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시집

벼 - 李盛夫

추연욱 2009. 5. 21. 14:28

        벼

                李盛夫


벼는 서로 어우러져/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워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을 보아라.

최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우리들의 양식>, 1974.

'여백 > 시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歸天-천상병  (0) 2009.05.21
4월은 갈아엎는 달-신동엽  (0) 2009.05.21
폭포-김수영  (0) 2009.05.18
황동규/ 즐거운 편지, 시월, 寄港地1  (0) 2009.05.18
정현종의 나무의 사계와 -Joyce Kilmer의 Trees  (0) 2009.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