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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둘레길, 벗꽃길- [영남방/4월9일~10일/전국정기도보]

추연욱 2011. 4. 10. 05:38

 

[영남방/4월9일~10일/전국정기도보] 경주 벗꽃길


사진/ 울산의 바람

 

나무들 중 가장 사랑스런 Loveliest of Trees, the Cherry Now

 

나무들 가장 사랑스런 벚나무는 지금 Loveliest of trees, the cherry now

가지 따라 만발한 꽃을 걸치고, In hung with bloom along the bough,

부활절을 맞아 흰 옷을 입고서 And stand about the woodland ride

수풀 속 승마길 옆에 늘어서 있네. Wearing white for Eastertide. 

 

이제, 내 일생 일흔 해 중 Now, of my threescore year and ten,

스물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Twenty will not come again,

그러니 일흔 봄에서 스물을 빼면, And take from seventy springs a score,

내게 남은 것은 오직 쉰뿐. It only leaves me fifty more.

 

활짝 핀 꽃 보기에 And since to look at things in bloom

쉰 봄도 너무 짧으니,  Fifty springs are little room,

수플 있는 곳으로 나는 가야지 About the woodlands I will go

눈처럼 피어 있는 벚꽃을 보러. To see the cherry hung with snow. 

 

A. E. Housman(1860~1936)  

 

Oscar Williams ed., <Immotal Poems>, Washington square Press, 1961,


 

제1일 남산둘레길-  2011년 4월 9일의 행로

 

 

 

 

  

 

 

 

 

 

 

 

 

 

 

 

 

 

 

 

 

제2일 경주 벚꽃길- 4월 10일의 행로

 

 

 

 

 

 

 

 

 

 

 

 

 

 

 

 

 

 

 

 

 

9시에 밀레니엄 파크에 모였다.

 

시간이 남아 안을 둘러 보았다.

 

 

황룡사 9층탑?

 

 

사람은 보이지 않고 봄빛만 가득하다.

 


 

 

 

 

금년 봄 처음으로 조팝나무 꽃을 보았다.

 

 

 

밀레니엄 파크를 출발해서 보문호를 따라 간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 빠른 걸음으로, 잠깐 옆으로 빠졌다. 일탈의 두려움과 긴장을 맛보며.

진평왕릉에 가기 위해,

진평왕릉에는 북새통인 시내와 달리 사람은 없었다.

황량해서 오히려 靜謐한 이곳, 봄이 무르익어 가면서 정밀함은 사라지고, 황량하기만 했다. 

 

 

 

 

 

 

오후에 다시 꽃잔치에 참가한다.

 

 

황룡사터

 

 

황룡사터에서 찾은 석물도 이렇게 생명을 안고있다.

 

 

황룡사터 불상대좌 

 

 

 

황룡사터 당간지주

 

 

 

반월성

잠깐 편안한 시간을 얻었다.

 

성을 반바퀴 돌았다. 왼쪽으로 문천을 끼고.

 

 

 

 

경주 향교

 

 

 

 

 

경주 교동 최씨고택

 

 

방문 위에 걸려있는 현판 龍庵古宅", "大愚軒", "鈍次" 등의 '용암 , '대우', '둔차' 300년쯤 전에 이곳에 살았던 조상들의 호이다.

 

 

요석궁은 최씨가에서 경영하는 고급 식당이라 한다. 한때는 요정이었고.

 

본디 요석궁은 태종무열와 김춘추의 여동생이며, 설총의 어머니가 살던 집이다. 

<삼국유사>, 제4권, 의해 제5, 원효불기 조에,

"스님이 일찍이 어느날 상례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며, 거리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를 불렀다.

 

그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리겠는가,

나는 하늘을 받칠 기둥을 찍으리.

 

사람들이 아무도 그 노래의 뜻을 알지 못했다. 이때 태종이 이노래를 듣고 말했다.

'이 스님은 필경 귀부인을 얻어서 귀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이때 요석궁에 과부 공주가 있었는데 왕이 궁의 벼슬아치에게 명하여 원효를 찾아 데려가라 했다.

벼슬아치가 명을 받들어 원효를 찾으니, 그는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를 지나다 만났다. 이때 원효는 일부러 물어 빠져서 옷을 적셨다.

벼슬아치가 원효를 궁에 데리고 가서 옷을 말리고 그곳에서 쉬었다.

공주는과연 태기가 있더니 설총을 낳았다."

 

원효(617~686)가 물에 빠졌다는 문천은 지금 반월성 남쪽을 돌아 흐른다.

이곳에는 본디 일정교와 월정교가 있었다. 지금 월정교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원효가 물에 빠진 곳은 월정교 근처라 한다. 

 

 

재매정(사적 제246호)은 경주시 교동에 있다. 

 

 

 

오릉

 

 

 

"大小人員皆下馬 이곳에 오는 모든 사람들은 말에서 내리시오"라 쓴 하마비가 먼저 보인다.

 

 

여기서 이틀간의 일정을 마무리한다.

4시 30분이다.

 

 

 

지나가는 길에 만나는 문화유산들

 

■ 부처골 감실 석불좌상(보물 제198호) - 남산의 동쪽 기슭 인왕리

높이 3m, 너비 4m의 남쪽으로 향한 바위에 높이 1.7m, 너비 1.2m, 깊이 60cm의 홍예형 감실을 만들고 그 안에 고부조로 불상을 새겼다. 감실의 모습이 광배 모습이다. 그러서 감실 안에는 광배를 새기지 않았을 것이다.

불상의 어깨와 감실벽에 물감이 남아있다. 옛날에는 감실을 붉은 연꽃으로 장식하였을 것이다.

 

불상의 높이는 1.4m이다.

약간 숙인 얼굴에 두 손은 소매 속에 넣고 다소곳한 자세로 조용히 앉아있다.

둥근 얼굴은 단아하여 여성적인 느낌을 준다. 머리에는 작은 육계가 솟았는데 마치 아주머니가 머리를 틀어올린 것 같다. 지그시 감은 눈과 오목하게 파인 입가의 가득한 미소는 은은하면서도 고졸하다.

 

이 불상에 서린 특이한 적막감은, 신라 불상이 보여주는 불가사의한 정신성이 조각기술의 발전과 함께 화강암의 구석구석에 표현되면서 8C 석굴암 조각으로 이어진다.

 

 

이 불상은 팔짱을 끼고 있는데, 불상의 수인에는 이런 것이 없다. 중국 고대 불상에서 평남 원오리 불상, 백제의 납석제 불상으로 전해진 선정인의 모습이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삼신할머니 같다.

옛날 신라 때, 아니 그 보다 훨씬 옛날부터 부인네들이 이 부처님(삼신할머니)에게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빌었을 것이다.

불상 뒷쪽에 알터가 있다.

부처님이 오시기 전부터 이곳에서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빌었던 근거가 뚜렷이 남아있다.

  

선덕여왕(632~647 재위) 때 조성되었다고 한다.

어쩌면 선덕여왕을 모델로 했을지도 모른다. 

신라는 이미 불교가 지배이념으로 등장한 때였다.

그러나 민중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애니미미즘 신앙에 따라 산천이나 돌에 소원을 빌었을 것이다. 

여기에 불교와 전통 신앙의 결합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 황룡사터

 

 

황룡사는 진흥왕 14년(553년),

반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지으려 하는데, 그 자리에 황룡이 나타나므로 계획을 바꾸어 절을 짓게 되었다.

이리하여 17년만인 진흥왕 30년(569년)에 주위의 담장이 완성되었으나, 중요 건물들은 미완성 상태로, 1차 공사를 마쳤다.

 

다시 선덕여왕 12년(643년)에 자장율사의 권유에 따라, 구층목탑을 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선덕여왕 14년(645)에 완성하였다.

자장은 643년 당나라에서 귀국하면서 불두골, 불아, 불사리 100립, 비라금점가사 1벌, 장경 1부, 번당, 花蓋 등을 가지고 왔다.

이 가운데 사리는 3등분하여 한 부분은 황룡사탑, 또 한 부분은 태화사탑, 다른 한 부분은 가사와 함께 통도사 계단에 두었다.

황룡사는 이렇게 4대 왕 93년만에 완성된 것이다.

 

정문인 남문 좌우에 동서로 파생하여 다시 북쪽으로 꺾여 강당 뒤를 둘러쌓은 돌담이 있다.

돌담장 내의 면적은 동서 299m, 남북 281m, 80,928㎡(24,480평)이다. 이 남문과 돌담이 사찰과 속세의 경계이다.  

 

그리고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고의 침략으로 불타 버렸다.

 

고려 중엽의 시인 金克己(1150?~1204?)는 황룡사9층탑에 올라 이런 시를 지었다.

 

黃龍寺題詠

 

層層梯繞欲飛空 층계로 된 사다리는 빙빙 둘러 허공에 나는 듯하고,

萬水千山一望通 일만 강과 일천 산이 한 눈에 트이네.

俯視東都何限戶 굽어보니 동도의 수많은 집들,

蜂穴果蟻穴轉溟 벌집과 개미집처럼 아득하게 보이네.

 

그후 몽고의 지배기, 억불숭유의 조선조 까지 약 800년 동안 버려진 채로 있었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들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직도 황량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금당터 불상대좌 

금당터 중앙에 있는 세 개의 석조 대좌는 금동장륙삼존상을 안치했던 대좌이다.

대좌에는 자연 그대로 생긴 바위의 윗면을 평평하게 고른 뒤 장육상의 발이 들어가게 홈과 신광을 세웠던 구멍이 있다.

앞부분이 넓고 뒤로 갈수록 좁은 형태인데 좌우 협시보살도 이와 같다. 모두 입상일 것이다.

 

장육존상이란 부처의 키가 一丈六尺이라는 불교의 교리에 따라 만든 부처의 等身像이다. 1척이 30Cm라면 크기가 4.8m이다.

장육존상은 석가삼존불상이다.

 

장육삼존상 좌우에 각각 8기씩 대좌가 배열되어 모두 16개의 대좌가 있다. 모두 19기의 대소 불보살상이 있었다.

장육삼존 좌우 각각 5개 대좌는 10대제자상, 또 그 좌우에는 각각 2구씩 신장상이 있었다.

현재는 남단 서편의 동서, 서단의 대좌 1기 등 모두 3기가 없어졌다.

 

황룡사9층탑 자리

탑의 기단은 동서 29.m, 남북 29.1m, 면적은 858㎡이다.

탑자리에는 주춧돌이 64개가 있다. 기단 앞면에 계단 3개, 뒷면과 서면에 각각 계단 1개가 있다.

탑은 정면과 측면은 모두 일곱 칸의 정사각형이다. 탑의 한 변은 22.2m이다. 면적은 225평이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탑의 높이는 225尺 곧 82m로 오늘날 건물 30층 정도의 높이이다.

삼성그룹 본관 높이와 비슷하다고 한다.

찰주의 높이는 14m이다.

 

 

황룡사터 당간지주는 황룡사터에서 분황사로 가는 길목에 있다.

 

당간을 받치는 간대가 거북이다.

 

 

황룡사 치미는 국립 경주박물관에 있다.

금당터 기와무지에서 발견했다. 수십 개로 조각난 발견하여 5년 동안에 걸쳐 이어 붙였다. 높이 182cm, 최대폭 105cm로 동양 최대의 치미이다. 치미는 불을 막는다는 의미로 용마 루 좌우 끝을 장식하는 물고기 꼬리 모양의 망새다. 삼국시대에서 고려 중기까지 널리 성행하다가 차츰 쇠퇴하여, 조선시대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크고 묵중한 건물에 하늘로 비상하려는 듯한 경쾌한 느낌을 주며 동시에 지붕의 모든 부재가 땅으로 가라앉는 가운데 치미가 양 끝에서 위로 뻗치는 강한 힘을 발산한다. 두 힘 사이에 극적인 긴장감을 조성한다.

장난기 섞인 민중적 치미는 민중의 함성이다. 분청, 민화로 연결된다.

 

양옆과 뒷면에 24개의 연꽃무늬 기와와 사람 얼굴형 기와를 치미의 면들을 기하학적으로 분할하여 부착했다.

연꽃기와는 틀을 쓰지 않고 주물러 힘차게 양감을 살렸다.

얼굴기와는, 하나는 코밑과 턱에 수염을 나타내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수염이 없는 얼굴은 할머니이다.

천진난만하고 티없이 해맑고 명랑하다.

 

 

 

반월성

반월성은 성곽을 두르고 전이나 궁을 세운 궁궐다운 최초의 궁궐이다.

제5대 婆娑尼師今 22년(101)에 2월에 궁성을 쌓아 月城이라 이름하고, 7월에 금성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이 궁성에는 여러 문과 月上樓, 望恩樓, 鼓樓 등의 누각과, 南堂, 乾元殿, 崇禮殿, 平議殿과 같은 堂殿이 있었다고 한다.

그 훨씬 후인 문무왕 때에는 더 많은 전각들이 지어져 안압지 일곽과 연결되어 전각, 官衙 등의 건물들이 즐비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성 안에는 영조 14년(1738)에 축조된 석빙고가 있다.

 

이 성의 일대는 원래 瓠公의 집이었다.

석탈해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계교를 써서 빼앗아 살았다. 남해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보통 아이가 아니라 여겨 사위로 삼았다.

석탈해는 그후 4대 임금이 되었다. 탈해가 왕이 되자 이곳을 왕성으로 정하고 파사왕대 석벽을 쌓아 왕성을 마련하였다.

 

瓠公은 왜 땅에서 바가지를 허리에 매달고 바다를 건너와 ‘호’자를 붙여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왜에서 몸을 숨기려고 망명했을 것이다. 탈해 이사금은 즉위하자 호공을 大輔로 삼았다. 탈해와 호공 체제는 6부 우두머리들의 정치적 몰락을 가져와 왕권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탈해가 서라벌에 왔을 때, 호공은 신망이 높은 인물이었다. 그는 마한에 사신으로 간 기록이 있다. 

 

하늘에서 본 반월성

 

 

 

재매정(사적 제246호)은 경주시 교동에 있다.

화강암을 벽돌처럼 다듬어 쌓아올리고 그 위로 네 변에 거칠게 다듬은 긴 장대석을 이중으로 쌓아올린 후 맨 위에 잘 다듬은 ㄱ자의 장대석 2개를 짜맞추어 정사각형으로 맞물렸다. 이 일대가 김유신의 집이 있었던 자리로 보고있다.

 

<삼국유사, 제1권, 김유신> 조에 따르면, 김유신의 집안 財買夫人이 죽자 靑淵 上谷에 장사지내고 재매곡이라 불렀다. 해마다 봄이 되면 온 집안의 남녀들이 그 골짜기 남쪽 시냇가에 모여 잔치를 벌였다. 이때에는 백 가지 꽃이 화려하게 피고 松花가 골짜기 안 숲속에 가득하였다. 골짜기 어귀로 암자를 짓고 이름을 松花房이라 하여 전해오다가 願刹로 삼았다.

 

비각 속에 있는 유허비는 조선 제26대 고종(1863~1907) 9년(1872)에 세운 것이다.

 

 

김유신은 선덕여왕 13년(644)에는 蘇判이 되었고, 그해 9월에 상장군이 되어 백제의 加兮城, 省熱城, 同火城 등 7개성을 점령하고 加兮津을 열었다.

이듬해 정월 원정에서 돌아와, 아직 왕을 배알하지도 못하였는데, 사람이 와서 백제의 대군이 買利浦城을 침입한다고 급히 알리므로 왕은 또 김유신을 상장군으로 삼아 이를 막으라고 명령하니, 가족도 못 만난 채 다시 출전하여 백제군을 패주시키고 2000여명을 참획하였다.

 

그해 3월에 돌아와서 왕에게는 복명하였으나 아직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는데, 또 백제의 군사들이 국경에 나와 진을 치고 우리나라로 쳐들어오려 한다고 급히 알리자, 왕은 김유신에게 적들이 전비를 갖추기 전에 빨리 나가서 막으라 하므로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다시 전장으로 나가게 되었다.

이때 집 사람들은 모두 집 밖에 나와서 장군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 유신은 문 앞을 지나면서 돌아보지 않고 가다가 50보쯤 되는 곳에 이르러서 시종에게 집에 가서 물을 떠오라고 시켜 물을 마신 후 “우리집 물맛이 아직도 옛맛 그대로구나”하고 길을 떠났다.

그 샘이 바로 재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