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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동서원

추연욱 2011. 12. 10. 00:36

 

 

도동서원

     

1. 도동서원은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 있다. 현풍에서 도동리로 넘어가는 다람재에서 도동서원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오른쪽으로는 산줄기 사이로 낙동강이 흐르고 왼쪽으로는 대산이 강과 만나는 곳에 낙동강을 바라보며 동북향으로 서원이 서 있다.

2. 寒暄堂 金宏弼(1454~1504)을 모시고 향사하는 서원이다. 원래 1586년 비슬산 기슭에 세워 雙溪서원이라 했다.

조일전쟁으로 불타버려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었다. 1604년 먼저 사당을 지어 위패를 봉안하고 이듬해 강당 등 서원을 완성하였다. 이 건립을 주도한 사람은 김굉필의 외증손자 寒岡 鄭逑(1543~1620)와 퇴계 이황이었다.

1608년 道東書院이란 사액을 받았다. 성리학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뜻이다.

 

3. 입구에서 사당에 이르기까지 경사진 터는 폭과 넓이를 달리 하는 18단계의 석축으로 적절히 나뉘면서 비교적 넓은 곳에는 건물이, 좁은 곳에는 뜰이 가꾸어져 있다. 석축을 쌓은 기법이 동일해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높낮이와 폭의 변화가 있어 율동감이 있다.

4. 1865년 대원군 서원철폐 때도 폐지돼지 않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병산서원 · 도산서원 · 옥산서원 · 소수서원과 더불어 5대 서원의 하나로 꼽힌다.

 

 

다람재를 내려서면 서원 앞마당이 나온다.

 

다람재

 

다람재에서 본 낙동강

 

 

마당에는 寒岡 鄭逑가 서원 건립을 기념하여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서 있다. 鄭逑는 김굉필의 외증손자로, 서원은 수륜면 신정동 양정마을 봉비암 아래에 있는 檜淵書院이다.

앞에서 서원을 바라보면 막돌허튼층쌓기로 된 4단 석축이 있다. 4번째 석축 위에 수월루가 있다.

 

 

도동서원 은행나무

 

 

■ 수월루는 서원의 정문으로 2층누각이다.

처음 서원을 지을 때는 없었고, 1855년에 지었다. 서원의 제도를 갖추려면 누각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과, 서원을 출입하기에 너무 가파르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1888년 불타버려 1973년 다시 지었다.

누각 아래 문이 있지만 늘 잠겨있고, 관리사로 쓰는 전사청으로 출입한다.

 

 

수월루

 

 

수월루 안쪽은 사방이 담장으로 막힌 좁고 가파른 공간이다. 이 공간은 강학공간으로 들어서는 진입영역이다.

약간 굽은 환주문으로 이어진다.

 

■ 환주문은 절병통을 얹은 사모지붕의 작은 건물이다.

‘주인을 부른다’는 뜻의 ‘환주문’은 문이 작다. 환주문뿐만 아니라 도동서원의 문들은 모두 작다.

갓을 쓴 유생은 반드시 머리를 숙여야 들어설 수 있다. 

 

환주문 

 

 

 

그것은 건물이 북향이기 때문이다. 건물이 북향인 것은 자연 경관을 즐기기 위한 것이다.

 

이어 환주문의 안쪽이 강학공간으로 서원의 중심영역이다.

안쪽에 강당인 중정당이 높직한 기단 위에 있고 양 옆에 기숙사인 동재인 居仁齋와 서재인 居義齋가 있다.

 

 

중정

 

 

중정당(담장과 함께 보물 제350)은 높은 기단 위에 세워졌다.

기단은 정면의 길이 17m, 높이가 140cm쯤 된다. 측면은 뒤쪽으로 갈수록 대지가 점점 높아짐에 따라 기단은 점차 낮아진다.

다듬은 돌을 쌓아올리다가 판석을 앞으로 약간 내밀게 깔아 덮개돌로 삼고, 그 위에 다시 1단의 덮개돌을 들여 깔아 마무리하였다.

측면에도 같은 수법으로 기단 위에서 마루와 거의 비슷한 높이까지 돌을 쌓아올리고 쪽마루를 깔듯이 판석을 덮었다.

 

 

중정당

 

"도동서원" 현판은 퇴계 이황이 썼다.

오른쪽에 "萬歷三十五年 二月 宣賜"라 적혀있다.

'만력 35년 2월 선조대왕이 (이 현판을)하사했다.'는 말이다.

"萬歷"은 명나라 제13대 신종의 연호이고, 만력 35년은 조선 선조 40년, 1607년이다.

 

 

같은 모양의 돌이 하나도 없다. 크기가 제각기 다른 돌을 곱게 다듬어 차곡차곡 쌓았다.

네모난 돌, 여섯 모 이상인 돌, 12모진 돌도 있다. 전체의 모습은 마치 조각보와 같다. 뿐만 아니라 그 빛깔은 쑥빛, 연한 잿빛, 엷은 보랏빛 등이 농도를 달리하며 만들어 내는 은은한 색감은 참으로 아름답다.

 

 

중정당 기단

 

 

덮개돌 바로 아래에는 4마리 용이 물고기와 여의주를 물고 머리만 내밀고 있기도 하고, 다람쥐처럼 생긴 짐승이 꽃송이를 옆에 두고 오르내리는 모습이 조각된 돌이 박혀있기도 하다.

 

 

기단의 연꽃은 도포자락이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뜻이고, 용머리는 함부로 드나들지 마라는 뜻이다.

주작은 함부로 달리지 마라, 거북은 오르내리지 마라는 뜻이다.

 

중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집이다. 덤벙주초에 굵직한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우고 그위에 주심포를 짜올리고 창방의 중간마다 화반을 받쳤다. 지붕은 겹처마이며 양 측면 박공에는 풍판을 달았다. 가운데 세 칸은 대청이며, 좌우 한 칸씩은 온돌방이다. 나머지 빈 칸은 마루를 갈아 대청과 연결하였다.

 

동재서재는 크기와 구조가 같아 대칭을 이룬다. 한 칸은 마루이고, 두 칸은 온돌방이다. 특이한 것은 서쪽의 있는 거인재를 동재, 동쪽에 있는 거의재를 서재라 한다. 이것은 서원의 좌향이 북향인데 기인한다. 자연방위에 관게없이 인간의 인식을 우위에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강당 대청 앞 기단에 정료대가 있다. 긴 돌기둥과 사각형의 상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석 위에 솔가지나 기름을 올려놓고 불을 밝히는 조명대이다. 일반적으로 서원의 정료대는 야간에 치르는 제례때 쓰이는 것으로 사당 앞 마당에 설치된다.

 

서쪽 마당에 모를 접은 사각형 돌기둥에 받쳐진 판돌이 있는데 이것은 牲壇이다. ‘牲’은 향사때 쓰일 소 염소 돼지 같은 짐승을 말한다. 생단은 제사 전날 제관들이 생을 올려놓고 제수로 적합한지를 검사하는 곳이다. 서원에서 행하는 제사로는 봄가을 향사와 매월 2차례 있는 분향례가 있다.

 

담장은 진흙을 섞어가면서 막돌을 몇줄 쌓은 후에 황토 한겹, 암키와 한 줄을 되풀이하다 지붕을 덮어 마무리했다. 아래위에 두 줄로 중간중간 수막새를 박아 율동감 있게 무늬를 만들었다. 지형에 따라 꺾이고 높낮이가 바뀌면서 만들어내는 변화가 아름답다.

중정당 뒤로 돌아가면 가파른 경사에 다섯 개의 석축을 쌓고 그 터에 모란과 갖가지 꽃나무로 후원을 가꾸고 그 내삼문으로 오르는 계단을 두어 사당으로 가는 길을 내었다. 계단은 지형에 따라 곡선을 그린다. 봉황으로 보이는 짐승을 새긴 소맷돌이 있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사당이다. 사당은 제향공간으로 서원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기단은 장방형으로 다듬은 면석을 한 줄로 세우고 그 위를 판석으로 덮었다. 정평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주심포를 짜올리고 정면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을 올렸다. 정면에는 칸마다 밖여닫이 널문을 달았으며 내부는 통칸이다.

정면에는 칸마다 밖여닫이 널문을 달았으며 내부는 통칸이다.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

 

사당의 동쪽 담장에 가 있다. 담장에 정사각형의 구멍을 뚫어 제사에서 쓴 제문을 태우는 곳이다. 담장의 한 부분을 정사각형으로 파내고 담장 바깥과 통하도록 수키와를 끼워 굴뚝 역할을 하도록 했다.

사당 앞에는 화사석이 없는 석등이 있다. 절의 팔각석등과 달리 사각석등이다.

등잔이나 호롱불을 넣어 어둠을 밝히는 시설물이다.                                 

 

※ 寒暄堂 金宏弼(1454~1504)

1. 서울 정릉동(정동)에서 태어났다.

증조부가 현풍 곽씨에 장가들어 현풍은 서흥 김씨의 세거지가 되었다. 김굉필은 현풍에서 자랐다.

청소년기에는 그는 매우 호방하여 놀기 좋아하고 남의 눈치에 거리낌없이 행동하였다고 한다.

2. 18세에 박씨와 결혼한다.

결혼과 동시에 처가가 있는 합천군 야로 근처에 한훤당이라는 서재를 짓고 학문에 열중한다. 그리고 세거지 현풍, 처가인 야로, 처외가인 성주의 가천 등지를 오가며 그곳의 선비들과 교유하며 견문을 넓힌다.

3. 20세 때인 1474년 봄 김종직(1431~92)을 찾아간다.

이때 김종직은 현풍에서 멀지 않은 함양 군수로 있었다. 김굉필은 김종직의 문하에서 <소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김종직의 수제자로 성장하게 되고, 조선조 유학의 적통을 잇는다. 그러나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 때문에 끝내 죽임을 당하게 된다.

4. 26세에 생원시에 합격한다.

그러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계속 학문에만 정진한다. 그러다가 나이 마흔에 경상감사 이극균의 추천으로 비로소 벼슬길에 나선다. 그뒤 사헌부 감찰, 형조좌랑 등을 지냈다.

 

5. 연산군 4년(1498)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빌미가 되어 무오사화(1498)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들도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杖 80대”와 “遠方付處”의 형을 받고 평안도 회천으로 유배된다. 이로써 5년의 짧은 관직 생활은 끝났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단종의 폐위사건을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초나라의 의제에 비유하여 은근히 세조를 비방하고 단종을 조의한 글인데 훈구파들이 연산군을 부추겨 사림을 제거하는 빌미로 삼았다.

6.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戊午黨人이라는 죄목으로 순천으로 이배되어 귀양지에서 50세의 나이로 사약을 받는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의 생모 윤씨 폐위 · 사사사건이 동기가 되어 일어났다. 연산군이 폐비 윤씨를 왕비로 추증하고자 할 때 이에 반대하거나 윤씨가 사사될 때 찬성했던 대신들을 처단하는 과정에 사림들 가운데서도 연루된 사람들이 많았다.

7. 중종반정으로 곧 복권되었다.

중종은 신진사류를 등용하여 자신의 세력기반으로 삼았고, 그 선두에 조광조(1482~1519)가 있었다. 조광조는 김굉필의 직제자였다.

김굉필은 죽은 지 3년 뒤인 중종 2년(1507)에 사면되어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8. 그뒤 성균관 유생들의 문묘종사 건의가 계속되어 선조 8년(1575)에는 영의정에 추증되면서 文敬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으며, 이어 광해군 2년(1610)에는 臺諫과 성균관 및 각 도 유생들의 지속적인 상소로 동방오현의 한 사람으로 문묘에 배향되었다.

동방오현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유학자 다섯 사람으로 김굉필, 일두 정여창(1450~1504),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1491~1553), 퇴계 이황(1501~1570) 등을 말한다.

9, 김굉필의 제자로는 조광조 · 김안국 · 성세창 · 이장곤 등이 있다.

10. 김굉필은 고려 말 정몽주에서 시작되어 길재 · 김숙자 · 김종직에게로 전한 유학의 도통을 이어받은 조선조 사림파의 적자라 한다.

두 번의 사화를 겪으면서 그의 저술 대부분이 불태워졌다. 그래서 그의 학문과 사상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다만 문장중심으로 아직 철학적인 단계에 이르지 못한 그때가지의 유학이 실천중심, 도학중심의 이학적 성리학의 단계로 나아가는 길을 연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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