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여행/인도행

경주 남산 답사도보 5차/ 지바위골- 2010년 7월 7일

추연욱 2010. 7. 5. 21:01

 

경주 남산  답사도보 5차- 2010년 7월 7일

-오산골에서 금오봉, 봉화대능선, 칠불암으로-

 

백일봉님, bonami님, 비주류님, 미산님,

대구에서 오신 추계소문님, 백연님, 그리고 나,

이렇게 일곱 분이 함께했다.

  

 

■ 남산리 삼층석탑(양피사터 쌍탑)(보물 제124호) 

오산골 어귀 마을은 본디 避里 또는 피촌라 했다.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이름을 바꾸면서 남산리라 했다.

그래서 지금 이 마을을 남산리라 히고, 이 탑을 남산리 쌍탑이라 한다.

그러나 이곳은 본디 양피사터다. 

 

두 탑은 동서로 21m의 간격을 두고 마주 서있다.

 

동탑은 모전석탑의 형식을 취하고 있고, 서탑은 이중기단에 각층이 별석으로 된 신라 전형양식의 석탑이다.

양식이 다른 두 탑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동서쌍탑은 대체로 같은양식을 취하지만, 이처럼 다른 양식을 취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예로 불국사 다보탑과 석가탑이 있다. 

 

* 동탑은, 높이 7m로 넓은 이중의 지대석 위에 기단을 만들었다.

잘 다듬은 커다란 돌덩이리 8개를 2층으로 쌓아 기단으로 삼았다.

기단을 쌓은 여덟 개의 돌은 크기가 서로 달라 연결된 선이 亞字형으로 되어있다. 이는 균형미를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기단 위에 세 개의 몸돌괴임돌을 놓고, 그 위에 기둥[隅柱]없는 첫 몸돌을 올렸다.

첫 몸돌은 위 몸돌보다 넓다. 몸돌 위에는 5개의 지붕돌받침이 있다.

넓은 추녀가 일직선으로 가로 놓이고 낙수면도 계단식으로 경사를 지워 지붕을 만들고 그 위에 이층 몸돌을 얹어 놓았다.

이층, 삼층 몸돌의 높이는 첫 몸돌 높이의 반 이상 줄었는데 비해 몸돌 너비와 지붕돌 추녀의 너비는 조용한 비례로 축소되면서 솟아 있다.

지붕돌 받침은 1층에서부터 5. 5. 4단이고, 낙수면은 일반 석탑양식과는 달리 초층에서부터 7. 6. 5단의 층을 형성하였다.

상륜부는 노반만 남았을 뿐 나머지는 없어졌다.

 

기단이 단층, 몸돌에 기둥이 없는 점, 지붕 위 낙수면에도 계단이 새겨져 있다는 점이 특색이다.

특히 몸돌부분에는 모서리기둥을 새기지 않았다. 이는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제30호)을 모방한 것이다.  

이런 형식의 기단은 서악리 삼층석탑(보물 제65호, 9세기)과 이 양피사 동탑밖에 없다.

 

 

* 서탑은 높이 5m로 2층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세운 전형적인 신라 석탑이다.

하층기단의 너비는 1층몸돌 너비의 3배, 상층기단의 너비는 1층몸돌 너비의 약 2배이다.

안정된 삼각구도의 기단 위에 층층의 몸돌들은 부피를 줄이며 솟아올랐다.

층층마다 지붕돌의 추녀는 곡선을 그리며 날 듯이 양끝을 치켜들었다.

상륜부는 역시 노반만을 남고 나머지는 없어졌다.

 

특히 상층기단의 중석은 4매석으로 구성되어 중간의 버팀기둥 1주로써 구획되어 각면 2구씩 모두 8구의 팔부중신을 돋을새김하였다.

팔부신중은 주로 신라 중대 이후에 등장하는 조각으로서 이 석탑의 연대와 함께 팔부신중 조각의 양식계보 설정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서탑 2층기단에는 팔부신중상이 새겨져 있다.  

 

 

두 탑 중간쯤에 석등 대좌 하나가 있다. 

 

 

 오산곡 마애불은 찾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다.

 

 

■ 오산골 삼층석탑은 남산의 여느 탑처럼 1층기단은 생략하고 남산 전체를 1층기단으로 삼았다. 

 

 

 

큰지바위는 너비 150m, 높이 50m쯤 된다. '땅의 큰 신'이란 뜻일 것이다.  

 

 

이 바위는 신앙의 대상이었다. 촛불을 켠 흔적이 있다.

 

 

 

 

지바위 앞에 이런 앙증스런 폭포도 있다. 높이 30cm쯤 된다. 

 

 지바위를 지나 능선으로 오르는 길에 이런 민불이 있다.

 

명문도 있는데 읽을 수가 없다.

 

 

이런 민불도 있다.

 

 

탁자바위

이 탁자바위를 받치고 있는 돌들은 마치 책상다리 같다.

이곳에 서면 시야가 확 트여, 바라보는 남산의 전망은 무석 시원하다.   

 

 

탁자바위에서 본 남산부석 

 

 

부석을 밭치고 있는 돌

 

 

사자봉

 

 

 

삼화령

용장사 쪽으로 뻗어내린 산맥과 남으로 뻗어 수리산으로 연결되는 산맥과 금오봉에서 흘러오는 세 갈래의 산맥이 모여 꽃봉오리처럼 솟아오른 봉우리다.

이 정상에 연화대좌가 있다.

 

삼화령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많다.

정통 고고학계에서는 이곳이 아니고 해목령에서 북쪽 도당산으로 이어지는 고개(맨드리고개)로 보았다.

 

운경렬은 이곳이 삼화령이고 연화대좌 위에 안치되었던 불상이 삼화령미륵불이라 보았다.  

 

삼화령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삼화령미륵부처가 출토된 곳이며, 충담사와도 관련이 있기 빼문이다.

 

<삼국유사 제3권 탑상 제4>, 생의사 석미륵 조에,

선덕왕 때 중 생의는 항상 도중사에 살고 있었다.

어느날 꿈에 한 중이 그를 데리고 남산으로 올라가서 풀을 매어 표를 해놓게 하고는 산 남쪽 골짜기에 와서 말한다.

"내가 이곳에 묻혀 있으니 스님은 이것을 파내다가 고개 위에 편안히 묻어 주시오."

꿈에서 깨자 그는 친구와 함께 표시해 놓은 곳을 찾아 그 골짜기에 이르러 땅을 파자 거기에서 석미륵이 나왔으므로 삼화령 위로 옭겨 놓았다.

선덕여왕 13년(644)에 그곳에 절을 세우고 살았는데, 그 뒤에 이 절 이름을 生義寺라 했다.

 

충담사가 해마다 3월 3일과 9월 9일이면 차를 달여서 공양한 비륵불이 바로 이 부처이다.  

 

연화대좌

지름 2m의 복련화로 남아있다. 대좌 위에 기둥을 세웠더 구멍이 줄지어 뚫려있다.

 

 

 

 

삼화령 미륵삼존불(국립 경주박물관 소장) 

 

 

이영재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신선암봉 

 

 

■ 신선암 마애보살상(보물 제199호)

근래까지 이곳에 神仙庵이란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보살상을 신선암 마애보살상이라 한다. 신라 때는 무슨 절이었는지 무슨 보살님이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칠불암 뒤 높은 절벽의 남쪽을 향한 바위면에 보살상을 새겼다.

비가와도 보살상이 젖지 않도록 윗부분이 조금 앞으로 숙여지게 깎아 높이 1.53m, 너비 1.27m의 배 모양의 龕室을 만들었는데, 감실을 그대로 거신광으로 삼았다.

감실 내부에 세 줄의 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구분하였다.

눈은 가늘게 뜨고, 입가에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감돌아서 전체적으로 온화하고 자비로운 모습을 보인다.

 

옷자락으로 덮힌[裳縣座] 의자 위에 왼발은 대좌 위에 얹고, 오른발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늘어뜨려 반가에 가까운 모습을 취하고 있다.

이런 자세를 遊戱坐상이라 한다. 유희좌는 아주 편안하게 앉아 있다는 뜻이다.

 

 

머리는 보계를 틀어 올리고 그 둘레에 세 면으로 된 보관(삼면두식)을 썼으며, 그 위로 육계가 솟아 있다.

머리카락은 어깨 위에까지 늘어져 둥글게 뭉쳐 있다.

머리 장식을 동여 맨 끈은 머리 좌우에서 나비 날개처럼 매듭을 짓고, 그 자락이 양 귀 언저리로 흘러 내려 두 어깨에 드리워져 있다.

 

천의 자락은 부드럽게 흘러 약간 비만한 몸의 굴곡을 넌지시 드러내면서 무릎밑으로 흘러내리고 있는데, 그 끝부분은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듯 나부끼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발 밑에는 화려한 구름을 새겨 이 보살이 천상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두 손은 가슴 앞에 들어 오른손에는 꽃가지를 쥐고, 왼손은 엄지와 장지를 맞댄고 설법인을 맺고있다.   

 

살결이 풍만한 둥근 얼굴에 야단스럽고 화려한 옷차림, 조각이 평면적인 점 등으로 보아 8C 후반에 조성된 듯하다. 

 

두 어깨 위 광배의 윗면에 가로로 길게 파인 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는 목조 전실이 세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보살상 주변 바위에 지름 10cm쯤 되는 구멍이 1.5m의 간격으로 다섯 곳에 파여 있다. 이로보아 옛날에는 바위 가를 쇠난간으로 둘러 막았던 듯하다.

 

 

 

칠불암으로 내려가는 길

  

 

 

칠불암 

 

 

 

■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국보 제312호)

보물 제200호로 있다가 2009년 9월 1일 국보로 승격하였다. 경주 남산의 유일한 국보다.

칠불암은 근래에 지은 절이다. 신라 때 절 이름은 알지 못한다.

 

 

칠불암이란, 동남쪽으로 향한 큰 바위에 삼존불이 부조로 새겨져 있고,

그 앞에 별도로 솟은 사면체 바위에 각 면마다 여래상 1구씩 새겨 삼존불과 사방불 등 7개의 불상이 조각되어 있어 칠불암이라 한다.

 

 

높은 돋을새김, 풍만한 얼굴, 양감이 풍부한 사실적 신체 표현, 옷주름의 융기 등으로 보아 8세기 초엽에 만든 작품이다.

보살들의 유연한 자세는 삼릉계의 석불좌상, 석굴암 본존불, 굴불사터 석불좌상과 비슷한 양식이다.

 

 

불상 위에 기둥을 세웠던 흔적이 두 곳에 있는 것으로 보아, 본디 전실이 있어 그 안쪽에 불상을 모셨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이 주변에는 당시 건축물 존재를 짐작하게 하는 기와 조각 등이 나오고 있다.

 

 

 

 

 삼존불

본존불 높이가 2.7m이다. 

대좌는 매우 사실적인 2중 연화 무늬가 새겨진 仰蓮과 伏蓮으로 이루어져 있다. 8각중대석은 생략되었다.

광배는 무늬가 없는 寶珠形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은 몸에 비해 크다.

소발의 머리에 큼직한 육계가 있고, 떡 벌어진 어깨에 잘록한 허리, 결가부좌한 다리 등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서 안정된 구도를 보이고 있다.

보존 상태도 좋은 편이나 코가 깨져 시멘트로 발라 다소 흉한 모습이 되었다.

 

 

항마촉지인을 맺은 두 손은 유난히 크다.

이  불상은 우리나라 항마촉지인 불상의 초기 양식이다.

降魔觸地印은 석가가 성도하는 순간 마귀가 방해하면서 '참된 깨달음을 이루었다면 大地의 神을 불러내어 증명해 보라'고 요구한다.

이에 석가는 두 손을 무릎위에 포갠 선정 자세에서 왼손 바닥을 위로 하여 결가부좌한 발 위에 얹고, 오른손을 풀어 검지를 곧게 펴 땅을 가리키자 지신이 나타나 그의 깨달음이 진실한 것임을 증명한다.

이 모습이 뒷날 항마촉지인의 성도상이 만들어지는 동기가 된다. 오른손은 성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석가여래만 맺을 수 있다.

 

 

항마촉지의 손모양은 존재 내부의 악마인 탐욕[貪], 성냄[嗔], 어리석음[痴]을 극복하는 것을 상징한다.

그후 외부의 악마를 극복하는 쪽으로 발전하여 호국사상과 이어진다.

 

항마촉지인상은 우리나라에서는 8C 이후 지속적으로 제작된다. 항마촉지인 불상은 일본에는 전혀 없고, 중국에서도 아주 드물다.

 

8C 중엽부터 지권인을 한 여래형 비로자나불이 형상화되어 예배의 대상이 된다.

통일신라 후반기부터 성행하여 고려, 조선을 통해 항마촉지인의 석가상과 함께 불상조성의 주류를 이룬다.

이런 현상은 다른 나라와 구별되는 한국 특유의 신앙형태이다.

 

 

偏袒右肩으로 입은 가사의 옷주름은 고운 곡선을 그리며 부처의 몸을 감싸고 흘러내린다.

본존불의 편단우견은 인도식 착의법으로 2세기 마투라 양식에 나타나는데, 이 불상은 우리나라 편단우견 착의법의 최초이다.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불상은 통견이다. 이것이 삼국시대 주류를 이룬다.

중국에서는 편단우견은 죄인을 나타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를 따라 기피하다가 현장법사(602~644)가 편단우견 불상을 도입하여 이 영향으로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도 만들어진다.

 

 

본존불을 아미타불로 보는 견해도 있다. 우협시보살이 보병을 들어서 관세음보살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자연히 좌협시보살은 대세지보살로 본다. 

그러나 석가모니불로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그 근거로, 본존은 항마촉지인을 맺은 점, 동쪽을 향해 앉은 점, 그리고 사방불의 서쪽 여래상이 아미타불이니, 두 아미타불이 마주 앉은 것은 이상하기 때문이다.

동쪽(동해)을 향해 앉은 불상은 대개 호국 부처님이다. 이런 예로 골굴암 여래상, 석굴암의 본존불 등이 있다.

 

 

협시보살은 좌우 모두 같은 모습에 비슷한 양식을 나타내고 있는데 매우 사실적이다.

장식이 없는 보주형 두광을 둘렀다. 넓은 어깨에 한쪽이 약간 올라갔으며, 그 반대편 다리에 힘을 뺀 삼굴자세를 취했다.

본존 쪽으로 몸을 돌려 삼존을 하나로 통일하고 있다.

 

 

왼쪽 협시보살은 오른손에 연꽃[寶相蓮華]을 들고, 왼손은 아래로 떨어뜨린 채 옷자락을 살며시 잡고 있다.

허리를 감싸고 있는 치마 주름 위를 끈으로 묶었는데, 끈을 배 앞에서 나비 날개처럼 매듭을 짓고 나머지 자락을 밑으로 드리웠다.

 

오른쪽 협시보살은 머리는 三面頭飾이고,

왼손은 감로병을 들고 팔꿈치를 굽혀 어깨 높이로 치켜들었고, 오른손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드리우고 감로병을 들었다.

왼쪽 어깨에서 비스듬히 僧祗支가 가슴을 감싸고, 남은 자락이 수직으로 물결을 그리며 흘러 내렸다.

 

 

신라의 보살상은 8C 중엽에 이르면 가슴이 짧아지고 다리가 길어 몸 맵시가 날씬해진다.

석굴암의 문수보살, 보현보살, 11면 관음보살상 등이 이런 모습이다. 그러 점에서 이 보살상은 8C 전반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방불

삼존불 앞에 솟아 있는 네모난 2.2m, 내지 2.4m정도의 바위 네 면에 부처님을 새겨 사방 사불을 나타냈다. 사방이 불국 정토임을 나타낸다.

바위모양에 따라 상도 크기를 달리하고 있는데, 네 상 모두 연화좌에 무늬 없는 보주형 두광을 갖추고 결가부좌하였다.

전체적인 조각수법이 삼존불에 비해 세련되지 못한 느낌이다.

 

 

동면의 상은 얼굴은 둥글고 살결은 부드럽고 풍만하다. 왼손에 약합을 들고 있어 약사유리광여래(약사여래)인 듯하다. 오른손은 설법인이다.

약사여래불은 인간을 병고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부처다.

그러나 약사여래불은 인간의 몸의 병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병, 국가의 병도 치료한다.

동해는 왜구들이 들어오는 통로다. 왜구는 끊임없이 처들어와 신라를 괴롭혔다. 

동향으로 앉은 약사여래는 왜구라는 나라의 병을 치료하는 부처님이기도 하다.  

 

 

서면의 상은 몸체는 돋을새김을 했고, 연화대좌는 선각으로 처리했다.

얼굴은 둥글고 살결은 풍만하며 자그마한 눈을 아래로 떠서 하계를 보살피는 모습이다.

약사여래의 반대편인 서쪽을 향해 앉은 것으로 보아 아미타불인 듯하다. 수인은 설법인이다.

 

 

남면의 상은 높은 돋을새김으로 조각된 얼굴에는 살결이 풍만하고, 삭발한 머리 위에 육계가 단정하다.

두손은 설법인이다. 신라의 사방불은 경전과 일치하지 않아 존명은 알 수 없다.

 

 

북면의 상은 무릎 너비에 비해 키가 작고, 키에 비해 얼굴이 큰 편이다. 살결이 풍만하지 못하고 훌쭉하게 보인다.  

 

탑골 부처바위 마애조상군(보물 제208호)은 사방에 부처, 보살, 승려 등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굴불사 사면석불(보물 제121호)은 서방에 아미타불과 좌우에 관세음, 대세지 두 보살을 입체로 조각하여 크게 세워 극락세계를 강조하였고, 바위에 둘러가며 좌상, 입상을 선각, 돋을새김 등으로 불상 배치하였다.

칠불암 마애조상군에서는 그 淨土를 대표하는 여래로 단순화되었다.

이런 양식이 불국사로 발전한다. 불국사의 대웅전 서쪽에 극락전을 세우고, 그 앞에 구품 연못을 파고 연화교, 칠보교를 세워 화엄세계의 이상을 우리 국토에 실현하고자 하였다.

 

신라 하대에 이르면 석탑 몸돌에 사방불을을 새겼다. 창림사터 삼충석탑에는 앙화에도 작게 사방불을 새겼다.

 

 

마래불상군 앞에 이런 석조물들이 모여있다.

탑의 부재들, 주춧돌과 석등 하대석이 보인다. 

  

 

염불사

 

<삼국유사, 제5권 피은 제8, 念佛師> 조에, 

남산 동쪽 기슭에 피리촌이 있었다. 그 마을에 절이 있는데, 피리사라했다. 그 절에 이상한 중이 있었는데, 성명은 말하지 않았다. 항상 아미타불을 외어 그 소리가 성 안에까지 들려서 360坊 17만호에서 그 소리를 듣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 소리는 높고 낮음이 없이 낭랑하기가 한결같았다. 이로써 그를 이상히 여겨 공경하지 않은 이가 없었고 모두 그를 염불사라 불렀다. 그가 죽은 뒤에 소상을 만들어 민장사 안에 모시고 그가 본래 살던 피리사를 염불사로 이름을 고쳤다.

이 절 옆에 도 절이 있는데, 이름을 양피사라 했으니 마을 이름을 따라 얻은 이름이다.

 

 

 

 

 

 

염불사터에는 석탑 부재를 비롯한 여러 석재들이 있다. 이 중에는 이거사터에서 가지고 온 석탑 지붕돌도 있다. 

 

 

양기못과 서출지

철와골 입구 남쪽 마을인 안마을 앞에 있는(통일전 남쪽), 연꽃과 배롱나무가 우거진 숲 속의 못을 서출지라 한다.

 

<삼국유사 제1권 기1>, 射琴匣 조에,

 

신라 제21대 비처왕(소지왕)은 즉위 10년(488년)에 하늘샘[天泉亭]에 행차하였다.

이때 까마귀와 쥐가 나타나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잘 살피시오." 하였다. 왕이 신하에게 명령하여 뒤쫓게 했다.

신하가 남쪽 피촌(지금의 남산동 양피사터)에 이르러 보니, 돼지 두 마리가 싸우고 있었다. 이것을 한참 보고 있다가 그만 까마귀가 날아간 곳을 잊어버리고 길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이때 한 노인이 못 속에서 나와 글을 올렸는데, 겉봉에 "이것을 떼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떼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라 쓰여 있었다.

신하가 돌아와 왕에게 이 일을 알리자 왕이 말하기를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고 하고 봉투를 뜯지 않으려고 했다. 이때 日官이 "두 사람이란 백성이요 한 사람은 임금입니다."라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글을 펴 보니 "거문고 갑을 쏴라[射琴匣]."라 쓰여 있었다.

왕이 궁궐에 돌아가서 거문고 갑을 향해 활을 쏘니, 내전에서 焚香하던 수도승과 宮主가 거문고 갑 속에서 간통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곧 사형을 당했다.

이때부터 나라 풍속에 정월 상순 돼지, 쥐, 말, 날에는 모든 일을 조심하며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15일을 烏忌日이라 하고 찰밥으로 제사를 지냈다.

그 못을 書出池라 하였다.

 

*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것은 법흥왕 15년(528년)이다.

불교가 공인되기 전,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갈등을 보여주는 설화이다.

 

 

* 사금갑 설화는 정월 대보름날 찰밥, 오곡밥을 먹는 풍속의 기원을 설명하고 있다.

이후 까막까치를 위해 오곡밥을 조금씩 담 위에 얹어 놓는 풍속이 생겼다.

 

※ 소지왕 10년(488)에 대궐을 명활산성에서 반월성으로 옮겼다.

고구려가 장수왕 15년(427)에 도읍을 평양성으로 옮겼는데 그것은 중원을 포기하고 남으로 진출하는 것이다. 장수왕은 475년 백제 서울(지금의 서울)을 침공하여 백제 제20대 개로왕을 죽였다.

자비왕은 나라를 다스리기는 불편하나 험준한 명활산성으로 궁성을 옮기고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약 15년간 버려두었던 대궐을 반년동안 수리하여 488년 정월 초 반월성으로 이사한 것이다.

그리고 정월 보름날 天泉亭으로 행차하였으니 이는 나라의 태평을 기원하는 기도차 행차한 것으로 짐작된다.

  

윤경렬은 <겨레의 땅 부처님 땅>에서, 이요당이 있는 이 못이 서출지가 아니고 양기못이 서출지라 한다.

양피사터 쌍탑 동쪽에 있는 못을 옛 기록에는 양피제라 했고, 마을 사람들은 양기못이라 한다.

그러므로 <三國遺事>, 射琴匣條에 나오는 서출지가 바로 이 양기못이라는 것이다.

 

 

 

 

■ 二樂堂(사적 제138호)

철와골 입구 남쪽 마을인 안마을 앞에 있는(통일전 남쪽), 연꽃과 배롱나무가 우거진 숲 속의 못에 정면 삼칸, 측면 두칸의 기역자모양의 정자다.

반은 땅에 반은 물위에 떠 있다. 1664년에 세웠다.

이요당이 있는 이 못이 서출지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못 이름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남산에서 본 꽃들

금년들어 연꽃을 처음 보았다. 

 

 

 

배롱나무꽃은 금년들어 처음 보았고, 원추리는 지난 토요일 백양산 임도에서 보았지만 야생 샹태의 꽃을 보기는 처음이다.

 

 

도리지꽃도 금년 들어 처음 보았다.   

 

 

 남산에서 본 나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