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 산책로 · 함양상림
정여창 고택
최치원산책길”은 함양읍 필봉산(309m)에서 대덕리 대병 저수지와 상림을 한바퀴 도는 약 5km 거리로 1시간 30분에서 2시간쯤 걸린다.
함양군에서 길을 정비하고 2010 5월 “최치원 산책로”라 이름을 지었지만 실제로는 지금부터 20년 전 1991년도에 이미 개설이 되었다.
孤雲 崔致遠(857~?)의 발자취는 영호남의 여러 곳에 남아있다. 특히 지리산 곳곳에 흔적이 남아있다.
만년에는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하며 지냈는데, 어느날 아침 집을 나간 뒤 숲속에 갓과 신만 남겨놓고 사라졌다. 세상 사람들은 그가 신선이 되어 사라졌다고 한다.
※ 최치원
은 경주 사람으로 자는 孤雲, 海雲이며 육두품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 최견일은 경문왕계 왕실과 친밀하였는데, 당시 왕실은 유학과 불법을 존숭하면서 宿衛학생을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 따라 최치원은 경문왕 8년(868) 12세에 당나라 유학한 가장 어린 유학생이다.
구체적인 행적은 알 길이 없고, 전설적인 이야기만 무성하다. <삼국사기 열전>에 전기가 있지만 “史傳이 인멸되어 그 世系를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신라의 사회적 모순은 전에 없이 격화되었다.
진골 귀족들은 왕위를 찾이하려고 목숨을 건 싸움을 일쌈았으며, 사치와 낭비가 극심했고, 백성에 대한 수탈이 갈수록 가혹해졌다. 민심이 신라를 등지게 되고 국력은 갈수록 약회되었다.
육두품 지식인들은 체제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는 한 방법으로 당나라에 가서 빈공과에 응시해 그곳에서 재능을 발휘해 진출하는 길을 찾고자 했다.
<桂苑筆耕 序>에,
“臣이 열두 살에 집을 떠나 서쪽으로 가려고 배를 탈 때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훈계하기를 ‘10년 동안 공부하여 진사에 급제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고 하지 말라. 나도 또한 아들을 두었다고 하지 않겠다. 가거든 부지런히 공부하여 힘을 다하거라’ 하였습니다. 신은 그 엄격하신 훈계를 마음에 새겨 조금도 잊지 않았습니다. 상투를 대들보에 걸어매고 송곳으로 허벅지를 찔러가며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부응하기 위하여 참으로 남들이 백의 노력을 할 때 신은 천의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당나라에 유학간 지 6년만에 신의 이름이 牓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당나라에서 빈공과에 급제한 후, 태학에서 儒學을 익혔고, 6년 뒤에는 국자감 학생으로서 진사의 대우를 받는 생도시의 賓貢진사시에 합격하였다. 876년 말단 지방관직인 선주 율수현위에 임명되었지만 고급 관료가 되기 위해 1년만에 사임하고 입산하여 시부와 策文을 공부하였다. 그러다가 경제적인 어려움과, 황소의 약탈을 피해 회남절도사 高騈의 휘하에서 4년 동안 감찰과 문한의 임무를 맡아 활동하였다. 879년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討格黃巢文>으로 문명을 날린다. 황소가 이 격문을 보고 충의를 저버린 부끄러움에 몸을 떨었다고 한다. 과장된 이야기이겠지만 이 일로 당나라 관료사회에 매우 유명해졌다.
그러나 당나라에서의 출세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세계제국의 국제인이면서도 변방의 이국인이기도 했기 때문에 최치원이 느꼈던 소와와 고독은 심각했다. 이국인의 차별을 뼈저리게 느끼고 고국에 돌아가 뜻을 펼치겠다는 생각으로 헌강왕 11년(885) 28세에 귀국하였다. 처음에는 상당한 환영을 받는 듯했다. 이후 국왕의 측근인 시독겸 한림학사를 맡아 왕실이 일으킨 불교 행사의 각종 발원문과 왕명으로 <사산비명>을 지으며 경문왕계 왕실의 왕권강화에 참여하였다. 또 병부시랑이란 벼슬을 받고 뜻을 펴보려고 했지만 나라는 썩어 들어가고 시기하는 무리들은 그를 괴롭혔다.
889년 그는 중앙 정계를 떠나 大山郡(지금의 태인) · 부성군(서산) · 천령군(함양) 등지의 지방관으로 나갔다. 군수 시절 수리시설, 기민구제 등 민중의 고통을 풀어보려고 노력하였다. 진성왕 7년(893) 견당사의 임무를 맡아 경주로 가다가 궁예와 견훤의 무리 등 도둑떼에 길이 막혀 임지로 되돌아갔다.
894년 2월 時務策(귀족의 부패, 타락 폭로) 10여 조를 올려 시급히 개혁을 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로인해 阿湌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조정의 어느 누구도 자신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자 난세에 뜻을 잃고, 벼슬을 버리고 산과 바다를 찾아다니며 누대를 짓고 나무를 심고 시를 읊었다. 후삼국이 이미 쟁패가 벌어졌는데, 신라를 위하여 끝까지 애써야 할 이유도 없고 그렇다고 후백제나 고려를 택할 용단을 내릴 수도 없는 어정쩡한 처지에서 다른 선택의 길이 없었을 것이다. 뛰어난 재능을 역사의 방향과 연결시킬 수 없었던 지식인의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어떤 결단을 내릴 수도 없고, 자기 사상을 뚜렷이 세우지 못한 채 정신적 방황을 거듭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그는 현실을 비판하고 고발하는 지식인이고, 사상가이지만 행동하는 지식인은 아니었다. 현실에 참여할 의지도 용기도 없었다.
그의 발길은 경주 남산, 가야산 해인사,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등지에 닿았다.
문경의 가은에 있는 백운대에도 최치원의 글씨가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은 나라를 세운 1년쯤 뒤인 919년 도읍을 송악으로 옮긴다. 왕건은 한창 내실을 다지고 있었으므로 후삼국은 잠시 평온을 유지한다. 이 무렵 최치원은 경주 금오산에서 글을 읽으며 조용히 지내면서 “鷄林黃葉 鵠嶺靑松”이란 글을 지어 왕건에게 보낸다. 신라왕이 이 말을 듣고 꺼려하자 그는 가야산으로 들어가 해인사 입구 계곡에 신발을 남겨두고 종적을 감추었다. 그뒤 지리산에 숨어 살다가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지리산에 숨어 살 때 道家的 설화를 많이 만들어 냈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고려 건국에 참여하여 새 왕조 건설에 도움을 주었다. 신채호는 그의 사대주의적 경향을 들어 “일개 선비”라 하였다.
그는 한국 최초의 유학사상가이다. 또 그는 유학자인 동시에 도교와 불교에도 조예가 깊어 유불선 삼교를 겸비한 사상가이다. <四山碑文> 등 선종과 관련된 많은 비문을 쓰면서 부분적으로는 선종의 종지에 동조했다.
<鸞郎碑序>에서 그는 풍류도를 설명하면서 유불선 합일을 제창했다. 이 사상은 훗날 우리나라 사상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의 신선사상은 계승되어 조선 중기에는 단군 이래 민족도교를 계승 발전시킨 사람으로 이해하였다.
고려 顯宗(1010~1034) 초에 문창후로 추증되어 문묘에 모시게 된다.
<四六集>, <桂苑筆耕>, <山中覆簣集>, <帝王年代歷> 등 저작이 있다고 하는데, 지금 <계원필경>과 <사산비문>이 남아있다.
<동문선>에 신라인의 작품이 모두 192편인데, 최치원의 것이 146편이나 된다. 후대에 최치원을 일컬어 東國文宗이라 했다. 중국인의 안목으로 보더라도 흠잡을 데 없는 수준에 오른 최초의 작가이다.
■ 함양 상림(천연기념물 제154호)
1100여 년 전 함양태수(당시는 천령)였던 최치원이 숲을 조성하여 大館林이라 했다.
고을을 가로지르는 위천이 넘쳐흐르는 것을 막기 위해 물길을 돌리고 둑을 따라 나무를 심었다. 그 뒤 언젠가 대홍수로 둑의 중간이 파괴되어 그 틈으로 집들이 들어서면서 상 · 하림으로 나뉘었다가 지금 상림만 남았다.
면적 182,665, 길이 1.6㎞. 숲 안에는 120종 2만여 그루의 나무가 살고 있다.
때죽나무, 사람주나무, 쪽동백, 당단풍, 나도밤나무 같은 소교목과 느티나무, 서어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같은 대교목 들이 섞여 자란다. 숲이 무성하여 안정된 식물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함양 상림은 우리나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20여 곳의 숲 가운데 유일한 낙엽 활엽수림으로, 특히 한여름 우거진 숲과 단풍 든 오솔길이 아름답다.
* 척화비는 운동장 입구에 있는데, 비문에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다면 화해할 수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한다는 것은 곧 나라를 팔아먹자는 것이니, 만대 자손에게 경고하노라”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 척화비는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겪으면서 흥선 대원군이 쇄국의 결의를 널리 선양하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세운 비중의 하나이다.
* 함화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짜리 팔작집으로 조선시대 함양읍성의 남문이었다.
일제강점기 도시계획으로 헐리게 된 것을 1932년 이곳 상림으로 옮겨 지은 것이다. 본디 ‘멀리 지리산을 바라본다’하여 望岳樓라 이름하였으나 상림으로 옮겨오면서 함화루로 바꾸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은 김종직의 시가 실려있다.
“작년에는 내 발자취가 저 멧부리를 더럽혔구나.
망악루 위에서 다시 대면하니 무안도 하구나.
산신령은 거듭 더럽히게 될까 두려워하여,
흰 구름을 시켜 곧 문을 굳게 닫는구나”
* 文昌候 崔先生 神道碑는 상림 입구에 서 있는 각종 기념비, 유적비 들과 나란히 서 있다.
상림을 조성한 최치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23년 후손이 세웠다.
* 사운정은 고운을 생각하는 정자라는 뜻이다. 최치원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고종 43년(1906) 후손들이 세웠다.
* 연리목은 느티나무와 개서어나무가 함 몸을 이루었다.
* 함양 이은리 석불은 1950년 무렵 함양군 이은리의 냇가에서 출토된 것을 지금의 위치로 옮겨 놓은 것이다.
높이 1.8m의 석조여래좌상이며, 배 아랫부분이 심하게 훼손되었으나 광배와 대좌는 온전히 남아 있다. 몸체를 모두 감싼 광배에는 이중의 원형을 둘러 두광을 만들었고, 머리 주위에는 연꽃잎을 돋을새김 하였으며, 신광에는 당초무늬를 새겼다. 소발의 머리에는 육계가 납작하게 표현되었고, 순박한 표정의 얼굴에 비해 빈약해 보이는 어깨에는 통견의 옷자락이 U자형을 이루며 두툼하게 묘사되었다. 두 손은 떨어져 나갔는데, 팔꿈치 아래에서 끼우게 되어 있었던 듯 구멍이 나 있다.
* 상림연꽃은 6만 6천여㎡(2만여 평)에 백련, 홍련, 활련 등과 기타 수생식물이 있다.
이곳의 연꽃은 무안 백련지나 경상 방죽 등지와 같이 연꽃이 물 위에 떠있지 않고, 줄기를 꼿꼿이 세워 서있다. 이 연꽃의 기원은 현재의 주차장 건너편의 운림리 연밭머리이다. 지금은 식당들이 들어서 있다. 함양군은 이 운림리 연밭머리의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해 상림 인근의 농지를 점진적으로 매입, 새로 조성했다.
* 물레방아는 죽장마을로 이어지는 길 가에 있다.
燕巖 朴趾(1737~1805)이 청나라에 가서 물레방아를 보고 와서 국내에서는 함양에 처음으로 물레방아를 만들어 이용했다고 한다.
물레방아는 함양군의 상징물이다. 박지원이 1792년 현감으로 부임하면서 지금의 안의면 안심마을에 물레방아를 설치한 것이 우리나라 물레방아의 시작이라 한다. 그래서 군의 축제 이름이 물레방아축제다.
물레방아는 거창 · 산청 · 함양 등 서부 경남에서 전승되는 민요 <질꾸내기>에도 등장한다.
“함양 · 산청의 물레방아는 물을 안고 돌고, 우리 집 서방님은 나를 안고 돈다.”
* 학사루 느티나무(천연기념물 제407호)는 함양초등학교 옆에 있다.
높이 21m, 줄기 둘레는 9m에 이른다. 안내판엔 1000년 수령의 ‘천년목’이라 적었으나,
김종직(1431~1492)이 함양군수 때 학사루 옆에 심은 나무라고 한다.
■ 학사루(유형문화재 제90호)
언제 처음 지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신라 말 최치원이 함양 태수로 있을 때 이 누각에 올라 시를 읊었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학사루라는 이름도 최치원과 인연이 있다고 생각하여 후세 사람들이 지었다.
현판 기둥에 내건 주련도 모두 최치원과 관련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함양초등학교 자리는 본디 함양읍성의 객사가 있던 곳이다. 객사로 들던 2층 문루가 학사루다.
본디 옛 함양 동헌 자리였던 함양초등학교 뒤뜰에 있었다. 조일전쟁 때 불탄 것을 숙종 18년(1692)에 중건한 기록이 이전 복원할 때 발견되었으며, 1979년 현재의 군청앞으로 옮겨 복원하였다.
학사루는 무오사화와 관련이 깊은 곳이다. 조선 초기 영남 사림파의 종사로 명성이 높았던 金宗直(1431~1492)이 함양군수로 부임하여 학사루에 올랐다. 그때 고향이 남원인 유자광이 함양에 놀러 왔다가 써서 걸어 놓은 현판을 보고 “어찌 이 따위가 여기에 시를 걸 수 있는가”라고 호통치며 현판을 떼어 불태워 버렸다. 학사루에서 일어난 이 현판 사건은 1498년 발생한 무오사화의 불씨가 되었다.
※ 戊午士禍
조선 전기 사대부는 두 세력이 있었다. 권력과 토지를 이미 점령한 쪽을 勳舊派라 한다.
훈구파는 개국공신이나 개국 후의 공신 또는 그 후예로서 중앙 정계에서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고 기득권을 지키고자 했다. 이러한 혜택에서 제외된 지방의 사대부는 중소지주로서의 위치에 만족하지 않고 중앙 정계로의 진출을 꾀하면서 새 왕조 창건의 명분을 철저하게 시행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 세력을 士林派라 한다. 사림파가 훈구파와 거의 맞설 수 있을 만큼 세력이 커지자 훈구파가 반격을 해서 여러 차례 사화가 일어났다. 그 첫 번째 사화가 무오사화이다.
지방 중소지주가 먼저 두각을 나타낸 곳은 영남지방, 그 중에도 선산이었다.
길재가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며 도학에 힘썼으므로 정몽주에서 길재로, 길재에게서 다시 金叔滋로 학통이 이어졌다. 다시 김숙자의 아들인 金宗直이 선두에 서서 그 기반을 딛고 중앙 정계로 진출하여 훈구파와 맞서게 된다.
戊午士(史)禍는 연산군(1494~1506 재위) 4년(1498) 戊午년에 일어났다.
등장하는 주요 인물로는 김종직, 김일손, 정여창, 유자광, 이극돈 등이다.
김종직은 영남 지방의 이름난 도학자였다. 성종의 총애를 받으며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 제자들과 함께 영남 사림을 형성하며 기성세력인 훈구파에 맞서 조정에 새로운 기풍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했다.
이극돈은 명문 출신으로 요직을 두루 지낸 훈구파의 거두였다. 그러나 그는 뇌물을 좋아하고 간교한 사람이었다.
성종이 죽었을 때 전라감사로 나가 있으면서 관례를 어기고 향을 바치지 않았으며 시간만 나면 기생과 놀이를 벌였다.
유자광은 남원 출신으로 부윤 벼슬을 한 집안의 서자로 태어나 궁궐문을 지키는 갑사로 있다가 이시에의 난에 공을 세워 벼슬을 받고 남이장군을 모함하여 공신이 되었다.
어느해 유자광(?~1512)은 경상도 함양땅에 들러 학사루에 올랐다.
여러 문인들이 최치원의 학덕을 기리는 시를 지어 현판에 걸어둔 것을 보고 자신도 시를 지어 군수에게 부탁하여 나란히 걸게 하였다. 1470년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와서 유자광의 시를 ‘비루한 시라’고 분개하여 현판을 내려 불태워버렸다. 유자광은 이 사실을 알고 분개하였으나 김종직이 임금의 신임을 받았던 까닭으로 어쩌지 못하고 겉으로 태연한 척하면서 교분을 트고, 보복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마침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1464~1498)이 <성종실록>을 편찬하던 중 ‘이극돈이 세조의 비 貞熹王后의 국상 때 전라 감사로 있으면서 기생과 어울리고 뇌물을 받은 사실이 있다’고 史草에 올린 일이 있었다. 이를 안 이극돈이 고쳐 주기를 청했으나, 김일손은 한마디로 거절해 버렸다. 분을 삭이지 못한 이극돈은 김종직에 감정이 있던 유자광에게 도움을 청해 보복을 하려 하였으나 김종직이 신임 받던 성종 때에는 일을 벌이지 못하였다.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그 뒤를 잇자 연산군은 <성종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1498년 實錄廳을 개설하고, 이극돈을 그 당상관으로 임명하였다. 드디어 기다리던 기회를 만난 이극돈은 <성종실록>에 실려 있는 김종직의 <弔義帝文>과 도연명의 <述酒詩>에서 꼬투리를 잡았다. <조의제문>은 항우가 어린 의제를 죽이고 초나라 왕이 된 것을 조문한다는 내용이다. 항우를 세조에, 의제를 단종에 비유했다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술주시>는 중국 남조시대 송의 武帝가 晉의 安帝를 치고 황제가 된 것을 꾸짖는 시이다.
이 글들은 당시 유명해서 선비라면 누구나 읽었을 것이며, 성종도 알고 있었다. 성종은 모르는 체 넘어갔다.
음모를 계획한 이극돈은 먼저 유자광을 끌어들이고 이어 두 사람은 노사신, 한치형, 신근수 등 사림파에 불만을 가진 벼슬아치들을 끌어들였다.
유자광은 김종직의 문집을 연산군 앞에 펼쳐놓고 <조의제문>과 <술주시>에 주석을 달아 알기 쉽게 해석해 주었다. 이극돈은 김종직이 세조를 비방한 것은 대역무도한 행위이며 처벌해야 한다고 부추겼다. 김일손이 악독한 것도 김종직이 가르친 것이라 주장하면서, 김종직이 지은 글을 모두 불살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훈구파가 가세하여 상소하자, 사림의 간언과 권학에 증오를 느끼던 연산군은 유자광의 상소에 의하여 김일손 등을 신문한 끝에 이 사건을 모두 김종직이 교사한 것이라 결론지었다.
연산군은 명을 내려 병으로 함양에 가 있던 김일손을 잡아올리고 이어 권오복, 정여창, 김굉필 등 수십 명을 잡아들였다. 김종직은 이미 6년 전에 죽었다.
김종직의 시와 글을 가지고 있는 자는 이틀 안으로 자진해서 바치게 하여 불태우고 그가 쓴 현판은 다 떼어 버리게 하였다.
김종직의 시체를 꺼내 목을 베고 김일손, 권오복, 등 5명은 사지를 찢어 죽였고, 나머지 21명은 불고지죄 등을 적용해서 재산을 몰수하고 곤장을 쳐서 유배보냈다. 사초를 누설한 이극돈의 엄청난 죄는 언급도 하지 않았다.
이로써 유자광은 함양에서 당한 치욕을 철저히 보복한 셈이었다.
무오사화는 현실 사회의 모순에 직면해 부조리를 시정, 개혁하려는 士林과 구질서를 고수하려는 훈구파의 갈등을 배경으로 일어난 사화이다. 또 연산군이 부패한 훈구파에 이용당해 젊은 선비 집단을 주륙한 사건이다. <조의제문>을 보고 수양대군의 증손자인 그로서는 분노했을 법도 하지만 당시 백성들의 공분을 샀던 제거 대상은 훈구파였지 사림파가 아니었다. 이 사건으로 사림 세력이 유자광과 훈구파에 의해 크게 화를 입고 세력이 위축되었다.
유자광은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하여 많은 재산과 노비를 하사받고 조정을 휘젓고 다녔다.
그러나 변신을 거듭하며 권세를 틀어쥔 유자광도 만년에 유배를 당하고, 유배지에서 눈이 먼 채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큰 아들은 여색에 빠져 가보지 않았고, 작은 아들은 아프다는 핑계로 술만 마시고 아버지의 장지인 謫居地로 내려가지 않았다.
김종직은 문묘의 배향되어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 이후에도 사림은 갑자사화(1504년), 기묘사화(1519년), 을사사화(1545년) 등 여러 차례의 사화를 겪었지만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잠재적인 성장을 계속하여 선조 때에는 정계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 결과 사림파 내부의 분열로 당쟁이 나타난다.
■ 정여창 고택(중요민속자료 제186호)은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 있다.
개울을 따라 난 마을길을 쭉 들어가면 왼쪽으로 우물과 그 우물 자리를 표시하기 위한 종바위[鍾岩]가 있다. 이 우물은 개울(옥계천) 좌우 암반 위에 있던 샘물 다섯 개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마을이 배의 형국[行舟形]이라 우물을 파면 안 된다는 전설이 있어 마을 사람들은 이 다섯 개의 우물 말고는 일절 다른 우물을 파지 않았는데, 일제강점기 이를 무시하고 초등학교를 지으면서 우물을 판 뒤 마을이 점차 기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우물 맞은편에 자잘한 돌로 포장된 골목길로 한참 들어가서 막다른 듯한 곳에 있는 높은 솟을대문 집이 ‘정여창 고택’이다. 이곳의 유적 명칭은 건물주의 이름을 따서 ‘함양 정병호 가옥’이라고 한다.
마당에서 솟을대문까지 박석을 깔아 돌을 밟는 발자국 소리로 손님이 온 것을 안다. 솟을대문 옆에 하마비도 있다.
솟을대문은 당상관만 가능하다. 이 솟을대문에는 효자효부에게 하사하는 旌閭를 게시한 문패가 네 개나 걸려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동향한 사랑채가 보인다.
3,000여 평의 대지 위에 사랑채, 안채, 별당, 가묘, 곳간 등 5개 건물이 샛담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 건물들은 대부분이 조선 후기에 중건되었다.
사랑채에는 ‘忠孝節義’, ‘百世淸風’이라는 커다란 글씨가 붙어있다. 사랑채는 ㄱ자 팔작집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 집이다. 돌축대가 높직하고 추녀는 활주로 떠받칠 만큼 넓다, 툇마루 한쪽을 약간 높여 누각의 난간처럼 둘렀다. 사랑채의 높은 축대는 바닥이 높은 안채와 아래채에 수평을 맞추기 위해 쌓았으며 권위를 나타내기도 한다.
사랑채 옆의 일각문을 거쳐 안채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일각문을 들어서면 또 한 번 중문을 통과해야 한다. 남향한 一자형의 큼직한 안채는 경북 지방의 폐쇄적인 공간과는 달리 개방적으로 분할되어 있어 집이 밝고 화사하다.
덧난간이 있는 곳이 며느리 방이다. 일각문과 중문 왼쪽에 곳간채가 있다. 곳간의 건물은 땅을 파서 지면보다 낮게 한 것은 곳간 지붕이 사당 지붕보다 낮게 하기 위한 것이다. 안채 왼쪽에 아래채가 있고, 안채 뒤편으로 가묘와 별당, 안사랑채가 따로 있다.
사랑채는 정병호 씨의 고조부가 중건하였으며, 안채는 사랑채보다 건축 연대가 더 올라가 약 300년 전 청하현감을 지낸 先祖가 중건하였다고 한다. 요란한 치장이 없고 옛 손길이 그대로 배어 있는 세간들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 鄭汝昌(1450~1504)은 조선 성종 때의 학자로 본관은 경남 하동이지만 함양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증조할아버지 정지의가 처가인 함양에 와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함양 사람이 되었다. 자녀 균분 상속제가 지켜지던 당시에는 거주지를 옮길 때 처가나 외가로 옮겨가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아버지 정육을은 함길도 병마우후를 지냈고, 어머니는 목사 최효온의 딸이다.
그의 어릴 때 이름은 伯勖이었는데, 그의 아버지와 함께 중국의 사신과 만나는 자리에서 그를 눈여겨본 중국 사신이 “커서 집을 크게 번창하게 할 것이니 이름을 여창이라고 하라”고 했다고 한다. 호는 일부, 수옹이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공부에 힘쓰다가 김굉필과 함께 함양 군수로 있던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연구하였다. 그는 주로 성리학의 근원을 탐구하였으며 특히 <논어>에 밝았다. 1480년 성종이 행실이 바르고 경학에 밝은 사람을 구할 때 성균관이 그를 추천해 천거되었다.
성종 14년(148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같은해 8월 성균관에서 理學에 뛰어나다 하여 또 다시 천거되었다. 그러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1486 모친상을 치른 후 지리산을 찾아가 진양의 악양동 부근 섬진나루에 집을 짓고 대[竹]와 매화를 기르며 평생을 살았다.
1487년에는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고, 성종 21년(1490) 윤긍이 효행과 학식이 뛰어나다고 그를 추천하여 소격서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자식된 자의 도리를 내세워 사양하였다. 그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을 거쳐 시강원설서가 되었다.
한때 세자 연산군을 보필하며 <대학>을 강론하였으나 강직한 성품 때문에 총애를 받지 못했다.
연산군 1년(1495) 안음현감으로 있으면서 백성들이 과다한 세금 때문에 고통이 많다는 것을 알고 <便宜數十條>를 지어 시행하였다. 그는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여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또 고을의 총명한 젊은이를 뽑아 친히 교육하였으며 봄가을 養老禮를 행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 때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다가, 1504년에 죽었다. 갑자사화 때 剖棺斬屍되었다. 중종반정 후 중종 원년(1506) 도승지에 증직되었고, 1517년에는 우의정에 증직되었고, 광해군 2년(1610)에 문묘에 종사되었다.
그는 학문과 덕이 뛰어나, 우리나라 성리학사에서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5賢으로 인정받고 있다.
정여창은 평소에 도가 없으면 먹을 것이 없고, 먹을 것이 없으면 백성이 없고 백성이 없으면 나라가 서지 못한다고 하여 나라의 근본이 백성임을 강조하였다. 이같은 왕도정치를 실현하려면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함이 근본이고 그 근본이 바르지 못하면 선정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남명은 지리산을 기행하여 기행문 <유두류록-남명집 권2>을 남겼는데, 지리산으로 가던 중 정여창의 옛 거처를 찾아 다음과 같이 썼다. “陶灘에서 한 마장쯤 떨어진 곳에 정여창 선생의 옛 거처가 있었다. 선생은 바로 천령(함양) 출신의 儒宗으로 학문이 깊고 독실하여 우리 도학에 실마리를 이어 주신 분이다.”
* 남계서원은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에 있다. 정여창을 모신 서원이다.
명종 7년(1552) 함양의 士族 강익의 주도로 박승익 · 노과 · 정복현 등이 정여창의 제향을 위한 사당이 필요함을 인식하고 서원 건립을 논의하였다. 이후 함양 사림들과 지방관들의 협조, 인근 지역 사림들의 재정 지원을 받아 진행되었다. 명종 16년(1561) 사우 건립이 완성되어 위판을 봉안하였고, 1564년 당시 김우옹의 형인 군수 김우홍의 도움으로 동재와 서재를 건립하였다. 이듬해 진사 강익의 주도로 함양 유생 30명이 상소하여 사액을 요청하여 ‘藍溪’란 사액을 받았다.
중종 38년(1543) 풍기에 세워진 백운동서원(1543년에 건립돼 1550년 사액되어 소수서원이라 했다)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졌다.
사액서원이 되면 국가의 인정을 받게되어 면세와 면역 따위의 이득이 있다.
숙종 때 姜翌과 정온을 더하여 지금은 세 분을 모시고 있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1603년 나촌에 옮겨지었고, 광해군 4년(1612)에 옛 터인 지금의 자리에 재건하였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 후 남은 47개 중 하나이다.
서원 입구에 홍살문과 하마비가 있다. 홍살문은 수레가 드나들 수 있도록 높였다.
그 뒤에 정문을 겸한 풍영루가 서있다. 누각은 각종 연꽃을 비롯한 꽃무늬장식과 그림이 있다.
풍영루 앞 연못 건너 동 · 서재가 마주보고 있고, 강당인 명성당이 있다. 명성당 뒤 언덕에 사당이 있다.
사당에는 현판이 없다. 서원이 사당보다 먼저 세워졌기 때문이다.
사당 밑에 (省)牲檀이 있다. 이곳에서는 9명의 제관이 제물의 상태를 점검하여 가부를 결정하는 곳이다.
서원 외에 따로 사당을 짓고 유호인과 정홍서를 모셨다가 고종 5년(1868)에 폐지하였다.
* 남계서원 근처에 金馹孫(1464~1498)을 배향하는 淸溪서원이 있다.
1907년(순종 1년)에 세웠다. 청계서원은 홍살문과 솟을삼문을 갖추었고, 그밖에 서원 부속 건물들이 정렬해 있다.
* 문헌공 일두 정여창의 묘소는 남계서원 뒤 산기슭 昇安山 하동정씨 공원묘원에 있다. 공원묘원은 승안사라는 절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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