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분성산 임도 답사도보- 2011년 3월 23일
금년 봄 5번째 꽃샘추위라 한다. 강원도 동해안 11개 시 · 군에 대설특보가 내렸고, 4시간 남짓 동안 10cm 안팎의 봄폭설이 쏟아졌다. 대관령이 영하 9도, 서울도 영하 2도, 남부 지방도 대부분 영하권의 날씨라 한다. 그러나 오늘 추위 때문에 힘들지는 않았다. 덤 부터 먼저 챙기자. 김해를 자나가면 시내 중심에 오똑하게 솟아 언제나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산, 신비롭기도 하여 늘 올라보고 싶었던 산, 그 산이 林虎山이다.
사진/ bonami
■ 임호산(해발 175m)을 오른다.
생강나무는 어김없이 노란 꽃을 피운다.
부흥사 범종각 지붕이다.
임호산 정상의 임호정
이 작은 산에 오르니 김해시와 김해평야가 한 눈에 들어온다.
왼쪽 가장 높은 봉우리에 김해천문대가 있고, 오른쪽으로 보이는 능선이 신어산이다.
교과서에도 나온 김해평야, 아직도 좀 남아있다.
암호산 중턱에 있는 興府庵 再建 有功비
아래 가운데 웃는 인형을 들고있는 아기스님 뒤에 '碑'자가 있을 것 같다.
■ 봉황대(김해패총과 함께 사적 제2호)는 금관가야의 왕궁터라 한다.
금관가야의 왕궁에 대하여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 가락국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그(김수로왕)는 임시로 대궐을 세우게 하고 거처하면서 다만 질박하고 검소하니 지붕에 이은 이엉을 자르지 않고, 흙으로 쌓은 계단은 겨우 3자였다.
즉위 2년(43) 정월에 왕이 말하기를 “내가 서울을 정하려 한다” 하고는 이내 임시 궁궐의 남쪽 신평답에 나가 사방의 산악을 발라보다가 좌우를 바라보며 말한다. “이 땅은 협소하기가 여뀌[藜-풀] 잎과 같지만 수려하고 기이하여 16나한이 살 만한 곳이다. 더구나 1에서 3을 이루고 그 3에서 7을 이루니 7성(聖)이 살 곳으로 가장 적합하다. 여기에 의탁하여 강토를 개척해서 마침내 좋은 곳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여기에 1500보 둘레의 성과 궁궐과 殿堂 및 여러 관청의 청사와 무기고와 곡식 창고를 지을 터를 마련한 뒤에 궁궐로 돌아왔다. 두루 나라 안의 장정과 공장을 불러 모아서 그 달 20일에 성 쌓는 일을 시작하여 3월 10일에 공사를 끝냈다.
그 궁궐과 옥사는 농사일에 바쁘지 않은 틈을 이용하니 그해 10월에 비로소 시작해서 이듬해(44) 2월에 완성되었다. 좋은 날을 가려서 새 궁으로 거동하여 모든 정사를 다스리고 여러 일도 부지런히 보았다."
지금 이곳에 왕궁터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봉황동 일대는 중간에 우뚝 솟은 봉황대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에 조개더미가 분포되어 있어 가락국 초기 생활 중심지였음은 분명하다.
금년 봄 첫 진달래를 보고,
망해정지 표지석
■ 여의각은 여의라는 낭자의 정절을 기리는 사당이다.
사진/ 백일봉
여의각 안에 여의의 영정이 걸려있다.
여의낭자와 세장군의 애틋한 사랑의 사연이 전한다.
금관가야 제9대 견지왕 때 출정승의 딸 여의와 황정승의 아들 세가 살고 있었다. 이들의 아버지인 두 정승은 여의와 세를 낳기 전에 이미 사돈간이 되기로 약속한 터였다. 그러나 그후 지체와 세력이 더 높아진 출정승은 마음이 변해 딸 여의를 사내아이처럼 꾸며 세와 함께 서당에서 글공부를 하게 하였다. 여의는 사내아이처럼 꾸몄지만 자라면서 여자임을 감추기 힘들었을 것이다. 세는 여의를 의심하여 여의에게 소변 멀리 누기와 멀리 뛰기 시합을 제의했다. 이를 눈치 여의는 자신의 본색을 감추기 위해 달아나 버렸다. 결국 여의는 세에게 자신이 여자임을 털어놓았고, 둘은 사랑하게 되었다. 출정승도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둘을 약혼시켰다.
그후 어느날 세가 가락국을 침입한 신라군에 맞서 싸워 나라에 큰 공을 세우게 되자 왕은 세를 사위로 삼았다. 세는 이미 약혼녀가 있었으나 왕명을 거역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여의는 왕의 사위가 된 세를 잊지 못하였고 그 괴로움에 24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고 만다.
이 소식을 들은 세 역시 여의를 잊지 못하다가 곧 죽는다. 이렇게 되고 보니 세의 아내인 유민공주 역시 세상을 비관하고 임호산(유민산)으로 출가하여 불도를 닦다가 세상을 떠났다.
여의각은 1973년 회현동 주민들이 이 사당을 건립하여 매년 단오날 추모제를 지낸다.
현재의 건물은 2002년 봉황동유적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보수정비하였다.
편액은 菁南 吳濟峯이 썼다.
사진/ bonami
또 사람들은 여의와 세의 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나무를 심어 여의목과 황세목이라 이름지었고,
큰 바위 위에 작은 바위를 얹어 여의돌과 황세돌이라 했다.
황세돌과 여의돌
그리고 두 사람과 인연이 있는 곳을 기리며 망해대라 하던 산 이름을 여의대로 고치고 제각을 지어 위령제를 지냈다.
여의대라는 산은 이제 봉황대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 김해패총은 김해 회현리패총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봉황동이지만 옛 이름은 회현동이다.
김해패총은 1907년 일본인 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처음 발견하였다. 그후 1914년부터 1935년까지 6차례나 발굴하였다.
1914년부터 17년까지 3차례 발굴하여 보고서도 내지 않고 있다가 1920년 다시 조사하여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에 따르면 돌로 만든 유물, 짐승 뼈로 만든 유물, 토기와 철기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貨泉이란 新나라(8~25) 王莽이 10년에 발행한 화폐가 출토되었다. 이를 통해 김해지역은 가락국 성립이전부터 중국과 왕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본 학자들은 김해패총을 1세기경에 형성된 것이라 하였다. 또 석기와 철기가 함께 출토되었으므로 한반도에는 청동기시대가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와같은 이론은 광복 후에도 줄곳 인정되어 오다가 1960년대에 들어서 비로소 청동기시대의 존재를 밝혔다.
또 조개무덤 속에서 탄화된 쌀도 한 주먹 나왔다. 한반도의 쌀농사가 시작된 시기를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자요다.
1935년 발굴조사에서는 조개무지 아래층에서 고인돌과 독무덤, 돌널무덤, 움집자리 등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김해패총은 앞선 시기의 무덤터와 이후 조개더미로 이루어진 생활유적지 등 2개의 문화층이 겹친 삼한시대의 유적지임이 밝혀졌다.
아곳에서 출토된 김해토기
분성산 임도를 오른다.
■ 은하사 - 김해시 삼방동
서기 42년 김수로왕이 창건했다고 하며,
수로왕 때(42~199 재위) 수로왕비 허황옥의 오라버니 장유화상이 창건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때는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이므로 믿기 어렵다.
본디 서림사라고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은하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조일전쟁 때(1592) 불에 탄 것을 1600년대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다.
높은 돌 게단을 오르면 연못이 나타난다.
이곳이 달마야 놀자 에서 스님팀과 조폭팀이 밑빠진 독에 물붓기 내기를 한 곳이다.
김수로왕은 이곳을 16나한을 모실만한 곳이라 했다.
절을 둘러싼 병풍같은 기암괴석을 모두 나한상이라 생각한 것 같다.
현재 16나한을 모신 나한전이 대웅전 옆에 있다.
대웅전 안에 몸통은 물고기, 머리는 용인 神魚문양,
발톱이 5개인 용그림 등 허황후가 가야국으로 올 당시 인도 아유타시대 문양을 볼 수 있다.
은하사 대웅전
은하사 범종각
이곳에는 다른 곳에서 보기 어려운 특이한 조각들이 있다.
허황옥이 인도에서 왔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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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뒤로 신어산(해발 630m)이 병풍처럼 둘러싸며, 양편으로 울창한 소나무와 대나무가 숲을 이루어 절을 포근하게 감싼다.
사진/ bonami
사진/ bonami
사진/ bona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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