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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망양정 · 월송정 · 금강송숲길

추연욱 2011. 6. 6. 22:31

 

울진 망양정 · 월송정 · 금강송숲길

 

■ 망양정-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

 

望洋亭은 성류굴 앞으로 흐르는 왕피천을 끼고 동해를 굽어볼 수 있는 언덕에 있다.

 

고려 때는 여기서 15km쯤 아래쪽인 기성면 망양리 해변 언덕에 있었다.

1517년 폭풍우로 넘어진 것을 중종 13년(1518) 안렴사 윤희인이 평해군수 김세우에 부탁하여 중수하였고,

철종 1년(1858) 울진현령 이희호가 郡承 임학영과 함께 현재의 위치인 근남면 산포리 둔산동으로 옮겨지었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 어수선한 시기를 거치면서, 주춧돌만 남아 있던 것을 1957년 울진교육청이 지역인사들의 도움으로 1959년 중건하였다.

1979년 보수 정화하였다. 1994년 다시 보수하였으며, 2005년 건물을 완전히 해체하고 새로 건립하여 현재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사진은 울진군청 홈페이지에서 빌렸다.
   

 

 

 

 

위의 사진은 2008년 9월 5일 필자가 찍은 것이다.

 

 

‘망양정’의 ‘望洋’이란 이름은, 겉으로 드러나는 뜻은 ‘바다를 바라본다’이지만

깊은 속뜻이 있다고 한다.

 

<장자>, 秋水편에, 

 

가을 물이 때가 되어(물은 봄에 나서 가을에 성하게 된다고 한다) 모든 냇물이 황하로 들어오니, 탁한 물결이 멀리 넘쳐흘러, 양쪽 기슭에 놓아먹이는 마소들을 분별하기 어려웠다. 이에 河伯(황하의 神)은 기뻐하여 천하의 장관이 모두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가서 北海에 이르렀다. 거기서 다시 동쪽을 바라보니 그 물끝을 볼 수 없었다. 하백은 비로소 얼굴빛을 고치고 멍하니 若(북해의 신)을 향해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다.

“시골말에 ‘백쯤의 道를 듣고 천하에 자기만한 이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하더니, 그것은 나를 두고 한 말인가 하오. 또한 나는 일찍 仲尼(공자)의 학문을 적게 여기고 백이의 義를 가벼이 여기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않았더니, 이제 당신의 그 끝없음을 내 눈으로 보게 되니, 만일 내가 당신의 문 앞에 나오지 않았더라면, 길이 大方家(大道를 얻은 사람)의 웃음거리가 될 뻔했소.”

 

“우물 안 개구리에게 바다를 말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우물에 구속을 받기 때문이요, 여름 벌레에게 얼음을 말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때(여름)를 굳게 믿기 때문이며, 옹졸한 선비에게 도를 말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敎(墨子 등의 가르침)에 얽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자네는 냇물에서 나와 큰 바다를 보고 자네의 못난 것을 아니, 자네와는 더불어 큰 이치를 이야기할 만하구료. 천하의 물로서 바다보다 큰 것은 없으니 모든 냇물은 끊임없이 여기로 들어와도 찰 줄을 모르고 尾閭(바다의 동쪽에 있다는 바닷물이 새어 나가는 곳)로 끊임없이 새어 나가도 마를 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또 봄이나 가을을 따라 변하지 않고, 장마나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니 이것은 저 江河의 물보다 많아서 그 수량을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

김달진 편, <莊子>, 고려원, 1989.

 

여기서 ‘望洋之嘆’이란 성어가 나온다.

‘망양지탄’은 ‘지금까지 알지 못한 위대한 것을 보고 감탄하며 자신의 좁은 소견을 부끄러워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망양정은 예로부터 관동팔경 중에도 경치가 으뜸으로 꼽혔다.

고려 말 李穀(1298~1351)의 <東遊記>, 조선 광해군 때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李山海(1539~1609)의 <아계유고>, 古山子 金正浩가 1861~1864쯤 간행한 <大東地誌> 등 여러 문헌에 그 아름다운 경치가 소개되어 있다.

 

그 경치가 관동팔경 중 제일가는 곳이라 하여 숙종(1674~1720 재위)은 “關東第一樓”라는 친필 편액과 시를 내렸고,

 

정조(1776~1800 재위)도 망양정을 제재로 시를 지었다.

 

正祖의 어제시

元氣蒼茫放海溟 일기 창망한 때 바닷가로 내쳐지니,

誰人辯此望洋亭 뉘라서 이곳에 망양정을 알 수 있으리.

恰如從目仙尼宅 흡사 문선왕 공자의 집을 구경하는 듯,

宗廟官墻歷歷經 종묘며 관창 담들이 뚜렷이 구분되어있구나. 

 

망양정 李山海

枕海危亭望眼通 바다를 낀 높은 정자 전망이 탁 트여,

登臨猶足盪心胸 올라가 보면 가슴 속이 후련히 씻기지.

長風吹上黃昏月 긴 바람 황혼의 달을 불어 올리면,

     禁闕玲瓏玉鏡中 황금 궁궐이 옥거울 속에 영롱하다네.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1745~?) 등 조선시대 화가들도 그림을 남겼다.

 

단원 김홍도는 금강산 주변의 네 개 군을 그려 <금강산 사군첩>이라 하였는데, 관동팔경이 모두 들어있다. 이 <망양정도>는 현재의 자리로 옮기기 전, 기성면 망양리 해변에 있을 때의 모습이다. 
   

 

 

 

조선 선조 13년(1580) 송강 정철(1536~1593)은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다.

이때 그는 금강산을 유람하고, 이어 동해안 관동팔경을 따라 내려오면서 그 마지막 여정에 망양정을 찾는다.

 

……

하늘의 끝을 못내 보아 망양정에 오르니,

바다 밖은 하늘이니 하늘 밖은 무엇인고.

가뜩이나 성난 고래, 뉘라서 놀라게 하기에,

불거니 뿜거니 어지러이 구는고.

은산(銀山)을 꺾어내어 육합(六合)에 내리는 듯,

오월 장천에 백설은 무슨 일인고.

곧 밤이 되니 풍랑이 고요해져,

부상 지척에 명월을 기다리니,

천길 서광이 보이는 듯 숨는구나.

……

나도 잠을 깨어 바다를 바라보니 깊이를 모르니 끝인들 어찌 알겠는가.

명월이 천산만락에 비추지 않는데가 없구나.

<관동별곡>

 

 

망양정 현판은, 蔚珍文化院 附設 蔚珍歷史硏究所長 金成俊의 고증으로 울진군수를 지낸 적이 있는 李台榮이 1962년 초에 썼다고 한다. <울진문화 제16호>

 

 

 

 

 

 

이에 앞서 망양정을 현재의 장소로 옮겨짓기 전에는 숙종 16년(1690) 전에는 숙종대왕이 현판을 써서 眼原君에게 보내 달게 했다. 그런데 <大韓每日申報> 1910년 4월19일자 기사에 따르면 “망양정의 현판 글은 숙종대왕이 御製했는데, 그 정자가 훼손되어 철거한 후 그 현판을 고을 객사에 두었더니, 원산의 재무감독국 임원인 일본인 슈등정부(사이또 마사히로)가 재무 시찰차 왔다가 그 현판을 구경하고 가져갔다”고 하였다.

 

 

월송정은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에 있다.

월송정이란 이름은 신라 때, 네 국선 영랑 · 술랑 · 남석 · 안상 등이 이곳 울창한 소나무 숲에서 달을 즐겼다 하여 月松亭이란 이름을 얻어다고 하고,  

또 越나라에서 소나무 묘목을 가져다 심었다 하여 越松亭이란 이름을 얻었다고도 한다.

 

지금은 각종 문헌을 바탕으로 ‘越松亭’으로 정했다.

 

고려 충숙왕 13년(1326)에 존무사 박숙이 처음 지었다. 이때는 경치를 즐기는 정자가 아니고 왜구의 침입을 감시하는 망루였다.

조선 연산군 때 박원종이 관찰사로 와서 정자로 중건하였다.

1933년 퇴락한 건물을 중건하였으나,

일제 말기에 미군 폭격기의 표적이 된다 하여 일본 해군이 헐어 버렸다.

1969년 재일교포들이 신축하였지만, 철근콘크리트에 전망대 같은 건물이어서 옛 모습과 같지 않아 헐어 버리고,

1980년 정면 5칸, 측면 3칸의 고려양식으로 복원하였다.

 

 현판에는 이때 임시 대통령을 지냈던 최규하의 친필이 새겨져 있다.


누대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잊고 登樓遊子却行路

낙목이 가로 놓인 조국을 탄식하네 可歎檀墟落木橫

남아 27세에 이룬 일이 무엇인가 男子二七成何事

문득 가을바람이 부니 감개만 이는구나 暫倚秋風感慨生

 

신돌석(1878~1908) 장군이 1905년 평해 월송정에서 읊은 한시다.

 

 

정조의 시

정자를 둘러싼 송백은 울울 창창한데

갈라진 나무껍질 세월이 오래로다.

넓고 푸른 바다는 쉼없이 출렁이는데

돛단배는 석양에 무수하게 떠 있구나

 

 

 

 

滄溟白月半浮松 넓은 바다 위로 밝은 달 소나무에 걸려있네.

叩角歸來興轉濃 소뿔 끌어당기며 돌아오니 흥이 더욱 깊구나.

吟罷亭中仍醉倒 시 읊조리다 취하여 정자에 누웠더니,

丹丘仙侶夢相逢 단구의 신선들이 꿈속에서 반기네. 

 

 

정자 밖에 구산해수욕장이 있다. 

 

■ 관동팔경

대관령 동쪽의 여덟 경승지로 동해 바다를 배경을로 한 정자, 누대, 절 등이 포함되어 있다.

북쪽에서부터

① 통천의 三日浦 ② 고성의 叢石亭 ③ 간성의 淸澗亭 ④ 양양의 洛山寺

⑤ 강릉의 鏡浦臺 ⑥ 삼척의 竹西樓 ⑦ 울진의 望洋亭 ⑧ 평해의 越松亭

등이다.

 

월송정 대신 흡곡의 侍中臺를 넣기도 한다.

시중대는 江原道 통천군 흡곡면에 있는 대이다.

 

이들 여덟 경승지가 언제 관동팔경이란 이름으로 정착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고려 때 안축의 <관동별곡>과 송강 정철의 가사 <관동별곡>에서 그 연원을 찾기도 하지만 '8경'으로 요약된 것은 아니다.

 

송강 정철은 '관동팔경'이란 말은 쓰지 않았다. 

"……산중을 매양 보랴 바다로 가자스랴"라 하면서 위의 '팔경' 중 월송정은 없고, 의상대가 들어 있다.

 

17세기 사대부 사회에서 기행의 풍류가 크게 일어나고,

18세기 기행문학이 보편회되면서 항간에서 '8경'으로 굳어진 듯하다.

 

겸제 정선(1617~1759)과 단원 김홍도는 관동팔경도를 그렸다.

겸재는 여덟 폭 화첩으로 그렸고,

 

겸재 정선의 <월송정>

 

 

 

단원은 <금강산 사군첩>에서 금강산 주변의 네 개 군을 그렸는데,

관동팔경이 모두 들어있다.

 

19세기 민화시대에는 간결하고 해학적인 필치로 사실성보다 반추상으로 꿈과 상징적인 풍경으로 '8경'을 그리기도 하였다.

 

 

 

 

■ 울진 소나무는 울진군 서면 작은빛골(소광리), 큰빛골(대광리)에 걸쳐 있다.

 

 

• 소나무

우리말 ‘솔’은 ‘으뜸’을 뜻하는 ‘수리’가 변한 말이다. ‘으뜸되는 나무’, ‘나무 중의 나무’라는 뜻이다.

나무줄기는 소나무 특유의 붉은색을 띠어 적송이라 한다. 육지에 난다하여 육송이라고도 한다.

한자어로는 소나무의 기품이 군자와 같다 하여 군자목이라 한다.

 

예로부터 소나무는 ‘民族樹’로 불리었다.

소나무로 지은 집에서 태어나 소나무 숲에서 살다가 소나무로 만든 관에 담겨져 소나무 숲에 묻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소나무는 6500만 년 전 중생대 백악기에 지구상에 처음 나타나서 현재 약 100종이 자라고 있다고 한다.

우리땅에는 6000년 전부터 자라기 시작하여 3000년 전쯤 한반도 전역으로 퍼졌다 한다.

 

 

우리나라 소나무는 자라는 지역에 형태도 다르다.

 

 

 

 

 

 

 

 

 

 

 

 

 

 

 

 

송편에 향기를 내기 위하여 잎을 쓰고, 솔잎 끝만 잘라 말린 다음 이것으로 솔잎떡을 만든다.

솔잎을 넣어 발효시킨 솔잎술도 만들었고,

전쟁이나 흉년 같은 어려운 시기에는 소나무 속껍질을 벗겨 松肌죽, 송기떡을 만들어 먹었다.

송화가루를 이용해 다식을 만든다. 

 

백두대간 자락인 울진군 서면 소광리 백병산과 삿갓재(해발 1,118m)에 이르는 4백 80여만 평의 국유림에 우리나라 향토 수종인 金剛松 1백여 만 그루가 군락지를 이루고 있다.

특히 보존상태가 좋은 곳은 36번 국도에서 13km 떨어진 곳이다.

빛내골은 국내에서 가장 긴 골짜기인 불영계곡(16㎞)과 이어져 있고,

숲길 옆으로 소광천이 흘러 1급수에서만 사는 버들치들이 살고있다.

 

울진군 서면의 소나무숲에는 10년생에서부터 525년생까지 소나무가 살고있는데, 평균 수령은 150년이다.

대부분 지름이 40cm쯤 되지만 60cm가 넘는 나무도 1,673그루에 달한다고 한다.

키는 보통 20m 정도이고 35m에 달하는 나무도 있다. 평균 키는 23m라 한다.

줄기의 지름은 작은 것이 6㎝ 큰 것은 110㎝나 된다.

이곳에서 나는 소나무 한그루로 전통 가옥 한 채를 지을 수 있다고 한다.

소나무의 밑둥치가 하도 넓어 소나무를 잘라 낸 그루터기에 장정 여섯 명이 앉아 중참을 먹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나이 많은 나무는 대왕송이라 부르는 525살 먹은 나무로 조선 성종 때 태어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지름 96cm, 키는 25m쯤 된다. 여느 금강소나무와는 달리 곧지도 잘생기지도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오래 보호될 있었을 것이다. 

 

1959년 농림부가 대관령과 이곳의 소나무를 육종림으로 지정했으며,

1982년에는 천연보호림(82-2호)으로 지정해 체계적인 보존이 시작되었다.

 

1998년부터 산림청은 우리나라 최상품 소나무인 이곳의 소나무 숲에 대한 기록과 구전을 토대로 생태조사를 실시해,

"백두산 원시림 보다 보존상태가 좋다"고 하였다.

1999년에는 문화재 보수, 복원용 목재림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또 산림청은 또 2000년 이곳을,

‘22세기를 위해 보존해야 할 국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지정하고 본격적인 보호에 나섰다.

2010년 3월 문화재청은 울진군 서면 소광리 산 29번지 일대 금강송 군락지 203,496㎡에 대해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으로 지정 예고했다.

 

 

 

 

 

해발 1천m 이상인 이 지역 산에 빽빽이 심어져 있던 소나무는,

일제강점기 철도가 부설되고 신작로가 개설되는 등 교통이 발달되자 베어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엄청나게 많은 양의 소나무가 봉화군 춘양역을 통해 외지로 반출되었는데,

당시 지역에서 생산된 금강소나무 목재를 춘양목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나마 남은 것도 한국전쟁을 전후해 군용열차로 실어날랐다.

그러나 다행히 소광리 일대는 불편한 교통으로 인하여 금강소나무가 잘 보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숲의 소나무가 좋은 금강소나무 형질을 갖게 된 것은,

바닷가에 자라는 곰솔의 꽃가루가 날아와 이곳 내륙 소나무와 자연적인 잡종이 되고,

그 후손이 자연조건에 맞추어 변화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곳 소나무가 곧게 자라는 이유 중 하나는 눈이 많이 내리기 때문이다.

겨우내 눈이 가지 위에 쌓이면 자잘한 가지들이 눈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나간다.

이 때문에 줄기가 가지를 치지 않고 위로 곧게 자랄 수 있는 것이다.

 

또 소나무숲이 유지된 데는 산불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숲의 천이(숲이 변해 가는 것)는,

소나무처럼 자라는데 많은 광선이 필요한 양수가 먼저 자라다가 그 밑에서 올라오는 그늘에서도 잘 견디는 음수와 경쟁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빛의 양이 줄어들면 소나무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으므로 점차 산꼭대기로 쫓겨 가다가 나중에는 사라진다.

따라서 이곳의 숲이 고스란히 있었으면 참나무 숲이 되었을 터인데 작은 산불이 일정한 주기로 일어나 그늘이 되는 나무를 제거하는 역할을 한 덕택에,

또 이 지역이 비교적 건조하여 소나무가 살아남기에 유리한 조건이어서 오늘의 모습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 금강송 ‧ 황장목 ‧ 춘양목

① 금강송은 주로 금강산, 설악산, 태백산 등지에 분포한다.

"金剛'이란 불경에 의하면 견실하여 이 세상의 만물과 번뇌를 부술 수가 있으며,

이 세상의 어떤 번뇌와 만물도 금강을 부술 수 없다는 뜻이다.

일반 소나무에 비해 성장속도가 아주 느려 재질이 단단해져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를 줄여 剛松이라고도 한다.

일반 소나무의 나이테 간격은 5㎜~1㎝ 정도지만 이곳의 소나무는 1~2㎜로 매우 조밀한 것이 특징이다.

껍질이 얇고 잘 썩지 않아 옛부터 고급 건축자재 · 棺材 등으로 널리 사용됐다.

 

목재의 결이 아름답고 단단하며 재목으로 쓰기 위해 송판으로 켠 뒤에도 크게 굽거나 갈라지지 않고 송진이 많아 잘 썩지도 않기 때문에 예로부터 소나무 중 으뜸으로 쳤다.

따라서 궁궐이나 큰 사찰 등 권위 있는 건물을 지을 때 소나무 중에서도 최상급 목재인 금강소나무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일부 격이 떨어지는 사찰이나 한옥에서 느티나무, 잣나무, 참나무 등을 사용하기도 했으나,

격이 높은 건물엔 대부분 금강소나무를 사용하였다.

강원도 지역에서 주로 자란다고 江松이라고도 한다. 

 

② 소나무가 400~500년 되면 나무 속 부분[心材部]이 굳어 빛깔이 노래진다.

이를 黃腸이라 하고 그렇게 된 나무를 黃腸木이라 한다.

 

조제한 목재는 심재 부분은 변재 부분에 비해 수분 함량이 적어 부피에 비해 가볍고 건조 과정에 변형이 적다.

황장목 심재부를 취하여 주로 왕실에서 관 또는 梓宮(왕, 왕대비, 왕비, 왕세자 등의 시체를 넣던 관이다.

중국에서는 가래나무(梓)로 관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생겼다)을 만드는데 썼다.  

 

③ 춘양목이란 이름은 이곳 태백산 일대에서 벌채된 금강송이 출발하는 기차역 이름(영동선 춘양역)에서 비롯됐다.

195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봉화 인근의 춘양지역은 벌채된 금강송 집산지였고,

철로를 따라서 전국 각지로 운송되어 출발지의 이름을 따서 춘양목이라 하였다.

오늘날 이 지방에서 소나무가 본이름인 金剛松 또는 강송보다 춘양목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광륭사 목조미륵보살 반가상은 우리땅에서 자라는 소나무로 만들었다고 일본학자가 1951년 밝혔다.

또 1980년대 불상의 미소에 반해 가까이 다다간 일본 대학생이 실수로 불상의 새끼손가락 하나를 부러뜨리는 사고를 낸 적이 있다.

이를 수리하는 과정에 정밀한 조사를 통해 그 나무가 한국의 적송, 곧 태백산맥에 자생하고 있는 금강송,

원산지는 경상북도 봉화임이 밝혀졌다.

 

 

광륭사 목조미륵보살반가상(일본 국보 제1호)

 

 

 

 

■ 소광리 봉계표석(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00호)은 영주, 울진을 연결하는 36번 국도에서 소광리 금강소나무 생태경영림으로 진입하는 917번 지방도로변에 있다.

 

조선 숙종 6년(1680)에 백성들이 소나무 벌채를 금하고자 하여 세운 표지석이다.

자연석에 “黃腸封界 界地命 生達峴 安一王山 大里 堂城 山直命吉”이라 새겼다.

“황장목의 봉계지역을 생달현, 안일왕산, 대리, 당성 등 네 지역을 주위로 하고 이를 길이라는 산지기로 하여금 관리하게 한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황장목을 보호하여, 국가적인 필요에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산에 출입통제를 제도적으로 실시하였다.

 

이렇게 입산이 금지된 산을 조선 전기에는 황장금산, 숙종 이후에는 황장봉산이라 했다.

이 산들을 보호하기 위해 표지로 황장금표, 황장봉표를 각각 세웠다.

치악산 입구에는 금표, 소광리 장군터 옆에는 봉표를 세웠다.

영월군 수주면 법흥1리 새터마을 도로변, 인제군 한계리 폐사지 축대석에도 금표가 있다.

 

후기로 내려올수록 권세가들이 산림을 사유화하면서 소나무를 보호하기가 곤란해졌다.

이러한 문란한 임정을 쇄신하고 관리의 부정을 막고자 하여 숙종 때 금산제도 대신에 封山제도를 도입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황장봉산 제도는 숙종 6년(1680)부터 시작되었다.

봉산제도란 국가에서 필요한 특정한 용도의 목재(조선재, 관곽재, 신주용 목재)를 공급하기 위한 지역을 설정하는 제도이다.

 

봉산은 船材封山, 黃腸封山, 栗木封山이 있다.

선재봉산은 戰船과 漕運船을 만드는데 필요한 소나무와 참나무를 생산하는 곳이고,

황장봉산은 왕실에서 필요한 관을 만들거나 궁궐 건축에 필요한 소나무를 생산하는 곳이다.

율목봉산은 神主를 만드는데 필요한 밤나무를 생산하려고 지정한 산림이다.

 

조선 순조8년(1808) 편찬된 <만기요람(왕에게 경제, 군제, 토지 등에 대해 보고하기 위해 편찬)>에 따르면,

전국에 봉산은 282개소가 지정되어 있었으며 그중 황장봉산은 60개소로 나타나고 있다.

영조 때의 기록을 보면 황장목 보호구역은 경상도에 7곳, 전라도에 3곳, 강원도에 22곳이 있었다.

이렇게 지정된 봉산에는 봉표를 자연석 등에 새겨 나라에서 지정한 산림임을 쉽게 알게 하였고 일반인이 함부로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의 이러한 보호로 울진 봉화 지역의 소나무는 잘 보전되어 왔다.

 

 

※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는 소나무

한국갤럽이 산림청의 의뢰를 받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의 성인 남녀 1천8백14명을 대상으로 9개 분야 (78항목)에 걸쳐 면접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가장 좋아하는 나무는 1. 소나무 (58.7%), 2. 은행나무 (6.8%), 3. 감나무 (3.1%) 순이었다.

또 꽃나무는 1. 목련 (22%) 2. 진달래 (16.1%) 3. 개나리 (13.4%)

 

 

※ 삼림의 공익적 기능

우리나라의 삼림은 우리나라 면적의 64%로 면적은 643㏊이다. 돈으로 계산하면 73조원이다. 국민 1인당 매년151만원에 해당한다

이산화탄소 13% 흡수. 산림 산소방출 1㏊당 16톤 방츨.

물저장은 팔당댐 10개분으로 물 정화와 홍수조절기능이 매우 크다.

경치 등 정서적 효과가 크다.

 

2010년 통계에 따르면 플라타나스가 가로수의 29%이다. 

한국인 1인당 평생 잣나무 116그루를 쓴다.

 

참고

강병국, 최종수, <한국의 늪>, 지성사.

<문화재사랑> 통권 66호,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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