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송사, 서암정사
■ 벽송사는 함양군 마천읍 추성리에 있다.
예로부터 수행처로 널리 알려졌으나 여러 번의 화재로 사적기가 불타 역사를 알 수 없다.
유물로 미루어 보아 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중종 15년(1520) 碧松대사 智嚴이 중창하여 벽송사라 했다.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되었다. 이때 불탄 뒤 곧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 건물로는 금당인 보광전과 方丈선원, 간월루, 종루, 산신각이 있다. 문화재로는 묘법연화경, 고려 초기 양식으로 보이는 삼층석탑(보물 제474호)와 목장승 2기가 있다.
※ 智嚴대사(1464~1534)는 부안 사람으로 속성은 宋氏이다. 호는 野老이며, 居室號가 碧松堂이다.
어려서부터 책과 劍을 좋아하여 兵書에 통하였다. 뒤에 북방의 野人을 토벌할 때 종군하여 전공을 세웠다.
어려서부터 책과 劍을 좋아하여 兵書에 통하였다
28세 때 계룡산 상초암에 들어가 祖澄대사에게 출가했다. 중종 3년(1508) 가을 금강산 묘길상암으로 들어가 <大慧語錄>을 보다가 크게 깨쳤다. 또 <高峰語錄>을 통해 깨달음을 더욱 깊게 했다. 그래서 지엄은 육조 혜능의 17대 적손인 대혜 宗杲(고) (1089~1163)와 臨濟 義玄의 18대 적손인 고봉 原妙(1239~1295)를 전승하였다 한다.
중종 29년에 세상을 떠났다. 대표적인 제자로 芙蓉堂 靈觀이 있는데 영관은 서산대사 休靜의 스승이다. 영관의 제자들이 흥성하여 오늘날 한국 불교계는 거의 그의 법손으로 이루어져 있다.
쌍계사 永慕殿에 벽송대사의 진영(정조 5년 조성)이 있다.
|
| ||
* 목장승 2기(금호장군, 호법대장군)
왼쪽 장승은 몸통 부분에 禁護將軍, 오른쪽 장승에는 護法大將軍이라 음각되어 있다.
왼쪽 장승은 여장승으로 1969년 산불이 나 머리가 타고 코도 떨어져 나갔다.
눈은 툭 불거져 나오고 입은 양 끝을 벌려 성난 표정을 짓고 있다.
오른쪽 남장승은 민머리에 눈은 튀어나오고 콧구멍이 크고 코끝이 뭉툭하다.
입은 합죽하며 입 주위에 불꽃같은 여러 갈래로 수염이 나있고 턱 밑에도 수염이 있다.
두 장승은 전체 높이는 4m쯤 되는데, 1m정도 땅에 묻혀있고,
썩은 몸통을 지탱하기 위해 둑을 쌓아 1m 정도 더 묻혀있다. 드러나 있는 부분은 2m쯤 된다.
약 80년 전에 세웠다고 한다.
단단한 밤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에 이제까지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장승의 몸통은 붉은색이다. 눈은 애초 흰색이었던 같은데 지금은 상당히 탈색되었다.
이 장승들은 명문으로 보아 사찰 입구에 세워 인왕의 역할을 대신하여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문장이었을 것이다.
사찰장승은 불이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수문장 같이 서서 불법을 수호한다.
예천 용문사의 호법대장군, 삼원대장군이 그 예이다.
* 삼층석탑(보물 제747호)은 높이 3.5m로 2중기단에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한개의 돌로 만들어 3층을 올렸다.
몸돌에는 모서리기둥만 있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지붕돌받침은 1층과 2층은 4단 3층은 3단이다. 상륜부에는 노반과 복발이 남아있다.
벽송사 창건 당시에 세웠을 것으로 보인다.
* 벽송사는 판소리 <변강쇠가> 또는 <가루지기타령>의 무대이며, 변강쇠와 옹녀가 이곳 지리산의 마천면 일대에 살았다는 견해가 있다.
<변강쇠가>에 변강쇠가 장승을 뽑아 불에 태우는 장면이 나오는데,
“등구 마천 가는 길에 있는 장승”, “함양군 산로 지킨 장승”, “함양 동관” 등의 말이 나오는 것을 근거로 함양군에서는 벽송사에 있던 장승으로 추정하고 있다.
<변강쇠가>의 주요 등장인물은 옹녀와 변강쇠이다.
둘 다 살길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만나서 부부가 되었다고 하고서 음녀 옹녀와 잡놈 변강쇠가 놀아나는 장면을 걸판지게 묘사해 음담패설의 극치를 이루었다.
특히 기물타령이라는 대목에서는 남녀의 성기를 자세히 그리는 데 대단한 솜씨를 발휘했다.
거듭되는 시련 때문에 최소한의 생존도 유지할 수 없는 유랑민의 처절한 처지를 우스꽝스럽게 그렸다.
그러나 이런 파격적인 웃음의 이면에 눈물겨운 사정이 있다. 여느 고대소설과 달리 불운을 돌려놓는 반전도 없다.
내용으로 보아 최하층민들 사이에서 전승되어 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옹녀는 본디 평안도 월경촌 사람이다.
옹녀는 맞이하는 서방마다 줄줄이 죽을 팔자이다.
그러자 “마을에서는 이 년을 두었다가 우리 두 도(평안도, 황해도)내 ○ 단 놈 다시없고, 여인국이 될 터이니 쫓을 수밖에 없다”하여 쫓아낸다.
그러자 그녀는 “어허, 인심 흉악하다. 황 · 평 양서 아니며는 살 데가 없겠느냐. 삼남 ○은 좋다더라.”고 하면서 고향을 떠난다.
그녀는 중화, 황주, 동설령, 봉산, 서흥, 편산, 금주 떡전거리 등지를 유랑하다가 청석관에서 변강쇠를 만난다.
변강쇠는 천하의 잡놈으로 삼남에서 빌어먹다가 양서(평안도, 황해도)로 가는 중에 청석골 좁은 길에서 옹녀와 만난 것이다.
이들은 부부가 되어 청석관에서 살았다.
옹녀는 술장사를 하는 는 등 온갖 일을 마다않고 해서 돈을 조금 모으면 변강솨는 술 퍼마시고 계집질하고 노름질로 돈은 탕진하고,
밤낮 부부싸움이 벌어졌다.
그러자 옹녀는 지리산이 “土厚하여 生利가 좋다하니” 그리로 가서 山田이나 이루고 살자한다.
이리하여 지리산 첩첩한 깊은 골에 들어 빈집을 찾아 정착한다.
어느날 옹녀가 추위를 못이겨 변강쇠에게 땔나무를 해오라 한다.
게으른 변강쇠는 나무할 생각은 하지 않고 늘어지게 낮잠만 자고나서 어쩔 수 없이 “등구 마천 가는 길에” 있는 “朝官을 지냈는지 紗帽 品帶 갖추고 방울눈 주먹코에 채수염이 점잖은” 장승을 베어와 불에 땐다.
그러자 죄없이 쪼개지고 불태워진 장승 木神이 경기도 노들나루 지금의 노량진에 있는 조선 장승의 大方을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러자 장승 대방은 조선 八道 장승들에게 통문을 보내 모두 불러들여 변강쇠를 징벌 할 것을 의논한다.
그리하여 변강쇠의 몸의 모든 구멍을 막아 죽이기로 결정한다.
명령을 받은 팔도의 장승들은 각각 맡은 대로 病 하나씩 등에 업고 벌떼같이 달려가서 변강쇠에게 병으로 도배를 한다.
이름을 지으려 하나 만 가지가 넘어서 짓지 못한다 한다. 이리하여 변강쇠는 죽고만다.
휴천면 월평리 오도재에 변강쇠와 옹녀 무덤이라는 무덤이 있다.
林道가 끊긴 뒤 지리산으로 300여m 올라가면 무덤 두개가 나타난다.
주인 없는 이 무덤은 1996년에 발견됐는데, 흙무더기가 높지 않고 잔디가 심어지지 않아 가묘 같다.
이곳은 200여년 전 지리산에 살았다는 변강쇠의 묘로 알려지고 있다.
원래는 변강쇠 묘만 있었는데. 함양의 변강쇠 옹녀 바로알기선양회에서 최근 그 옆에 옹녀의 가묘를 만들고 진흙으로 빚은 옹녀의 인형을 묻었다.
특히 무덤 근처에서 발견된 서낭당터는 변강쇠 살았다는 마을의 구전 내용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변강쇠 묘 부근에 맑은 물이 흐르는 옹녀샘이 있다. 모양새가 여성의 둔부같다.
이 옹달샘은 예부터 옹녀샘으로 불렸다.
이곳의 물을 마시면 정열이 샘솟는다는 말이 예부터 전해 왔다고 한다.
* 서암정사는 벽송사의 주지인 원응 스님이 한국전쟁 때 지리산에서 죽어간 원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조성했다고 한다.
원응 스님은 벽송사 중창에 몰두하던 1970년대 어느날 우연히 서암정사 터를 발견하고 주변 땅을 사들였다. 그런 후 1989년 6월에 홍덕희라는 석공과 함께 석굴법당 불사를 시작하여 2001년 완공하였다.
이리하여 30년 불사가 거의 마무리 됐다. 스님에 의해 벽송사가 중창되었고, 서암정사는 새로운 절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극락전, 나한전 등 석굴 속 바위벽과 천정에는 살아서 볼 수 있는 극락의 절경이 조각돼 있다.
서암의 연혁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愚潭 丁時翰(1625~1707)은 1686년 함양에 있는 안국사에 머물렀는데 “……西庵까지 걸어갔는데 거리는 벽송암에서 수리 가량이다. 지세가 높고 넓으며 지리산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 금대암과 다르지 않다”고 그의 <山中日記>에 기록하고 있다.
'문화유산 > 문화유산 답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도동서원 (0) | 2011.12.10 |
|---|---|
|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각석 (0) | 2011.12.03 |
| 최치원 산책로 · 함양상림/ 정여창 고택 (2) | 2011.11.05 |
| 쌍계사 (0) | 2011.10.08 |
| 고려대장경 (0) | 2011.1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