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왕비릉~ 구지봉~ 수로왕릉~ 연지공원~ 천문대~ 분산성- 2011년 3월 2일
김해시 구산동 백조아파트 정류소에서 만났다.
약속시간 10시보다 좀 늦었다.
꽃샘추위, 말처럼 그렇게 예쁜 것은 아니다.
좀 쌀쌀했다. 그러나 추위가 우리를 어렵게 하지는 않았다.
봄은 이미 나에게
龜旨門,
이 문을 들어서면 수로왕비릉이다.
■ 수로왕비릉(사적 제74호)은 수로왕릉과 조금 떨어진 구산동에 있다.
원형봉토분으로 둘레에 아무런 장식이 없다.
조선 인조 25년(1647)에 세운 비와, 제사를 지내기 위한 몇 채의 건물들이 있다.
비에 "駕洛國首露王妃 普州太后許氏陵 "이라 썼다.
파사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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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 앞 작은 전각 안에는 파사석탑이 있다.
“금관국에 있는 虎溪寺 婆娑石塔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으로 있을 때 世祖 수로왕의 비 허황후 황옥이 東漢 건무 24년(48년)에 서역 아유타국에서 배에 싣고 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향하려하는데, 수신의 노여움을 받게 되어서 가지 못하고 돌아와 부왕께 아뢰자 부왕은 이 탑을 배에 싣고 가라고 했다. 그리하여 바다를 건너 편하게 남쪽 언덕에 도착하여 배를 대었다. ……
탑은 모진 4면 5층으로 되었고, 그 조각은 매우 奇妙하다. 돌에는 희미한 붉은 무늬가 있고 품질이 매우 좋은데 우리나라에서 나는 종류가 아니다. (<삼국유사> 제3권 塔像 제4 金官國 婆娑石塔)
파사석탑은 물론 파사석으로 만든 석탑이다. <本草綱目, 명나라 李時珍이 1596년에 지은 책>, 石部에 “선박들이 이 돌이 나는 산 밑을 왕래할 때 그 돌을 사랑하여 더듬어 잡는다는 데서 摩裟石이라 한다.……파사석과 유사한 것이 있으니 돌을 물에 갈아 닭 벼슬의 피에 담아보아 물이 되는 것이 진짜다.……태우면 유황 냄새가 난다.”고 하였다.
이 점은 허명철이 이미 실험하여 진짜 파사석임을 증명하였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가야불교> 참고)
탑은 현재 가장 아래층은 방형으로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나머지는 그저 돌덩어리를 쌓아둔 것 같은 모습니다.
이 탑은 鎭風塔이라 하여 후대 사람들이 이 탑의 돌을 가지고 항해나 고기잡이를 하면 파신의 노여움을 싸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몰래 조금씩 떼어가 이런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일연스님은 이 탑을 보고 그 모습이 “매우 기묘”하다고 적었다.
수많은 탑을 본 일연스님이 기묘하다고 한 것은 까닭이 있다.
파사석탑은 파사석으로 만든 축소형 스투파이거나 스투파 상단 입주일 것이다. 원래 스투파는 거대한 봉분 모양이다.
인도 석굴 사원의 스투파라면 상단 부분이 넓고 하단 부분이 좁으므로 이 파사석탑은 거꾸로 엎어야 한다. 축소형 불상이 조각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무불상시대(BC 5세기에서 AD 1세기 사이)의 것으로 보인다.
탑을 재배열 하면 구성과 형태가 인도의 스투파와 같다. 이점은 허명철님이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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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탑은 원래 虎溪寺(고종 10년 1873년 폐사)에 있던 것을 김해부사가, “허황후께서 인도 아유타국에서 가지고 온 것이니 허황후 능 곁에 두어야 한다.”고 하여 허황후 능 앞으로 옮겼다.
구지봉으로 간다.
■ 구지봉(사적 제429호)
수로왕 탄생설화의 현장이다. 거북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구수봉이라고도 한다. 수로왕비릉이 있는 쪽이 거북의 몸이고, 서쪽으로 뻗어 구지봉이 거북의 머리에 해당한다.
일제강점기 거북의 머리에 해당하는 곳을 잘라 도로를 내는 바람에 끊어졌다가 근래에 육교를 만들어 이었다. 지금 수로왕비릉에서 구지봉으로 건너갈 수 있다.
이 기념물 옆에는 1907년에 세운 기념비가 있고, 구지봉 아래 <구지가>가 새겨진 비석이 있다.
구지봉에 수로왕을 비롯한 5가야의 시조가 알로 태어나는 것을 상징하는 알 5개와 9간을 상징하는 용 9마리가 돌에 조각되어 있었는데,
보이지 않았다. 수로왕릉으로 옮겼단다.
지금은 이런 이상한 돌이 서있다.
바득판식 고인돌이 하나 있다.
깬돌 네뎃 개를 괴어 가로 세로 2.5m, 두께 0.3~0.4m쯤 되는 덮개돌을 올렸다.
덮개돌에 "龜旨峰石"이란 글이 있는데, 한석봉이 썼다는 이야기가 있다.
구지봉의 풍경
산수유, 매화가 거의 피었다.
꽃샘추위라, 그런 것은 해당이 없는 모양이다.
■ 수로왕릉(사적 제73호)
<삼국유사>, 제2권 가락국기에,
"……이에 비로소 나라를 다스리고 집을 정돈하며,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니 그 교화는 엄숙하지 않아도 위엄이 서고, 그 정치는 엄하지 않아도 다스려졌다. 더구나 왕이 왕후와 함께 사는 것은 마치 하늘에게 땅이 있고, 해에게 달이 있고, 양에게 음이 있는 것과 같았으며 그 공은 도산(塗山-도산씨의 딸이 하나라 우에게 시집가서 우왕을 도왔다)이 夏를 돕고, 당원(唐媛-요임금의 딸 항아와 여영. 이들은 순임금에게 시집가서 순의 후예인 교씨의 시조가 되었다)이 교씨를 일으킨 것과 같다.
중평 6년 기사(189) 3월 1일에 왕후가 죽으니 나이는 157세였다. 온 나라 사람들이 땅이 꺼진 듯이 슬퍼하여 구지봉 동북 언덕에 장사지내고……,
왕후가 죽자 왕은 매양 외로운 베개를 의지하여 몹시 슬퍼하다가 10년을 지난 후한 헌제 입안 4년(199)에 3월 23일에 죽으니 나이 158세였다. 나라 사람들은 마치 부모를 잃은 듯 슬퍼하여 왕후가 죽던 때보다 더했다. 대궐 동북쪽 평지에 빈궁을 세우니 높이기 한 길이며 둘레가 300보인데 거기에 장사지내고 이름을 首陵王廟라 했다."
흔히 볼 수 있는 원형봉토분이다. 왕릉이 언제 축조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수로왕의 아들 제2대 거등왕(199~253 재위)으로부터 마지막 왕 제10대 구형왕(521~532)까지 330년 동안 매년 정월 3일과 7일, 8월 5일과 15일에 제사를 지냈다.
그러다가 구형왕이 나라를 잃은 뒤 문무왕 원년까지는 60년 동안에는 더러 제사를 빠뜨리기도 했다.
“신라 제30대 문무왕 원년(661) 3월 왕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가야국의 시조 구형왕이 이 나라에 항복할 때 데리고 온 세종(구형왕의 맏아들)의 아들인 솔우공의 아들 서운잡간(김유신의 아버지 舒玄각간)의 딸 문명왕후께서 나를 낳으셨으니, 시조 수로왕은 어린 나이에 15대조가 된다. 그 나라는 없어졌지만 그를 장사지낸 사당은 지금도 남아있으니 종묘에 합해서 계속 제사를 지내게 하라.”
그리하여 사당에 가까운 곳에 있는 좋은 밭을 내려 王位田이라 하여 제사와 사당 관리에 필요한 재물로 쓰게 했다.
해마다 명절이면 술과 단술, 떡과 밥 - 차- 과실 등을 갖추어 제사를 지냈다. 제삿날은 거등왕이 정한 연중 5일을 그대로 지켰다.
고려 문종 때 부분적인 수리가 있었고,
조선 세종 때 정비했다. 선조 13년(1580) 당시 영남관찰사이던 허엽이 대대적으로 개축했다.
조일전쟁 때 도굴당했고, 그뒤 다시 봉토를 높였다.
인조 25년(1647) 왕명으로 능 앞에 묘비를 세웠으며,
고종 15년(1878) 나라에서 숭선전을 중수하였다.
수로왕릉 홍살문
가락문을 안에서 본 것이다.
수로왕릉 정문 '납릉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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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어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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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릉
비에 "駕洛國首露王陵" 이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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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과 왕비의 영정(사진/ ㄴrㅂr론)
납릉정문 밖에 있는 많은 건물들은 모두 제사를 위한 시설들이다.
분성산성이 보인다.
崇善殿은 수로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집이다.
마당에 있는 짧은 기둥들은 제사를 제낼 때, 제관들의 자리를 표시한 것이다.
아름다운 연화대좌 하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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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을 나서면 능역을 떠나 고목숲으로 이루어진 공원이다.
왕버들이 엄청 크다.
목련이 필 준비를 다한 듯하다.
이 기념물은 본디 구지봉에 있었다.
김수로를 위시한 5가야의 시조가 알로 태어난 것을 상징하는 기념물이다.
탄생을 상징하는 기념물이 왜 탄생의 장소가 아닌 이곳 죽음의 장소에 있는지 의문이다.
또 9간을 상징하는 용 9마리도 있었던 듯한데, 보이지 않는다.
능역 밖을 돌아 수릉원으로 가는 길이다.
가는길에 "가야원"이라는 한옥이 있다.
수릉원
먼저 "茶祖 普州太后 許黃玉像" 상과,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시집올 때 가지고 온 차나무인 '장군차' 나무가 있다.
차[茶]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2대 흥덕왕 3년(828)> 조에,
"……12월에 사신으로 갓다가 돌아오는 김대렴이 차종자를 가지고 왔으므로, 왕은 지리산에 심게하였다. 차 마시는 풍속은 이미 선덕(여)왕 때부터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성행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곳이 지리산 쌍계사 근처이다.
그러나 허황옥이 차나무를 가지고 왔음이 분명하다.
해반천을 따라간다.
경전철이 해반천 위로 지나간다.
해반천을 건너,
연지공원
마술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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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12시 20분.
들어가지 말라는 잔디밭에 들어가서 점심을 먹었다.
매화 옛 등걸에 봄이 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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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시내를 벗어나 분성산으로 오른다.
삼계체육공원으로 간다.
천문대로 간다.
김해천문대
해시계의 모형이다.
분성산
분산성이 보인다.
항아리, 또는 화분처럼 보여 이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신어산이 반퉁이를 엎은 모습으로 보인다.
MBC 드라마 <철의 제왕 김수로> 촬영장
분산성으로 가는 길
분성산을 뒤돌아 보고,
분산성(사적 제66호)
봉수대 바로 앞에 고인돌 하나가 있다.
봉수대, 만장대라 한다.
"萬丈臺", 흥선 대원군이 썼다. 대원군의 낙관도 보인다.
충의각 안에 비 4기가 있다.
그 중 하나는 흥선 대원군 불망비다.
해은사
해은사 대왕전에 모신 수로왕과 왕후의 영정
이 그림은 지금은 없어진 聖祖寺에서 가지고 왔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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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방불교의 스투파다.
불상 아래쪽에 있는 부조들은 힌두교의 신들이다.
우리나라 탑의 상층기단에 있는 팔부신중과 같다.
봉수대를 뒤돌아 본다.
4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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