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문화유산 답사자료

금관가야 · 김수로 · 허황옥

추연욱 2011. 3. 1. 00:34
 
   

 

금관가야 · 김수로 · 허황옥

 

1. 가야국

 

① 김해 지방은, 수로왕이 터전을 잡기 전에는 弁韓 땅이었다. 변한은 12개의 작은 나라들로 분산되어 있었다.

김해의 狗邪國(뒤에 수로를 시조로 하여 본가야 곧 금관가야로 발전), 고령의 彌烏邪馬國(뒤에 伊珍阿鼓를 시조로 대가야로 발전) 등이 그것이다. 마한의 지배권이 느슨해지는 틈을 타 부족의 우두머리들이 제각기 영역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서로 힘을 겨누다가, 여러 부족국가가 연합하여 가야 연맹체를 형성하여 공존 방식을 모색하였다. 완만한 연맹체로 거의 독립된 세력들이었다. 곧 九干들이 干集團을 이루고 느슨한 지배력으로 주민들을 통제했다.

 

 

 

 

 

② 간은 몽고어의 HAN(翰), KAN(邯), HAGAN(韓)으로 ‘大人’이란 뜻이다. 먼 옛날 낙동강 하류에서 농경에 종사하던 사회가 구간사회이다. 그들에게는 통일된 나라가 없었고, 나라를 형성할 계기도 없었다. 농사와 어업에 종사할 적당한 하천과 비옥한 땅을 중심으로 마을을 만들고 살기 시작했으나 국가와 계급분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마을공동사회에서 국가 형성의 필요성을 느낀 것은 북방민족의 침입이었다.

 

③ 가야의 여러 나라들은 초기부터 신라와 영토문제로 자주 다투어 번번이 패배했다. 4세기말 임나가라 곧 금관가야는 백제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고구려 신라 연합 세력에 대항하다가 패배하여 맹주국은 가라국(대가야)로 넘어갔다. 이때부터 후기가야라 한다.

 

④ 6세기 고구려에 밀린 백제와 신라가 동맹하여 가야지역을 넘보기 시작한다. 가야는 우호관계에 있던 백제와 사이가 벌어지면서 신라의 무력과 회유에 말려들었고, 가야의 분국이었던 일본의 야마다이 왕국이 없어지고 친백제계의 야마도[大和] 정권이 들어서면서 백제, 신라, 일본이 가야의 중계무역을 제치고 직접 무역을 함으로써 경제 기반이 약화되어 멸망했다. 

 

⑤ <三國史記-新羅本紀 제 4, 법흥왕, 진흥왕> 조에 의하면 법흥왕 19년(532년)에 金官國主(본가야)인 金仇亥(仇衡王)와 妃, 세 아들이 나라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했다. 또 진흥왕 23년(562년)에 伽倻(대가야)가 모반하므로 異斯夫가 쳤다.

이어 가야 연맹은 모두 망하게 된다.

 

⑥ 가야 문화는 신라에 흡수되어 신라 문화에 크게 기여했다. 본가야 최후의 왕 仇衡王은 신라의 진골로 편입되었고, 본국을 食邑으로 주었으며, 셋째 아들 武力은(김유신의 조부) 角干으로, 구형왕의 증손자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공을 세웠고, 우륵은 가야금을 만들어 신라로 계승되었다. (이기백, <한국사 신론>, 일조각)

 

 

2. 김수로왕의 등장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 <駕洛國記>는 1076년 금관주(김해)의 행정관인 知州事가 편찬한 책이다. 一然스님이 <삼국유사>를 편찬하면서 그 일부를 옮겼다.

 

천지가 처음 열린 이후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 이름이 없었다. 그리고 임금과 신하의 칭호도 없었다. 이럴 때 아도간 · 여도간 · 피도간 · 오도간 · 유수간 · 유천간 · 신천간 · 오천간 · 신귀간 등 9간이 있었다. 이들 추장들이 백성들을 통솔했으니, 모두1 00호로서 7만 5천 명이었다.

후한 광무제 18년 3월 계욕일(삼월 첫 뱀날)에 그들이 살고있는 구지봉에서 무엇을 부르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백성 2~300명이 여기에 모였는데. 사람의 소리 같기는 하지만 그 모양은 숨기고 소리만 내서 말한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아홉 간들이 말한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그러자 또 말한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

“구지봉입니다.”

또 말한다. “하늘이 나에게 말하기를 이곳에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였으므로 일부러 여기에 내려온 것이니, 너희는 모름지기 산봉우리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되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라 만일 내지 않으면 굽고 지져서 먹어버린다.’ 하고 뛰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뒤놀게 될 것이다.”

9간들이 이 말을 좇아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다가 얼마 안 되어 우러러 쳐다보니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서 땅에 닿아 있다. 그 끈의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에 금으로 상자가 싸여 있으므로 열어 보니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여 백번 절하고 다시 싸안고 아도간의 집으로 돌아와 책상 위에 놓아두었다.

이튿날 아침 여러 사람이 다시 모여 그 함을 여니 여섯 알은 화해서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는데, 용모가 매우 훤칠했다. …….

그가 그달 보름에 왕위에 오르니 세상에 처음 났다고 해서 이름을 首露라고 했다. 나라 이름을 대가락이라 하고 또 가야국이라고도 하니 이는 곧 6가야 중의 하나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 수로왕이 알로 탄생하여 왕으로 추대되는 과정을 신화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後漢 光武帝 건무 十八年(AD 42년, 신라 유리왕 19년, 고구려 대무신왕 25년, 백제 多婁王 15년)에 가야국 곧 금관가야가 탄생한다.

 

* 김수로는 안개 자욱한 龜旨峰에 나타나 남부지방 巫俗에서 전승되는 ‘공징이’라는 특수한 腹話術을 빌어 환청을 조작했다. 완벽한 계획 아래 추진하여 토착 구간 위에 군림한 것이다.

 

이종기는 <崇善殿誌>(수로왕릉에 대한 기록을 모은 것으로 원본 가락국기에서 인용한 책)의

“父庵은 金海府 칠십리 밀양계 재약산에 있는데 世傳하기를 수로왕이 金盒에 의지하여 하늘에서 내린 후 이 세상에 의지할 곳이 없어 이 절을 원당으로 삼았다. …… 胎臺는 김해부 南 이십리 胎峰이라는 봉우리가 있고, 태봉에 태대라는 臺가 있으니 세상에 전하기를 수로왕의 태를 묻은 곳이라고 한다. 그 아래 마을이 胎亭里라 한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삼랑진읍 안태리의 부족 출신이던 수로왕의 아버지가 낙동강을 타고 남하하여 현재의 장유면 태정리 부근에 정착하여 수로왕을 낳았다.”고 하였다. (李鍾琦, <駕洛國 探査>, 일지사, 1977. 37쪽)

 

또 수로왕은 카시미르 지방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 근거로 <삼국유사>의 北天竺 訶羅國에 대한 기록과, <동이전>의 기록 곧 “弁辰의 주인은 몸이 장대하고 사람이 죽으면 큰 새의 날개깃으로 장사지냈다.”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의 迦羅國에 대한 기록 그리고 ‘弁’자가 고깔이라는 뜻에 착안하여 단석산 신선사의 부조에 고깔을 쓴 사람 등을 들고 있다. (같은책, 149쪽)

 

■ “수로왕은 조선의 유민 같지는 않다. 수로왕도 허황옥과 같은 지방 출신일 것이다. 수로왕의 추종자는 유교, 불교적 교양이 풍부하고, 한나라 연호를 정확하게 쓰고 있고, 통치 방식도 유교적이다.”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②>, 한길사, 75쪽.)

 

김수로왕의 출신지가 어딘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여튼 어디에선가 들어온 수로왕이 狗邪國 곧 금관가야를 세우면서 간집단을 통합, 통제하여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였다.

가락국이란 이름은 이 시기에 생겼다.

수로왕은 자신을 포함해서 6가야를 출발하게 한다. 금관가야(김해), 아라가야(함안), 고령가야(상주, 함창), 대가야(고령), 성산가야(성주), 소가야(고성) 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가야국은 변한을 대신해서 이 지역의 맹주가 되었다.

 

<삼국유사>에 “나라 이름을 大駕洛, 伽耶國이라고도 하니 곧 여섯 가야 중의 하나다. …… 동쪽은 黃山江, 서남쪽은 滄海, 서북쪽은 地理山, 동북쪽은 伽耶山 이며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라고 가락국의 영역을 설명했다.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해상 활동을 했다. <三國志 魏書 東夷傳 三十 弁辰條>에,

“나라에서 철이 생산된다. 韓, 濊, 倭가 모두 변진의 철을 사간다. 저자거리에서 물건을 사고 팔 때 모두 무쇠뭉치를 사용한다. 고을에 무쇠를 공급한다.”고 기록하였다. 주로 낙랑, 대방, 예, 倭와 교역하였다. 이들 나라에 철을 제공하였다.

 

3. 허황옥의 등장

 

<삼국유사, 제2권 가락국기> 를 인용한다.

 

① 건무 24년(48년) 7월 27일에 9간 등이 조회할 때 수로왕에게 결혼할 것을 진언한다. 그러자 수로왕은, “내가 여기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이니, 왕후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이 있을 것이니 그대들은 더 이상 거론하지 말라.”

 

■ 수로왕은 고구려나 신라와는 달리 토착세력과의 결혼을 거부한다. 이것은 왕위가 안정되고 지배권이 강화되었음을 뜻한다. 궁궐을 짓고 제도를 정비한 뒤에 간집단을 신하로 만들어 나갔을 것이다.

 

② 왕은 유천간에게 명하여 빠른 배와 잘 달리는 말을 가지고 망산도에 가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에게 명하여 승점으로 가게 했다. 그때 갑자기 바다 서쪽에서 붉은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이쪽으로 향해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망산도에서 횃불을 올리니 사람들이 다투어 내려 뛰어오므로 신귀간이 이것을 바라보다가 대궐로 달려와서 왕께 아뢰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여 이내 9간 등을 보내서 木蓮으로 만든 키를 갖추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서 그들을 맞아하여 곧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려 하자 왕후가 말한다. “나는 본래 너희를 모르는 터인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따라갈 수 있겠느냐.”

유천간 등이 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전달하니 왕은 옳게 여겨 행차해서 대궐에서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산기슭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전을 만들어놓고 기다렸다.

왕후는 산 밖의 별포 나루터에 배를 대고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쉬고, 입은 비단 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 “建武 24년 戊申 7월 27일(서기 48년) 바다의 서쪽에서 붉은 돛을 달고 붉은 깃발을 휘날리는 대형의 범선이 북쪽을 바라보고 오고 있었다.…….”

 

망산도 유주암- 창원시 진해구 용원동

 

 

당시 가락국 사람들은 돛은 원색으로 했지만 깃발은 달지 않았을 것이다. 인도의 종파들은 자기 집단을 알리기 위해 깃발을 내거는데 주로 붉은색과 주황색을 쓴다고 한다. 그러므로 외국에서 온 배이고 허황옥이 자기가 온 것을 알리는 신호이다.

 

허황옥이 도착한 곳은 主浦란 곳이다. 김해부 남쪽 40리 지점이라 하였다. 山外別浦津頭는 후일 별포로, 다시 주포로 승격된다. 지금 녹산면 생곡리 장각나루이다. 이곳에서 益山山城이 보인다.

 

 

MBC TV 드라마 <철의 제왕 김수로>에서 가져온 사진이다.

 

 

 

 

 

 

 

■ 허황옥은 가야의 신하들을 따라가서 수로왕을 만날 수 없었다. 수로왕이 직접 나와서 맞이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이 평등한 부부의 출발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수로왕은 어쩔 수 없이 대궐 서남쪽 산기슭에 임시로 장막궁전을 만들어 놓고 기다렸다.

그제서야 허황옥은 별포 나루에 배를 대고 상륙했다.

 

■ 허황옥을 배행하는 媵臣(잉신은 시집갈 때 따라가는 신하) 2명 神輔, 趙匡과 그들의 아내 慕貞과 慕良, 노비들 그리고 뱃사공 15명을 합치면 일행은 35명이다.

뒤에 신보는 泉府卿(재무 담당), 조광은 宗正監(문교, 문화 담당)이 된다.

신보의 딸은 2대 거등왕의 왕비가 되고, 조광의 손녀는 3대 麻品王의 비가 된다.

토착 세력과 이민 세력의 결합으로 고급문화를 발전시키게 된다.

 

 

■ 허황옥은 금수능라, 옷, 필단, 금은보화, 신변용기, 장신구, 노리개 등 많은 혼수를 가지고 왔다. 혼수가 많은 것은 농경 사회의 특징이다. 이런 물건들은 가락국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것들이다. 중국, 인도, 실크로드를 거쳐 오는 사라센 지방의 산물들이다.

이때 가야는 초기 철기 문화가 시작되었고, 후진적 농경사회이었다.

 

허황옥이 여러 잉신과 많은 혼수를 가지고 온 것은 단순한 결혼만이 아니라 가야 세력과 연합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허황옥을 매개로 가야와 아유타국의 동맹을 의미한다.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가지고 온 많은 재물을 백성을 위해 사용하여, 허황옥 집단과 가야 토착 집단을 융합시켰다.

이리하여 허황옥은 금관가야의 공동시조가 되었다.

 

 

■ 바다가 보이는 높은 언덕에 올라 바지를 벗어 신령에게 예물로 바치는 행위는 한국 민속에는 없는 辟邪 행위이다. 이것은 미혼을 청산하고 결혼하려는 통과의례이다. 인도에서는 처녀들은 바지(kameei) 위에 원피스(salwal)를 입다가 성숙한 처녀가 되면 저고리(sattai)에 긴치마(pavadai)를 입는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자신이 건너온 바다의 신과 앞으로 살아갈 토착신을 연결하는 제의였다.

바지를 벗어 신령에게 폐백을 드린 곳이 高嶠이다. <삼국유사>에 綾峴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하였다. <대동여지도>에는 명월산 줄기라 하였는데, 지금 명월산의 위치는 알 수 없다.

 

 

 

 

 

 

③ 이에 왕이 왕후와 함께 침전에 드니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한다.

“저는 阿踰陁國의 공주인데 성은 許이고 이름은 皇玉입니다.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에 부왕과 모후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하늘의 상제를 뵈었는데, 상제께서는 가락국의 왕 수로를 하늘이 내려보내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또 나라를 새로 다스리는데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경들은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 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으로 떠나라’ 하셨습니다. …… 감히 용안을 우러러 보게 되었습니다.”

왕이 대답했다. “나는 나면서부터 성스러워서 공주가 멀리서 올 것을 미리 미리 알고 있어서 신하들의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따르지 않았소. 그런데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오셨으니 이몸에는 다행한 일이오.”

왕은 그와 혼인해서 함께 두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냈다.

 

 

■ 김수로왕은 行在所(幔殿)에서 허황옥을 영접한다.

허황옥을 태우고 온 배와 선원들은 아유타국으로 돌아갔다. 수로왕은 쌀 10석과 베 30필을 실어보냈다. 

 

■ 허황옥은 자신을 阿踰陁國의 공주라고 소개했다. 아유타국은 어떤 나라인가?

Ayodhia는 갠지스강 상류인 Sarayu강변에 있다. BC 1000년경부터 BC 5세기까지 태양왕조가 있었다. 수우리야(태양 왕조)의 군주 Manu가 마련한 이 도시는 그의 아들인 힌두교 중흥 시조 Rama 탄생지이다. 정복할 수 없는 땅이라는 뜻이다. 이땅의 주민들은 BC 6세기 경 Khosal(Kosala)이란 왕국을 세우고 이곳을 수도로 삼았다. 성은 물고기 모양으로 설계되어 있다.

 

 

 

BC 317년에 일어난 마우리아 왕조가 갠지스강 중하류에 있는 파트나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 당시 16개 나라를 통일하였다. 아소카왕 때에 이르러 북으로 아프가니스탄부터 남으로 마이솔에 이르기까지 불교문화권이 된다. BC 186년 숭가 왕조가 새로 일어나면서 수도를 아요디아로 정한다. 코살라국에 이어 두 번째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된다.

 

BC 165년 쿠산왕조라는 기마민족 연합 집단인 박트리아인이 북으로부터 침입하여 숭가왕국은 남쪽으로 이동했고, 아요디아는 2세기 동안 무정부 상태가 된다. 쿠산이 지배하게 되자 원래 이 지방을 지배하던 司祭 계급과 왕족들은 쫓겨나게 된다. AD 78년 불교신자인 카니시카왕의 등장으로 다시 불교가 지배하게 된다. 9세기 이슬람의 침략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현재는 힌두교 성지로 유명하다.

 

 

■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남해 앞 바다까지의 경로에 대해서는 李鍾琦(앞의 책), 김병모(김수로왕비 허황옥)가 쌍어문에 착안하여 현장을 답사한 보고서가 있다. 

 

▪ 가야 지역의 쌍어문- 수로왕릉의 정문인 納陵正門 문설주 가운데에 종처럼 생긴 물체(인도식 탑)를 두고 두 마리 물고기가 머리를 마주하고 있다. 똑같은 구성의 그림들이 세개의 문 위마다 한 조씩 있고, 崇仁門에도 앞뒤에 3조씩 6조가 있다. 이를 神魚라 한다.

 

수로왕릉 정문인 납릉정문에 있는 쌍어문

 

 

신어산 은하사 법당 수미단 하단, 양산 鷄院寺, 통도사 삼성각, 내원사 화정루, 울산 開雲寺 등지에 쌍어문이 있다.

▪ Ayodhia 지역의 쌍어문- 힌두교 사원 정문 위와 계단의 양쪽 난간에는 쌍어문 조각, 그림 있다.

 

 

* 허황옥이 아요디아에서 왔음은 모두 인정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阿踰陁國은 인도의 Ayodhia국이다.

결혼 예물, 쌍어, 婆娑石塔 등으로 인하여 같은 곳임을 알 수 있다.

 

파사석탑 

 

 

 

“금관국에 있는 虎溪寺 婆娑石塔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으로 있을 때 世祖 수로왕의 비 허황후 황옥이 東漢 건무 24년(48년)에 서역 아유타국에서 배에 싣고 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향하려하는데, 수신의 노여움을 받게 되어서 가지 못하고 돌아와 부왕께 아뢰자 부왕은 이 탑을 배에 싣고 가라고 했다. 그리하여 바다를 건너 편하게 남쪽 언덕에 도착하여 배를 대었다. …… 탑은 모진 4면 5층으로 되었고, 그 조각은 매우 奇妙하다. 돌에는 희미한 붉은 무늬가 있고 품질이 매우 좋은데 우리나라에서 나는 종류가 아니다. (<삼국유사> 제3권 塔像 제4 金官國 婆娑石塔)

 

해은사에 있는 허황옥 영정

 

 

 

 

■ 그 다음의 경로는 두 사람의 견해가 다르다.

 

① 이종기는 인도 학자의 Armit Lal Nagar의 말을 인용하면서 인도 Ayodhia 왕족이 서기 20년경 Kussian의 군대에 쫓겨 왕도를 잃고 갠지스강을 따라 메남강 하류로 해서 태국의 Ayuthya국으로 갔다고 보았다. 1세기 초에 인도 Ayodhia 왕족의 일부가 태국에 Ayuthya라는 식민국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이들 중 한 여자가 가락의 왕후가 된 것이다.

그 무렵 중국의 광동은 인도 상선의 집결지라고 한다.

 

 

※ 왕녀 허황옥은 서기 48년 5월 중에 본국을 출발하여 동진하다가 사나운 물결을 만나 돌아가 배의 重心 조절용 파사석탑을 싣고 그해 7월 27일 김해에 도착했다.

허황옥은 6월에 출발했다. 이 기간 西域과 한반도 사이에는 바람과 해류가 줄곧 북으로 올라가는 계절풍과 리만해류가 있는 기간이다. 적절히 重心만 잡힌 배라면, 태풍만 만나지 않는다면 그대로 두어도 이 해로를 타고 북으로 가게 되어있다.

 

 

② 김병모 교수는 쿠산 왕조의 지배시에 쫓겨난 아요디아의 왕족, 사제 계급의 사람들은 중국의 서남쪽 보주 땅으로 이주하였다고 보았다. 그 근거로 <崇善殿誌>의 기록과 “駕洛國 首露王妃 普州太后許氏陵”이란 비문(현재의 비석은 仁祖 25년(1647년)에 세웠다)과 보주땅의 쌍어문이다. 그리고 BC 3세기 때 아소카가 운남 지방 대리국에 왕자를 보낸 일, 보주에 허씨 집성촌이 현재에도 있는 점을 들고 있다.

태국의 도시 Ayuthya는 13세기에 생긴 도시라 하여 부정하고 있다.

 

 

* 보주는 지금 사천성 안악현 땅이다. 허황옥의 생존 기간인 1~2세기에는 後漢이었고, 蜀이라 불렀다.

 

▪ 보주지방에도 쌍어문이 있다. 사천지방 제기 받침, 운남성에서 발견된 한 나라 때의 벽돌(사원 건축에 쓰인 것), 무창의 구리로 만든 그릇 바닥 등에 보인다.

 

 

▸ 허황옥은 AD 32년에 태어났다. BC 165년쯤 허황옥의 6대 또는 7대 선조들이 고향인 아요디아를 떠났을 것이다. 이들은 사라유강을 따라 하류로 흘러 내려가 갠지스강 본류를 거쳐 갠지스강을 동류하여 뱅골만으로 해서 동뱅골에 이르면, 아삼 지방에서 서남쪽으로 흘러온 Jamuna강과 만난다. 이 강의 상류는 중국 서남부인 운남성이다. 허황옥의 조상은 이 강줄기를 타고 대리국으로 이동하였을 것이다.

 

<後漢書>에, “광무 23년(47년) 촉 땅에서 토착민(南蠻)이 봉기하여 한나라 정부에 대항하였다. 반란군 세력이 강하여 정부는 진압군을 파견해 진압하였다. 반란의 주동자와 700명을 江夏界(오늘날의 무창 지방)로 이주시켰다.”

 

 

“50년 후 또 토착 민족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그 주모자가 한군에게 항복했는데 그 주모자 이름이 許聖이다.” “許”는 성이 아니고 세습되는 직업 무사이다.

 

 

※ 허황옥은 첫 번째 반란이 실패했을 때 강제 이주당한 지도자급 가계의 여인으로 그들은 정착했던 양자강 중류의 무창지방을 거쳐, 양자강을 따라 상해 지방으로 간 다음 바다를 건너 김해의 가락국으로 갔다고 보았다.

 

 

김병모가 주장하는 허황옥의 이동 경로

 

 

 

 

④ “나는 어려서부터 성스러워서 공주가 멀리 올 것을 알고 있어 신하들의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따르지 않았소. 그런데 이제 현숙한 공주가 오셨으니…….”

 

* “수로왕은 허황옥이 올 줄 알았다고 했다. 이는 신통력이 아니라 미리 내통하였다는 증거이다. 수로왕은 토착세력을 옥죄려고 고향의 한 집단과 혼인을 맺고 그 집단을 끌여들여 새 지배집단을 만든 것이다. 그는 자신을 신격화 시켜 몽매한 주민들을 현혹하여 우러러 보게 만들었다. 뒷날 수로왕은 간집단을 개편하여 새로 6가야를 발전시켜 간집단을 제거했다.”

이리하여 다른 세 나라와는 다른 고대국가로 출발한다. 들판이 적은 반면 김해만을 끼고 있어서 해양으로 뻗어 활발히 무역을 했고 그 결과 후기에는 철기문화를 고급 수준으로 끌어 올렸고 백제, 신라, 중국, 왜를 잇는 통로가 되었다. (이이화, 앞의 책, 75~76쪽)

 

* 이종기는 이 국제 결혼은 잘 짜여진 각본이라고 본다. 붉은 기는 신부가 온 것을 알리는 신호이고 배가 돌아간 것은 일이 성사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라고 했다.

 

참고한 책

깁병모, 김수로왕비 허황옥, 조선일보사, 1994.

이기백, 한국사 신론, 일조각, 1969.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2, 한길사, 1998.

이종기, 가락국 탐사, 일지사, 1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