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주성(사적 제118호) - 진주시 남성구 또는 본성동
진주는 본디 가야의 땅이었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거열성(또는 거타성)이었다가, 삼국통일 후 문무왕 때 주를 설치하였고, 신문왕 때는 거타주를 나누어 진주 총관을 두었다. 경덕왕 때 강주로, 혜공왕 때 청주로 고쳤다. 고려 태조 때 다시 강주로 부르고, 성종 14년(995)에 진주로 바꾸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성이 옛터만 남아 언제 쌓은 것인지 알 수 없는데,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여 고려 우왕 3년(1377) 가을에 성을 수리하였다고 했다. 이때 성의 둘레는 800보이고 성벽의 높이는 약 8m을 넘고 의정문(서쪽), 지제문(북쪽), 예화문(남쪽)이 있었으며, 성밖의 서쪽에는 청천이, 남쪽에는 긴 강(남강)이 흘렀으며, 북쪽에는 못이 있는데 성과 못 사이에는 참호를 팠다고 한다.
조선 선조 25년(1592) 조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호남으로 진출하려는 왜적을 막는 관문이 되었다.
1979년부터 정화 사업을 펼쳐 진주성은 지금의 모습으로 단장되었다. 진주성 안에는 국립진주박물관, 정충단, 의기사, 북장대, 서장대, 창렬사, 호국사 등의 유적들이 있다.
* 촉석루는 남강 가 바위 벼랑에 높이 솟은 아름다운 누각이다.
남원의 광한루, 밀양의 영남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이라 한다.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규모가 매우 크다. 본디 진주성의 남장대(지휘소)로 장원루라고도 했다. 이 누각은 전쟁이 일어나면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 본부였고, 평화로운 시절에는 향시를 치르는 고시장으로도 쓰였다.
고려 공민왕 14년(1365년)에 창건하여 7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다. 현재 건물은 한국전쟁 때 완전히 파괴된 것을 1959년 원형대로 복원한 것이다.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진주성을 함락한 왜병들은 이곳에서 자축연을 벌였다.
* 북장대는 성 안팎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본디 외성이 산으로 이어져 있었고, 1900년까지 1km의 해자가 있었다.
* 호국사(전통 사찰 제70호)는 진주성 안 서장대와 창렬사 사이의 골짜기에 있다.
이 절은 고려 말기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진주성을 수축하고 승병을 양성하기 위해 지었다.
조일전쟁 때는 승군의 본거지였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내성사였으나,
조일전쟁 후 성과 함께 전사한 승병들의 공적을 찬양하고 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숙종이 호국사란 이름을 내리고 다시 세웠다.
* 창열사(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호) 진주성 안 호국사 옆에 있다. 정사호란 사람이 세웠다.
조선 선조 40년(1607)에 임금이 사당의 이름을 지어 내려 주었다.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제1차 진주성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김시민 장군(1554∼1592)을 모신 충민사가 없어지자 신위를 창열사에 모셨다.
이곳에는 지금 충무공 김시민장군의 신위를 맨 윗자리에 모시고 창의사 김천일(1537∼1593), 충청병사 황진(1542∼1606),
경상우병사 최경희(1532∼1593) 등 39분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 의암(경상남도 기념물 제235호)은 촉석루 아래에 있다. 1593년 7월 29일 논개가 왜장을 안고 남강에 빠져 죽은 바위이다.
* 의암사적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53호)는 2차 진주성전투 때 진주성이 함락되고 논개가 순국한 사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1722년에 세웠다.
* 의기사는 논개의 사당으로 1739년(영조 16년)에는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촉석루 옆에 논개의 애국충정을 추모하여 세웠다.
그뒤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의기사에는 김은호가 미인도를 논개영정으로 봉안하였다.
김은호의 미인도는 1955년 그렸는데, 1960년에 의기사에 봉안하였다.
이 그림은 복식과 머리 모양이 당대의 맞지 않아 논란이 되어왔다. 논개의 옷은 16세기 옷이 아니고 19세기 말의 옷이다.
조일전쟁 전의 저고리는 허리까지 내려오고 소매는 풍성하고 직사각형에 가깝다.
또 고름을 길게 한 것은 19세기 말 중국 복식이다.
2005년 5월 시민단체들이 친일파 김은호가 그린 논개영정을 철거했다.
윤여환 교수가 표준영정을 제작하여 2008년 국가표준영정 제79호로 지정하고, 2008년 5월 23일 영정 봉안 고유제와 제막식을 가졌다.
2008년 새로 봉안한 논개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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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堂 金殷鎬(1892~1979)가 그린 논개영정
2005년 시민단체에서 철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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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부터 매년 5월 27일 의암별제를 지낸다. 교방굿거리라는 춤을 추는데 이 춤은 논개가 왜장을 유인할 때 춘 춤이다.
※ 논개(1574~1593)는 성은 주씨(朱氏)이며, 본관은 신안이다.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주달문, 어머니는 함양박씨이다. 주달문은 한학에 밝아, 향리에서 청년 자제들에게 글을 가르친 선비였다고 한다.
열네 살 나던 해인 1587년, 아버지가 돌아가자 논개와 어머니는 숙부 주달무에게 의탁한다. 주달무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토호인 김풍헌에게 논개를 민며느리로 팔고 행방을 감추었다. 이 사실을 안 논개 모녀는 외가인 안의의 봉정마을로 피신하였는데, 김풍헌이 당시 장수현감인 최경회에게 이를 알려 심문을 받게 하였다. 논개 모녀로부터 전말을 들은 최경회는 이들을 무죄로 인정하고, 관아에 머물며 병약한 아내의 시중을 들게 하였다. 논개의 아름다움과 재능을 인정한 현감 부인이 남편 최경회에게 논개를 소실로 맞이할 것을 권유한 뒤 지병으로 숨을 거둔다.
이렇게 해서 논개가 18세 되던 해 1591년 봄, 최경회의 부인이 되어 무장현감으로 부임하는 남편 최경회를 따라 장수를 떠났다.
최경회가 1593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하여 진주성싸움에 참가하게 되자 논개도 진주로 왔는데, 진주성 함락과 함께 순절하였다.
※ 조일전쟁과 진주성 싸움
조일전쟁은 1592(선조 25)년 4월 13일부터 1598년까지 햇수로는 7년, 달수로는 6년 7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중간 3년 휴전 기간을 빼면 실제로 4년쯤 전쟁을 치렀다. 1차 침입이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 2차 침입이 정유년에 있어서 정유재란이라고 부르나 일반적으로 임진왜란 하면 정유재란까지를 포함하여 말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임진왜란이란 말을 쓰지 않고 조일전쟁이라 쓴다.
진주성싸움은 두 번 있었다.
첫 번째 싸움은 1592년 10월 5일부터 10일까지 6일간 계속되었다. 10월 5일 왜군 30,000명이 진주성으로 쳐들어 왔다. 당시 일본군은 경주 등지에서 밀려 서생포로 쫓겨간 뒤 거점이 흔들렸고, 바다에서는 이순신에게 번번이 패전한 뒤부터 전라도로 가는 길이 막혔다. 일본군은 경상 우도의 주력군이 진주에 있다는 것을 알고 진주성을 함락하여 조선군의 거점을 빼앗고 전라도로 들어가는 길을 뚫고자 하였다. 진주성은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가는 요지인데다가 곡창지대인 호남으로 가는 관문이기 때문이다.
이때 진주성에는 진주 목사 김시민의 군사 3,700여명과 곤양 군수 이광악의 군사 100여명뿐이었다. 성 밖에서는 곽재우 의병과 최경회 의병이 적을 교란하며 성원했다. 이런 상태에서 일본군은 더 버티지 못하고 퇴각했다. 적의 손실은 엄청났고, 아군의 피해는 별로 없었다. 이 전투에서 김시민은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1차진주성 싸움은 행주대첩(1593년 2월), 이순신의 한산도대첩과 함께 조일전쟁 3대첩이라 한다.
2차진주성 싸움은 1593년 6월 20일부터 29일까지 열흘간 계속되었다. 이 무렵 명나라 군대가 들어와 평양성을 수복하자 일본군은 서울에서 철수해, 5월 말경에는 거의 모든 병력이 후퇴해 부산으로 10만 명가량 모여들었다. 명나라 장수들은 일본과 강화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1차진주성싸움에서 패전한 것을 수치로 여겨, 진주성을 점령하고 장기간 머물 성을 쌓을 것과, 진주성에 있는 사람은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했다. 명나라는 일본과의 회담을 이유로 싸움을 피했고, 도원수 김명원, 권율 등이 진주성에 도착했으나 적의 기세에 눌려 후퇴하였다.
성 안에는 의병장 김천일, 진주목사 서예원,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김해부사 이종인 등이 군사 3500명과, 진주 관민 6만여 명이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에 비하면 전투에 참여한 군사의 수는 십대 일이었다. 그것도 외부와 단절된 독안에 든 쥐와 싸움이었다. 치열한 싸움 끝에 결국 성 안의 군사와 관민들은 모두 전사하였다. 황진은 서문을 지키다가 이미 전사했다. 목사 서예원은 도망쳤다.
나머지 장수들은 남강 가 바위에 모였다. 장수들은 북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무기를 강물에 던지고 김천일, 최경회, 이종인 등이 차례로 강물로 뛰어들었다. 김천일은 아들 김상건의 손을 잡고 뛰어들었으며, 이종인은 적군과 격투하다가 양쪽 팔에 적군을 하나씩 끼고 강물로 뛰어들었다.
일본군은 촉석루에서 진주성 승전 축하 잔치를 벌였다. 이 자리에 논개가 기생으로 위장해 끼어들어 접대를 맡았다. 논개는 왜장들이 술에 취해 비틀거리자 한 장수를 촉석루 밑으로 유인하여 끌어안고 강물로 뛰어들었다. 그 장수는 뒷날 가등청정 휘하에 있던 게야무라 로쿠스케로 밝혀졌다.
일본군은 진주성에 장기간 주둔하기 위해 성을 수리하는 한편 이웃 마을로 다니면서 노략질을 해댔다.
일본의 주력부대는 이 승리로 육로를 통해 전라도로 진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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