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1일/ 수요일] 경주시내 문화유산 답사 1
대릉원에서
천키로, 영아, 미산, 뿌리, m42k, 백서향, 소정네, yamaggo, 빛들, 별사모,
하얀수선화, 다으메, bonami, 조롱이, 달바우, 인혜랑, 선수촌, 태화강, 화산, 바다선녀,
부엉이, 물찬제비, 신여울, 신여우, 비나리, 는개, 행복메니아, 워크뷰, 안개비, 하얀새,
예암, 똥글이, 풀잎이, 유비한, 아해, 달려라가을이, 빈터, 수평선, 달마루,
이렇게 39명이 함께 했다.
9시 40분, 기차로 경주역에 도착했다.
기치에서 달바우 님과 m42k 님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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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장소 시외버스 터미널에 왔다.
11시가 되니 벗님들 모두 모였다.
날씨 포근하고 맑아 걷기에 참 좋다.
대릉원 앞, 11시 10분.
대릉원에는 천마총, 미추왕릉, 황남대총 등을 포함해서 23기의 고분이 있다.
무덤 자리가 수없이 많지만 봉분이 있는 것만 남기고 지워버렸다. 1970년 공원화 하였다.
김씨 시조 알지는 탈해왕대 등장하지만 김씨로 처음 왕위에 오른 인물은 석씨왕 시대 즉위한 미추왕이며 본격적으로 김씨왕 시대를 연 이는 내물왕대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이후 내물왕의 아들 눌지왕(417~458), 손자 자비왕(458~479) 증손 소지왕(479~500?) 대에는 김씨끼리 근친혼을 통해 본격적인 김씨왕실을 이어가면서 지배체제를 정비해 나갔다. 눌지왕 대에는 고구려 세력을 물리쳤고, 자비왕대는 주요 요충지에 성벽을 쌓고 서울의 坊里 이름을 정하였다. 소지왕대에는 통신수단으로서 우편역을 설치하였고, 교통로로서 관도를 수리하였으며 시장을 열어 재화를 유통시켰다.
대릉원은 미추왕을 대묘로 불렀던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릉원 안에는 미추왕릉 그 외에도 천마총과 황남대총 등이 있다. 돌무지덧널무덤이다. 무덤의 주인은 대체로 4~6세기 마립간 왕호를 칭하였던 김씨 왕족들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 왕릉은 대체로 지증왕 이전에는 왕족의 거주지인 원성 근처 오늘날 경주 시내에 있었다. 중고기(법흥왕~진덕여왕)에 들어서면서 외곽지대로 나가는데 이는 법흥왕 이후 장사를 지낸 장지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법흥왕 이전에는 왕릉이 왕족의 거주지 근처에 있어 장지를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없었지만 능 자리가 점차 부족해지자 법흥왕대 이후 외곽에 축조하면서 장지를 기록하게 된 것이다.
미추왕은 김유신과 함께 신라인에게 영원한 호국영령으로 상징화되었는데. 이로 인해 나라사람들이 그 덕을 생각하여 삼산과 함께 제사지내고 서열을 혁거세의 능인 오릉보다 위에 두어 대묘라 불렀다.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경주문화권>, 역사공간, 2004.
■ 대릉원 안에 이런 거대한 나무.
산수유가 활짝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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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총을 구경했다. 천마총은 촬영금지구역 이다.
* 천마총(155호고분)
1973년 4월부터 12월까지 황남대총을 발굴하기 전 연습 삼아 발굴했다. 발굴 연습으로 작은 무덤 천마총을 택한 것이다. 당시 능 발굴로 하늘이 노해 가물었다고 민심이 흉흉했다. 무덤을 몰래 파면 하늘이 더럽다고 비를 내려 씼는다는 속신이 있다. 금관이 나올 때 천둥, 번개가 치고 인부들은 달아났다. 소나기가 왔고, 곧 맑아졌다. 가뭄도 해소되었다. 금관과 천마도장니 등 모두 11,500여 점의 유물이 나왔다.
무덤을 복원, 내부를 공개하고 있다.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지상에 높이 2m 정도의 덧널을 짜놓고 그 안에 널을 안치한 뒤, 이 덧널 위에 높이 약 4m의 돌무지를 쌓고 그 위에 봉토를 덮은 구조로 무덤 전체의 높이는 12.7m 밑지름은 47m이다. 먼저 땅을 고르고 목곽이 놓일 자리를 깊이 40cm 정도로 파고 어른 머리 크기의 냇돌을 깔고 분구 밑바닥 전체에 점토를 다져 두께 15cm 정도의 기초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폭 50cm 높이 40cm로 냇돌을 깔아 받침대를 만들고, 그 위에 동서 6.6m 남북 4.2m 폭 2m의 목곽을 놓았다. 목곽은 결국 지상에 놓인다. 목곽 주위에는 직경 23.6m 높이 7.5m가 되게 돌을 쌓은 뒤 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기 위해 20cm 두께로 점토를 발랐다. 곽 안에는 동서로 길게 21.5m×1m의 목관을 놓았고, 동쪽의 머리끝에서 50cm 떨어진 곳에 1.8m×1.08m 되는 副葬品 收藏櫃를 놓았다. 장신구는 모두 순금제였다. 유물로 보아 5C말 6C초의 능으로 추정된다.
목관 안에는 금제 허리띠를 두르고 금관을 쓰고, 둥근 고리장식의 자루가 붙은 칼을 차고 팔목에 금팔찌, 은팔찌 각 1쌍, 손가락마다 금반지를 낀 주검이 누워있었다. 석단 동쪽에 나무로 짠 부장품 수장궤를 남북으로 길게 놓았다. 뚜껑 위에서는 金製鳥翼形冠飾과 金製蝶形冠飾 및 金銅帽․金銅製脛甲 등의 파편이 발견되었다. 안에서는 透彫金銅板飾竹心障泥, 白樺樹皮製 천마도 장니, 은제․금동제 안장 등의 마구류가 위쪽에 놓였고, 그 밑에 백화수피제 彩畵板이 있었다. 이들 밑에는 금․은․금동 및 청동으로 된 각종 그릇과 많은 칠기와 유리그릇이, 맨 밑에는 쇠솥과 각종 토기들이 가득 차 있었다. 석단 위에서는 동쪽에서 金帽․은제과대 등의 장신구류가 발견되었고, 그 밖의 자리에서는 환두대도를 비롯한 각종 무기류와 鐵鋌이 나왔으며, 金銅製飾履는 서북쪽 모서리에서 발견되었다.
신라 제 21대 소지마립간, 또는 제 22대 지증마립간의 무덤이라는 의견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 무덤의 주인이 확실하지 않을 때 중요한 출토품에 ‘총’을 붙인다. 천마도는 말다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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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왕릉/ 사진, 2011년 1월 4일.
미추왕릉(사적 제175호)은 면적 6만 1,144㎡, 지름 높이 12.4m, 지름 56.7m. 신라 초기의 왕릉묘제인, 봉토만 있고 호석이 없는 형식의 능묘다. 원형토분으로 특별한 시설도 없고 의표물도 설치되어 있지 않다.
신라 초기 왕 가운데 미추왕이 희귀하게 제 이름의 능을 분명히 알려주며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미추왕은 대릉원에 최초로 모셔진 왕이다.
법흥왕은 평지에서 산으로 올라갔으니 대릉원에는 미추왕부터 법흥왕 이전까지 10왕이 묻혔있다.
황남대총은 내물왕의 능이다. 내물왕은 북쪽에서 내려온 유이민 박씨, 바다에서 온 昔씨를 누르고 3세기 중반 권력을 잡는다. 그 최초의 왕이 미추왕이다.
대릉원은 김씨왕조의 전용무덤이다.
계림은 알지 김씨성으로 보아 황금을 다루는 기술집단으로 보인다. 북분에서 3.75kg의 금이 나왔다.
미추왕릉은 13대로 김씨이다. <삼국사기>에 ‘재위 23년만에 돌아가시니 대릉에 장사지냈다’라는 기록으로 ‘대릉원’이라 한다.
14대 유례왕 때 경북 청도를 중심으로 세력을 뻗치고 있던 伊西國의 군대가 경주까지 쳐들어와 신라는 곤경에 빠졌다. 이때 어디선가 귀에 대나무 잎을 꽂은 원병들이 나타나서 순식간에 적을 무찔러 위급한 상황을 면하게 해준 뒤 어디론가 사라졌다. 신라의 병사들이 이상하게 여겨 대나무 잎의 행방을 조사해 보니 미추왕릉 앞에 쌓여 있었다. 그래서 죽릉, 죽장릉이라고도 했다.
세월은 흘러 혜공왕(765∼779) 때였다. 김유신의 무덤에서 장군 같은 사람이 나와 말을 타고 달려가 미추왕릉으로 들어갔다. 얼마 있다 무덤 안에서는 한바탕 울음소리가 섞인 하소연이 들려온다. 바로 김유신의 혼령이었다.
그의 후손들이 가혹한 형벌을 받아 섭섭한 마음 그지없어 이제 멀리 떠나겠다는 것이었다. 미추왕의 혼령은 극구 말린다. “오직 내가 그대와 더불어 나라를 지키지 않으면 백성들은 어디로 가란 말이오.” 왕의 간절한 청에 김유신이 몰고 온 회오리바람이 멈추었다고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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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릉원 벌초/ 사진, 2010년 9월15일.
대릉원의 가을, 황남대총/ 사진, 2010년 11월 21일.
* 황남대총(98호고분)은 동서 80m 남북 120, 높이 20mm의 낙타등 모양으로 북분, 남분이 연결되어 있다.
황남대총은 대릉원에서 가장 크다.
1973년 7월 6일 16,000톤의 봉토를 걷어냈다.
적석목곽분 2기가 붙은 쌍문이다. 4~5세기 고구려, 백제는 적석총이다. 따라서 지배집단은 고구려, 백제와는 다르다.1975년 발굴조사에 의하면 남쪽은 남자, 북쪽은 여자의 묘이다. 남분에는 정강이 가리개, 금동, 은동관이 나왔다.
북분에서 순금제관, 팔찌 11개, 반지 12개와 , "夫人帶"라는 명문이 있는 은제허리띠 장식이 출토되었다.
주인공은 150cm 정도의 여자로 보인다. 남분의 주인공보다 뒤에 사망하였다.
피장자는 칼을 차고 있지 않았다. 여주인공의 신분은 남자와 같거나 높다. 남자보다 신분이 높은 여자는 결혼해도 지위가 바뀌지 않는다. 이로 보아 신라 여성의 지위를 알 수 있다. 신라의 여자 왕족은 쌍분의 북분에 매장됨을 알 수 있다. 여왕이 아닌 여자가 금관을 사용한 2명이 있다. 조생부인은 자비 마립간의 여동생, 지증 마립간의 어머니이다.
남분의 주인공은 장신구가 적고 관 내부 허리에 환두대도가 있고, 머리에 금동관이 있었다. 뼈조각 12개가 출토되었다. 63세 전후의 170cm 정도의 남자로 보인다.
또 주인공과는 다른 뼈 15개가 나왔는데, 146cm 정도의 15세 전후의 소녀의 뼈이다. 순장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지증왕때 순장을 금지했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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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릉원의 겨울/ 사진 2011년 1월 4일.
■ 노동리 ․ 노서리 고분공원은 경주시 노동동 ․ 노서동, 대릉원과 길 하나 사이를 두고 있다.
중앙에 나있는 도로를 경게로 하여 노동리와 노서리로 나뉘어진다.
고분군은 월성을 중심으로 서에서 북동 방향으로 분포하는 많은 신라고분 중 서북편 말단부에 위치해 있다.
■ 노동동고분군(사적 제38호)고분군에는 고분 1기와 고분터 2기가 남아있다.
3기 중 금령총, 식리총은 발굴되었고, 봉황대는 발굴되지 않았다.
봉황대에서
밑바닥 지름이 82m, 높이가 22m로 단일 원형 고분으로는 가장 크다. 주위에서 발굴 조사된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의 구조로 보아 4~5세기경의 적석목곽분으로 여겨지고 있다. 규모로 보아 왕의 무덤으로 생각되지만 아직 발굴되지 않아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왕건과 관련된 설화가 있다.
왕건은 신라를 빨리 멸망시키기 위해 풍수지리의 창시자인 도선과 의논하여 계략을 부렸다. 도선은 경주 땅이 배 모양새이니 배를 침몰시킬 방법을 강구하도록 조언하였다. 왕건은 제 편의 풍수가를 신라 조정에 보내 ‘경주가 봉황형인데 그 봉황이 지금 날아가려 하고 있으니 봉황의 알을 만들어 봉황으로 하여금 애착을 갖도록 한 뒤 맑은 물을 좋아하는 봉황을 위해 맑은 샘물을 파고, 날갯죽지에 금을 넣어두라’ 하였다. 결국 봉황의 알은 흙으로 산을 만드는 격이니 배는 더욱 무거워지고 곳곳에 괸 샘물은 배 바닥에 구멍을 뚫는 것이며, 날갯죽지에 금을 박는 것은 돛대를 부러뜨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왕건이 이렇게 하여 신라의 멸망을 재촉했다는 것이다. 그때 만든 봉황의 알이 바로 봉황대라고 한다.
봉황대 위에 오르면. 동쪽의 금강산, 남쪽의 남산, 서쪽으로는 선도산이 감싸 안은 경주 시가지 불빛들의 고즈넉한 모습과 단석산 위로 번져오는 저녁노을에 정신이 팔려 한참 만에 내려왔다.
■ 노서동고분군(사적 제39호)은 노동동에서 봉황로를 건넌 곳에 있다.
표주박형과 크고 작은 무덤 14기가 있는데, 그중 5기의 무덤이 발굴되었는데, 4~5세기 무덤으로 밝혀졌다.
대체로 봉분이 큰 것은 돌무지덧날무덤이고 작은 것은 돌방무덤과 구덩식무덤이다.
1984년 신라고분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민가를 철거하고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하였다.
서봉총
1926년 발굴하였는데 금관총, 금령총에 이어 세 번째로 신라시대 금관이 발굴되었다.
적석목곽분으로 금관을 비롯하여 금제 장신구, 유리 제품, 토기 등 수많은 유물이 나왔다.
스웨덴의 황태자 구스타브 아돌프 6세가 직접 금관을 드러냈다.
서봉총이라는 이름은 스웨덴 곧 瑞田의 ‘서’자와 금관에 새겨진 ‘봉’자를 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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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총/ 사진, 2010년 7월 13일
호우총 출토 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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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제 호우(병 모양의 물잔)가 출토되었다. 높이 239cm의 이 물잔 밑바닥에 ‘乙卯年 國崗上 廣開土地好太王 壺우’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을묘년에 만든 ‘국강’ 언덕위 광개토왕의 제사용 그릇임을 알게 해준다. 글씨체는 광개토태왕비문과 같은 체이다.
이는 신라가 고구려에 예속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볼모로 갔던 신라 왕자가 돌아오면서 가지고 온 것이다. 국립박물관에 있다. 井자(광개토왕의 고유문양)가 있다.
성동시장으로 점심 먹으러 간다.
성동시장, 12시 45분.
■ 경주읍성터, 1시 30분.
동쪽 성곽의 일부이다. 약 90m쯤 남아있다.
발굴된 석재들을 모아두었다.
■ 경주문화원, 1시 40분.
경주문화원 주변은 고려, 조선시대 경주관아가 있던 곳이다.
300살쯤 되는 산수유나무.
경주에 가장 먼저 봄을 전한다는 나무다.
향나무
경주동부동 은행나무(경상북도기념물 제66호)
이 나무는 나이가 약 500년이며, 높이 10m, 둘레 6.06m, 지름 2.1m, 수관 폭 20m로 생육상태가 비겨적 양호한 편이다.
또 30m 거리에 한 그루가 더 있으며, 두 나무는 모두 암나무로 열매가 풍부하다.
이 나무는 은행나무과에 딸린 낙엽교목으로 은행목, 행자목, 公孫樹, 鴨脚樹라고도 하며,
사찰, 社壇, 문묘, 묘사 등에 많이 심어졌다고 한다.
이 나무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이곳에 경주부 동헌을 지을 당시 심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스웨덴의 황태자 구스타프 아돌프 6세갚 1926년 서봉총 발굴에 참여하고,
기념으로 심은 전나무다.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을 걸었던 종각이다.
이 건물은 1700년대 말에 지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화원을 나와 왼쪽으로 돌면 바로 보인다.
■ 화랑수련원이다.
일제강점기 경주의 첫 서양식 의원인 옛 야마구치병원건물이다.
한국방사선폐기물관리공단
이 건물 뒤에 옛 경주여중 건물이 있고,
■ 이곳이 집경전 옛터다.
집경전구지비
이 자리는 신라가 고구려, 백제를 정복하여 태평성대를 누리던 시기,
신라의 이궁으로 집경전이 있었던 곳이다.
삼국을 동일한 문무왕이 즉위식을 가졌고,
뒷날 조선태조 강헌대왕 수용(임금의 화상, 御眞)을 모셨던 곳이다.
지금 그 건물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으며 옛터엔 우리학교가 들어서 있고
조선 정조의 친필로 쓴 "集慶殿舊基"란 비석만 남아있다.
왼쪽 나무는 500살쯤 된 회화나무다.
이 어름에 일제강점기 우시장이 서던 곳이고,
그 옆에 '한탕'이라는 커다란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미로같은 골목을 거쳐,
명사마을 우방아파트 안 소나무 숲이 우거진 소공원이 경주감영의 옥사터다.
지금은 아무 흔적도 표지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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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사, 2시 20분.
일제강점기에 지은 일본식 절이었다.
문이 잠겨있다.
가곡 전수관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 동리생가, 2시 40분.
동리생가에는 지금 표지판만 있다.
이 한복집이 본디 동리생가였다.
사진은 2011년 2월 13일 찍은 것이다.
■ 삼랑사터, 2시 50분.
2011년 2월 1일 사진
성건동 주민센터, 3시 15분.
북천을 건너, 3시 25분.
북천 다리 위에서 내려다 보았다. 미나리꽝이다.
■ 황성공원, 3시 30분.
정자에서 쉬며
공원을 나와 다시 북천을 건너 내려와
형산강을 따라
시외버스터미널에 이르렀다. 4시 40분이다.
몇몇 분은 기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갔고,
터미널에서는 바쁜 분들부터 먼저 차를 타고 각자 돌아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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