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 은행나무길과 무섬마을- 2011년 11월 2일
가이거, 결실, 결실동행, 계수나무, 관우, 구름달, 길섶, 길섶동행, 는개, 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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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한동행, 유심초, 자리, 조아해, 조은세상, 찌릉소, 청심이, 초록맘, 풀향기(진해), 하얀수선화,
행복, 혜미니, 희진*(울산), 달마루,
이렇게 모두 44명이 함께 했다.
여기에다 반갑게도 물찬제비, 海바라기와 그들과 동서 한분 이렇게 세 분이 점심시간쯤에 찾아왔다.
그래서 오후부터는 47명이 함께 했다.
정확하게 8시, 도시철도 동래역을 출발했다.
날씨는 흐리고, 청도쯤 부터는 가는 빗줄기가 차창에 선을 그었다.
그것도 잠깐,
풍기읍에 들어섰을 때는 가로수 은행잎이 몽땅 떨어져 나무는 텅텅비어 있었다.
눈 앞이 가물가물 전신에 피로가 몰려왔다.
11시 20분에 부석사 주차장 도착했다.
부석사 매표소, 이런 모습이었다.
유치원 병아리들 한 무리가 지나갔고,
고등학생 수학여행 한무리가 또 우리 한발 앞서 지나갔다.
이 북새통을 어이할꼬?
무량수전을 향해 한발 한발 오르니 그 많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수학여행 학생들은 썰물처럼 사라졌다. 고등학생들은 여기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을가?
내가 무슨 조을증에 걸린 사람처럼 기분이 우울했다, 좋았다 변덕을 부렸다.
이제 마음의 균형을 찾았다.
무량수전 앞에서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었으니 참 다행이다.
일주문에서부터 쉬엄쉬엄 올랐다.
일주문에서,
천왕문
안양루
안양문(안양루)를 들어서면 극락세계를 형상화한 무량수전이 액자 속에 모습을 보여준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 사진: 가이거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 온 목조건물 중에서는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건물임이 틀림없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와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스다듬어 봐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최순우, 부석사 무량수전,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학고재, 1994.
부석사의 상징인 浮石 앞에서/ 사진: 가이거
모처럼 무량수전 뒤안도 돌아보았다.
무량수전에는 벽화라고는 뒷벽이 이 그림밖에 없다.
무량수전 앞마당에서 앞을 바라본다.
우리나라 절집이나 정자 등은 뒤에서 앞을 바라보는 구조로 지어졌다.
앞으로 보이는 모든 풍경이 절의 원림이다. 그래서 절 안에는 원림을 만들 필요가 없다.
浮石寺
金炳淵(1807~1863)
平生未暇沓名區 평생에 여가없어 이름 난 곳 못 갔더니,
白首今登安養樓 백수가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
江山似畵東南列 그림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벌여있고,
天地如萍日夜浮 천지는 부평같아 밤낮으로 떠 있구나.
風塵萬事忽忽馬 풍진세상 지난날이 말 달려 온 듯,
宇宙一身泛泛鳧 이 한 몸이 오리마냥 우주에 떠다니네.
百年幾得看勝景 한 평생 이런 경치 몇 번이나 구경할까.
歲月無情老丈夫 무정한 세월따라 나는 벌써 늙어있네.
조사당으로 간다.
조사당에는 부석사 창건주 의상대사의 소상을 모셨다.
조사당에서 내려와,
자인당으로 가는 길이 이렆게 예쁜 줄 나도 처음 알았다.
왼쪽이 자인당이고, 그 오른쪽이 응진전이다.
부처님의 명호 중에 자인대사란 말도 있다.
단하각이란 작은 건물
여느 절집에서는 나도 본 적이 없다.
정면, 측면 한칸의 납도리 맞배집으로 건물 안에는 손에 쥐를 들고있는 작은 나한상이 있다.
단하선사가 사리를 얻기 위해 목불을 쪼개 땟다는 “丹霞燒佛” 고사에서 온 듯하다. 따라서 선종과 관계있는 전각이다.
단하소불고사는 이렇다.
知通선사(739~823)는 등주의 단하산에 있었으므로 흔히 단하선사라 한다. 또 諱가 天然이므로 천연선사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강서 馬祖 道一스님(709~788, 중국 선종의 제8조)을 친견하고, 石頭 希遷선사에게서 크게 깨닫고 그의 법을 이어받았다.
단하선사가 운수행각을 하던 어느 겨울날 낙양의 惠林寺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추워져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화로의 불조차 거의 사위어가니 더 견딜 수가 없어 불전에 안치된 목불을 들어다가 도끼로 쪼개 불을 놓았다. 방이 훈훈해지자 그는 만족스럽게 불상이 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그 절 승려가 ‘야, 이 미친 중놈아, 이런 못된 짓이 어디 있느냐.’하고 호통을 치며 달려들었다. 그러자 단하선사는 천연스럽게 ‘너무 흥분하지 마시오. 석가여래의 몸은 화장하여 많은 사리가 나왔다기에 나도 이 부처님에게서 사리를 얻으려고 하오.’라 말하며 막대기로 재를 뒤적거렸다. 그러자 그 절의 승려는 참으로 어이가 없는 듯 ‘이 어리석은 중놈아, 목불에서 무슨 사리가 나온단 말이냐.’고 꾸짖었다. ‘사리가 안 나올 바에야 나무토막이지 무슨 부처님이요? 추워서 나무토막을 좀 때었기로 무슨 허물이라고 그런 소란을 떠는 거요.’ 하고는 양쪽의 보처불까지 들어다 불에 넣어 버렸다.
벌을 받을까 두려워 새파랗게 질렸던 그 절의 승려는 눈썹이 다 타버렸으나,
못된 짓을 한 단하선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다.
선묘낭자 영정을 모신 선묘각도 보고,
전각 안에 모셔진 선묘낭자 영정
또 이런 건물이 하나 들어서는 모양이다.
중요한 건물을 거의 돌아보았다.
1시쯤부터 점심,
천왕문 들어서면 왼쪽에 넓은 장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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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정한모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으며 가볍게 가을을 날으고 있는 나뭇잎, 그렇게 주고받는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십시오.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엄마의 치마 곁에 무릎을 꿇고 모아 쥔 아가의 작은 손아귀 안에 당신을 찾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살아가는 어제 오늘이 마침내 전설 속에 묻혀 버리는 해저 같은 그 날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달에는 은도끼로 찍어낼 계수나무가 있다는 할머니 말씀이 영원히 아름다운 진리임을 오늘도 믿으며 살고 싶습니다.
어렸을 적에 불같이 끓던 병석에서 한없이 밑으로만 떨어져 가던 그토록 아득하던 추락과 그 속력으로 몇 번이고 까무러쳤던 그런 공포의 기억이 진리라는 이 무서운 진리로부터 우리들의 이 소중한 꿈을 꼭 안아 지키게 해 주십시오.
정한모 시집, <여백을 위한 서정>, 신구문화사, 1959. |
2시 20분쯤 부석사를 떠나 3시 50분 무섬마을에 도착했다.
수도교란 콩크리트 다리를 건너 마을로 들어간다.
이 다리는 길이 180m, 폭 5.5m로 1983년에 만들었다.
마을 뒤로 무섬교란 다리가 또 하나 더 있는데, 찾아보지 못했다.
마을로 돌어가면 먼저 해우당이 나타난다.
해우당고택은 고종 때 의금부도사를 지낸 해우당 김낙풍의 집이다.
만죽재고택은 이 마을의 입향 시조인 박수 선생이 1666년에 지은 고택이다.
그밖에 김덕진, 김뢰진, 김위진, 김규진, 김정규, 박덕우, 박천립 가옥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 가운데 해우당고택, 만죽재고택, 인동장씨종택, 김규진가, 김뢰진가 등은 소수서원 옆 선비촌 재현할 때 건축의 모델이 되었다 한다.
해우당 현판/ 대원군이 섰다.
조선 고종 때 의금부도사를 지낸 해우당 김낙풍의 집이다.
이 마을 유적에 대한 설명을 이곳의 문화유산 해설사에게 양보했다.
이 마을 입구에서 보면 오른쪽으로 내성천이 마을을 휘돌아 흐르고 가운데는 둑방길,
그 왼쪽에 마을이 들어서있다.
이곳 무섬마을에 사람이 들어온 것이 17세기 무렵이라 한다.
처음 이곳에 들어온 가족은 영주 지역의 명문가인 반남박씨(潘南朴氏) 입향조 박수이며 그 뒤로 영조 때 그의 증손녀 사위인 선성 김씨(예안김씨) 대(臺)가 들어왔다. 그래서 이 마을은 수백년 동안 두 집안의 집성촌이 되었다.
수도리에는 38동의 전통가옥이 있는데, 그 가운데 16동이 조선 후기에 건축된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으로 그 역사가 100년이 넘는다. 그 중 가옥 아홉 채가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마을을 대충 둘러보고,
벗님들은 이 마을 유산보다 금모래빛 내성천을 구불구불 건너는 외나무다리에 더 관심이 많은 듯.
내성천은 경북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 선달산(1,236m) 남쪽 계곡에서 발원해 봉화읍,
영주시 평은면 水島(무섬마을)리 마을을 한 바퀴 감싸 돈 후 문수면, 예천군 지보면을 지나 문경시 영순면 삼강리에 이르러 낙동강 본류와 합쳐진다.
내성천은 조선시대에도 모래가 많아 사천(沙川)으로 불리었다.
4대강 공사로 모래는 강바닥어서 강변으로 자리를 옮겼고,
오직 내성천만 모래강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모래층은 탁한 미립점토나 유기물을 걸러내어 수질을 정화하여, 생태계를 풍요롭게 한다.
네성천 중ㆍ상류에 비교적 많은 인구가 살고 있음에도 수달이 사는 깨끗한 강으로 남아 있는 것은 콩팥 역할을 해주는 모래 덕분이다.
평은면 평은교 아래 물에서.
손에 들어있는 작은 생명은 새우 새끼다.
사진은 "다음 아고라"에서 인용
2년쯤 후 여기서 멀지 않은 상류에 영주댐이 완성되면 강물이 줄고 모래톱에 풀이 무성해질 것이 뻔하다.
물길은 더욱 야위어 도랑이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다리도 없어질 것이다.
지금의 모래와 왕버들과 단풍 물든 산과 황금들녘은 올해가 마지막이 될 것이다.
내성천의 수많은 생명들과 들꽃, 달빛과 별빛은 이제 우리 곁에서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른다.
영주시 평은면·이산면 일대에 들어서는 영주다목적댐은 국내 하천 환경개선을 주목적으로 하는 댐이라 한다.
총 8797억원을 투입, 높이 55.5m, 길이 400m, 총저수용량 181만100㎥ 규모로 건설된다.
2009년 12월 착공, 2012년으로 댐 본체 축조를 마칠 것이라 한다.
댐이 완공되면 연간 2억300만㎥의 하천유지용수 · 생활용수를 공급하고.
홍수조절용량도 7500만㎥ 확보해 내성천 및 낙동강 유역의 홍수피해를 경감할 수 있다고 말한다.
2013년 댐이 완공되면 영주시 평은면 금강마을, 총 447세대가 완전히 물에 잠긴다.
400년이 넘는 역사의 흔적과 문화재를 간직하고 살아있는 박물관,
40여 년 전 무섬마을에는 다리가 세 개 있었다 한다.
예전 이 자리에 있었던 다리 이름은 몽동(夢童)골다리다. '꿈속 아이들이 건너는 다리'라는 뜻인 것 같다.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로 일꾼들이 물 건너 논밭으로 일하러 가는 다리이고,
콘크리트다리 자리에 있던 다리는 있었던 도랑나들다리는 아침이면 아이들이 학교 가는 다리였고,
마을 뒤편에 있었던 뒷나들다리는 영주 장날이나 나들이 갈 때 건너는 다리였다고 한다.
1973년 콘크리트 다리 수도교가 생긴 뒤 지난 350여 년간 이 마을과 바깥 세상을 이어준 유일한 통로인 외나무다리가 철거되었다.
그러다가 2005년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한 것이 현재의 외나무다리다.
금빛 모래톱과 은빛 여울에 말뚝 188개를 박고 그 위에 널판 124개를 얹었다.
4시 55분 무섬마을을 뒤로 하고 차에 올랐다.
부산에 도착한 것은 8시였다.
함께 해 주신 벗님께 감사드린다.
특히 김해의 신정님, 밀양의 마을님, 진해의 풀향기님과 야생화님, 울산의 희진*님께 감사드린다.
떡을 주문하고, 아침 일찍 떡집을 찾고, 마실 것을 사서 무거운 짐을 들고 오신 미산님과 뿌리님,
감귤 한 박스를 주신 자리님,
부석사 에서 맛있는 떡 세 박스를 주신 초록맘님께 크나큰 고마움 전한다.
그리고 물찬제비님, 海바라기님 3동서 찾아오신 반가움 길이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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