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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

추연욱 2011. 7. 30. 23:25

 


운문사 

 

  운문사 전경

 

 

1. 운문사는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호거산에 있다.

 

2. <虎距山 雲門寺 事蹟記>-조선 숙종 44년(1718)에 彩軒스님이 쓴 글- 에 의하면,

진흥왕 18년(577)에 한 도승이 지금의 운문사 5리쯤 못미친 곳에 있는 金水洞 계곡에 들어와 작은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수도하더니,

홀연 득도하여 道友 10여명과 산에서 혈맥을 찾아 다섯 개의 갑사[五岬寺]를 짓기 시작하여 7년만에 완성하였다.

 

오갑사는 현재의 운문사인 大鵲岬寺를 중심으로,

동쪽 900步 지점에 嘉瑟岬寺,

남쪽 7리에 天門岬寺,

서쪽 10리에 大悲岬寺,

북쪽 8리에 所寶岬寺 등이었다.

사방의 갑사들은 폐사되고 서쪽의 대비갑사만 대비사로 이름이 바꾸어 지금도 남아있다.

 

2. 첫 번째 중창자는 圓光法師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광법사는 진평왕 22년(600)에 귀국하여 황룡사에 있다가,

대작갑사에 와서 3년 뒤,

가슬갑사로 옮겼다. 여기서 화랑 貴山과 箒項에게 ‘世俗五戒’를 내려 주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일연스님도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삼국유사. 제4권, 圓光西學> 조에,

“당전과 향전 두 전기에 모두 작갑 · 이목과 운문의 사실이 없는데,

鄕人 金陟明이 항간의 말을 가지고 잘못 글을 윤색해서 <원광법사전>을 지어 함부로 운문사의 개조인 보양스님의 사적과 뒤섞여서 하나의 전기를 만들어 놓았다.

뒤에 <해동고승전>을 편찬한 자도 잘못된 것을 그대로 이어받아 기록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많이 현혹되었다.”

 

<삼국유사. 제4권, 寶壤梨木>조에,

“후세 사람들이 <新羅異傳>을 고쳐 지으면서 작갑사의 탑과 이목의 사실을 원광의 전기 속에 잘못 기록해 넣었다.……

더구나 <해동승전>을 지은 자도 여기에 따라 글을 윤색하고 보양의 전기가 없어 뒷사람들이 의심내고 잘못 알게 했으니……”

 

3. 통일신라 이후 250년간 오갑사의 사정은 전혀 알려지지 않는다.

신라시대 이래로 이 청도군의 절과 작갑사와 그밖의 크고작은 사원인 대작갑, 소작갑, 소보갑, 천문갑, 가서갑 등 다섯 갑사가 모두 후삼국시대 난리에 없어져서 다섯 갑사의 기둥을 대작갑사에 모아 두었다.

 

4. 운문사는 고려 초에 다시 부상한다.

두 번째 중창자는 寶壤선사이다. 중창이라기보다는 개창에 가깝다.

寶壤이 개창하고 작갑사라 했으며,

943년 고려 태조가 왕조 창업에 군사적으로 거든 보양의 공에 대한 보답으로 쌀 50석을 하사하고 雲門禪寺라고 사액한 뒤부터 운문사라 했다.

雲門이란 이름은 중국 남종선에서 분파한 五家 중 하나인 운문종 시조 文偃(846~949)의 법명이다. 

 

<삼국유사. 제4권, 寶壤梨木> 조에,  

祖師(보양)가 중국에서 불법을 전해받아 돌아오는 길에 서해 가운데에 이르니,

용이 그를 용궁으로 맞아들여 불경을 외게 하더니 금빛 비단 가사 한 벌을 주고, 아들 璃目을 그에게 주면서 조사를 모시고 가게 했다.

이때 용왕이 부탁하기를 “지금 삼국이 시끄러워서 아직은 불법에 귀의하는 군주가 없지만, 만일 내 아들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서 鵲岬에 절을 짓고 살면 능히 적병을 피할 수 있을 것이오. 또한 몇 해가 안되어 반드시 불법을 보호하는 어진 임금이 나와 삼국을 평정할 것이오.”……이에 보양법사는 장차 허물어진 절을 일으키려 하여 북쪽 고개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뜰에 누런 오층탑이 있었다.

그러나 내려가 찾아보니 아무런 자취도 없으므로 다시 올라가 바라보니 까치가 땅을 쪼고 있다.

해룡이 작갑이라 말한 것이 생각나 그곳을 찾아가서 파보니 과연 예전 벽돌이 수없이 있었다.

이것을 모아 쌓아올려 탑을 이루니 남은 벽돌이 하나도 없으므로 이곳이 전대의 절터임을 알았다.

여기에 절을 세우고 살면서 절 이름을 鵲岬寺라 했다.

 

그런지 얼마 후 고려 태조가 삼국을 통일하고 보양법사가 이곳에 산다는 말을 듣고 다섯 岬의 밭 500結을 합해서 이 절에 바쳤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청도군의 墾田이 모두 3932결이라 했다.

또 고려 태조 20년(937)에는 절 이름을 雲門禪寺라 내리고, 가사와 신령스런 음덕을 받게했다.

 

처음 법사가 당나라에 갔다가 돌아와서 먼저 推火郡(밀양) 奉聖寺에 머물렀는데,

이때 마침 고려 태조가 동쪽을 정벌해서 청도 지경까지 이르렀는데,

산적들이 犬城(伊西山城)에 모여서 교만을 부리고 항복하지 않았다.

태조가 산 밑에 이르러 법사에게 산적들을 물리칠 방법을 물으니 법사는 대답하기를,

 

“대개 개라는 짐승은 밤만을 맡았고, 낮을 맡지 않았으며, 앞은 지키나 뒤는 잊고 있습니다.

하오니 마땅히 대낮에 그 뒤쪽(북쪽)으로 쳐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태조가 그 말을 좇으니 적은 과연 패해서 항복했다.

태조는 법사의 신통한 꾀를 가상히 여겨 매년 가까운 고을의 租 50석을 주어 향화를 받들게 했다. 

 

그러던 어느해 몹시 가물어 밭에 채소가 모두 타고 마르므로 보양이 이목을 시켜 비를 내리게 하니 온 고을이 흡족하였다.

이에 天帝가 그를 죽이려 하자 이목이 보양에게 위급함을 고하니 법사가 침상 밑에 숨겨주었다.

이윽고 天使가 뜰에 와서 이목을 내놓으라고 청하자 법사는 뜰앞의 배나무[梨木]을 가리키니,

천사는 거기에 벼락을 치고 하늘로 올라갔다.

 

배나무가 부러졌으므로 용이 쓰다듬으니 곧 되살아났다.

그 나무는 근년에 와서 땅에 쓰러졌는데, 어떤 사람이 망치를 만들어서 선법당과 식당에 안치하였다.

이목이 살았다는 이목소는 오백전 뒤 극락교 아래에 있다.

 

이목소

 

 

태조 26년(943) 정월에는,

"운문산선원 장승은 남쪽은 阿尼岾, 동쪽은 嘉西峴이라 했다.

 946년의 운문산선원의 “장승이 11개이니 아니점, 가서현, 畝峴, 西北買峴(혹은 面知村), 北猪足門 등이다.”

 

불교가 재래신앙 보다 우월하다는 것이다. 보양은 중국에서 돌아오면서 서해 용궁에 초청되어 환대를 받고 용왕의 아들인 이무기를 데리고 온다.

그 뒤 이무기는 절 옆의 작은 못에 살면서 불교 교화를 도왔다.

어느해 날이 가물어 채소가 말라 죽게 되자 비를 내려서 채소를 살렸다가 하늘의 벌을 받게 되었다.

보양은 하늘에서 내려온 사자에게 뜰에 있는 배나무가 이무기라 했다.

배나무는 벼락을 맞아 말라 죽었다.

그러자 이무기가 그 배나무를 어루만져 살려냈다고 한다. 보양이 살려냈다고도 한다.

 

이무기는 민간에서 받드는 용이다.

보양이 서해 용궁에서 이무기를 데리고 왔다 한 데서 원래부터 있던 용신신앙과 불교의 경쟁에서 월등한 지위에 있다고 했다.

이무기를 상좌로 삼고 벌을 받아 죽게 된 이무기를 살러주었으니 스님의 위력은 대단하다.

청도군에서 전하는 이야기에는 이무기가 스님을 따라 왔다는 말이 없다.

스님이 자기 정체를 알아내자 이무기는 화가 나서 꼬리로 거대한 바위를 치고는 다른 데로 가 벼렸다고 했다.

 

5. 세 번째 중창자는 圓應國師국사 李學一(1052~1144)이다.

그는 승과에 합격한 뒤 송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선사, 대선사의 승계를 밟은 후 인종 즉위년에(1122)에 왕사가 되었다.

인종 7년(1129) 운문사로 왔다. 이때 나라에서 “신수리, 신원리, 이원리의 200結과 國奴婢 500명을 운문사에 내려주어 만세토록 香火를받들게 하라.”고 하였다. 이때가 운문사의 절정기이었다.

 

<虎距山 雲門寺 事蹟記>에 따르면 이때 가람의 위용을 갖추어 사찰 경내 사방에 장생표주를 세우고 田結奴婢碑까지 세우니 “나라의 500선찰 중 제2의 선찰”이 되었다. 고려 숙종 10년(1105) 송나라에서 천태교관을 배운 뒤 귀국하여 이곳에 머무르면서 중창했다.

사적기에 따르면 전성기에는 대웅전, 영산전, 관음전, 看香殿, 심검당, 설선당, 水月堂, 양진당, 종각, 彩鏡堂, 淸風寮, 香積殿, 影子殿, 오백전, 만월당, 會雲堂, 서별실, 披霞堂, 大國金佛堂, 淸溪堂, 한산당 등의 전각이 있었다.

옛 건물로는 대웅보전과 만세루, 금당, 응진전 등이 있다.

 

6. 원응국사 이후 반세기가 지나 무신정권 시대에는 민란과, 노비들의 반란이 있어서 “운문적”의 소굴이 되었다.

 

<고려사>, 명종 23년(1193) 7월 조에,

"南賊이 봉기하였다. 그중 극심한 자는 운문에 거점을 둔 金沙彌와 草田(울산)에 거점을 둔 孝心이다. 이들은 떠돌아다니는 자들을 모아 州縣을 공격하였다."

 

金沙彌의 '사미'는 어린 중이란 뜻이다. 그는 운문사의 재가승이었을 것이다. 아마 운문사의 땅을 소작하는 사람들의 우두머리였을 것이다.

이들의 농민항쟁은 토지수탈, 지방관의 수탈 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원 내부의 고승대덕과 하층 승려나 재가신도 들이 사원에 소속되어 수탈당하던 농민들과 합세하여 항쟁을 일으켰을 수도 있다. 실제로 이 농민항쟁 기간 동안 숱한 절이 공격의 대상이 되었으며 운문사는 그 중심에 있었다. 운문사에 전해졌다는 4비-신도비, 行蹟비, 位畓奴婢비, 중창사액비 가운데 토지와 노비를 절에 예속시킨다는 내용이 담긴 노비비와 사액비가 농민항쟁 기간에 파괴되어 버렸다.

 

<虎距山 雲門寺 事蹟記>에는 원응국사 이후의 사적은 기록하지 않고 “4碑 5岬 5塔 4窟이 있었는데 파괴되었다.”고만 하였다.

4비는 神道碑, 賜額碑, 行跡碑, 位畓奴婢碑이다.

노비비는 절의 노비들이 신분해방을 부르짖으며 일어날 때 부수어버렸다.

사액비도 왕건이 운문사란 이름을 내리면서 절의 토지와 노비를 획급한 내용이 적혀있었을 것이다.

행적비는 일연선사 행적비일 것이 분명하지만 지금은 없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조일전쟁 때 파괴되었다고 한다.

 

7. 1277년 72세의 일연스님이 주지로 임명되었다. 5년간 주지로 있으며 <삼국유사>를 쓴다.

일연스님은  1282년 충렬왕의 부름으로 개경 광명사로 가 국존에 책봉되고 이후 잠시 경산에 와 90노모를 모시다가 노모가 돌아간 후 군위 인각사로 가 84세로 돌아간다.

 

8. 조일전쟁으로 병화를 입었다. 숙종 16년(1690) 雪松대사(1670~1750)가 중건한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9. 한국전쟁 이후 비구 · 대처가 대립하여 불교 정화운동이 일어난 직후인 1958년 비구니 전문강원이 생겼다.

 

10. 1977년 명성스님이 10대주지로 취임하고 승가대학으로 4년제 정규과정을 갖추고 학인스님 200여명이 공부한다.

학인은 사미계를 받고 시험에 응시하여 들어온다.

 

현재 대웅보전를 비롯하여 鵲岬殿, 미륵전, 오백나한전, 金法堂, 만세루, 관음전, 명부전, 강원, 요사채 등 옛 건물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전체 17동의 전각이 있다.

 

문화재로는 圓應 學一(1052~1144)의 원응국사비, 석조여래좌상, 사천왕석주, 삼층석탑, 銅壺 등이 있다. 

 

 

 

운문사 돌담장

 

 

 

 

불이문

 

 

운문사는 남북 두 구역으로 나누어져 돌담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 돌담 가운데 불이문이 있다.

남쪽 구역에는 승가대학, 강의실, 숙소, 도서관, 공양간 등이 있다. 이곳은 금남 구역이다.

북쪽구역에는 크고작은 법당들이 유기적 관련 없이 널려있다.

 

본래 입구는 남쪽의 해탈문이었으나 일반인 출입금지 구역이다.

그러므로 해탈문을 지나 불이문을 거쳐 대웅전으로 가는 길이 막혀 버렸다.

 

따라서 출입구를 동쪽 범종루 밑으로 내었다. 

 

 

 

운문사 범종루

이곳이 절 출입문이다.

최근 새로 지었다. 

 

 

 

본디 이런 모습이었다.

 

 

 

 

 

 

 

 

■ 대웅보전(보물 제835호)은 신라 시대에 창건된 운문사는 여러 차례의 중창을 거쳤는데,

현재의 절집은 조선 숙종 44년(1718)에 있었던 네 번째 중창 때의 것이다.

대웅보전도 이때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기둥 간격을 넓게 잡아 칸수에 비하여 큰 규모의 건물이 되었다. 다포계의 공포를 구성하였고, 포작은 외3출목, 내4출목으로 그 짜임이 건실하며,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다포계 건물의 공포와는 달리 장식적으로 치우치지도 않았다. 가구는 큰 규모의 건물인데도 1고주 5량집으로 하여 넓고 탁트인 내부 공간을 꾸미고 있다.

천장은 4면에 빗천장을 돌리고 중앙에 우물천장을 두고 화려하게 채색하였다.

전면의 개구부에는 꽃살무늬를 넣은 분합문을 달았는데 특히 어간은 간격이 넓어 5짝의 분합문이 달려 있다.

“대웅보전”이라는 현판을 걸고 있으나, 통칭하여 비로전이라고 부른다.

 

① 얼마전까지 대웅전 현판이 걸려있었다.

우리나라 곳곳에 대웅전에 비로자나불을 모셨다. 비로전에 항마촉지인 석가여래를 안치하기도 한다.

석가보살은 여래가 되는 순간, 여래는 바이로차나[光名遍照]라는 진리 그 자체가 되어,

진리의 빛 곧 법신이 된다. 그리하여 석가여래와 비로자나여래는 不二가 된다.

이 비로자나불은 紙佛이라 전한다.

 

현재의 대웅보전을 짓기 전, 운문사 신앙 공간의 중심적 역할을 하였으며 문화재청 등록 당시 “운문사 대웅보전”으로 등재되었기 때문에 옛 현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② 그러다가 다시 비로전이란 현판을 걸었다.

 

언제부터인가 다시 대웅보전이란 현판을 걸었다.

안에는 비로자나불을 독존으로 모셨다.

 

 

 

 

 

 

운문사 비로자나불의 지권인 

 

지권인의 수인은 왼손 둘째손가락을 곧추세우고 그 끝을 오른손의 엄지 끝에 맞대고 나머지 손가락으로 감싼 통일신라, 고려시대 형상과는 다르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두 손이 상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두손을 모호하게 서로 감싸쥐고 오른손의 엄지만 봉긋하여 두손의 위치가 같다.

명나라의 영향으로 생각된다.

 

후불탱은 삼신을 그린 비로자나불 탱화로 건륭 20년(영조 31년, 1775)으로 불상도 이때 조성되었다.

고려 태조가 운문사란 절 이름을 내린 것처럼 선종사찰로 출발하였다. 통일신라, 고려 선종사찰에 비로자나불이 주불로 모셔진다. 원래 운문사도 비로자나불을 모셨을 것이다.

후불탱화는 법보화 삼신을 그린 비로자나불탱화이다. 영조 31년(1755)에 그렸다.

이 구역이 운문사 핵심부이다. 

 

 

■ 삼층석탑(보물 제678호)은 대웅보전 앞에 동, 서로 서 있다. 통일신라의 전형양식을 잘 보여주는 탑이다.

탑의 대석에는 연꽃무늬를 양각하였고, 상층기단에 앉아 있는 팔부중상이 세련되게 조각되어 있으며, 한돌로 된 옥신에는 모서리기둥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에는 5단의 층급빋침을 새겼으며, 추녀 밑이 수평을 이루어 경쾌하고 날씬한 조형미를 보여준다. 상륜부에는 노반, 복발, 앙화가 남아 있다. 기단 일부가 새 돌로 보수되었다. 탑의 전체 높이는 5.4m이다.

 

 

 

 

 

 

 

삼층석탑 상층기단의 사천왕상 부조

 

 


 

대웅보전 앞에 쌍탑을 건립한 까닭은 대웅전이 위치한 자리의 지세가 전복하기 쉬운 작은 배와 같다 하여 지세를 누르기 위하여 고려 때 쌍탑을 세웠다고 한다.

고려 태조 30년 보양국사가 조성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그 후 지나친 보수로 인한 원형 변조로 취소되었다고 한다.

 

 

 

새로 지은 대웅보전

 

 

 

안에는 삼세불을 모셨다.

 

 

만세루

정면 7칸 측면 4칸의 익공계 팔작자붕 건물로 평면이 164평이나 된다.

만세루는 조선 초기의 건물로서 우리나라 절 건물 중 가장 큰 것이라 한다. 바닥은 전체를 우물마루를 깔고 사방을 틔웠다.

<운문사중수기념비>에는 “만세루는 본디 종각이다”고 하였다. 지금은 대중들의 공동 작업을 하기도 하고, 철따라 고추, 메주, 무말랭이, 시레기 등을 말리는 곳으로 사용한다. 

 

 

 

 

 

 

 

작압전

불이문을 들어가 바로 왼쪽에 있는 조그마한 한칸 집이다. 원래 금당 석등 앞에 있었다고 한다.

일연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岬'은 속언으로 '古戶(곳)'라 하여 바로 '까치가 땅을 쪼는 곳'이다. 이 건물이 서있는 근처가 오층탑이 서있는 곳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황탑이라 한 것은 오갑사 가운데 중심이 대작갑사(운문사)이므로 오방색의 중심색인 황금색을 빗댄 것으로 보인다. 전탑이라면 황색일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한 조각의 전돌도 없다.

 

 

작압전 

 

 

 

좌우에 사천왕상 부조판석이 있다. 이 판석들은 전탑의 사방에 장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상은 생동감이 적고 판석 크기도 서로 달라서 신라 말기 양식일 것이다.

 

지금은 鵲鴨이라 불리고 있으나 '오리'는 이 절과 아무 관계없다. 鵲岬이 鵲鴨으로 잘못 불렸을 것이다.

5층정중탑은 운문사사적에 “喚鵲臺가 뜰 가운데 있다.”고 했다. 까치, 뜰 가운데 등으로 보아 5층정중탑이며 위치 또한 그러하다.

 

보양선사가 세운 5층정중탑은 1718년 이전에 원형을 잃고 일부만 남아 환작대란 이름으로 불리다가 그뒤 어느땐가 탑과 목조건척의 절충형태인 작압전으로 변형되었을 것이다. 편액에 "庚戌八月 日"이란 문구가 있다. 따라서 작압전은 1718년과 1941년 사이 경술년 곧 1730년, 1790, 1850, 1910년 중 어느 한 해일 것이다. 그러다가 1941년 지금의 작압전을 지으면서 탑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목조건물이 되었을 것이다. 현판은 작압전의 현판을 그대로 썼을 것이다.

 

법당 안에 항마촉지 석가여래좌상이 있다. 

 

■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호)은 현재 운문사 작갑전에 안치되어 있으며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 13년(591)에 사천왕 석주와 함께 조성된 것이라 하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고 형식상 고려때의 불상이다.

보양국사가 중창할 때 만든 11C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되며 불상일 가능성이 크다.

불상의 높이는 63cm이고, 무릎의 폭은 52cm, 대좌의 높이는 41cm, 광배의 높이는 92cm이다. 화강암 불상으로는 가장 작은 규모이다. 작아서 법당에 모시기 적당하지 않다. 자세히는 알 수 없다.

 

나발에 육계는 작은 편이다. 상호는 방형에 가깝도록 풍만한 데 코는 크고 입은 작아 자비성은 결여되었다.

항마촉지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분명하지 않으며, 크게 노출된 가슴에 줄이 나타나 있다. 법의는 얇은 편이며 옷주름은 사실적이나, 불상의 전면에 흙을 칠하고 종이를 바른 위에 호분을 도장하여 각선이 분명하지 않다.

광배는 폭이 넓은 주형 광배인데 두광과 신광을 융기선으로 구분하고 두광 중심에만 연꽃이 있고 외록에는 불꽃무늬가 조각되었다. 광배와 대좌의 무늬들은 그리 정교하지 않다.

대좌는 상대가 타원형으로 앙연이 조각되고 그 밑 양쪽에 당초문이 있으며 높은 3단의 받침이 있다.

중대는 하대와 한 돌로 만들었는데 6각형이고, 하대는 편육각형인데 위에 높은 3단의 괴임과 상면에 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좌대의 형식은 통례를 벗어났으나 불신의 균형이 좋고 광배의 조각은 정교하다.

 

네모진 상체와 하체에 규칙적으로 흐르는 층단식 옷주름선, 섬려해진 주형거신광배, 둔중한 연화문이 새겨진 6각연화대좌 등 다소 경직된 면도 나타나고 있다. 반면, 통견의 법의 안에 비스듬히 표현된 내의(승각기) 등에서 9세기 불상을 답습하려고 한 900년을 전후한 불상 양식을 단적으로 드러낸 중요한 작품이라고 하겠다.

 

 

 

 

 

 

■ 사천왕석주(보물 제318호)는 지금 석불좌상(보물 제317호) 좌우에 배치되어 있으나, 원래는 이곳에 세워진 전탑의 탑신 4면이나 혹은 안 벽면에 봉안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삼고저를 든 증장천왕,

탑을 든 다문천왕,

불꽃을 든 광목천왕,

칼을 든 지국천왕은 천의 자락이 휘날리는 갑옷을 입고 악귀를 밟고 선 자세이다.

발 밑에는 사귀가 있어 생령좌를 나타내고 있다.

이들의 신체는 장대하지만 운동감이 줄어든 섬약한 체구, 갑옷의 굵은 띠주름 등은 신라 헌강왕 6년(880)에 조성된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보물 제157호)이나 쌍봉사 철감선사탑(국보 제57호)의 사천왕상과 비교되어 석불 좌상과 함께 신라말 또는 후삼국 시대인 900년경을 전후한 시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신라 진평왕 13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나 기타 연혁은 미상이다.

사천왕석주의 높이는 각각 1.52m, 1.64m, 1,63m, 1.53m의 4개로 그 일면에 사천왕상을 1구씩 조각하였다. 모두 머리 뒤에는 원형의 두광이 있고 머리에는 관을 쓰고 있다. 상호는 원만하고 몸에는 모두 갑견을 입고 천의를 걸치고 있다.

 

한편 사천왕석주의 위치가 이동하였기 때문에 이 석주들이 어떠한 곳에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는 분명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추측되는 것은 불국사의 석굴암과 같은 석굴암을 만들기 위해 건조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운문사 관음전

항마촉지 석가여래 좌상이 보관을 쓰고있다. 인도나 중국에서는 이런 예가 있다. 이 경우 목걸이, 팔찌 등이 있어 보살같이 표현된다.

인도나 중국과는 달리 목걸이, 팔찌는 없고 보관에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길게 드리워져 있다.

이 목제 불상은 19C에 흔히 만들어진 조선말기 전형적인 항마촉지인 여래상이다.

옷주름도 두세 층으로 나타낸 추상적 형태로 간략화되었다. 치마는 가슴까지 올라가 붙어 아예 허리는 없는 듯 보인다. 상체는 작고 짧고 결가부좌한 다리는 넓고 높다. 상체에 비해 얼굴도 크고 손도 크다.

보관 가운데 화불이 있다. 보관만 보면 관음보살인데 여성의 모습이 아니고 근엄한 부처의 모습이다.

 

 

 

 

 

 

 

석가와 관음이 한몸을 이룬 세계 유일의 불상이다.

 

작갑전의 석불과 둘이 아니다. 작갑전 석불은 석가보살이 여래로 되는 첫 순간을 표현한 것이다. 관음전 목불은 정각을 이룬 여래 곧 자비심을 내어 관음보살로 되려하는 첫 순간을 표현했다.

뒤에는 <화엄경>에 묘사된 보타락카 산 위에 관음보살과 그에게서 설법을 듣는 선재동자가 그려져 있다. 

 

 

■ 운문사의 처진소나무(천연기념물 제180호)는 만세루와 16전 사이에 큰 우산을 펼쳐 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높이 6m, 나무 둘레에 2.9m나 되며 약 30평 넓이를 뒤덮고 있다. 수명은 400년 정도로 추정된다.

이 처진 소나무와 비슷한 소나무는 청도군 풍각면 월봉리, 안산리, 각북면 등에서는 야생으로 자라고 있다고 한다. 처진 소나무는 자연적으로 둥글게 자라는 나무이나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와 같이 자란 경우는 아주 드물다고 한다.

이 소나무는 자란 모습이 우아하고 아름답다. 늘어진 가지의 자체 무게를 감당치 못하여 수십 개의 받침대를 세워 보호해 주고 있다. 이 때문에 나무 모습이 흡사 우산을 펼쳐 놓은 것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처진 소나무의 유래는 옛날에 어는 스님이 이곳을 지나다가 시들어진 나뭇가지를 땅에 꽂아 생명을 주어 살렸다고 한다.

조일전쟁 당시에 이미 다 자란 나무가 되어 있었다고 하며, 나무를 보호하기 위하여 매년 여름철이면 막걸리 수십 말을 밑거름으로 부어 준다고 한다. 

 

 

 

 

 

 

 

비각에는 3기의 비가 있다.

원응국사비, 설송대사비, 운문사중수기념비가 있다. 雲門寺重修記念碑는 만세루와 대웅전을 중수란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 운문사 원응국사비(보물 제316호)는 비머리와 비받침은 없어졌고, 세쪽으로 절단된 비신만 복원한 것이다.

이 비는 높이 2.3m, 폭 90cm로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다. 조일전쟁때 파손되어 비문을 판독하기 어려운 곳도 있으나 보수를 하여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비문은 尹瓘 장군의 넷째 아들 尹彦頤(1090~1149)가 지었고,

글씨는 고려 왕조 제일의 명필이라는 大鑑國師 坦然(1069~1158)이 썼다.

비문은 고려 인종 때, 원응국사가 운문사를 중창한 역사를 기록하고 그 유덕을 받들어 모시기 위하여 왕명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원응국사(1051~1144)는 고려 숙종 때의 승려로 운문사를 세 번째 중건하였다.

국사의 성은 이씨며 속명은 학일이고 자는 봉거로 11세에 진장법사에 의해 입산하고, 희함선사에게 학문을 배웠다.

33세때 송나라에 건너가 서역과 중원을 주유하고 종전삼장과 천태교를 배워 34세에 귀국하였다.

귀국후 선종왕께서 환영을 하여 삼중대사 또는 대선사란 칭호를 받고 예종 2년에는 국사가 되어 존경을 받았다.

국사가 93세로 입적하자 그 동안 남긴 많은 업적을 찬양하여 원응이란 시호를 내리고 내신 김경원으로 하여금 호상케 하는 동시 많은 전답과 노비를 하사하고 비를 세워 그 공덕을 길이 추모케 하였다.

 

 

설송대사비

月沙 李廷龜의 현손들인 영의정 李天輔(1698~1761)와 형조판서 李鼎輔(1693~1766), 도승지 李益輔(1708~1767) 등 세 종형제들이 짓고 쓰고 箋을 내었다. 영조 30년(1754)에 세웠다. 

 

 

■ 금당은 지금은 강의실이다. 가장 오래된 건물인 듯하다.

그 앞에 신라시대 석등이 있다.

 

■ 운문사 금당앞 석등(보물 제193호)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8각 석등이다.  

방형의 지대석과 하대석이 한돌로 되었는데 하대석에는 여덟 잎의 복련이 조각되어 있다. 그 위에 8각의 간주석이 알맞은 높이로 서 있고 상대석에는 앙련이 조각되어 있다. 8각의 화사석에는 네 곳에 화창이 있으며 옥개석 꼭대기에는 보주가 남아 있다. 상하 대석에는 아름답고 섬세한 용비어천의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닳아서 잘 보이지 않는다. 석등의 높이는 2.58m, 밑받침의 폭은 0.98m이다. 통일 신라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석등이다.

신라 진평왕 13년에 건립한 것으로 금당 옆 황금탑을 밝히기 위하여 세워진 석등이라고 한다. 운문사의 금당은 모든 목재가 귀목으로 건조된 목조 건물로 불상을 모시고 사람들이 기거도 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불에 타 없어졌다.

 

 

 

  

 

 

■ 운문사 청동호(보물 제208호)은 신라 말엽작으로 뚜껑에 “성옹 3년 *월 *일 개진동해중참 십척도감대덕성념"이라 새겨져 있으며 연대는 미상이다. 높이 55cm, 지름 19.5cm 크기의 청동으로 만든 항아리다. 청동아 좌우에는 견고한 고리가 붙어 있고, 위에는 뚜껑이 달려 있다. 청동호 전체의 색감은 흑색이며 용도는 확실하지 않으나, 절에서 사용하던 佛具로 추측된다. 뚜껑 중앙에는 꼭지가 달려 있는데 밑은 고복형의 지주에 연판 6엽을 얹고, 그 끝에는 불꽃 무늬(십자형 화염문)장식이 있으며, 아래에는 꽃잎 장식과 둥근 마디가 있다. 특히 화염문 장식법은 나말여대에 걸쳐 나타나는 부도의 상륜정상부에서 볼 수 있는 십자형 화염문 보주형과 비슷하다. 또 몸체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고려 문종 21년(1067)에 개조하였고 무게는 30근이었다고 한다. 이런 점으로 보아 청동호의 제작연대는 적어도 나말여초로 볼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청동호는 임진왜란 당시에 왜적들의 분탕으로 잃어버렸다가 인조 10년(1632) 인담선자가 꿈을 꾸어 얻은 것이라 한다. 인담선자가 하루는 운문사 옆을 흐르는 약사계 부근에서 잠을 자는데, 꿈속에 한 승려가 나타나서 약사계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곳에 보물이 있으니 네가 가지라고 하였다. 꿈을 깬 인담선자가 약사계를 둘러보니 항아리 모양의 물건이 있었고 그 속에 서하집이란 책이 한 권 있었다 한다. 후에 와서 서하집은 후손이 원하므로 돌려주었고, 청동호를 감로집이라 불렀다 한다.

 

  

 

■ 박곡리 석조 석가여래 좌상(보물 제203호)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으로 1928년 화재로 크게 손상되었다. 전각 안에는 석조 좌상의 광배로 여겨지는 파손된 광배와 부서진 석탑의 일부 부재가 남아있다.

 

박곡리석조여래좌상/ 사진 백일봉

 

 

 

■ 대비사

신라 진흥왕 때 세웠다는 오갑사는 후삼국 시기에 모두 폐사되었다. 그뒤 대작갑사는 복구되어 운문사로 이어졌고, 대비갑사는 대비사로 바뀌어 오늘에 이어진다.

* 대웅전(보물 제814호)은 기둥의 높이와 칸살의 비례가 알맞아 문얼굴이 단아하다. 빗살문을 한 어칸은 4분합, 협칸은 3분합이다.

기둥은 굵고 배흘림을 두어 기둥머리를 가볍게 궁글려 선이 곱다. 다포계 구성이면서도 맞배집이다. 앞뒤면에만 짜인 공포는 번잡하지 않고 고풍스럽다.측면으로 내민 뻘목이 너무 짧아 풍판이 바짝 달라붙은 것이 흠이다.

 


대비사 대웅전/ 사진 문화재청

 

 

* 부도밭 - 14기의 석종형 부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