 있다. 기단부를 연꽃 모양으로 조각하여 탑이 마치 연꽃에서 솟아나는 듯한 모양이다. 그위에 괴임돌이 한단 있어서 상층기단을 받치고 있다. 상층기단 중심에는 모서리기둥이 새겨져 있다. 곧 기단부를 부처의 대좌처럼 장식했다. 탑신부를 부처님과 동등하게 여긴 듯하다. 이 점은 탑 앞에 공양하는 보살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알 수 있다.

탑신부는, 8각몸돌과 지붕돌이 각기 다른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石材의 크기에 따라 1개 혹은 2~3개의 돌로 짜여진 것도 있다. 상층기단과 1층몸돌 사이에는 괴임돌이 하나 더 얹혀 있고, 1층몸돌에는 각 면마다 모서리기둥이 있다. 1층몸돌 8면 중 네 면에 교대로 네 개의 감실이 파여 있는데 남쪽의 것이 가장 크고 문을 달았던 흔적이 있다. 2층 이상의 몸돌에는 모서리기둥은 있으나 감실은 없다.

지붕돌은 1층부터 3층까지는 각각 두 개의 돌로 만들어 조립하였고, 나머지 부분은 한 개의 돌로 만들었는데, 유독 8층지붕돌과 9층몸돌은 붙여 조각하였다. 추녀는 수평이며, 지붕돌받침은 모두 3단이다. 처마 밑에 낙수면이 음각되어 있다. 지붕돌 모서리에는 경쾌한 반전이 있고, 처마 아래에는 층마다 풍경이 8개씩 달려 있어 상륜부까지 합치면 풍경은 모두 80개나 된다.

 

상륜부는 완전하다. 노반, 복발, 앙화, 보륜까지는 돌이고, 그 이상은 금동으로 장식하였는데 매우 화려하다. 상륜부를 받치고 있는 앙화는 지금 막 피어난 2중연꽃 모양으로 꽃송이 끝 부분을 도톰하게 돋을새김하여 양감이 뛰어나다. 그 위로 9개의 원형 돌로 중첩된 보륜에는 한 개의 보륜마다 돌아가며 8군데 꽃모양을 두겹으로 조각하여 고정시켜 하늘에서 내리는 꽃비를 표현했다. 그 위로 다른 탑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양의 보개가 덮여 있으며 그 위로 수연과 보주가 하늘에 닿을 듯이 솟아있다.

 

자장율사가 세웠다고 하였으나 양식으로 봐서 고려 시대의 것이다. 10C 이전까지는 올라가지 않을 것 같다.

 

1970년 해체 수리할 때 1층몸돌과 5층몸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1층몸돌 원형 사리공에서는 銅盒, 銀盒, 金銅四角盒, 수정사리병, 청동거울 4, 5층지붕돌에서는 은제여래입상이 발견되었다. 청동거울은 4개로 寶相華緣 雙龍文鏡, 波文, 무문경, 四龍有銘鏡 등이다. 수정사리병에는 사리 14알이 들어있었다.

새로 순금 사리병과 순금불입상을 만들어 순금사리병은 1층몸돌에, 순금불입상은 5층몸돌에 봉안하였다.

 

만주를 비롯한 북방의 고구려 땅에 평면이 8각에 5층 이상 다층탑이 많다. 평양 지방에도 영명사8각오층탑, 광명사8각오층탑, 묘향산 보현사813층석탑 등 팔각다층목탑과 석탑을 많이 세웠다. 고구려 건축술을 계승한 고려 역시 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의도로 평양을 중심으로 다각다층석탑을 많이 만들었다.

월정사팔각구층탑은 현재 한반도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다각다층탑으로 이러한 고구려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추운 지방에는 겨울에 땅이 깊이 언다. 그만큼 땅이 들고 일어나는 기운도 세진다. 평면이 긴 네모꼴은 기초가 부실하면 한쪽이 기울어지거나 처진다. 다각형 건물은 땅이 들고 일어나면 기울어졌다가 날이 풀리면 제 모습대로 복원되는 복원력이 강하다. 목조탑에서 시작된 방법이 석탑에 응용된 것이다.

 

석조보살좌상은 팔각구층석탑을 향해 오른쪽 무릎을 꿇고 왼쪽 무릎은 세운 자세로 두손을 가슴에 모아 무엇인가를 공양하고 있는 모습이다. 연꽃 등을 봉양하고 있었을 것이다. 높이 92.4cm이다. 9층석탑을 조성할 때 함께 세웠다고 한다. 신라 말이거나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왼쪽 팔꿈치는 왼쪽 무릎에, 오른쪽 팔꿈치는 동자상에 얹고 있다. 동자상은 웃고

있는 모습이라지만 마멸이 심하여 동자상인지초차 알아보기 힘들다.

복스러운 얼굴에 턱이 길고 동글며 눈두덩이 두껍다. 입가에는 살짝 미소를 짓고 있다. 머리 위의 보관에는 구멍이 세 군데 보이는데, 장식을 달았을 것이다. 연화대좌에는 두겹 연꽃잎이 피어나고 있다. 보살이 앉은 위치는 한가운데가 아니고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다.

팔각구층탑 공양보살상은 높고 긴 보관, 타원형 얼굴, 통통한 얼굴에 가득한 미소 등은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국보 제124)과 비슷하다.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은 머리에 보관을 썼다. 타원형의 통통한 얼굴은 가는 눈, 작은 코, 작은 입, 입 가의 보조개로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어서 흔히 자연주의 양식이라 한다. 긴 상체는 장신형이어서 좀 다르지만 양감은 기본적으로 부드러운 편이어서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계통을 계승한 것이다. 신체는 통통하며 앉아있는 자세도 유희좌로 자연스럽다.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 무척 고귀하게 보인다. 본존불은 대좌만 남아있고 같이 협시보살이었던 보살상(보물 제81)은 목이 없는 채 강릉시립박물관에 있다.

긴 보관이나 통통한 얼굴 들은 중국 당나라 말기 오대 내지 송조 초에 걸쳐 유행하던 보살상 양식이다. 좁은 이마의 큰 백호공은 전보원사지불상과 흡사하여 통통한 얼굴과 함께 동시대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신복사 탑 앞 공양보살상(보물 제81) 역시 긴 보관 형태의 관을 쓰고 있고, 좁은 이마의 백호공, 가는 눈, 짧은 코, 작은 입, 입가의 보조개와 통통한 뺨 등에 만면한 미소를 띠고 있어서 한송사 보살보상보다 더 인간적이다.

인접한 지역에서 발생한 동일 유파의 작품일 것이다.

 

<月精寺寺蹟-信孝居士親見類五聖事蹟>에 따르면 탑 앞에 약왕보살이 있는데, 손에 향로를 들고 탑을 향하여 무릎을 꿇고 있다라 하였다.

<법화경-23藥王菩薩本事品>에 약왕보살의 과거에 대해 묻는 宿王華에게 부처님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약왕은 본디 一切衆生喜見菩薩이었는데, 日月淨明德如來가 출현하였을 때 자신의 몸을 태워 공양하였고, 이 공덕으로 淨德王의 집에 환생하여 태어났다. 그때도 일월정명덕여래가 있어 일체중생희견보살에 이르기를 자신이 죽은 뒤 그대는 내 사리에 성대한 공양을 올려야 하고 사리를 유포시켜 수천의 탑을 세워야 한다.’고 당부하였다.

여래가 열반한 다음 일체중생희견보살은 팔만사천 개의 七寶로 된 항아리를 만들게 해서 그 속에 사리를 모시고 위로는 범천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산개가 죽 늘어진 실과 방울로 장식된 보탑을 세웠다. 그리고 백 가지 福德에 찬 자신의 딸을 72천년 동안 태우면서 여래의 사리를 모신 탑을 공양했다. 그로써 보살과 모든 사람들은 現一切色身三昧를 얻었다고 한다.

그때 모두가 불구가 된 그의 딸을 보고 슬퍼하자 희견보살이 말하기를 내가 여래를 공양하기 위해 내 팔을 희사했다면 내 몸은 금색으로 빛날 것이고 내 딸을 원래대로 될 것이다. 또한 하늘에 있는 천자들이 꽃비를 내릴 것이다라고 하자 온 세계는 진동하고 머리 위 공중에서는 수없이 많은 꽃비가 내리고 희견보살의 팔은 원래대로 되었다.”

 

탑을 공양한 복덕으로 자신의 몸이 금색이 되고 원래대로 팔이 돌아와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는 극적 장면을 보살상의 미소를 통해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다른 탑에서 볼 수 없는 많은 풍경과 상륜부로 약왕보살의 공덕을 극대화하고 있다.

따라서 이 탑은 형식적인 면에서는 고구려의 영광을 고려에 재현하려는 의도에서, 그리고 법화경의 내용을 현실화하여 극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탑이다.

 

2000년 여름 보살상을 수리하기 위하여 아래층을 발굴한 결과 지표 아래에서 그 동안 묻혀있던 중대석과 연꽃받침 하대석이 발견되었다. 이를 토대로 원래 모습으로 복원할 경우 고려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보살상의 하나일 것이다.

탑 남쪽으로 발굴을 확대한 결과 현재 드러나 있는 탑 기단 아래에 8각의 형태로 지대석과 중대석, 갑석의 순서로 기단이 존재하고 있었다. 또한 이 기단 양쪽으로 장대석을 놓아 그 안쪽에 보살상을 안치했으므로 탑과 보살상을 하나의 공간 내에 조성하려 한 것으로 생각된다.

 

보장각은 월정사의 유물을 모아놓은 전시실이다. 경전, 불화, 불구 등이 소장되어 있다. 이중 일부는 1970년 팔각구층탑을 해체할 때 나온 것이다.

 

* 선림원터 출토 동종1948년 폐사지 선림원에서 발견되었다. 돌볼 사람이 없어 월정사로 옮겼다가 한국전쟁 때 변을 당해 현재 그 잔해만 국립 중앙박물관에 있다.

종신이 96cm, 총 높이가 122cm, 입지름이 68cm로 균형이 잘 잡혀있고, 조각장식이 훌륭한 종이었다. 종신에 새겨진 비천상은 천의 자락을 휘날리며 연화좌에 앉아 피리와 북을 연주하는 모습으로 생동감이 있다.

 

종신 내부에 조성연대가 804년이란 것과 내력을 이두로 적은 명문이 남아있다.

* 오대산 상원사중창 권선문(보물 제140)은 세조 10(1464) 혜각존자 신미가 왕을 위하여 상원사를 중수하려 하자 이를 전해들은 세조가 쌀, 무명, , 채색 등의 물자를 보내면서 그 취지를 밝힌 글이다.

권선문은 2첩으로 된 필사본으로 겉표지는 당초문이 들어있는 비단으로 만들었는데, 각각 한문 원문과 한글 번역문이 적혀있다. 원문에는 세조와 왕세자의 수결과 인장이 찍혀 있으며 번역문에는 세조와 왕비, 왕세자와 세자빈 그리고 궁인들의 인장과 옥새가 찍혀있다.

 

信眉 慧覺은 세조대왕의 총신 金守溫의 친형이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늘 경애하였다. 그러나 신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단지 신미와 동갑 친구인 妙覺王師 守眉의 행장을 기록한 도갑사 妙覺和尙碑에 약간의 기록이 있고, 세조의 중흥불사와 관계되는 몇몇 기록에 단편적으로 나타난다.

세조 10(1464)에 쓴 오대산 상원사 중창 권선문내가 일찍이 潛邸에 있을 때부터 혜각존자를 만나 도가 합하고 심기가 서로 화합하였다. 매번 속진의 길에서 포섭하여 이끌고 나로 하여금 항상 깨끗함을 지니게 하여 탐욕의 수렁에 빠지지 않게 하였다. 지금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어찌 스승(신미)의 공덕이 아니겠으며 多劫의 깊은 인연이 아니면 어찌 능히 서로 契合할 수가 있으리요. 내가 지금 병이 들었음을 듣고 수백 리 밖에서 주야로 달려 나에게 이르렀으니 이것을 고상한 일로 삼지 않으며 어찌 중생을 제도하는 대비라 할 수 있겠는가. 또한 스승께서는 學悅스님, 학조스님과 함께 나를 위하여 옷을 팔아 靈刹을 중수하는 비용으로 하고자 함을 들었다. 스승이 나를 위하여 마음을 쓰는 것을 보니 나 역시 스승을 위해 감은하는 것이 사람이 할 바가 아니겠는가 …….”라는 기록으로 보아 세조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세조 3(1457) 종이 388,900묶음, 양곡 5,000섬의 경비로 해인사에 있던 대장경 50부를 찍을 때 신미와 竹軒을 보내 감독하게 하였다. 2월에 시작하여 4월에 인출을 마친 대장경을 각 도의 명산 거찰에 보내 나누어 간직하게 하였다.

14616월 세조의 명에 의하여 간경도감이 설치되어, 신미의 주관 아래 법화경”, “능엄경”, “금강경”, “반야심경”, “영가집등이 언해하였다.

14642월 왕이 속리산 복천암으로 행차하였을 때는 그곳에서 斯智, 학열, 학조스님과 함께 대설법회를 열기도 했다.

 

* 부도밭(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2)은 상원사로 올라가는 길목, 월정사에서 500m쯤 떨어진 곳에 있다. 석종형부도 24기가 석 줄로 나란히 서있다. 특히 제일 앞쪽에 비신과 이수는 없어지고 귀부만 남은 부도가 있다. 자기가 지고있는 비석을 쳐다보고 있는 모양으로 얼굴이 사람과 비슷하다. 귀까지 두드러지게 표현하였다.  

 

 

 

 

 

팔각구층탑 공양상

 

 

 

 

 한송사석조보살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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