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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보종찰 통도사

추연욱 2011. 8. 18. 12:03

 

 

 

 

불보종찰 통도사

 

 

 

 

영축산

 

▴ 통도사는 영축산(1058m) 남쪽 기슭에 있다. 조선 중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취서산이라 하였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이 썼다는 일주문에는 “靈鷲山通度寺”라 하였다.

 

영취산이란 이름은 본디 중인도 마가다국 왕사성 동북쪽에 있는 기사굴산을 번역한 것이다.

‘耆’는 ‘수리鷲’, ‘崛’은 ‘머리頭’의 뜻이다. 그 산 정상부가 독수리 머리 모양과 같기 때문이라 하였다.

 

<대지도론> 3권에 따르면 왕사성 남쪽 시타림에 鳥葬을 위해 시체들이 버려지는데, 이 시체들을 먹는 독수리들이 이 산 정상으로 돌아와 쉬고 있으므로 영취산이라 불렀다고 했다. 독수리들은 사람이 죽으려고 하면 미리 알고 기다리고 있다가 시타림으로 시체를 버리면 날아와 먹었으므로 신령스럽다 하여 ‘靈’자를 붙여 영취산이라 불렀다고 했다.

 

붓다께서는 생의 후반을 거의 영취산 피팔라굴에서 지냈다. 이런 까닭으로 대승경전 대부분도 이곳에서 설했다.

<법화경>을 비롯한 여러 경전 첫머리에 “이와같이 나는 들었다. 부처님께서 왕사성 기사굴산 중에 머무시어……”라 시작한다.

<법화경> 제16 여래수량품에는 석가세존께서 열반에 드신 것은 無相法을 보이기 위한 방편으로 행하신 일일 뿐 실제로는 이 영취산에 늘 머물러 계신다고 하였다.

 

영취산을 또 취서산이라고도 했다. 독수리가 살고 있는 산이라는 뜻일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영축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영축산 정상부

 

 

 

 

통도사

 

통도사는 선덕여왕 15년(646)에 慈藏律師가 창건하였다.

자장율사는 선덕여왕 5년(636) 당나라에 들어가 수학하고 643년 귀국한다.

당나라로부터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붓다의 사리와 袈裟,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대장경 400여 函을 봉안하고 절을 창건하고, 절 이름을 통도사라 하였다.

 

通度寺란 이름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있다.

 

① 전국의 승려는 모두 이곳의 金剛戒壇에서 得度한다.

② 만법을 통달하여 일체 중생을 계도한다.

③ 산의 모양이 인도의 영축산과 같아 부처님이 상주하신다.

 

고려 초에 사세가 확장되어 절을 중심으로 四至石標, 즉 國長生石標를 둘 만큼 대규모로 증축되었다.

특히 현존하는 중요 석조물이 고려 초기인 제13대 선종(1083~1094 재위) 대에 조성되었으므로, 가람의 정비는 이때 중점적으로 이룩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 당시의 중요한 석조 조형으로는 금강계단 상부의 석종형의 삼층석탑, 拜禮石, 奉鉢臺, 그리고 국장생석표 등을 들 수 있다.

그밖에 현존하는 목조건물들은 모두 조일전쟁 이후에 건립되었다.

 

통도사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계곡을 따라 길게 펼쳐져 있다. 동쪽 곧 천왕문에서부터 下爐殿, 中爐殿, 이어 절의 중심이 되는 上爐殿으로 이어진다. 이 세 구역은 각각 낮은 축대를 경계로 독립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도 절 전체가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로전의 법당은 금강계단과 대웅전을 비롯하여 應眞殿 · 冥府殿 · 三聖閣 · 산신각 · 一爐香閣이 있다.

후벽의 탱화를 위시하여 내외벽화는 주목되는 불화들이다. 대웅전, 나한전, 명부전, 삼성각, 산영각

중로전의 건물은 觀音殿 · 龍華殿 · 大光明殿 · 世尊碑閣 · 藏經閣 · 海藏寶閣 · 皇華閣 · 甘露堂 · 圓通房 · 華嚴殿 · 篆香閣 등이 있다.하로전의 중요 건물들은 영산전 · 극락전 · 藥師殿 · 萬歲樓 · 影閣 · 범종각 · 가람각등이 있다.

 

상중하로전의 배치는 고려 조선조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중창되는 과정에 형성되었다.

창건 당시부터 있었다고 생각되는 건물은 대웅전, 대광명전, 영산전 뿐이다. 

상중하로전을 잇는 중심축이 휘어져 있어서 멀고 깊게 느껴진다.

 

 

■ 일주문에는 흥선대원군이 쓴 ‘靈鷲山通度寺’란 편액이 걸려있다.

       두 기둥의 주련에는 해강김규진이 쓴 “佛之宗家”, “國之大刹”이란 주련이 걸려있다.

       붓다의 사리를 모시고 있으므로 불지종가, 나라의 으뜸 사찰이라는 뜻에서 국지대찰이라 했다.

고려 충렬왕 31년(1305)에 처음 세워진 것으로 전한다. 현제 건물은 조선 영조 46년(1770)에 중수한 것이라 한다. 맞배지붕에 포작이 l9개나 있어 매우 화려하다.

 

일주문 바로 앞에 "方袍圓頂常要淸規 異姓同居必須和睦"이라 쓴 돌기둥이 있다. 단체생활의 기본 규칙을 말한 것이다.

 

1. 하로전 영역은 천왕문을 들어서서 불이문에 이르기까지의 공간이다.

      남향한 영산전을 바라보고 왼쪽으로 약사전, 오른쪽으로 극락보전, 맞은편에 만세루, 이렇게 네 건물이 하나의 마당을 가운데 두고

      튼 口자로 둘러서 있고, 마당 가운데 신라말기에 만든 삼층석탑이 있다.

 

 

■ 천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집이다.

      고려 충숙왕 복위 6년(1337)에 처음 지었으며 현재 건물은 조선후기에 건축된 것이라 한다.

      안에 있는 사천왕상은 조선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천왕문은 하로전으로 오르는 문이며, 하로전으로 들어가면 곧 영산불국이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각 전각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 범종각은 숙종 12년 처음 지었다.

       대종 역시 그때 지어졌다. 절의 종은 梵鐘이라 한다.

      ‘梵’은 산스크리트어 Brahma를 음역한 말이다. ‘淸淨하다, 寂靜하다’는 뜻이다.  

      곧 청정한 절에서 쓰는 맑은 종소리의 종이라는 뜻이다.

대종 외에 법고, 雲板, 목어와 함께 있다. 이 넷을 佛前用四物이라 한다. 모두 붓다에게 예배드릴 때 사용되는 물건이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또 이 넷은 불음을 전파한다는 뜻도 담고 있다.

범종은 지옥의 중생을, 법고는 축생의 무리를, 운판은 허공을 나는 짐승을, 목어는 수중의 어류를 향해 소리를 보낸다는 것이다.

 

범종루 위에 喚惺 志安(1664~1729)의 시가 걸려있다.

洞口連平野 동구는 평야에 이어졌고,

樓臺隱小岑 누대는 작은 봉우리를 감추었네.

居僧懶不掃 한가한 스님은 쓸지 아니하여,

花落滿庭心 낙화만 뜰 가운데 가득하구나.

 

예로부터 고산 제일의 절은 오대산 월정사, 야산 제일의 절은 통도사라 했다.

 

 ■ 가람각  

범종루 뒤에 있다. 사방 1칸의 작은 집이다. 가람(절)을 수호하는 가람신을 모셨다. 본디불교의 신이 아니고 민간에서 받드는  신이기 때문에 신의 위상은 낮다. 그래서 천왕문 아래 자리잡았다.

숙종 32년(1706)에 처음 지었고, 현재의 건물은 근래에 지은 것이다.

 

 

가람각은 구석에 있어 잘 눈에 띄지 않는다.

 

 

 

 

密護伽籃聖神之位

 

 

■ 영산전은 하로전의 중심 전각으로 창건 당시 중노전의 대광명전, 상노전의 금강계단, 대웅전과 함께 통도사의 골격을 이루는 건물이었다.

       남향한 영산전은 초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숙종 30년(1704)에 중건된 후로 여러 차례 보수 중건되었다.

       장방형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약간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정면,  측면 3칸의 맞배지붕집이다.      

 

안에는 목조 석가여래좌상을 모셨다. 건물의 정면인 남쪽을 바라보지 않고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후불탱화로 석가모니가 영산에서 설법하고 있는 영산회상도가 걸려있다. 가로 2.33m, 세로 3.9m이다. 영조 10년(1734)에 그린 그림으로 통도사에서 가장 오래된 탱화이다.

팔상탱화(보물 제1041호)는 가로 1.51m, 세로 2.33m이다. 畵記에 의하면, 영조 51년(1775)에 조성되었다.

팔상탱화의 중앙에 당대의 명필 弘經스님의 원불 전단항목불입상이 있다.

 

서쪽 벽에는 가로 2.2m, 세로 5.5m나 되는 다보탑그림이 있다. 풍령과 구슬을 단 구층탑이다. 3층에는 석가여래와 다보여래가 나란히 앉아 있다. 탑 좌우에는 보살상과 제자상이 각각 네 분씩 그려져 있다. 탑의 지붕은 금빛으로 장식되어 있다.

숙종 30년(1704)년 중건되 때 그렸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 약사전은 고려 공민왕 18년(1369)에 처음 지었다.

      중건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현재의 건물은 조선 중기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안에는 약사여래불을 중심으로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 通度寺 藥師佛會圖은 약사전 후불탱화이다.

       영산전 팔상도와 같이 영조 51년(1775)년에 그렸다. 화면 중앙에는 須彌座에 결가부좌한 본존이 자리하였고,

       그 주위를 日光, 月光을 비롯한 10보살과 聖衆이 둘러싸고 있으며, 또 그 밖으로 사천왕과 12신장이 外護한 구도로,

       조선 후기에 유행한 전형적인 원형구도의 群圖 형식을 이루고 있다.

       본존은 원형광배를 지니고 있는데 손에는 藥壺를 지니지 않고 설법의 수인을 취하고 있다.

       이 약사도는 17,18세기 조선불화의 불상모습에서 보여지는 塊量感이나 묵중함은 거의 느껴지지 않고,

       윤곽이나 신체의 세부묘사가 작고 섬약한 느낌을 주고 있다.

       18세기 약사불화의 전형적인 도상을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시대의 불화양식을 알려주는 작품 중의 하나이다.

 

■ 극락전은 고려 공민왕 18년(1369)에 약사전과 함께 지었다.

       현재의 건물은 대략 조선 중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극락전 뒤 어칸 벽면에 반야용선이 그려져 있다.

 

 

 

 

 

 

 

■ 만세루는 영산전을 마주보는 자리에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집이다. 조선 영조 22년(1686)에 처음 지었고, 현재의 건물은

       숙종 12년(1746)에 중건된 것으로 전  해지나 여러 차례 보수가 있었다.

       본디 법회나 법요식을 행할 때 사용하는 누각이었으나 지금은 토산품판매장이다.

 

■ 삼층석탑 하층기단에는 안상이 새겨져 있고, 상층기단에는 모서리기둥과 버팀기둥이, 각층 몸돌에는 모서리기둥만 새겨져 있다.

       지붕돌받침은 4층이다. 상륜부눈 모반과 복발 일부가 남아있다.

 

삼층석탑 앞의 배례석은 부처님을 향해 합장하고 절을 올리는 곳이다.

       돌의 좌우로 연화문을 새기고 그 왼쪽 끝에는 “太康王一年乙丑二月 日 造”라 글자가 쓰여 있다.

       ‘王’자는 후세에 누국가가 ‘十’자를 고친 것이다. 그런데 ‘태강십일년’은 없다. ‘

       태강’은 중국 요나라 道宗의 연호인데, 태강은 십년(1084)에 끝난다.

       ‘을축’은 다음해인 1085년이다. 그러므로 이 배례석은 고려 선종 2년(1085)에 조성한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때 어떤 임금이 늘 이곳에서 금강계단에 참배했다고 한다.

 

하로전 구역에 과거에 승방으로 사용했던 明月寮, 금당 등의 건물이 있다.

천왕문 옆에는 사방 한 칸의 가람각이 있다. 가람신을 모신 집이다. 숙종 32년(1706)에 처음 지어졌고, 지금의 건물은 근래에 새로 지은 것이다.

 

2. 중로전은 불이문을 들어서서 세존비각에 이르는 공간이다.

       불이문을 지나면 중로전과 상노전의 법당들이 펼쳐진다.

       일렬로 늘어선 관음전과 용화전 대광명전, 세존비각과 관음전 용화전 대광명전이 이루는 축 사이에 들어서 있는

       개산조당과 해장보각이 있다.

 

■ 불이문은 1.5m쯤 되는 석축 위에 서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집이다.

       고려 충렬왕 31년(1305) 처음 지었고, 지금의 건물은 조선 중기 어느때 새워진 것이다.

       정면 3칸에는 모두 문을 달아 출입하게 하였으며 뒷면에는 벽체도 문도 없다.

       대들보가 없는 중앙 천장에는 호랑이와 코기리가 서로 마주보며 이마로 종보를 받치고 있다.

       호랑이든 코끼리든 불이문을 들어서면 모두 하나가 된다는 뜻일 것이다.

       양쪽 대들보 위에는 ㅅ 자 모양의 솟을 합장재를 짜 넣었다.

불이문을 들어서면 대웅전을 마주하게 된다.

 

 

 

 

■ 관음전은 정면, 측면 3칸의 팔작지붕집이다.

       조선 영조 원년(1725)에 창건된 이래 여러번 중수에 오늘에 이르렀다. 안에는 관세음보살을 모셨다.

 

 

 

■ 용화전은 관음전 뒤에 있다.

      정면 측면 3칸의 맞배지붕집이다. 고려 공민왕 18년(1369)에 처음 지어졌고,

      현재의 건물은 조선 영조 원년(1725)에 중건된 것이다. 안에는 미륵불을 모셨는데 크기가 2m나 된다.

 

* 통도사 봉발탑(보물 제417호)은 석등과 거의 같은 구조의 대석 위에 뚜껑을 덮은 큰 돌바릿대(石壺)를 얹은 석조물이다.

       대석은 석등 대석과 마찬가지로 下臺石, 竿石, 上臺石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하대석은 판석을 깐 넓은 지대석 위에 覆蓮石을 놓은 것인데, 하반부에는 상하 두 가닥의 테를 돌리고 그 둘레를 8등분하여

       기둥모양 8개를 양각하였다. 상반부에는 4중의 重瓣蓮花紋을 새기고, 윗면에는 3단의 얕은 굄을 새겨 간석을 받치게 하였다.   

       간석은 단면이 사각형의 모를 깎은 부등변팔각형의 기둥인데, 한가운데에 대나무 같은 마디를 음각하고 위아래의

       사면을 약간씩 홀쭉하게 다듬었다. 상대석은 원형의 仰蓮形인데, 측면에는 8엽의 복판연화문을 돌리고,

       윗면에 3단의 얕은 굄을 마련하였다. 이 석조물에 대하여 통도사에서는 石壺 또는 衣鉢塔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을 용화전 앞에 건립한 데에는 신앙상의 뜻이 있는 듯하다.

       불가에서는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가사와 바리대를 傳法의 의표로 전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부처의 衣鉢을 용화전의 주불인 미륵보살이 이어받을 것을 상징한 조형물로 생각된다.

 

 

 

■ 大光明殿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집이다.

      통도사 창건 장디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의 건물은 조선 영조 원년에 중수한 것이다.

전각 내외 기둥머리 위로 모두 용이 조각되어 있다. 전각 좌우 천장 아래 도리 위에는 “吾家有一客, 定是海中人, 口呑天漲水, 能殺火精神 내 집에 한 손님이 있으니, 정녕 바닷사람이리라. 하늘에 넘치는 물을 입으로 머금어 능히 불의 정신을 줄일 것이니라”라는 시가 적혀있다. 이 오언절구는 화재를 막으려는 부적이다. 전각의 용틀임 장식 역시 화재를 막는 것과 관련이 있다.

안에는 목조비로자나불을 독존으로 봉안하였다. 단아한 사대부의 형상을 보이고 있다. 진경시대의 영조 연간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비로자나삼존 탱화(보물 제1042호)는 영조 35년(1759) 7월의 작으로 비단바탕에 채색을 했다. 법신, 보신, 화신 삼신불을 나타낸 그림으로 華嚴曼다羅에서 분화된 것이며, 근원은 화엄경의 석가여래 成道相에서 비롯된다. 일반적으로 삼신불이라 할 경우 법신불에는 비로나자불, 보신불에는 노사나불, 화신불에는 석가여래로 비정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는 대웅보전에 三如來를 봉안할 경우 석가, 미타, 약사여래가 봉안되는 경우도 있다. 중앙은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이 지권인을 결하며 결가부좌하고 있다. 왼쪽에는 보신불인 노사나불이 설법인을 짓고 있는데 보살형의 보관을 쓰고 있다. 주존불의 오른쪽에는 화신불인 석가여래가 항마촉지인을 결하고 앉아 있는데, 法衣는 앞의 두 여래가 通肩으로 표현된 것과는 달리 右肩偏袒이다. 세폭으로 이루어진 이 삼신불도는 전체적인 구도에서 보면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있다. 이 삼신불도는 1774년에 조성된 직지사 대웅전 삼신불도나 1804년에 조성된 선운사 대웅전 삼신불도가 석가, 미타, 약사여래를 표현한 것과는 달리, 비로자나, 노사나, 석가여래를 표현한 점이 다르다. 세로 460cm, 가로 315cm이다.가 있었는데, 지금은 성보박물관에 있다.

 

宋나라 때의 고승 豫章宗鏡의 시

 

報化非眞了妄緣 보신, 화신 참이 아니고, 망연으로 인함이니

法身淸淨廣無邊 법신은 청정해서 가이없구나.

千江有水千江月 천 강의 물에 천 강의 달이여

萬里無雲萬里天 만리에 구름이 없으니 만리의 하늘이더라. 

 

대광명전 뒤에 정광여래부도라 전하는 부도 1기가 있다. 지붕돌이 없어져 전체 높이는 1m쯤 된다.

 

■ 세존비각은 중로전의 끝 서쪽에 있는 사방 한칸의 팔작지붕집이다.

      이 비각은 숙종 32년(1706) 桂坡스님이 금강계단을 중수하면서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시게 된 사연을 적은 비석을 세우고

      지은 비각이다. 비각 안에는 높이 약 2.5m, 폭 1.5m쯤 되는 비가 있다.

      가운데 도깨비상을 조각하고 양쪽에 꽃무늬를 새긴 비받침이 있다. 천장에 비석을 내려다보는 용을 그렸다.

裟婆敎主釋迦如來靈骨浮圖碑라는 제명이 있다. 비문은 蔡彭胤(1669~1731)이 썼다.

 

■ 개산조당과 해장보각은 조선 영조 3년(1727)에 창건되어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다.

      현재의 모습은 고종 4년(1867)에 중수한 것이다. 개산조당은 솟을삼문 형식의 문으로 해장보각의 출입문이다.

      해장보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집으로 안에는 자장율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영정은 가로 1m, 1.7m이다. 순조 4년(1804)에 그렸다. 외벽에는 민화풍의 까치 호랑이 그림이 그려져 있다.

 

3. 상로전은 통도사의 가장 핵심인 금강계단과 대웅전이 있고,

    대웅전을 ㄷ자로 둘러싸고 명부전, 나한전, 삼성각, 일로향각 등 건물이 있다.

    상로전도 창건 이래 계속 건물이 지어져 오늘에 이르렀다.

 

■ 구룡지는 통도사 창건설화에 등장하는 곳이다.

자장율사가 중국 종남산 운제사 문수보살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니 문수보살이 나타나 가사 1벌과 진신사리 100알, 붓다의 머리뼈와 손가락뼈, 염주, 경전 등을 주며 “그대 나라 신라의 남쪽 鷲栖山 아래 독룡이 사는 神池가 있는데, 그 용들이 비바람을 일으켜 곡식을 상하게 하여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대는 용이 사는 연못에 금강계단을 쌓아 이 불사리와 가사를 봉안하면 三災(물, 바람, 불의 재앙)가 들어오지 못하며 만대에 이르도록 불법이 전하며 천룡이 떠나지 않고 지켜주는 곳이 되리라” 하였다.

 

그후 자장이 사리와 그밖의 성물들을 가지고 귀국하여 몇 곳에 절을 짓고 사리를 봉안하였다. 다시 선덕여왕과 함께 절 지을 곳을 찾아 이곳 독룡이 사는 신지에 이르러 설법하여 용들의 악한 마음을 조복받아 못을 메우고 계단을 쌓아 사리를 봉안하였다.

 

통도사 창건 이전에 이곳은 큰 못이었다. 그 못에 아홉 용이 살았는데, 용을 쫓아내고 못을 메워 절을 지었다. 아홉 용 가운데 다섯 마리는 오룡동으로 세 마리는 삼룡동으로 가고 오직 한 마리만 이곳에 남아 절을 지키겠다는 서원을 세우므로 이 못을 만들어 용이 머무르게 했다 한다.

 

 

 

■ 삼성각은 대웅전 서쪽 구룡지를 중심으로 응진전과 산신각 사이에 있다. 조선 고종 7년(1870) 처음 지었다. 현재의 건물은 1935년 경봉선사가 중건한 것이다.

안에는 중앙에 삼성탱, 그 오른쪽에 칠성탱, 왼쪽에 독성탱을 봉안하였다. 중앙의 삼성탱은 지공, 나옹, 무학의 3대화상을 모셨다. 지공은 인도의 승려로 <사리부도비>에 고려 충선왕(1309~1313) 때 바다로 떠와서 설법했더니 많은 대중이 모였다고 하였다. 나옹화상은 고려 말의 승려로 중국에 가서 법을 구했다. 속전에는 고양이를 처음 가져왔다는 말이 있다. 무학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산 승려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왕사가 되었다.

칠성은 북두칠성을 말한다. 별의 왕으로 인간세계의 복과 수명을 맡았다고 한다.

독성은 나반존자를 말한다. 탱화 앞에 높이 40cm쯤 되는 목각상을 안치했다.

 

 

■ 명부전은 서향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집이다. 고려 공민왕 18년(1369)에 처음 지어졌다. 조선 영조 36년(1760)에 다시 지었고, 고종 24년(1888) 화재로 불탔다. 이듬해 다시 지었다. 특이하게도 양쪽 끝은 판창문을 달아 창고로 쓰고 있다.

안에는 지장보살과 사왕상을 모셨다.  

 

■ 응진전은 동향 건물로 정면, 측면 3칸의 맞배지붕집이다. 숙종 3년(1677)에 창건되어 이후 조금씩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안에는 석가여래와 좌우에 미륵보살과 제화갈라상을 모셨다. 그 주변에 16나한상과 멈천, 제석천을 모셨다. 옆면 외벽 중앙에 신장상이 있다. 

 

■ 호혈석

은 응진전 바로 옆에 있다. 호혈을 눌러야겠다고 하여 큼직한 돌을 놓아두었다. 돌의 길이는 약 1.5m, 폭은 80cm쯤 된다. 이런 호혈석이 극락전 바로 옆 북쪽에도 있다.

 

■ 무풍교는 냇물이 양쪽에서 만나는 곳에 여의주봉이라는 작은 봉우리가 있고, 그 봉우리 옆에 냇물을 가로지르는 곳에 있다.

 

■ 삼성반월교는 일주문 옆에 있다. 경봉선사가 건립했다. 三星과 半月은 心자를 나타낸 것이다.

 

■ 일승교는 화엄전 앞에 있다. 본디 있던 다리는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떠내려가고, 현재 다리는 1963년에 건립된 것이다. 이 다리를 건너 남쪽에 새로 복원한 오층석탑과 암자로 갈 수 있다.

 

 

■ 비로암은 고려 충목왕 원년(1345) 창건되었다. 중건에 관한 기록은 조선 선조 11년(1578)에 중건한 기록만 있다.

 

비로암 금강문 천장

 

 

■ 극락암은 極樂護國禪院이라고도 한다. 통도사에서 서북쪽으로 1.5km쯤 떨어진 곳에 있다. 고려 충혜왕 복위 5년(1344)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후 중건 중수에 대해서 날려진 것이 없다. <통도사약지>에 따르면 조선 영조 34년(1758) 중건했다고 한다.

1968년 祖室(산중 최고 원로 스님)鏡峰禪師(1892~1982)가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부속 암자 중 규모가 가장 크다. 독립된 절의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지만 산내암자에 속해 있으므로 암자라는 칭호를 갖고있다.

극락암 입구에 극락영지라는 작은 연못이 있어 영축산 상봉이 비친다. 그 못 위에 무지개다리를 놓았다.

선원 정면에 영월루라는 편액이 붙은 누각이 있고, 그 왼쪽 계단 위 높은 곳에 진여문이 있다. 누각 위 북쪽으로 연강당이 있고 그 바로 옆에 선원 큰 방이 있다. 선실 왼쪽에는 壽世殿이 있고, 이 법당 바로 뒤에 조사당이 있다. 조사당에는 석가여래 이후 33조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연강당에서 마주보이는 북쪽에 수도원이라는 편액이 붙은 또 하나의 작은 선실이 있고, 그 뒷쪽에 조실 三笑窟이 있다.

 

 

극락암 方丈

 

  

극락영지 

 

 

 

극락암 아래 북쪽 산 언덕에 김유신의 할아버지 무력각간의 묘가 있다. 조선 후기에 조성된 문인석이 있다.

 

■ 반야암

 

 

 

■ 자장암은 자장율사가 통도사를 짓기 전에 움집을 짓고 수도하던 곳이다. 그러므로 자장암은 진평왕 때(579~632 재위) 창건되었다. 1870년, 1963년에 중건한 기록이 있다.

법당은 4칸의 작은 인법당(사람이 거처할 있는 작은 암자의 법당)이며 그 북쪽에 요사가 있다. 요사 남쪽으로 높이 4m쯤 되는 ㄷ자 모양의 바위에 마애불이 있다. 1896년에 만들었다.

법당 뒤쪽 암벽에서 맑은 물이 흘러나오고, 그 샘 위 바위에 손가락 하나 들어갈 구멍이 있는데, 자장율사가 통도사를 짓기 전 이곳에서 수도하고 있을 때 개구리 두 마리가 나타나 맑은 물을 흐리게 함으로 자장율사가 신통력으로 석벽에 한 구멍을 뚫어 개구리가 들어가게 했다. 그후부터 한쌍의 금개구리로 또는 벌과 나비로 나타난다고 한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 하권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축서산 통도사 자장암 절 석벽에 拇指 하나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있으니 그 속에 한쌍의 蛙子(작은 개구리)가 있다. 몸은 청색이고 입은 금색인데 어떤 때는 벌과 나비가 되기도 하여 그 변화하는 것이 헤아릴 수 없다. 여름철에 바위가 과열되면 뜨겁기가 솥과 같으나 그 위를 자유로이 뛰어다닌다. 寺僧이 이를 일러 금개구리라 하였다. 그런데 이 금개구리는 도무지 산문 밖을 나가지 아니한다고 하므로 한 때 어떤 관리가 그 말을 믿지 아니하고 그 개구리를 잡아 盒中에 넣어 嚴閉 하고서 손으로 움켜쥐고 돌아가다가 도중에 열어보니 없어졌다. 世傳에 그 개구리는 자장율사의 신통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말한다.” (278쪽)

 

개구리는 지금도 가끔 나타난다고 한다. 금개구리를 보고 못봄에 따라 부처님에 대한 신심의 두께를 가늠한다고 한다.

 

 

 

 

 자장암에서 바라본 영축산 능선

 

 

 

■ 옥련암

 

옥련암 대웅전

 

 

■ 서운암은 고려 충목왕 3년(1346)에 창건되었다. 그후 조선 철종 10년(1859)에 중건한 기록이 있다. 언젠가 상서로운 구름이 암자 주변을 감돌았던지 서운암이란 이름이 붙었다.

주위에는 대숲이 빽빽이 둘러있고 앞에는 논밭이 이어져 있다.

 

 

 

 

■ 백련암은 통도사 부속 암자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다. 만세루 앞 일승교 건너 남쪽 산기슭에 삼층석탑이 있다. 이 탑은 통도사 창건 당시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데 무너져 있던 것을 근래에 다시 세웠다.

 

 

■ 通度寺 國長生石標(보물 제74호)은 양신시 하북면 백록리 35번국도 옆에 있다. 높이 1.67m, 너비 0.6m의 돌기둥이다. 표면에 크기 6~10cm쯤 되는 한자들이 네 줄로 음각되어 있다. “통도사 솔내천 국장생 일좌[通道寺孫仍川國長生一座]는 절에서 문의한 바 상서호부에서 을축 5월자 통첩에 있는 이전의 판결과 같이 고쳐 세우게 함으로 이를 세운다. 太安 원년 을축십이월”

태안 원년 고려 선종 2년(1085)이다. 당시 통도사 소속 땅을 표시하기 위해 세운 경계표다. 당시 통도사 주변에는 이런 국장생석표가 12곳에 세워졌다고 한다. 현재 울산시 삼남면 상천리 국장생표만 남아있다.

국장생이란의 명칭은 國命에 의하여 건립한 장생이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장생(里數를 표하기 위하여 길가에 세운 표말)은 그 시대, 위치, 재료에 따라 명칭이 다르기도 하나, 신라 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長生標柱, 木榜長生標, 石蹟長生標, 石碑長生標, 長栍, 長偶, 長丞{將丞), 벅수, 법수 등으로 불려졌으므로 일반적으로 장생이라 부른다. 이들은 守護神, 里程標, 境界標 등의 구실을 하고 있으며, 풍수지리설과 함께 민속신앙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통도사의 장생은 경계표와 비보의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확인된 국장생석표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리 도갑사 입구의 것과 경남 밀양시 무안면 무안면의 것이 있다.

 

 

통도사 국장생석표(보물 제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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