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량산은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 재산면, 안동시 도산면, 예안면에 걸쳐있다.
청량산(淸凉山) 육육봉(六六峯)을 아는 이 나와 백구(白鷗)
백구야 헌사하랴 못 믿을 손 도화(桃花)로다.
도화야 떠나지 마라 어주자(漁舟子) 알까 하노라.
청량산 입구 큰 돌에 새긴 이 <청량산가>는 퇴계 이황이 그의 집 퇴계종택에서 청랸산 오산당을 오가면서 지은 시조다.
1. 청량산은 12개 봉우리를 안고 있다.
북쪽으로 가장 높은 丈人峰(의상봉 870.4m) · 선학봉 · 자란봉 · 연화봉 · 연적봉 · 향로봉 · 탁필봉(형제봉) · 紫霄峰(보살봉) · 卓立봉 · 慶日봉 · 금탑봉 등이 병풍을 두른 듯 솟아있고, 이 봉우리들 남쪽을 지나는 918번 도로를 건너 축융봉(845m)이 마주하여 솟아있다.
청량산의 모습들
2009년 5월 4일
周世鵬(1495~1554)이 豊基郡守로 있을 때 청량산을 답사하고 12봉우리 이름을 지었는데, 그의 청량산 기행문 <淸凉山遊山錄, 1544>에 그 기록이 있다.
청량산은 본디 불가의 산이었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33개의 절과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주세붕은 청량산의 불교적 명칭들을 버리고 새로 이름을 지었다. 그 이름들은 대개 유교적이거나 도교적인 것이다.
이후의 선비들은 이 산의 모양과 기운을 그들이 지향하는 유교이념을 실현하는 길로 보았던 것 같다. 특히 퇴계 이황은 산 이름을 吾山[나의 산]이라 불렀다.
위에 인용한 시 <청량산가>에 나오는 “도화”, “어주자”는 중국 東晉의 시인 陶淵明의 <桃花源記>에서 인용한 것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동진 太元年間(376~395)에 武陵(지금의 湖南省 桃源縣)에 살던 어느 어부가 자기의 작은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중 복사꽃이 떠내려 오는 것을 보았다. 일찍이 본 적이 없어 호기심에 이끌려 점점 더 상류로 올라갔다. 그러자 한 동굴이 나왔고, 그 동굴을 빠져나오니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깨끗한 마을에 복숭아꽃이 환하게 피어있었다. 그곳의 사람들은 秦代의 전란을 피해 이곳으로 왔는데, 그 이후 수백 년 동안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왔다고 했다.
어부는 이 마을에서 3일쯤 편안히 지내다가 집으로 돌아와 보니 세상은 엄청나게 변해버렸다.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을 아무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 복숭아꽃이 핀 마을을 다시 찾아갔으나 찾지 못했다.
복숭아꽃이 환하게 핀 이곳이 武陵桃源이다. 동양인들이 이상향으로 생각하는 곳이다. 이 이야기는 후대 사람들에게 예술적 상상력의 원천이 되었고, 우리나라 문인, 화가들에게도 많은 예술적 영감을 주었다.
퇴계선생은 이 청량산을 이상향으로 생각한 것이다.
2. 안동과 공민왕
고려 제31대 공민왕(1351~1374 재위) 10년(1361) 홍건적의 제2차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된다.
어쩔 수 없이 왕과 그 일행은 11월 19일 福州(현재의 안동)로 피난길을 떠나 12월 15일 안동에 도착한다.
공민왕이 피난처로 안동을 택하게 된 것은 물론 이곳은 홍건적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탓도 있지만 그의 선조 때부터 각별한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高麗史>, 태조 13년 조에,
……12월에 견훤이 고창군(안동의 옛 지명)을 포위하므로 왕이 친히 가서 구원했다. 경인 13년 정월 병술일에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고창군 병산에 주둔했으며 견훤은 석산에 주둔하니 양군의 거리가 5백보쯤 됐다. 드디어 접전해 저물 때까지 계속됐는데 견훤이 패해 달아났다. 백제 시랑 김악이 포로되고 전사자가 8천여 명에 달했다.……경인일에 고창군 성주 金宣平을 大匡으로 임명하고 權幸 ․ 張吉을 大相으로 삼았다.
안동은 8세기 중엽인 경덕왕 때부터 古昌郡이라 했다. 조용한 고을이었다.
조용하던 고을 안동은 후삼국시대부터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안동은 경주와 소백산맥 북쪽을 잇는 곳으로 이 지역을 차지하는 세력이 후삼국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전략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고려 태조 왕건(918~943 재위)은 초기에는 견훤의 세력을 꺾을 만큼 강하지 못하였다. 더구나 안동에서 멀지 않는 상주는 견훤의 출신 지역이라 개경을 근거로 한 왕건은 지역적 기반도 약했다.
고려 태조 13년(930) 고려군은 팔공산 등지에서 후백제군에 패하여 안동으로 쫓겨 와 다시 병산에서 힘겨운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때 이 지역 호족 김선평 ․ 권행 ․ 장길 등이 왕건 편을 들어 병산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왕건은 김평선을 大匡으로, 장길과 권행은 大相으로 삼아 등용하고, 동쪽을 편안하게 했다는 뜻으로 안동이라 이름을 바꾸고 군을 승격시켜 府로 삼았다. 그리고 안동을 삼태사의 식읍으로 주었다.
김선평은 안동김씨, 장길은 안동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권행은 본디 김씨이나 ‘능히 일의 기틀을 밝게 살피고 권도를 적절히 결정하였다’는 치하와 함께 권씨 성을 내려주어 오늘날 안동 권씨의 시조가 되었다.
공민왕은 추운 겨울 피난 오는 동안 피폐한 민심을 직접 보았고, 백성들의 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온갖 고초를 겪으며 안동으로 왔다.
그러나 안동에서는 관과 민들이 온갖 정성을 다하여 공민왕 일행을 받들었다.
이 열성에 감복한 왕은 안동을 안동대도호부로 승격하고, 많은 재물을 하사하여 안동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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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사람들은 고려왕실이 안동을 충절의 고장으로 인정했었다고 생각한다.
공민왕은 안동에서 70일쯤 머무르고 이듬해 2월 개경을 수복하고 돌아갔다.
이런 까닭으로 청량산을 중심으로 공민왕과 관련된 유적이 많다.
청량산성은 공민왕이 쌓았다고 한다. 공민왕이 이곳에 머물렀다고도 한다.
이때 새긴 바둑판이 어딘가에 있다고 하는데 아직도 찾지 못했다.
현재의 산성은 둘레가 16km쯤 된다. 조선 선조 28년(1595) 관찰사 이원익이 봉화군수에게 명하여 크게 다시 쌓은 것이다.
청량산성
공민왕이 군율을 어긴 병사를 처형했다는 밀성대다.
그러나 공민왕이 이곳까지 왔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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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융봉 아래 산성마을에 있는 공민왕당은 공민왕을 마을신으로 모시는 사당이다.
공민왕당과 산신각 2007년 3월 봉화군에서 원형에 가깝게 단장하였다.
공민왕당에는 ‘曠感殿’이라는 현판을 걸고 안에는 공민왕의 위패를 봉안하고, 임금을 상징하는 용을 그렸다.
산성마을 주민들은 매년 정월 보름날과 7월 보름 백중날 동제를 지낸다.
공민왕당은 언제 건립되었는지 알려진 것이 없다
왼쪽의 작은 집은 산신각이다.
공민왕당과 산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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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에 대한 신앙은 공민왕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산성마을을 중심으로 하여 점차 인근지역으로 확산되었으며 확산의 과정에 가지를 뻗어 공민왕의 선조와 가상의 후손까지도 신격화하였다. 이리하여 공민왕 계열 신이 주변 마을 동신으로 좌정하게 된다. 신들은 친족 관계를 이루고 있다.
처음에는 산성마을 주민들이 공민왕을 마을의 신으로 받들다가 그의 부인인 노국대장공주, 그의 어머니, 사위, 딸 등이 신격화 되면서 청량산 일대는 공민왕 신앙이 자리잡게 되었을 것이다.
아마 마을의 형성과 가족주의가 정착된 조선 후기 이후일 것이다.
공민왕을 모시는 마을은 산성마을 · 하회마을 · 수동 · 용상동,
왕의 어머니를 명덕태후를 모시는 곳은 내살미 · 왕모산성의 왕모당,
왕비 노국대장공주를 모시는 곳은 아랫뒤실 · 윗뒤실,
형형 내외를 모시는 곳은 단천리,
딸을 모시는 곳은 도산면 가송리 공주당 · 등자다리 구티미,
사위를 모시는 곳은 새터,
아들을 모시는 곳은 고계 동다리,
손자 내외를 모시는 곳은 소용골 등이다.
이 중 공민왕과 왕모 명덕태후, 부인인 원나라 공주인 노국대장공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가상의 인물이다.
현재까지 조사된 바로는 공민왕 관련 신앙이 전승되고 있는 곳은 축융봉 산성마을의 공민왕당,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의 공주당, 도산면 단천리에 있는 왕모산성의 왕모당 등 주변 지역 17개 마을이 걸쳐 분포되어 있다.
역사적 인물이 신격화 되는 데는 업적의 위대함, 비극적 종말, 그리고 전승집단과 친연성이 있어야 한다.
최영장군이 그렇고, 조선 제6대 왕 단종이 그렇다.
공민왕은 즉위 초부터 반원정책을 실시한다. 원나라 제15대 순제(1333-1368)의 황후인 기황후의 오라비 기철을 위시하여 친원 세력을 숙청하고, 원나라가 설치한 정동행성의 이문소를 혁파하였으며,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 땅을 되찾는다.
또 신돈을 등용하여 토지제도와 관제를 개편하여 권문세족의 기득권을 해체하여 국가의 중흥을 도모하였으니, 이점은 공민왕의 위대성이다.
원나라 왕녀 노국공주를 왕비로 맞아 극진한 사랑을 베풀었으나 그녀는 임신 중에 죽음으로 후사를 보지 못했다. 이로 인해 비탄에 빠졌고, 비정상적인 동성애에 빠져 신하에게 시해당함으로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했으며, 홍건적의 난으로 안동으로 피란왔으므로 인근 지역 사람들은 가까이서 공민왕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런 까닭으로 공동체 신으로 좌정하였고, 점차 범위를 넓혀 인근 지역으로 확산되었으며 공민왕의 선대와 가상의 후손까지도 신격화 되었다.
우리 민간신앙에는 현실의 열악함을 초래하는 결핍의 원인은 초자연덕인 존재의 부정적 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해원사상이 있다.
이곳 사람들은 비명에 죽은 공민왕의 원한을 풀어줌으로써 자신들의 현실적 열악함을 해소할 수 있다고 믿었다.
참고한 책
한양명, <서낭님이 세배 간다>, 청량산문화연구회, <청량> 창간호, 2005년 5월.
정민호, <공민왕당>, <청량> 제3호, 2007.
2. 퇴계와 청량산
퇴계 이황(1501~1570)은 1501년 안동시 예안면 온혜리에서 태어났다.
13살쯤부터 집(현재의 퇴계종택)에서부터 50리 낙동강변을 걸어 청량산 중턱에 숙부 이우가 지은 吾山堂(현재의 청량정사)까지 가서 학문을 익혔다.
오산당은 청량산 내청량사에서 외청량사로 가는 길에 있다.
청량정사, 2005년 5월 4일
퇴계는 벼슬이 생리에 맞지 않았고, 벼슬하기 싫어했다. 그래서 여러 차례 벼슬길 나아가고, 여러 차례 사임도 했다.
그때마다 그는 청량산을 찾아 후학들과 강론을 즐겼다.
퇴계는 스스로 당호를 청량산인이라 지었다.
퇴계가 공부하던 곳에 후세의 문인들이 건물을 짓고 오산당이라 이름지었다. 대대로 강학의 장소로 삼아 학문의 맥을 이었다.
도산서원의 전신인 도산서당을 지을 때는 현재의 도산서원과 이곳 청량산을 두고 선택에 고심했다고 한다.
그는 수없이 이 길을 오르내리며 공부한 것을 익히고 사색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청량산은 퇴계의 사상의 산실이었다.
3. 예던길을 걷는다.
예던길은 농암종택에서 청량산 전망대를 거쳐, 단천교까지 5km쯤 된다. 구불구불 낙동강변을 따라 난 오솔길은 청량산을 바라보기도 하고, 등지고 지나간다.
더러는 퇴계가 출발했던 퇴계종택에서부터 도산서원에서 단천교~ 농암종택~ 고산정까지 18km를 말하기도 한다.
길은 길에 이어져 있으므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 말하기가 쉽지않다. 거기다가 길의 이름들이 하도 난립하여 많은 혼란상도 보이고 있다.
퇴계종택에서부터 단천교까지는 차가 함께 다니는 아스팔트길이라 걷기가 조금 불편하다.
烟巒簇簇水溶溶 산봉우리 봉긋봉긋, 물소리 졸졸
曙色初分日欲紅 새벽 여명 걷히고 해가 솟아오르네.
溪上待君君不至 강가에서 기다리나 임은 오지 않아
擧鞭先入畵圖中 내 먼저 고삐 잡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네.
퇴계 이황이 그의 친구 이문량에게 써서 보낸 시다. 퇴계는 청량산을 바라보며 걷는 이 길“그림 속으로 들어간다”고 표현했다.
그 영향으로 조선 중기 이후로 청량정사와 예던길이라 이름붙인 이 강변길은 유학의 성지로 여겨지게 되었으며 퇴계의 제자들은 그 스승의 발자취를 받아 이 길과 청량산을 오르내렸다.
퇴계가 밟아 다져놓은 이 길은 조선의 선비들에게 마치 순례길처럼, 생애 한 번 걸어보길 바라는 곳이기도 했다.
고산면 가송리에있는 고산정은 퇴계의 제자 琴蘭秀가 1564년에 세웠다. 처음 일동정사라 하다가 뒷산 이름을 따 孤山亭이라 했다.
퇴계선생은 도산에서 이곳까지 제자를 찾아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청량산 도립공원 들어가는 입구
이곳이 광석나루다.
돌에 '낙동강예던길'이라 썼다.
퇴계 이황은 자신이 살던 곳 도산에서 이 길을 걸어 청량산을 자주 찾았다.
2010년 11월 17일
2009년 6월 25일
'농암선생 시가비'에 <漁父詞>를 새겨 두었다.
고려때부터 구전되어 오던 <어부가>라는 노래를 농암 이현보가 短歌 5수, 長歌 9수로 개작한 것이다.
늙은 어부의 즐거움을 노래한 것이다.
<어부가>에 있는 단가 한 수
구버는 千尋綠水 도라보니 萬疊靑山
十丈紅塵이 언매나 가랬는고
江湖에 月白하거든 더욱 無心하예라.
가송리에서 바라본 고산정
孤山亭은 퇴계의 제자 琴蘭秀가 1564년에 세웠다.
퇴계선생은 도산에서 이곳까지 제자를 찾아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청량산으로 가는 길에 이곳에서 쉬어가기도 했다.
이곳을 가송협이라 한다.
농암종택
聾巖 李賢輔(1467~1555)의 종가이다.
농암을 모시고 제사지내는 서원 분강서원도 있다.
긍구당
애일당으로 가는 길
애일당
애일당 담벼락에 농암각자(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43호)가 네 쪼개진 채 조각으로 서 있다.
농암선생의 정자 옛 자리를 표시한 글씨로 ‘聾巖先生亭臺舊庄’이라 쓰여있다.
이는 분천동에 위치하던 농암의 정자인 애일당을 1차로 옮기면서 그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새긴 글씨이다.
안동댐 수몰로 다시 이곳으로 옮겨왔다.
농암종택 앞을 흐르는 낙동강
예던길은 농암종택에서 강변길을 따라 단천교로 이어진다.
예던길에서 본 청량산
왼쪽에서 두 번째 봉우리 선학봉과 그 오른쪽에 있는 자런봉을 하늘다리로 이었다.
청량산 하늘다리
청량산 하늘다리는 해발 800m 지점에 길이 90m로,
국내 산악지대에 설치된 다리로는 가장 높은곳에 있는 가장 긴 구름다리라 한다.
2009년 5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