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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래산 둘레길과 봉래산- 2010년 1월 26일

추연욱 2011. 1. 26. 21:05

 

봉래산 둘레길과 봉래산- 2010년 1월 26일

 

남항동 해안길을 걸으며 남항과 천마산을 돌아본다.  

 

 

피아노계단에서

 

 

 

 

집들이 무덤을 감싸 안고 있다.

 

 

 

 

 

백련사

 

 

 

 

 

 

봉래산 너덜겅

봉래산에도 달성의 비슬산이나 산랑진의 만어산처럼 너덜겅이 발달되어 있다.

너덜겅은 한자로 崖錐라 하는데, 이곳에는 모난 돌무더기가 넓게 쌓여 풀이 자라지 못하는 곳이다.

지질학의 설명에 따르면, 너덜겅은 수만 년 전 빙하기 때 형성된 것이라 한다.

거대한 암벽 틈새에 수분이 스며들어 얼고 녹는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틈이 벌어져 떨어져 나간 암석이 암벽 아래쪽으로 굴러떨어져 쌓인 것이라 한다.

 

 

이쯤에서 뒤돌아 구덕산과 승학산을 바라본다.

 

 

 

 

 

 

산제당

 

 

산제당과 아씨당 옆에 그 유래담을 장황하게 써 두었다. 

 

산제당과 아씨당 전설

영도 봉래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산제당과 아씨당은 신라시대 절영도에 있던 국마장에 얽힌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조선 순조시대 절영도에서 말을 실어갈 적에 서쪽으로 끌고가면 병들어 죽는다는 것이다. 그 바람에 군마 관리 책임을 맡고 있던 부산진 첨사가 골머리를 앓았다. 그때 ‘한 선녀가 노복 두 사람을 데리고 절영도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선녀가 나오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그 무렵 정발이라는 무관이 부산진 첨사로 부임했다. 장군은 키가 6척에 어떤 일도 겁내지 않았다.

장군은 항간에 나도는 이야기로 미루어 군마들이 까닭없이 죽는 것은 그 선녀의 까탈이라 의심하던 어느날 밤 꿈에 이상한 이야기를 그녀에게서 들었다.

“이 몸은 칠원성군인데 옥황상제기 등극하여 천상에 있지 못하고 탐라국 여왕이 되었습니다. 고려 최영 장군이 탱자나무로 둘러진 성 둘레에 갈대를 심어 불을 댕겨 마침내 탐라국을 함락시켰습니다. 저는 장군의 첩이 되어 일편단심으로 몸과 마음을 바쳤으나, 장군은 제주도를 떠나고 나랏일로 바빠 수 삼년 동안 소식을 끊었습니다. 독수공방으로 지내는 저에게 신돈의 모함으로 장군이 절영도에 유배되었다는 소식이 들려 그 길로 이곳 절영도에 왔습니다. 그러나 장군은 절영도에 온 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되어 이 몸은 사고무친의 이곳에서 한많은 청춘을 마치고 고독한 영신이 되었습니다. 바라옵건데 저를 위하여 사당을 지어 고혼을 위로해 주면 군마가 죽는 것을 막아드리고, 정차 이곳에 사람이 살게 될 때 태평무사하게 지내게 해 줄 것입니다. 더불어 드릴 말씀은 나를 모시는 사람은 만사형통하고 소원성취할 것임을 아룁니다. 정발 장군이 꿈 이아기를 조정에 아뢨더니 임금은 동래부사 송상현에게 명하여 산제당과 아씨당을 짓고 해마다 봄 가을에 당제를 모시게 하였다. 그후 군마가 폐사하는 일이 사라졌다고 전한다.”

 

산제당과 아씨당에 전하는 전설은 영도의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설화이며, 제당 설립과 기원을 밝히는 당신화이다. 신화는 정발, 송상현, 최영, 신존 등 역사적 인물을 배치하여 흥미로운 스토리다. 이 전설은 영도가 오랫동안 국마장의 기능과 제주도 주민들의 이주 등 여러 역사적 사실을 보여주는 설화다.

산제당과 아씨당의 당제는 매년 2화 음력 1월 15일과 9월 15일에 지내며 3년마다 한번씩 전체 구민이 참여한다.

 

산제당과 아씨당은 원래 영도초등학교 부지 안에 있던 것을 1915년 지금 자리로 옮겼다. 산제당의 위치는 영도구 신선동 2가 141번지로 산신제 성격은 영도구 어민의 만선을 기원하고 구민의 수복을 기원하는 제례행사다. 할배당제 - 아씨당제 - 사천 - 왕장군님 할배당 - 용왕당제 - 골목 할매제 순서로 진행한다.

아씨당은 탐라국 여왕을 모시면서 군마만 잘 자라게 해준 것이 아니라 제주를 오가는 뱃길이 순조로워지고 제주 사람이 찾아와 영도를 풍요롭게 하는 데 일조했다.

외지인과 제주 해녀가 영도에 뿌리내려 생활 터전을 만든 것도 아씨당의 탐라국 여왕이 보살펴주는 덕분이라 전한다.

 

 

 

 

 

팔손이 군락지

 

 

편백나무숲을 지나,

 

감만부두와,

 

남항대교 다릿발을 바라본다.

 

 

봉래산 정상으로 오른다.

 

 

 

 

 

 

봉래산 정상, 1시

蓬萊山이란 이름은 “절영도 진의 첨사였던 林翊準이라는 사람이 영도의 지명을 한문식으로 고쳐 지을 때 이곳은 신선이 사는 곳이라 하여 산 이름을 봉래산이라 했다.”고 부산광역시시사편찬위원회에서 1997년에 펴낸 <부산지명총람 2권>에 설명했다.

 

봉래산은 중국 전설에 나오는 산으로 발해만 동쪽에 있다고 하였다. 方丈山, 영주산(瀛洲山)과 함께 삼신산이라 했다.

사마천이 지은 <史記>에 의하면, 이곳에 신선이 살고 있으며, 不死藥이 있다 하여 진시황과 漢 武帝가 이것을 구하려고 童男童女 수천 명을 보냈으나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이 이름을 본떠 우리나라의 금강산을 봉래산, 지리산을 방장산, 한라산을 영주산이라 하여 이 세 산을 삼신산이라 불렀다.

 

일제강점기 일본 사람들이 枯渴山(말라서 없어지는 산)으로 불렀다.

여기서 고깔산이란 말도 나왔다. 꼬깔산이란 이름은 ‘고갈산’과 음이 비슷해서이거나 봉래산의 모양이 원뿔형이기 때문에 생겼을 것이다.

 

이 바위가 '영도할매'의 신체다.

아래쪽 허연 줄은 영도할매에게 바친 막걸리가 흘러내린 자국이다.

 

 

 

 

 

 

 

 

 

 

 

 "오륙도 다섯 섬이 다시 보면 여섯 섬이……"

오륙도가 보인다.

 

 

 

 

 

 

정상에서 내려와 갈림길 옆에서 점심시간, 1시 25분

 

 

 

 

 

 

목장원 안에 있는 소나무, 2시 15분 

 

 

75광장, 1975년에 만들어 75광장이란다. 2시 20분.

 

 

 

 

 

 봉래산을 바라보고,

 

 

감지해변(자갈마당)을 지나,

 

 

태종대 둘레길로 들어간다.

왼쪽 "진임금지" 쪽으로 간다.

 

 

태종대, 4시 10분

 건물이 들어선 이곳이 자살바위였다.

 

 

 

등대가 있는 저 섬이 生島, 일명 주전자섬이다.  

 

 

 

 

 

남항전망대

 

 

 

 

오른쪽 기슭에

 순직장병 추모비

 

 

태종대 공원을 한바퀴 돌아 오른쪽 "진입방향"으로 나왔다.

4시 40분이다.

 

 

 

 조금 내려가면 버스 정류소다. 

 

 

 사진/ 산두리

 

 

 

 

 

 

 

 

 

 

 

 

 

 

bonami님이 18km를 걸었다고 일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