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시집

박목월의 시 廢園과 下棺

추연욱 2009. 5. 18. 12:17

廢園

 

박목월


그는

앉아서

그의 그림자가 앉아서


내가

피리를 부는데

실은 그의

흐느끼는 비오롱 솔로


눈이

오는데

옛날의 나직한 종이 우는데


아아

여기는

정동

성미하엘 종루가 보이는데


하얀

돌층계에 앉아서

추억의 조용한 그네 위에 앉아서


눈이

오는데

눈 속에 돌층계가 잠드는데


눈이 오는데

눈 속에 

가난한 장미 가지가 속삭이는데


옛날에……

하고,

내가 웃는데

하얀 길 위에 내가 우는데


옛날에……

하고,

그가 웃는데

서늘한 눈매가 이우는데


눈 위에

발자국이 곱게 남는다.

망각의

지평선이 멀리 저믄다. 

 

박목월, 보리빛 素描, 신흥출판사. 단기 4291.

 

                   

下棺

 

관이 내렸다.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 내리듯.

주여/용납하옵소서.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 주고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하직했다.


그 후로/그를 꿈에서 만났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돌아보고

형님!/불렀다.

오오냐. 나는 전신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그는 못 들었으리라.

이제/내 음성을

나만 듣는 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


너는/어디로 갔느냐.

그 어질고 안쓰럽고 다정한 눈짓을 하고.

형님!/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다만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 하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

 

박목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