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開장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옛날에는 화개마을 전체가 시장이었다. 가축시장으로 유명했다.
지리산 등산 때도 이곳에서 버스를 타고 내렸다.
허름하던 시골마을이 요즘은 말끔한 마을이 되었다.
※ 화개장터
화개마을은 화개동천의 물이 섬진강 본류와 마주치는 곳이며, 하동읍과 구례읍이 각각 50여리 떨어진 중간지점이다.
장터 앞에 있는 <기념비>에 섬진강이 수문을 연 이래 영남과 호남을 잇던 이곳에 삼한시대 화개관이라 불리던 요새가 장터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가 쓰여있다.
고려때는 화개部曲이라 하였다.
‘부곡’은 천민집단 또는 특정 기능을 가진 집단이다. 이곳에는 예인들이 많았다.
화개마을은 사하촌의 성격도 강하여, 예인들은 절의 행사에도 동원되었을 것이다.
남효온에 의하면, 부곡의 우두머리 관리는 재임기간 동안 머리 깎고, 승복을 입었으며, 僧首라 불렀다.
화개장은 조선시대 5대장 중 하나였다.
1726년 번성기를 맞아 전국적으로 손꼽히는 시장이 되었고, 객주의 오고감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였다.
옛날에는 여기까지 배가 들어왔다.
장돌뱅이들은 화개장(1, 6일), 구례장(2, 7일), 구례읍장(3, 8일), 순천장(4, 9일) 구례 토지장(5, 10일)을 돌아다녔다.
이들의 장 선택 원칙은 하룻밤 사이 이동할 만한 거리인 40~60리 떨어진 곳들을 찾는다.
5일장은 1800년대 정착된다.
동쪽인 하동에서는 건어물을 배에 싣고 강을 거슬러 올라왔고,
서쪽 구례 쪽에서는 쌀, 잡곡 등을 역시 배로 실어 날랐으며,
북쪽 함양, 남원 쪽에서는 삼베, 죽세공품 등을 메고 지고 화개재를 넘어 이곳에 왔다.
장이 파할 때쯤에는 남사당 패거리들이 찾아와 징과 장구들을 두드리며 신나는 놀음으로 장꾼들을 모았고,
나룻배 오가는 뱃머리 주막들은 장돌뱅이들로 넘쳤을 것이다.
마을 앞을 지나는 국도 옆으로 섬진강이 흐르고, 그곳에 화개나루가 있었다.
화개나루(섬진나루)에는 화개와 광양을 잇는 줄배가 있었다.
2003년 5월에 동서화합다리가 개통되면서 줄배는 그 사명을 다하고 사라졌다.
이곳은 섬진강폭이 가장 넓은 곳이다.
밀물 때는 바닷물이 역류하여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으로 뻘과 모래가 섞여 재첩이 잘 자란다.
여기서부터 쌍계사까지 10리 벚꽃길,
남해바다까지 하동포구 80리 길이 이어진다.
▴ 십리 벚꽃길 - 화개에서 화개천을 따라 쌍계사까지 이어지는 10리길에 4월 초에는 벚꽃길이 펼쳐진다.
1928년 화개면장을 지낸 김진호라는 사람이 소로길을 넓히면서 벚꽃 묘목을 일본에서 구해다가 심은데서 비롯된다.
한때 비난하는 말도 많았지만 지금은 화개의 명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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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개계곡 - 지리산에서 흘러내려 의신에서부터 화개 장터를 지나 섬진강으로 들어간다. 의신에서 16km쯤 된다.
※ 김동리의 소설 <역마>
<역마>의 첫머리에는 화개장터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기에 여기에 소개한다.
‘화개장터’의 냇물은 길과 함께 세 갈래로 나 있었다. 한 줄기는 전라도 구례 쪽에서 오고 한 줄기는 경상도 쪽 화개골에서 흘러내려,
여기서 합쳐서,
푸른 산 그림자와 검은 고목 그림자를 거꾸로 비추인 채,
호수같이 조용히 돌아, 경상 · 전라 양 도의 경계를 그어 주며,
다시 남으로 흘러내리는 것이,
섬진강 물이었다.
하동, 구례, 쌍계사의 세 갈래 길목이라,
오고가는 나그네로 하여, 화개장터엔 장날이 아니라도 언제나 흥성거리는 날이 많았다.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길이 고래로 허다하지만 쌍계사 세이암의, 화개협 시오리를 끼고 앉은 화개장터의 이름이 높았고 경상 전라 양도 접경이 한두 군데일 리 없지만 또한 이 화개장터를 두고 일렀다.
장날이면 지리산 화전민들의 더덕, 도라지, 두릅, 고사리 들이 화개골에서 내려오고 전라도 황화물 장수들의 실바늘, 면경, 가위, 허리끈, 주머니끈, 족집게, 골백분 들이 또한 구례 길에서 넘어오고, 하동 길에서는 섬진강 하류 해물 장수들의 김, 미역, 청각, 명태, 간조기, 간고등어 들이 들어오곤 하여, 산협하고는 꽤 은성한 장이 서는 것이기도 하였으나 그러나 화개장터의 이름은 장으로 하여서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장이 서지 않는 날일지라도 인근 고을 사람들에게 그 곳이 그렇게 언제나 그리운 것은 장터 위에서 화개골로 뻗쳐 앉은 주막마다.
유달리 맑고 시원한 막걸리와 펄펄 살아 뛰는 물고기 회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주막 앞에 늘어선 능수버들 가지 사이사이로 사철 흘러나오는 그 한많고 멋들은 진양조, 단가, 육자배기 들이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여기다 가끔 전라도 지방에서 꾸며 나오는 남사당, 여사당, 협률, 창극, 신파, 광대 들이 마지막 연습 겸 첫 공연으로 여기서 반드시 재주와 신명을 떨고서야 경상도로 넘어간다는 한갓 관습과 전례가 이 화개장터의 이름을 더욱 높이고 그립게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가운데도 옥화네 집은 술맛이 유달리 좋고 값이 싸고 안주인 - 즉, 옥화 - 의 인심이 후하다 하여 화개장터에서 가장 이름이 들린 주막이었다.
얼마 전에 그 어머니가 죽고 총각 아들 하나와 단 두 식구만으로,
안주인 옥화가 돌아올 길 망연한 남편을 기다리며 살아간다는 것이라 하여 그들은 더욱 호의와 동정을 기울이는 모양이기도 하였다.
혹 노자가 달린다거나 행장이 불비할 때 그들은 으레 옥화네 주막을 찾았다. …….
……
……
그리고 나서 한 달포가 지난 뒤였다.
성기가 좋아하는 여러 가지 산나물이 화개골에서 연달아 자꾸 내려오는 이른 여름의 어느 장날 아침이었다.
두릅회에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키고 난 성기는 그 어머니에게,
"어머니 나 엿판 하나만 맞춰 주."
하였다.
"……."
옥화는 갑자기 무엇으로 얻어맞은 듯이 성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지도 다시 한 보름이 지나, 뻐꾸기는 또다시 산을림처럼 유창하게 울고 늘어진 버들가지엔 햇빛이 젖어 흐르는 아침이었다.
새벽녘에 잠깐 가는 비가 지나가고, 날은 다시 유달리 맑게 개인 화개 장터 갈림길 위에서, 성기는 그 어머니와 하직을 하고 있었다.
갈아입을 옥양목 고의 적삼에 명주 수건까지 머리에 동여매고 난 성기는 새로 맞춘 새하얀 나무 엿판을 질빵해서 느직하게 ㅇ어덩이 즈음에다 걸고 있었다.
윗목판에는 새하얀 엿가락이 반 넘어 들어 있었고, 아랫목판에는 팔다 남은 이야기책 몇 권과 간단한 방물이 존 들어 있었다.
그의 발 앞에는, 물과 함께 갈리어 길도 세 갈래로 나 있었으나,
화개골 쪽엔 처음부터 등을 지고 있었고,
동남으로 난 길은 하동,
서남으로 난 길이 구례,
작년 이맘때도 지나 그녀가 울음 섞인 하직을 남기고 체 장수 영감과 함께 넘어간 산모퉁이 고갯길은 퍼붓는 햇빛 속에 지금도 환히 장터 위를 굽이 돌아 구례 쪽을 향했으나, 성기는 한참 뒤 몸을 돌렸다.
그리하여 그의 발은 구례 쪽을 등지고 하동 쪽을 향해 천천히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겨 놓을수록 그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지어,
멀리 버드나무 사이에서 그의 뒷모양을 바라보고 서 있을 어머니와 주막이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갈 무렵 하여서는,
육자배기 가락으로 제법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가고 있는 것이었다.
소설 <역마>는 1948년 잡지 <白民>에 발표된 작품이다. 驛馬煞로 표상되는 唐四柱라는 동양인과 한국인의 깊은 운명관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은 대부분 자신의 의지나 선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운명적으로 주어진 역마살에 둘러싸여 있으며, 배경인 화개장터 역시 역마살이 낀 장돌뱅이들의 집결지이다.
토속적이고 샤머니즘적인 역마살이라는 이 운명을 거역하기보다 거기에 슬기롭게 순응함으로써 생의 리듬을 얻어 살아가는 한국적인 인간상, 즉 인간은 자신의 운명에 따라 살아갈 때 가장 행복을 느낀다는 것을 보여준다.
쌍계사
■ 쌍계사는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지리산 남쪽 자락에 있다.
신라 제33대 성덕왕 23년(724) 三法(?~740)이 이곳에 머물며 불법을 전하고 있었다. 지은이를 알 수 없는 <지리산쌍계사기>에 성덕왕 때 圭晶 · 三法 · 김대비 등이 남종선을 수용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미륵사의 승려 규정이 언제 입당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성덕왕 18년(719) 당나라에서 육조 혜능의 <法寶壇經>을 가지고 돌아왔다. 삼법은 부석사에서 의상에게 화엄을 배우다가 혜능의 문하에 들어 공부하기를 원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규정이 가지고 온 <법보단경>을 얻어 보고는 혜능을 더욱 사모하게 되었다. 결국 김유신의 부인이었던 法淨尼의 도움으로 입당하게 되었고, 이보다 앞서 입당한 백률사 승려 김대비와 함께 성덕왕 22년(723) 혜능의 두개골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김대비와 함께 지리산 화개계곡으로 들어가 돌상자에 혜능의 두개골을 넣어 보관하였다.
삼법이 입적 후 절은 쇠락해졌다. 그러다가 문성왕 2년(840) 眞鑑선사 慧昭(774~850)가 중창하여 玉泉寺라 하였다. 그는 혜능을 모신 영당 육조영당을 짓고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제50대 정강왕(886~887 재위) 때 쌍계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조일전쟁 때 크게 불탔으며, 인조 10년(1632) 碧巖스님이 중건해 오늘에 이른다.
1. 화개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조금 올라가면 큰바위 두 개와 나무장승 두기가 있다.
장승은 옛 장승을 본떠 최근에 만든 것이다. 옛 장승은 13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선암사, 벽송사 장승과 함께 나무장승으로는 가장 우수한 것으로 꼽힌다. 지금 국립민속박물관에 있다.
바위 양옆에 있는 ‘雙磎’와 ‘石門’이란 글씨는 孤雲 崔致遠(857~?)이 지팡이 끝으로 썼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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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주문은 화려한 다포집이다. 앞면에는 예서체로 “三神山雙磎寺”, 뒷면에는 “禪宗大伽藍”이라는 행서체 편액에 걸려있다.
글씨는 해강 김규진이 썼다. 서산의 상왕산 개심사라는 현판도 김규진이 썼다.
일주문을 지나면, 맞배집 금강문이 나온다. 사자를 탄 문수동자와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상이 있다.
조금 더 들어가면 맞배집 천왕문이 나오고 안으로 들어서면 八詠樓가 나온다. 이들 건물은 모두 일직선상에 가깝게 놓여 있으나 산비탈을 이용한 낮은 층단이 계속되고, 중간중간에 다른 건물들이 비대칭적으로 들어서 있어 문을 하나씩 통과할 때마다 깊숙이 안으로 빨려드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3. 팔영루는 앞면 5칸 옆면 3칸의 2층 누마루이다.
眞鑑禪師 慧昭가 중국에서 불교 음악을 공부하고 돌아와 이 팔영루에서 우리 정서에 맞는 범패를 만들었으며, 많은 범패 명인을 배출하는 교육장 역할을 해왔다. 팔영루라는 이름도 진감국사가 섬진강에서 뛰노는 물고기를 보고 팔음률로써 범패를 작곡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4. 팔영루 앞에는 1990년에 세운 구층석탑이 있다. 스리랑카에서 가져온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셨다. 월정사 팔각구층탑을 닮았다.
5. 진감선사 大空塔碑(국보 제47호)는 진진성여왕 1년(887)에 세웠는데 현재 비빋침 ․ 비신 ․ 비머리 모두 온전히 남아있다.
전체 높이가 3.63m이다.
신라 말기 부도 양식에 따라 귀부는 용머리로 만들었다. 생김이 부자연스럽고 목도 짧다. 등에는 큼직한 육각 귀갑문을 둘렀고, 네발은 작은 편이다. 등 중앙 비신받침 옆에 구름무늬가 조각되었으며 윗면에는 비신을 받치는 굄이 조각되었다.
비문은 최치원이 짓고 쓴 것으로 만수산 성주사 낭혜화상 부도비, 초월산의 대숭복사비, 희양산의 봉암사 지증대사 부도비와 더불어 四山碑銘의 하나이다. 모두 2,417자의 해서체 글씨가 2cm 정도의 크기로 한 자 한 자 짜임새 있게 새겨져 있는데, 자의 운과 율에도 고저장단이 화려하게 어우러져 신품이라는 평을 받는다.
비신의 손상이 커서 쇠틀로 겨우 모양이 유지되고 있으며 글씨의 마멸도 심해 내용을 읽을 수 없으나 영조 1년(1725)에 전문을 목판에 옮겨 새긴 것이 보존되어 있다. 1686년 8월 17일 이곳을 찾은 정시한은 “篆書가 불에 맞아 상한 곳이 있어 얼마 안가서 떨어져 나갈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바받침은 산모양으로 운룡문이 힘차게 조각되었으며 앞면 가운데 “海東故眞鑑禪師碑”라는 전서체 제액이 쓰여있다. 꼭대기에는 앙화와 보주를 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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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감국사 영정/ 상주 남장사 소장
6. 대웅전(보물 제500호)은 막돌로 쌓은 높은 석축 위에 앞면 5칸, 옆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1641년에 중건하였다. 대웅전 현판은 벽암선사가 화엄사 중창을 함께 하면서 화엄사 대웅전 현판을 그대로 모각하여 이곳에 걸었다. 평방 위에 배치한 공포는 중앙 3칸은 2개씩, 좌우 협칸은 1개씩이다. 중앙 3칸에는 각각 4분의 빗살문과 교창을 달았으며 양끝 협칸에는 2분합분으로 井자 살문을 달았다. 내부는 우물마루, 우물천장으로 꾸몄다.
석가모니, 아미타, 약사의 삼존불을 모셨다. 석가모니불은 목불, 약사여래불은 금동불, 아미타불은 乾漆紙佛이다. 건칠지불은 닥종이의 약한 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삼베 - 닥종이 - 삼베 - 모시의 순서로 붙여 옻칠을 하였다. 벽암스님이 중창할 당시에는 바라보아 왼쪽 한분만 모셨던 것으로 추정된다. 오밀조밀 윤곽이 분명한 용모에 날렵한 이목구비를 갖추었고 목이 길고 어깨가 두꺼우며 가슴이 넓고 당당하며 허리도 길고 무릎도 장대하여 앳되면서도 건장한 체구를 갖추고 있는 벽안스님 당시의 양식이다. 나머지 두 분은 두 손을 모두 무릎 위에 대고 상하가 비슷하게 길어진 풍후한 얼굴, 짧은 목과 허리 등이 정조 연간의 양식이다. 그러므로 두 불상은 정조 5년(1781)에 조성하여 첨가한 듯하다.
후불탱으로 삼장탱, 제석용왕탱, 감로탱이 있는데, 감로탱은 영조 4년(1728)에 그린 것이고 나머지 둘은 정조 5년에 그린 것이다.
대웅전의 서쪽의 나한전 끝부분부터 그 아래에 건축된 효성각을 두르는 담장은, 대웅전 쪽과 나한전 사이에는 나한전 쪽으로 절반만 담을 쌓아 왕래와 시선 차단이라는 두 가지 효과를 얻고있다. 효성각을 둘러싼 담장은 흙과 막돌을 섞어 쌓았는데, 중간중간 암키와 조각으로 꽃잎을 만들고 도자기의 동그란 굽다리로 꽃심을 박았으며 조각난 기와로 ‘水’, ‘木’ 등 글씨를 만들어 박았다.
7. 대웅전에서 반야실로 가는 길에 마애불이 있다.
마애불은 바위의 한면을 사각형으로 움푹 파내고 그 아래 여래형의 조상을 두껍게 양각하여 감실 안에 안치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육계와 더불어 머리가 큰 편이고 법의도 두툼하다. 옷주름은 무릎 부분 말고는 뚜렷하지 않다. 두손은 소맷부리에 넣고 단전 앞에 모아 뭔가를 받드는 듯하며 스님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소박하다. 감실 위에 한자로 나무아미타불이라 쓰여있다. 높이는 1.35m 정도이며 고려 때의 것으로 보인다.
8. 팔상전에 더 나아가면 金堂이 나온다. 가운데 金堂, 왼쪽에 ‘六祖頂相塔’, 오른쪽에 ‘世界一花 祖宗六葉’이라는 현판에 걸려있다.
좌우의 두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썼다. 원판을 따로 보관하고 근래에 모각한 것이다.
금당은 창건 당시의 주불전이다. 중국 선종의 제六祖 慧能(638~713)의 두개골을 모신 전각이다. 이곳에 혜능의 뼈를 묻은 것은 창건설화와 관계가 있다. 삼법이 당나라에서 귀국하기 전에 ‘혜능의 頂上(두개골)을 모셔다가 삼신산의 눈쌓인 계곡 위 칡꽃이 만발한 곳[花開-꽃은 벚꽃이 아니고, 칡꽃이다]에 봉안하라’는 꿈을 꾸고 혜능의 머리뼈를 가지고 귀국했다고 한다.
<佛通> 상권 99쪽에는 당나라 開元 10년(성덕왕 21년, 722년) 신라 사람 김대비가 중국인 장정만을 매수하여 육조 혜능의 머리뼈를 훔쳐가지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공양하였는데, 육조정상탑이 이것이다는 기록이 있고, 1004년 오나라의 道彦이 지은 <景德傳燈錄-5권>에는 “사리를 훔쳤으나 그 동기가 공양에 있었으므로 용서되었다.” 김대비는 당나라 홍주 개원사에 있으면서 力士 장정만에게 돈 2천 량을 뇌물로 주고 육조탑에서 육조의 머리뼈를 훔쳐내게 해서 신라로 돌아와 공양하였다고 전한다.
벽화는 이 설화를 그렸다.
혜소가 처음 건립하고 육조영당이라 불렀다. 뒤에 금당이라 고쳐 불렀다.
그뒤 목암사의 칠층석탑을 옮겨와 탑 안에 두개골을 봉안하고 六祖頂相塔이라 부른다.
1781년에 그린 혜능의 영정도 봉안하였다.
이 칠층석탑 안에 육조 혜능의 머리뼈가 들어있다.
<육조단경-제10 付囑流通>에 혜능선사가 임종에 이르러 대중이 “후에 난이 없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혜능은 “내가 멸한 뒤 56년 뒷면 마땅히 한 사람이 와서 내 머리를 가져가리니 내 예언을 들어 두어라. 머리 위로 어버이를 봉양하고 입 속에 밥을 구하네. 滿의 難을 만날 때 楊柳가 官이 되더라”고 대답하였다.
'어버이를 봉양함'이란 김대비가 해동에 모셔다가 공양하고자 함이다. '입 속의 밥'은 淨滿이 생계를 위하여 2만 냥을 받고 범행한 것, '양류'는 당시 범행을 가리킨다.
육조선사의 재세시 제자이며 탑을 수호하는 사문 영도가 쓴 부록에,
“조사를 탑에 모신 후 개원 10년 임술 8월 3일에 이르러 밤중에 별안간 탑 속에서 쇠줄을 끄는 듯한 소리가 남으로 대중이 놀라 나가 보니 상주 차림을 한 사람이 탑에서 나와 달아났다. 곧 탑 속을 살펴보니 조사의 목에 상처가 있다. 이에 이 일을 고을에 알리니 통보를 받고 縣令 楊侃과 자사 柳無添이 세밀히 수사하기를 5일 만에 石角村에서 도적을 잠았다. 소주로 보내 심문하니 이는 張淨滿인데 汝州梁縣 사람으로 洪州 開元寺에서 신라승 金大悲에게서 돈 2만 량을 받고 육조대사의 머리를 취하고자 한 것이며, 김대비는 조사의 머리를 모시고 해동에 돌아가 공양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유자사는 이 사실을 알고 가형은 보류하고 곧 몸소 조계에 이르러서 조사의 上足인 令鞱에게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물었다. 영도가 말하기를 ‘만약 국법으로 말한다면 마땅히 베어야 옳지만 불교는 자비라 원수나 친한 이가 모두가 평등한 것인데 하물며 그가 공양하고자 범한 것이라하니 죄는 용서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유자사는 찬탄하기를 ‘이제 내가 비로소 불문이 광대한 것을 알았다’ 하고 드디어 용서하였다.”
정만의 난은 개원 10년이니 722년이다.
<景德전등록-제5권> 33조 혜능 조에도 이 이야기가 실려있다. <경덕전등록>은 남송 眞宗 4년(1004) 경덕에 道原이 편찬하여 진종에게 바친 선종의 역사이다.
9. 부속 암자로는 국사암 · 불일암 · 칠불암이 있다.
국사암(화개면 석문리)은 삼법스님이 머물었던 곳이다.
국사암 남쪽 벽에 1781년에 그린 진감국사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또 진감선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가 살아 나무가 되었다는 1100년 된 느릅나무가 있다. 이 나무가 사천왕수이다.
한쪽 방향에 여체가 있는데, 석축을 밟고 보아야 한다.
보조국사 지눌(1058~1120)의 시호를 딴 불일암은 불일폭포를 거쳐 간다.
원효 · 의상이 도를 닦았고, 고려때는 보조국사가 머물렀다.
정시한은 “불일암 문 밖 臺 위에 있는 입석에는 玩樂臺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글자의 크기가 손바닥만하며 글씨체가 ‘洗耳巖’과 비슷하다. 스님이 말하기를 이것은 최치원이 친필임이 틀림없다 한다”고 <산중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亞字房으로 유명하고, 금관가야의 김수로왕과 허황옥의 일곱 아들이 출가하여 모두 성불하였다는 지리산 운상원이 곧 칠불암이다.
칠불암에는 쌍계사 입구에서 지리산 쪽으로 더 거슬러 오르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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