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편지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해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 붓고 할 것을 믿는다.
황동규 시선, <삼남에 내리는 눈>, 민음사, 1975.
시월
황동규
1
내 사랑하리 시월의 강물을
석양이 짙어가는 푸른 모래톱
지난날 가졌던 슬픈 여정들을, 아득한 기대를
이제는 홀로 남아 따뜻이 기다리리.
2
지난 이야기를 해서 무엇하리.
두견이 우는 숲 새를 건너서
낮은 돌담에 흐르는 달빛 속에
울리던 목금(木琴)소리 목금소리 목금소리.
3
며칠내 바람이 싸늘히 불고
오늘은 안개 속에 찬비가 뿌렸다.
가을비 소리에 온 마음 끌림은
잊고 싶은 약속을 못다한 탓이리.
4
아늬,
석등(石燈) 곁에
밤 물소리
누이야 무엇 하나
달이 지는데
밀물 지는 고물에서
눈을 감듯이
바람은 사면에서 빈 가지를
하나 남은 사랑처럼 흔들고 있다.
아늬,
석등 곁에
밤 물소리.
5
낡은 단청 밖으론 바람이 이는 가을날, 잔잔히 다가오는 저녁 어스름. 며칠내 며칠내 낙엽이 내리고 혹 싸늘히 비가 뿌려와서...... 절 뒤울 안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낙엽 지는 느릅나무며 우물이며 초가집이며 그리고 방금 켜지기 시작한 등불들이 어스름 속에서 알 수 없는 어느 하나에로 합쳐짐을 나는 본다
6
창 밖에 가득히 낙엽이 내리는 저녁
나는 끊임없이 불빛이 그리웠다.
바람은 조금도 불지 않고 등불들은 다만 그
숱한 향수와 같은 것에 싸여가고
주위는 자꾸 어두워 갔다
이제 나도 한 잎의 낙엽으로 좀더 낮은 곳으로
내리고 싶다.
황동규 시선, <삼남에 내리는 눈>, 민음사, 1975.
소곡3
황동규
내 마음 안에서나 밖에서나
당신이 날것으로 살아 있었기 때문에
나는 끝이 있는 것이 되고 싶었습니다.
선창에 배가 와 닿듯이
당신에 가 닿고
언제나 떠날 때가 오면
넌지시 밀려나고 싶었습니다.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바라고 있지 않았던 것을.
창밖에 문득 후득이다 숨죽이는 밤비처럼
세상을 소리만으로 적시며
남몰래 지나가고 있었을 뿐인 것을.
이광호 · 김선우 엮음, 첫사랑 두근두근>, 문학과 지성사, 2011.
寄港地1
황동규
걸어서 항구에 도착했다.
길게 부는 寒地의 바람
바다 앞의 집들을 흔들고
긴 눈 내릴 듯
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
紙錢에 그려진 반듯한 그림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 꺼 버리고
조용한 마음으로
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
정박 중의 어두운 龍骨들이
모두 고개를 들고
항구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에는 數三個의 눈송이
하늘의 새들이 따르고 있었다.
황동규 시선, <삼남에 내리는 눈>, 민음사, 1975.
기항지(寄港地)란 배가 목적지로 가는 도중에 잠시 들르는 항구를 말한다. 화자는 겨울 항구에 도착했다. 거기서 본 바람에 흔들리는 집들은 화자에게 불안한 마음을, 낮게 비치는 불빛은 쓸쓸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화자는 반듯한 지전(紙錢)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 꺼 버린다고 했는데, 실제 구겨 넣고 꺼 버린 것은 화자의 불안함이나 쓸쓸함일 것이다. 고요해진 마음으로 이제 화자는 배 있는 곳으로 간다. 정박한 배들은 모두 항구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배들이 항구의 안을 들여다보는 것은 지친 항해를 끝내고 이제는 쉬고 쉽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삶은 그런 정착의 욕망뿐만 아니라 ‘눈송이’를 따르는 ‘새’처럼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망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다.
조그만 사랑노래
황동규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환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황동규 시선, <삼남에 내리는 눈>, 민음사, 1975.
더 조그만 사랑노래
황동규
아직 멎지 않은
몇 편의 바람.
저녁 한 끼에 내리는
젖은 눈, 혹은 채 날리지 않고
공중에서 녹아 한없이 달려오는
물방울, 그대 문득 손을 펼칠 때
한 바람에서 다른 바람으로 끌려가며
그대를 스치는 물방울
황동규 시선, <삼남에 내리는 눈>, 민음사,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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