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산 석남사
① 石南寺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에 있다. 이곳은 영남알프스의 최고봉인 迦智山(1240m)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석남골 입구이다.
② 일주문에서 오른쪽으로 계곡을 끼고 소나무, 서어나무, 굴참나무 등이 늘어서 있는 그윽한 길을 700m쯤 걸어 들어가면 枕溪樓에 이른다. 枕溪樓 현판은 菁南 吳濟峯(1908~ 1991)이 썼다.
③ 침계루 아래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대웅전 앞에 이른다.
대웅전 앞에는 대석탑이 있고, 이 대석탑을 중심으로 대웅전을 포함하여 4동의 건물이 둘러싸고 있다.
④ 대웅전 왼쪽에는 극락전이 있는데,
석남사 삼층석탑을 가운데 두고 극락전과 조사당을 비롯하여 건물 5동이 둘러싸고 있다.
⑤ 대웅전과 강당 사잇길로 나가 청화당 뒤로 돌아 계단으로 오르면 석남사부도가 있다.
1. 석남사는 신라 헌덕왕 16년(824) 도의선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도의선사가 중국에서 돌아와 신라 왕도에 가까운 이곳에 정착하여 그가 배운 남종선을 펴고자 하던 시기에 해당한다.
■ 도의선사의 행적은 전라남도 장흥 보림사에 있는 보조선사창성탑비, 문경 봉암사에 있는 지증대사적조탑비 그리고, 925년에 편찬된 <祖堂集, 17권 雪嶽山陳田寺元寂禪師> 등에 단편적인 기록이 있는데 이를 종합해 도의선사의 전기를 복원할 수 있다.
도의선사는 속성이 왕씨로 北漢郡(지금의 서울 부근) 출신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법명을 明寂이라 하였다.
신라 선덕왕 원년(784)에 사신 金讓恭을 따라 당나라로 가서 오대산을 참배하고,
寶壇寺로 가서 구족계를 받는다.
그리고 조계산 보림사로 가서 남종선의 시조인 六祖 慧能의 영당을 참배한다.
이어 江西 洪州 開元寺에서 제9조 西堂 智藏(735~814)에게 인가를 받는다. 여기서 도의라는 이름을 새로 얻는다.
서당 지장은 육조 혜능의 법증손이며 제8조인 馬祖 道一(709~788)의 제자이다.
이어 師叔인 百丈 懷海선사(720~814)에게서도 인가를 받는다.
백장선사는 그 스승인 馬祖 道一선사의 선맥이 모두 동국 승려에게로 가게 되었다고 탄식했다 한다.
도의선사가 당나라에서 배운 선은 남종선이다.
달마대사(?~528)에서 시작된 중국 선종은 → 慧可(487~593) → 僧璨(?~606) → 道信(580~651) → 弘忍 → 慧能 → 南嶽懷讓(677~744) → 馬祖道一 → 서당지장 → 麻谷寶澈로 그 계보가 이어진다.
제5조 弘忍(602~675)에 이르러 그의 문인들의 활약으로 선종은 양자강 일대로, 다시 여러 곳으로 퍼져 점차 융성해진다. 제4조 道信, 제5조 홍인 등의 선풍은 일문을 형성해 東山宗이라 불렀다.
홍인 문하에서 神秀(?~706)와 慧能(638~713)이 나와,
신수를 중심으로 하는 북종선과,
혜능을 시조로 하는 남종선으로 갈라진다.
선을 수행함에 있어 남종선은 頓悟頓修를 북종선은 頓悟漸修를 주장한다.
선에 대한 관념과 수행 방법도 시대에 따라 발전한다.
처음 인도에서는 여래선이라 하여 선정에 드는 것이었다.
달마대사는 “安心面壁” 곧 편안한 마음으로 벽을 바라보며 깨달음을 구했다.
그러다가 혜능에 와서는 “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旨人心 見性成佛(문자에 의존하지 않으며 경전의 가르침 외에 따로 전하는 것이 있으니, 사람의 마음을 직접 가리켜, 본연의 품성을 보고 부처가 된다)”이라 했다.
마조 도일에 이르면 “마음이 곧 부처(自心卽佛)”라 했다.
마조 도일의 문파를 특히 그가 있던 지명을 따 洪州宗이라 한다.
도의선사는 35년 동안 유학하고 헌덕왕 13년(821)에 귀국하여 선의 뜻을 전파하려 한다.
헌덕왕 16년(824)에는 왕도에 가까운 울산에 석남사를 창건한다.
그러나 당시 후기신라사회의 지배 이념은 화엄사상에 의거한 왕권불교였다.
왕은 부처[王卽佛], 귀족은 보살, 대중은 중생으로 부처 세계의 논리와 위계질서는 사회구성의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논리와 일치하였다. 신라 사회는 이렇게 불평등 구조가 고착되어 있었다.
“경전을 해석하고 염불이나 외는 일보다 인간 본연의 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또는 중생이 곧 부처다.”라 한 도의선사의 가르침은 인간의 평등과 인간성을 중시하는 진보적 사상으로 신라의 왕권불교에 대한 반역으로 여겨졌다.
당시 신라의 승려와 귀족들은 도의선사의 가르침을 ‘마귀의 소리’라 배척했다.
그리하여 그는 강원도 양양 陳田寺에 가서 은신하였다.
장흥 보림사에 있는 <보조선사창성탑비>에는 "아직 때가 이르지 못함을 알고 산림에 은둔"하였다고 하였다.
대략 석남사를 창건한 직후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도의선사는 진전사에서 40년 동안 선을 닦으며 제자를 가르치다가,
廉居和尙(?~844)에게 법을 전해주고 열반에 든다.
염거화상은 설악산 億聖寺(선림원)에 주석하며 선을 펴지만 아직 선문을 개설할 만한 여건을 갖추지는 못한 듯하다.
다시 普照선사 體證(804~880)에 이어진다.
보조선사는 장흥 가지산에 보림사를 세우고 법을 전하여 구산선문의 하나인 迦智山門을 형성한다.
<보조선사창성탑비>에 “달마가 중국 제1조이고,
우리나라에서는 도의선사가 1조, 염거화상이 2조, 우리 스님(보조선사)이 3조이다”고 하였다.
불교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선의 도입연대를 헌덕왕 13년(821)년으로 본다.
2. 석남사부도는 도의선사 부도로 알려져 있는데,
장흥 보림사의 보조선사창성탑과 닮은 것으로 보아 가지산문과 연관성이 있을 것이다.
대략 920년을 전후한 시기에 보조선사창성탑을 선구 양식으로 하여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가지산문의 眞空 運선사(855~937)가 신라왕도 근처인 이곳에 가지산문의 거점으로 석남사를 중건하고,
산문의 조사인 도의선사의 사리를 나누어 이곳에도 부도를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 가지산문의 分院이 세워진 것은 산 이름 때문일 것이다.
본디 바닷가에 가장 높은 산을 邊山의 뜻인 가이산, 가시산이라 불렀다. 한자식으로 또 불교식으로 지명이 바뀌면서 변산의 뜻이 가야산, 가지산 등으로 표기되었다.
지금의 운문령을 嘉瑟峴 혹은 加士峴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아,
가지산도 본디 가시뫼나 그 비슷한 이름이었을 것이다.
신라 왕도를 드나들던 가지산문 선승들이 이 가시재를 그 본산명인 迦智山으로 표기하고,
자가 산문의 분원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3. 조선 숙종 42년(1716) 秋演이 지은 <碩南事蹟>에 따르면 선조 25년(1592) 조일전쟁으로 몽땅 불 타 빈 터만 남은 것을 헌종 7년(1666) 언양 현감 姜膺의 시주로 卓靈 등 4대덕을 시켜 대웅전을 짓게 하고 이어 淨佑 등이,
극락전 · 청풍당 · 청운당 · 청화당 · 향각 등을 세웠다.
또 불상과 탱화를 제작하였으며, 鐘鼓 등 제반 器用을 갖추었다 하였다.
4. 순조 3년(1803) 枕虛, 守一 등이 중수했고, 1912년 友雲이 중수했다.
5.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
1957년 비구니 圓虛 仁弘이 주지로 와서 크게 증축했다.
이때부터 비구니 수도처로 각광을 받아 항상 100여 명이 넘는 비구니들이 엄격한 계율을 지키면서 수도하고 있다.
6. 현존 건물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극락전 · 說禪堂 · 조사전 · 尋劍堂 · 침계루 · 正愛樓 · 종루 · 無盡寮 · 큰방 등 30여 동의 건물이 있다.
유물로는 도의선사의 사리탑이라 전하는 석남사부도와 삼층석탑,
조선 초기에 제작된 엄나무 구유와 돌구유 등이 있다.
절 입구에 4기의 부도가 있다.
■ 대웅전은 <碩南事蹟>에 1666년에 지었다고 했는데,
"擁正三年己巳"라는 명문 암막새가 나와 영조 1년(1725)에 중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면 계단 소맷돌은 용신으로 되어있다.
<碩南事蹟>에 1666년에 불상을 조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대웅전 석가삼존불은 그후 영조 12년(1736)에 후불탱화와 함께 다시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불상의 규모가 작아지고 불의는 半袒으로 오른쪽 어깨를 덮어내렸으며 삼존상 모두 항마촉지인으로 통일되어 있는 점 등은 진경시대 불상양식이다.
석가삼존불을 모신 수미단의 국화, 모란, 규화 장식, 초화문 조각 등 장식이 매우 화려하다.
이것도 진경시대 그림으로 생각된다.
* 후불탱화에는 건륭원년 즉 영조 12년(1736)의 연기가 있다.
乾隆(1736~1795) 양식으로 화려하며, 진경시대 절정기 불화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법화경> 서품에 있는 영산회상에 모인 대중을 그렸다.
항마촉지인으로 좌정한 석가모니 좌우에는 가섭, 아난 양대 제자가 시립하고,
그 상하좌우로 문수 · 보현 · 관음 · 대세지 등 8대보살이 둘러싸고 있다.
문수보살이 들고 있는 연꽃의 씨방은 경책, 보현보살의 연꽃 씨방은 碧玉鉢로 되어있다.
관음보살은 여의를, 대세지보살은 연꽃 봉오리를 들었다.
8대보살 하단 양쪽에는 범천 · 제석이 합장 시립하고,
그 아래에는 사천왕이 각각 둘씩 각자의 지물을 들고 외호하고 있다.
8대제자는 8대보살 뒷줄에 시립하고 있다. 4體의 분신불, 8부신중과 8대금강도 있다.
※ 진경시대는 조선후기, 조선 문화가 朝鮮의 固有色을 드러내면서 난만한 발전을 이루었던 문화절정기를 말한다.
그 기간은 숙종(1675-1720)대에서 정조(1777-1800)대에 걸치는 125년간이다.
숙종 46(1719)년부터 경종 4년(1724)까지 50년 동안은 초창기,
영조 51년의 재위 기간이 그 절정기이며,
정조의 재위 기간인 24년은 쇠퇴기라 할 수 있다.
* 동벽의 지장탱은 순조 3년(1803), 서벽의 신중탱은 철종 14년(1863)에 그렸다.
■ 대웅전 앞의 대석탑은 1973년에 세웠다.
높이는 11m, 지대석 폭이 4.75m에 이른다.
도의선사가 824년 호국의 염원을 담아 15층석탑을 세웠다고 했다.
이 탑이 조일전쟁 때 파괴되어 탑의 일부 부재만 침계루 옆 수각 근처에 흩어져 있었는데,
1973년 스리랑카 승려가 사리 1과를 기증하므로 본디 이곳에 있던 작은 삼층석탑을 극락전 앞으로 옮기고 3층으로 복원하여 사리를 봉안하였다.
■ 극락전은 대웅전 서편에 있다.
이곳에는 본디 조사전이 있었는데, 1974년 인홍스님이 극락전을 이곳으로 옮겨지었다.
현판은 呑虛대사(1913~1983)가 썼다.
안에는 석조삼존불을 모셨다.
■ 삼층석탑은 본디 대웅전 앞에 있었는데, 대석탑에 자리를 내주고 이곳 극락전 앞으로 옮겼다.
이중기단의 삼층석탑으로 높이는 2.5m이다.
탑의 규모가 작아지고 상층기단의 버팀기둥이 하나로 줄어든 점,
지붕돌 층급받침이 4단인 점으로 보아 후기신라 하대 석남사가 창건될 때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하층기단은 탑 전체 높이에 비해 두툼한 편이다.
면석에는 모서리기둥이나 버팀기둥이 없이 면마다 안상만 하나씩 새겼다.
덮개돌에는 상층기단 면석을 받치기 위한 굄 3단을 두었는데, 특이하게도 가운데 단은 모를 죽여 둥글게 만들었다.
상층기단의 덮개돌과 각 지붕돌에도 몸돌을 받치기 위한 굄을 두었다.
상륜부에 노반, 복발, 보개 등이 남아있다.
■ 조사전은 극락전 앞에 있다.
중앙에 도의선사 진영을 모시고 좌우로 순조, 철종 연간에 활동하던 선사 여덟 분의 진영이 모시고 있다.
도의선사 진영은 1974년 仁弘스님이 중건할 때 새로 베낀 것이고 나머지 8점은 원래 진영이라 한다.
■ 석남사 부도(보물 제369호)는 淸和堂 뒤로 돌아 오른다.
지대석은 높직한 한 개의 8각형 돌로 되어있다. 윗면에 하대석을 받치기 위한 얕은 각형의 굄을 한 단 새겼다.
팔각의 하대석은 상 · 하 2단으로 되어있는데, 각각 다른 돌이다.
하대석 아랫돌에는 한 면씩 건너뛰며 사자상을 돋을새김하였는데, 사자 4마리는 각각 다른 자세이다.
윗면에는 하대석 윗돌을 받치기 위한 각형의 굄을 한 단 얕게 새겼다. 그 위에 놓인 하대석 윗돌에는 구름이 엉킨 모습을 새겼다.
윗면에는 낮은 각형 굄 두 단을 만들고 중대석을 올렸다.
8각의 중대석은 고복형이다.
모서리기둥은 없고 네모난 꽃모양의 안상을 새기고 안상 안에는 꽃잎 4장의 연꽃을 띠처럼 둘러맸다.
상대석은 활짝 핀 앙화이다. 중대석에 있을 굄은 중대석 윗면이 아닌 상대석 아래에 부연처럼 새겼다.
활짝 핀 연꽃 위에 몸돌을 받치기 위한 8각의 굄은 마치 덮개돌처럼 크고 두텁다.
윗면에는 얕은 굄 한 단을 새겨 몸돌을 받치고 있다.
8각형의 몸돌 정면과 뒷면에는 장방형 문 모양이 새겨져 있는데, 문비 조각은 앞면에만 있다.
문비가 있는 정면 좌우로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몸돌 각 면에 모서리기둥을 새기고 아래위로 굵은 선을 두르고 있어 문비와 사천왕상은 마치 액자 속에 들어있는 듯한 모습이다.
몸돌과 지붕돌이 이어지는 곳에 2단의 받침을 새기고, 이 받침에서 추녀를 향해 네모난 서까래를 조각하였다.
낙수면은 완만하며, 8각의 합각마다 우동마루가 새겨져 있다.
기왓골도 새져져 있으며, 우동의 끝에는 작은 귀꽃이 있었으나 떨어져 나갔다.
상륜부는 여덟 꽃잎이 솟은 앙화와 팔각기둥 모양의 보개, 높직한 보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 높이는 3.53m이며 보존상태가 좋다.
1962년 해체 보수할 때 중대석 윗 부분에 사리공이 있었는데, 사리장치는 이미 없어졌다고 한다.

보조선사창성탑 중대석은 안상형 모서리기둥 표현에 있어 모서리기둥으로서의 기능적 잔재가 남아있는 데 반해,
석남사부도는 중대석이 거의 고복형으로 바뀌면서 모서리기둥이 완전한 안상형 문양으로 양식화되었다.
중대석이 고복형으로 바뀌는 예는 923년에 세워진 창원 봉림사 眞鏡大師凌空塔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92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陳田寺터에 도의선사부도로 알려진 부도가 있다.
이 부도는 9C 중엽에 만든 것으로 팔각원당형이 형성되기 전의 초기 양식이다.
가지산 석남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