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슬갑사터
1. <虎距山 雲門寺 事蹟記-숙종 44년(1718)에 彩軒스님이 쓴 글>에 의하면, 진흥왕 21년(560)에 한 도승이 지금 운문사 5리쯤 못미치는 곳에 있는 金水洞 계곡에 들어와 北臺庵터에 작은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수도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산과 골이 진동하여 새와 짐승이 우는 소리를 듣고 五靈이 숨어 사는 곳임을 알게 되었다. 이에 道友 10여명과 산에서 혈맥을 찾아 ‘岬’자가 들어가는 다섯 개의 갑사[五岬寺]를 짓기 시작하여 7년 만에 완성하였다. 이 때가 567년이었다고 한다.
오갑사는 현재의 운문사인 大鵲岬寺를 중심으로 동쪽 9000步 지점에 嘉瑟岬寺, 남쪽 7리에 天門岬寺, 서쪽 10리에 大悲岬寺, 북쪽 8리에 所寶岬寺 등이었다.
‘鵲岬’은 ‘까치곳’ 곧 가지산의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삼국유사> 註에 “가슬갑은 혹은 加西, 또는 加栖라고 하는데 모두 방언이다. ‘岬’은 俗言으로 ‘古戶(곳)’라고 한다. 때문에 이것을 ‘고호사(곳절)’라고 하니 ‘岬寺’라는 것과 같다. 지금 운문사 동쪽 9000步쯤 되는 곳에 加西峴이 있는데, 혹은 嘉瑟峴이라고도 하며 고개 북쪽 골짜기에 절터가 있으니 바로 이것이다.”고 하였다.
오갑사가 세워진 시기는 신라의 발흥기였다. 신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꼽히는 제24대 眞興王(540~576)은 즉위와 동시에 삼국통일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짠다. 우선 각 지방별로 세력을 가지고 있던 6부장의 힘을 약화시키고 그 힘을 왕실에 묶어두기 위하여 불교를 眞興한다. 왕 5년(544)에는 최초의 국립사찰인 흥륜사를 지어 미륵불을 봉안하였다. 왕 27년(566)에는 14년 전에 착공한 황룡사를 완성하였다. 불교를 지배 이념으로 하여 국왕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지배체제를 구축하고 국가적인 단합을 꾀하였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신라가 원래 부처의 나라라는 불국토사상과, 신라왕이 바로 부처라는 王卽佛 사상이 형성된다. 그리고 화랑이란 청소년 단체를 만들어 이들 집단을 통해 전체 국민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냈다. 제23대 법흥왕부터 제28대 진덕왕 때까지를 불교식 왕명시대라 한다. 여기에는 王卽佛 사상이 배경에 깔려있다. 왕실을 석가모니 집안의 환생으로 보는 眞種說을 빌어 와 미화시켰다. 진흥왕은 자신을 불교의 정법을 퍼뜨린 위대한 정복군주인 전륜성왕에 비정하기도 하였다. 전국에 國統, 주통, 군통 등의 승관을 두어 사찰과 승려들을 관리하게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들은 그 뒤 문무왕에 의한 삼국통일의 기초가 되었다. 오갑사의 창건은 이러한 구상 아래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대작갑사는 지금 운문사로, 서쪽의 대비갑사만 대비사로 개명하여 남아있다. 다른 갑사들은 폐사되었다.
2. 첫 번째 중창자는 圓光法師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광법사는 진평왕 22년(600)에 隋나라 유학에서 돌아와 황룡사에 있다가 대작갑사에 와서 3년 머문 뒤 가슬갑사로 왔다. 여기서 화랑 貴山과 箒項에게 ‘世俗五戒’를 내려 주었다.
<삼국사기-제45권 列傳 제5> 貴山 조에,
귀산은 신라 사량부 사람으로……어렸을 때 사량부 사람 箒項을 친구로 사귀었는데, 두 사람은 서로 말하기를 “우리들은 士君子와 교유하기를 기약하였는데,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잘 닦지 않으면 장차 치욕을 면치 못할까 염려된다. 어찌 어진 사람을 찾아가서 올바른 도리를 듣지 않으랴” 하였다.
이때 원광법사가 수나라로 들어가 유학하다가 돌아와서 加悉寺(가슬갑사)에 머물러 있었는데, 이때 사람들이 이를 예의로써 존경하였다. 이때 귀산 등은 원광법사를 찾아가서 공손한 태도로 말하기를 “속세의 우리들은 어리석어 아무것도 아는바가 없사오니 원컨대 한 말씀 가르쳐 주시면 죽을 때까지 계명으로 삼겠습니다.” 하니, 원광법사가 말하기를 “佛戒로는 보살계가 있어 그를 十戒로 삼고 있으나 그대들은 남의 臣子가 되어서 능히 이를 감당하지 못할까 염려된다. 지금 세속에 알맞은 五戒가 있는데,
1은 임금을 섬김에 충성으로써 하고[事君以忠],
2는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로써 하고[事親以孝],
3은 벗을 사귐에는 신의로써 하고[交友以信],
4는 싸움 마당에 이르면 물러남이 없어야 하고[臨戰無退],
5는 산 것을 죽임에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殺生有擇].
하는 것인데, 그대들은 이를 실행함에 있어서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귀산 등은 말하기를 “다른 것은 다 명하는 대로 받아 하겠사오나, 산 것을 죽임에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는 것만은 아직 똑똑히 모르겠나이다.” 하니, 원광법사는 말하기를 “六齋날(여섯 齋日 곧 8월 14일 15일 23일 29일 30일)과 봄과 여름 달에는 산 것을 죽이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때를 가리라는 것이요, 짐승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은 말, 소, 닭, 개를 말하는 것이고, 잔 생물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은 고기가 한 임감도 못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이 물건을 가린다는 것이다. 또한 죽일 수 있는 것도 쓸 만큼만 하고 많이 죽이지 말라는 것이니, 가히 세속의 착한 경계라 말할 수 있다.” 하므로, 귀산은 말하기를 “지금부터 이후에는 법사의 주선함을 잘 받들어 감히 실수하지 않겠나이다.” 하였다.
이 기록은 <삼국유사>에도 그대로 인용되어 있다.
1, 2는 수신에 관계되는 내용이고, 3, 4는 당시 삼국통일 전쟁에서 전쟁의 덕목을 가르친 것이다. 5는 살생을 금한 부처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원광법사는 화랑도에게 불교의 다섯 계율이 아닌, 세속의 다섯 계율을 만들어 주고 실천하게 하였다. 그러기에 그의 가르침은 세속오계이다.
원광이 세속오계를 편 것은 불교가 신라 귀족사회의 이념으로 자리를 굳히고 세속적인 문제까지 영향력을 행사한 사정을 말해 준다. 통일 전후시기에 국왕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지배 체제를 구축하고 국가적인 단합을 꾀하는 데 불교가 계속 적극적인 구실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오갑사가 있는 청도군 운문면 일대는 운문산 기슭이므로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다. 그러므로 백제와 고구려에 들키지 않는 은밀한 지점이며 왜구의 침공 위험도 없는 곳이다. 따라서 군사교육장 같은 국가시설을 짓기에 알맞은 곳이다.
이곳은 삼국통일의 뜻을 품은 화랑도들의 수련장이었다. 원광은 이곳에 머물면서 신라의 중견지도자인 화랑의 스승이 되어 화랑도의 이론을 세우고 화랑들을 수련했다. 원광은 호국불교를 제창한 승려이다. 그는 왕실에 밀착한 어용승려로, 뒷날 수나라에 보내는 乞士表를 쓰기도 했다.
또 당시 신라의 군사적 요충지였던 언양과 양산이 이곳에 인접해 있다. 가슬갑사에서 경주로 통하는 산길은 삼계리에서 월성군 산내면을 거쳐 가는 길과, 동쪽 문복산 기슭을 넘어 언양과 산내면을 거쳐 내남면을 지나 경주로 가는 길이 있다. 이 길 주변에는 단련장, 채광지, 숙영지, 소규모 돌성, 도요지 등이 흩어져 있다. 이로보아 이곳은 교육장이자 수도권방위상의 중요한 곳이었던 듯하다.
3. 통일신라 이후 250년간 오갑사의 사정은 전혀 알려지지 않는다. 통일 후 군사시설로서의 의미가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뒤 후삼국의 싸움으로 일대의 다섯 갑사가 모두 파괴되고 남은 기둥만을 대작갑사에 모아 두었다. 일연스님(1206~1289)은 1277년부터 1282년까지 운문사에 있으면서 <삼국유사>를 편찬하였는데, 당시 가슬갑사 절터가 남아있었다고 한다.
현재 절터에는 ‘嘉瑟岬寺遺蹟地’라 쓴 1m쯤 되는 돌비가 세워져 있다. 1970년대 청도의 어떤 인사가 세웠다고 한다. 절터는 1천여 평쯤 되는데, 흙에 묻혀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옛날에 쌓은 듯한 축대가 약간 남아있다.
4. <삼국유사-제4권 의해 제5 원광서학> 조에 “원광이 가슬갑사에서 占察寶를 두어 常規로 삼았다. 이때 시주하던 여승 하나가 점찰보에 밭을 바쳤는데. 지금 東平郡의 밭 10여 結이 바로 이것이며 옛날의 문서가 아직도 있다.”는 기록이 있다. 점찰보는 점찰법회를 항구적으로 열기 위한 기금이다. 대승법회에는 僧俗의 숙식이 마련되어야 하기 때문에 기금이 필요하다. 원광법사는 점찰법회를 열어 대중 포교 활동을 한 것이다.
잠찰법회는 <占察善業業報經>에 따른 법회이다. <점찰경>에 의거하여 길흉선악을 점쳐 부정적 결과가 나오면 혹독하게 참회하는 일종의 참법이다. <점찰경>은 隋代 이전 중국의 민간점복 신앙에 영합한 僞經이다.
<점찰경>은 지장신앙의 형성에 매우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지장보살은 땅 속에 감추어진 것을 인격화한 보살이라는 점에서 여래장교의와도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신라에 <점찰경>이 들어온 것은 지장신앙과 여래장사상이 들어온 것이 된다.
※ 圓光법사(542?~630?)에 대해서는 <續高僧傳-道宣(667년에 죽음) 지음>, <삼국유사>에 인용된 <古本殊異傳>에 단편적인 기록이 있는데, 생몰연대가 달라 혼란을 보이고 있다. 여기서는 신종원(신라초기 불교사 연구, 민족사, 1992, 221~231쪽)의 추론을 따라 정리해 본다.
원광법사는 진흥왕 2년(542)에 태어났다. 속성은 박씨이다. 출가하기 전인 576년, 35세 때 陳나라(557~589)로 갔다. 당시 신라는 진나라와 적극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유학 가는 승려 외에 거의 해마다 진에 조공한 사실을 보면 조공하러 가는 사신들과 함께 선진문화를 섭취하기 위한 유학생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원광도 처음에는 이런 부류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처음 그는 儒學을 공부하다가 금릉[南京]에 가서 莊嚴寺 僧旻의 제자로부터 불법을 듣게 된다. 그는 진의 황제에게 아뢰어 승려가 됨을 허락받는다. 이로 보면 그는 개인적으로 중국 유학한 것이 아니고 국가의 공식적 입장을 띤 것으로 생각된다. 귀국 후 걸사표 등 수나라 황제에게 올리는 외교문서를 쓰는 것으로 보아 유학하기 전부터 文翰의 임무를 맡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진나라에서 출가한 뒤, 한 종파에 얽매이지 않고 각종 대 ․ 소승경전을 두루 섭렵했다. 특히 <성실론 ․ 열반경 ․ 四阿含經>을 통달하였다. <성실론>, <열반경>은 당시 南朝에서 가장 유향한 것으로 이러한 경전을 연구하는 것은 하나의 시대적 조류이다. 이외에도 <반야경>을 강의하는 등 남조 불교에 통달했다.
중고기 신라의 대중국 외교는 선진문물 특히 발전일로에 있던 南北朝나 隋나라의 불교를 신속히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의 목적이었다. 그러므로 유학승들의 불교 연구 경향은 당시 중국에서 유행한 대부분의 교학에 관심을 가졌다. 통일 후 신라 불교가 종파적 성격을 띠는 것과 달리 보편적 불교 이념의 전파라는 점이 이 시기의 불교의 특징이다.
589년 隋나라로 간다. 수나라 때는 장안에서 眞諦三藏(499~569)이 번역한 <攝大乘論> 연구가 성했다. 그도 섭종론 공부에 진력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에서 이름을 떨치게 된다.
신라 진평왕이 그의 명성을 듣고 귀국을 요청하자 진평왕 22년(600) 신라 朝聘使인 柰麻 諸文과 大舍 橫川을 따라 귀국했다. 그는 신라왕과 귀족의 극진한 공경을 받았다. 왕이 그를 성인처럼 받들며 옷과 음식을 손수 마련하여 공양하였다.
원광은 왕실의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신라 왕실에 철저히 봉사하였다. <속고승전-13권>에 따르면 “외교 국서가 모두 그의 머리속에서 나왔고, 온 나라가 그를 떠받들며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와 도로써 교화하는 방도를 물었다.”고 하였다.
진평왕 30년(608) 왕의 명에 따라 수나라에 고구려를 쳐달라고 乞師表를 썼다. <삼국사기-진평왕> 조에, 이때 원광은 “자기가 살려고 하여 남을 멸망시키는 것은 沙門의 할 행실이 아니옵니다. 그러나 貧道가 대왕의 땅에 살고 대왕의 水草를 먹으면서 어찌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오리까”라 아뢰고 걸사표를 썼다.
진평왕 35년(613) 7월 수나라에서 사신 王世儀가 왔을 때 왕룡사에 百高座會를 차리고 원광법사로 하여금 강의하게 하였다. 황룡사에서 거국적인 법회가 열릴 때면 언제나 원광은 상수로 추대되었다.
百高座會는 <仁王般若經-호국품>에 근거한 것으로 외적이 쳐들어오거나 나라가 어지러울 때 이 경을 설하여 국토와 중생을 지키고자 하는 의식이다. 獅子座 100자리를 만들고 고승 100분을 모셔다가 그 자리에 앉게하고 설법하는 법회이다. 신라 진흥왕 12년(551)에 처음으로 고구려에서 온 惠亮법사가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있다. 원광법사 이후 계속 국가적인 행사로 설치되어 고려 때 가장 성했다. 조선 초기에 폐지되었다. 설법 때 쓰여지는 經에 따라 仁王般若百座講會, 百高座藥師道場 등으로도 불린다.
당시 귀산과 추항이 평생 가질 가르침을 청하므로 세속오계를 가르쳤다. 세속오계는 화랑도의 근본사상이 되었다.
진평왕 52년(630) 황룡사에서 89세로 입적했다. 국가에서 왕의 장례와 동등한 葬具를 급여하였다. 명활산에 장사지내고 삼기산 金谷寺에 부도를 세웠다.
저서로 如來藏經私記 3권, 大方等如來藏經疏 1권이 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