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여행/인도행

지리산 둘레1길은

추연욱 2012. 4. 23. 19:42

 

1. 지리산 둘레1길은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장안리 외평마을과 남원시 운봉읍 서천리를 잇는 14km의 지리산길이다.

이 길에는 옛 운봉현과 남원부를 잇던 옛길이 지금도 10km쯤 남아있다.

해발 500m의 운봉고원의 넓은 들판과 6개의 마을을 잇는 옛길과 제방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나가는 길에 있는 중요한 지점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① 주천면 치안센터가 있는 이곳이 지리산 둘레 1길의 시작이다.

 

 

 

   

 

이 마을 안쪽에 송월정이라는 정자가 솔숲에 가려 있고,

 

 

지리산 만복대가 저만치 구름에 가려있다.  

 

 

주천면 주변을 흐르는 강

 

 

 

② 주천면 내송(안솔치)마을 개미정자는 참한 쉼터다.

나그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한 곳이다.

 

 

 

③ 이 오솔길은 구룡치로 이어진다.

 

 

 

④ 묘하게 구부러진 죽은 소나무, 용송이라 한다. 

오래 그자리에 있어주면 좋으련만 그렇지는 못할 것 같다. 

 

 

이 오르막을 오르면 구룡치다.

 

 

⑤ 구룡치

'아홉마리 용의 고개'라는 뜻의 이 이름은 싯달타 태자가 태어났을 때 용 아홉 마리가 물을 뿜에 태자의 몸을 씼겼다는 불교설화에서 왔을 것이다.

원주 치악산 구룡사를 비롯하여 구룡연, 구룡폭포, 양양의 백두대간 등 아홉 용과 관련된 지명이 전국에 여러 군데 있다.

구불구불 오르는 고갯길이 마치 용 같다고 생각하여 붙은 이름일 것이다.

 

연리목일까?

밑둥치 아래쪽에 난 가지인지, 솔씨가 떨어져 자란 나무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새로 자란 줄기가 본 나무를 둘러싸 안고 돌아가고 있다.

 

 

사무락다무락 

소나무 아래 비스듬한 공터에 작은 돌탑이 여러 개 있다.

'다무락'은 아마 담벼락이란 뜻일 것이다.

'사무락'은 '하는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란 뜻으로 보는 것 같다.

나로서는 승복할 수 없다.

무슨 뜻인지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이런 돌탑의 근원은 역시 돌무더기 서낭당이다.

사람들은 고갯마루에 돌무더기 서낭을 쌓고 오가며 여행의 안전을 빈다.

한쪽에서는 미신이라 비난하지만 문화적인 유전자는 이처럼 생명력이 길다.

 

 

 

 

⑦ 주촌면 덕치리, 회덕마을의 옛이름은 모데미이다. 사람들이 모였던 마을이란 뜻이다.

이곳에는 주막이 있었고, 지나가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요기하며 쉬어간 마을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다니던 살아있는 길이었다.

 

내송마을(안솔치)에서 구룡치를 넘어 회덕으로 이어지는 길은 그윽한 숲길이다. 걷는데 2시간쯤 걸린다.

1시간 내내 오르막길을 가야 한다.

반대로 가면 이 길은 오르막이 별로 없어 걷기 편하다. 

회덕마을은 해발 520m, 구룡치는 580m, 내송마을은 220m다.

 

이 길은 옛적 장꾼들이 장보러 다니던 길이다.

남원이나 달궁에서 하루 종일 걸어 회덕에 와서 하룻밤을 자고 다시 구룡치를 넘어 남원으로 간다고 한다.

 

 

 

이 비닐하우스 가게는 옛 주막을 계승했을 것이다. 참새방앗간이다.

 

 

노치마을

'노치'라는 이름은 '고개길 가의 마을' 정도의 뜻일 것이다.

노치마을 입구에 돌무더기서낭이 있다.

이런 모습은 서낭당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이다.

훗날 중국의 영향으로 성황당이라 하여 당집을 짓고 신체를 상징하는 위패나, 영정을 그려 넣기도 하였다.

서낭신은 토지신이고,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다.

사람들은 출입할 때마다 절을 하고, 일년에 한두 번 서낭제를 올리고 공동체의 풍요와 화합을 기원한다. 

꼭대기에 있는 선돌은 본디 남근석을 올렸다. 강원도 강릉에는 남근석을 올린 돌무더기 서낭당 여러 곳에 있다.

당집을 지어 감추어 둔다.

 

  

 

 

 

노치마을은 바로 백두대간 주능선이 지나가는 마을이다.

마을앞 도로가 백두대간 마루금이다.

 

 

⑨ 노치마을에는 요즈음 보기 드문 샛집이 있다. 

샛집은 억새풀로 이엉을 이어 두텁게 지붕을 올린 집이다.

예전에는 샛집은 부자집이고, 초가집은 가난한 집이었다. 

농촌에서는 볏집을 구하기 쉬우니 볏짚으로 지붕을 이었지만,

산촌에는 볏짚을 구하기 어려워 당연히 주변에 흔한 억새를 베어 지붕을 인 것이다.

또 운봉지역에는 눈이많이 내려 지붕의 경사가 급하다.

이것이 현대인들에게는 명물이 되었다.

 

조일전쟁 때 이곳에 숨어든 왜군 패잔병들이 처음 샛집을 짓고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쨋든 일본의 정통 가옥과 닮았다. 

텔리비젼 안테나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이 살고 있는 것같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이런 집들이 많았다. 전쟁 중에 많이 타버렸다.

지금 남아있는 집들은 한국전쟁 후 다시 지은 집이다.

 

 

 

⑩ 육모정 

 

 

 

⑪ 춘향묘

60년대말 成玉女라 새겨진 지석이 나왔다.

춘향 무덤을 정비할 때 이 비석에 이름을 새기면 복을 받는다는 풍문이 돌아 지역 유지들이 제 이름을 비석에 넣어보자고 다투었던 일이 있었다. 그 앞이 국립공원의 끝 육모정이다. 

 

 

 

광한루원 - (보물 제281호)남원시 중심지 천거리

① 황희 정승의 아버지 황감평이 지은 '逸齋'라는 작은 서실에서 시작한다. 황감평은 고려 무신의 난으로 벼슬을 버리고 남원으로 내려온 황공유의 후손이다.

② 조선 세종 1년(1419) 남원으로 유배 온 황희(1363~1452) 정승이 눅가을 짓고 廣痛褸라 했다.

황희는 태종이 양녕대군을 폐위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이곳으로 귀양왔다.

③ 세종 16년(1434) 남원부사 민여공이 중수하였고,

이듬해 전라감사 정인지가 그 수려한 경치에 감탄하여 전설상에 있는 달나라의 궁궐 '月宮의 廣寒淸虛府'와 닮았다고 하여 廣寒樓라 고쳐 불렀다.

④ 1461년 부사 장의국이 광한루 앞을 흐르는 요천을 끌어들여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을 만들고,

그 위에 은하수에 가로막힌 견우성과 직녀성의 칠월칠석날 만남을 상징하는 오작교를 만들었다.

⑤ 그러나 정유재란 때 불타고,

⑥ 1582년 송강 정철이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연못 안에 삼신산봉래, 방장, 영주산)을 만들었다. 오작교 곁에 있는 영주섬에는 蓮亭을, 가운데 봉래섬에는 배롱나무를, 그 옆의 방장섬에는 방장정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영주섬에는 1963년에 세운 방장정이, 방장섬에는 1795년에 세운 영주각이 있다. 

⑦ 현재의 건물은 인조 13년(1638) 남원부사 신감이 복원한 것이다.

 

* 오작교는 화강암을 다듬어 4개의 홍에를 석축으로 길게 쌓아 연결하였다.

길이는 33m 폭 2.6m, 높이 4m로 헝예와 홍예 사이는 가공석으로 면처리하였다.

오작교는 견우와 직녀의 사랑 이야기에 나오는 다리로, 춘향과 이도령의 한 맺힌 사랑을 풀어주기 위해 그런 이름을 붙였다.

 

* 춘향각은 광한루 안에 있는 춘향의 영정를 모신 사당이다. 초상화는 김은호화백이 그렸다.

대숲은 절개 상징한다.

1931년이래 매년 음력 4월 8일 춘향제를 지낸다.  

 

※ 남원의 춘향 유적

1. 광한루 - 춘향사당 초상은 김은호, 대숲은 절개 상징

2. 이별장 - 오리정 - 사미면 남원 10경. 눈물방죽은 이별 눈물이 이룬 방죽이다.

3. 이도령고개 - 사미면. 남원에서 전주 가는 길

4. 춘향 버선밭 - 사미면

5. 박석고개

6. 어현동 “춘향뎐” 촬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