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답사도보(3차)-2010년 6월 23일
포석정에서 시작한다.
백일봉님, 비주류님, 약수터님, 그리고 나.
■ 지마왕릉
능의 둘레는 34.5m로 초기 왕릉치고는 작은 편이다. 봉분 둘레에는 호석도 보이지 않는 소박한 원형토분이다.
초기왕들의 능은 대체로 왕성 근처에 있는데, 지마왕릉이 시내를 벗어난 이곳에 있는 점은 이상하다.
제6대 지마니사금(112~134)은 박혁게세의 후손이다. <삼국사기>에 가야와 몇 차례 전투한 기록이 있다.
왕릉을 지나면 작은 못이 나타난다.
못둑을 걸어 삼불사로 간다.
■ 경주 배리석불입상(보물 제63호)
신라 때의 선방사지로 알려진 곳에 전해오는 삼존상이다.
본디 지금의 자리에서 좀 더 산쪽으로 올라간 골짜기에 쓰러져 있던 것을 1923년에 지금과 같이 삼존상으로 복원하였다.
본디부터 삼존상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전신의 키가 머리 길이의 5배로 아이들의 신체와 같은 비례이다. 장식적이고 생동감 있는 모습과 古拙의 미소를 띠고 있다. 삼존이 모두 해맑고 명랑은 미소를 띠고있다.
신라 사람들은 불성은 신성한 것만도 아니고 어린애같은 맑고 티없는 마음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양식은 삼화령 미륵삼존상과 부처골 감실석불좌상(보물 제198호)이 있다.
이 삼존불상은 모두 표현이 장대하고 고식을 보이고 있으며 장식적이고도 생동적인 양식 등 새로운 새로운 형식에로 변화를 보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신라 말기인 7세기 후반으로 추정할 수 있다.
■ 삼불사
유물로 보아 신라 때 창건된 것으로 보이지만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통일신라 하대 헌강왕(875~880) 때 만든 것으로 보이는 불완전한 석탑 2기가 있다.
■ 마애선각여래상
마모가 심하여 형상을 알아보기 힘들다. 본디 새김이 얕은 듯하다.
■ 바둑바위는 봉우리 정상 근처에 있는 넓은 너럭바위다.
바둑바위에 오르면 시야가 확 트인다. 경주평아, 송화산 · 구미산 · 선도산 · 벽도산 · 단석산 · 안태산 · 금강산 · 명활산 · 망산 등이 내려다 보인다.
* 남산의 전설
신라 서울 경주의 옛 이름은 서라벌 또는 새벌이라 불렀다. 호랑이가 담배 먹던 때보다도 더 오랜 옛날 태고의 새벌에는 가운데로 맑은 시내가 유유히 흘러가는 푸른 벌판이었을 뿐 산은 없었다. 그러나 새벌은 복되고 성스러운 땅이었다. 왜냐하면, 새벌의 ‘새’는 동쪽이라는 뜻이고 ‘벌’은 벌판을 뜻하니. 새벌은 동이 터서 솟아오른 햇님이 제일 먼저 비춰주는 광명에 찬 땅으로 풀이되기 때문이다.
바다를 금빛으로 물들이고 솟아오른 아침해가 한없이 맑은 하늘을 통해 따스한 햇살을 벌에 뿌리며 서쪽으로 기울 때 아지랑이에 붉은 물이 들이고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모습도 아름다웠다. 이곳은 반도의 동남쪽이라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가 분명하여 일년 내내 살아도 권태를 모른다. 풀과 꽃들은 벌에 피고, 종달새는 하늘에서 노래하고, 고기들은 물에서 헤엄치니, 벌은 복된 웃음으로 차 있는 평화로운 땅이었다.
어느 날 이 벌판으로 흘러가는 시냇가에서 한 처녀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이때 두 神이 새벌로 찾아왔다. 한 신은 검붉은 얼굴에 강한 근육이 울퉁불퉁한 남신이었고, 또 한 신은 둥근 얼굴에 샛별같은 눈동자가 반짝이는 아주 부드러운 여신이었다. 신은 평화롭고 기름진 새벌의 경치를 둘러보면서 “야! 우리가 살 곳은 여기로구나!”하고 감탄하여 외쳤다. 이때 빨래하던 처녀가 신들이 외치는 우뢰같은 소리에 놀라며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아! 산과 같이 거대한 남녀가 자기 쪽으로 발을 옮겨 걸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겁에 질린 처녀는 “산 봐라!”하고 힘을 다해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산과 같은 사람 봐라!”해야 할 말을 너무 급하여 “산 봐라!”하고 외쳤던 것이다.
발 아래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두 신은 발을 멈추었는데 다시는 발을 옮길 수 없게 되었다. 처녀의 외침에 따라 그 자리에서 두 신은 산으로 변했던 것이다. 자기들의 소원대로 새벌을 안고 처녀의 말을 따라 산이 된 것이다. 여신은 남산 서쪽에 아담하게 솟아오른 부드럽고 포근한 望山이 되고, 남신은 검은 바위와 붉은 흙빛으로 울퉁불퉁한 산맥을 모아 장엄하게 자리한 南山이 된 것이라 전한다.
두 부부의 신이 변해 이루어졌다는 남산과 망산은 지금까지 나란히 정답게 솟아 있다. 남산은 억센 바위로 된 오랜 산인데 비해, 망산은 아직 새각시처럼 정숙한 푸른 산이다.
그 후 새벌 둘레에는 많은 산들이 생겨났는데, 망산 바로 곁에는 젊고 푸른 碧桃山과 仙桃山이 솟아 있어 그들은 젊은 팔을 벌려 얌전하고 예쁜 망산을 쉴 새 없이 유혹한다. 그러나 망산의 머리는 한결같이 남산 쪽으로 향하고 있다. “망산의 전설이 변하지 않는 한 새벌 처녀들의 순결도 변하지 않는다!”라고 믿어 새벌의 딸 가진 부모들은 망산을 바라보며 한 시름을 덜고 살아 온 것이다. (윤경렬, <부처님 땅 겨레의 땅>, 19~20쪽)
■ 금송정터
<세종실록지리지>에 "금송정은 금오산 산정에 있다. 옥보고가 거문고를 타던 곳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옥보고는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한다."고 하였다.
<삼국사기, 잡지 제1, 樂> 조에,
"신라 사람인 사찬 공영의 아들 옥보고는 지리산 운상원(칠불사)으로 들어가 50년 동안 琴法을 수학하여 스스로 新調 30곡을 제작하여 이를 속명득에게 전하고……
옥보고가 지은 30곡은 상원곡 1, 중원곡 1, 하원곡 1, 남해곡……"이라 했다.
■ 상사바위는 높이 13m, 길이 25m쯤 되는 주름이 많은 큰 바위이다.
옛날부터 상사병에 걸린 사람들의 병을 낫게하고, 아들 낳기를 바라는 부녀자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영험있는 바위이다. 지금도 바위 동쪽면 중앙에 가로 1.44m, 높이 56cm, 깊이 30.3cm 되는 감실이 있다. 감실은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켠 촛불에 검게 그을려 있다.
상사바위의 감실 아래에는 높이 80cm에 너비 35cm의 작은 석불입상이 있다. 머리는 없어졌고 두 손은 가슴에 모아 붙이고 있다. 이는 오랫동안 토속신앙과 불교가 밀착되어왔음을 보여준다.
정면에서 보면 왼쪽이 남근, 오른쪽이 여근석이다.
암벽에는 産兒堂이라 음각되어 있다. ‘함풍 6년(1856) 4월에 기도를 올리고 다음해 김응현을 낳았다’는 내용과 함께 김응현의 아들 6형제의 이름과 장손 두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기도처 주변의 바위 모양은 여근이다. 산아당에서 5~6m 떨어진 바위벼랑 위에 솟은 남근석 하나가 여러 여근석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이다.
바위 서쪽면에는 사람들이 남근석과 여근석으로 여기고 치성을 드린 자리가 있다.
"산아당"이라 쓴 글씨가 있다.
■ 또 다른 상사바위다. 남근석이다.
■ 절터는 금오정에서 부흥사로 가는 길에 있다.
탑의 몸돌, 지붕돌로 보이는 석재들이 흩어져 있다.
■ 늠비봉오층석탑
주변에 모아두었던 탑재들을 조립하고 부족한 것은 새로 만들었다.
멀찍이서 바라보면 아름답기는 하지만 이상한 모습이다.
산라탑도 아니고, 그렇다고 백제탑도 아니다.
어디에, 어떤 양식에 근거하여 이런 모습으로 복원했는지 의문이다.
여름날 태풍이 불면 넘어지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
오층석탑 주변에는 여러 종류, 여러 개의 석재들을 모아두었다.
부흥사 대웅전 앞에서 본 늠비봉오층석탑
■ 부흥사
부흥사 요사채로 들어가는 길은 접시꽃이 활짝 피어있다.
대웅전 옆에 노반이 붙은 탑의 지붕돌 하나가 있다.
부엉골은 완전히 말라버렸다.
■ 포석정(사적 제1호)
포석정 일대는 성남 이궁터로 알려져 있다. 포석정은 이궁 안의 연회 장소였던 것 같다.
남산에서 흐르는 물을 인공으로 끌어들여 술잔을 띄우면서 流觴曲水라는 시회를 벌일 수 있게 만들었다.
<삼국사기>에 남산 계곡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을 받아들여 이것을 水溝에 흐르게 해 잔을 띄워 놀았다는 기록이 있다. 원래 큰 거북돌은 만들어 놓고 저수지에서 물을 끌어다 그 거북의 입으로 물이 나와 홈으로 가게 한 것인데 이 돌거북은 조선 말엽 어느 부윤이 옮겨다가 자기 조상 무덤의 비석대로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지금 거북의 행방은 알지 못한다.
지금은 정자는 없어졌으나, 전복 모양의 물도랑이 남아있다.
돌홈은 가장 긴 세로축이 10.3m, 가로축이 약 5m이다. 돌홈의 폭은 30cm, 물이 흘러 들어가는 도랑의 폭 약 50cm, 깊이 약 50cm이다. 모두 63개의 돌로 조립하였다.
포석정이 언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 <삼국유사>에 제49대 “헌강왕(876~886)이 포석정에서 신하들과 향연을 베풀었을 때, 남산신이 임금 앞에서 춤을 추었는데 여러 신하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9C 중엽에 이미 있었다. 이로 보아 늦어도 9C 초반에는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포석정은 1915년에 개축한 것이다. 당시 원래 있던 돌들을 움직이기도 했고 또 임의대로 돌을 놓아 원형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없지 않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55 景哀王 조에 왕 4년(927) 11월 어느날 후백제 견훤이 쳐들어왔다, 경애왕은 鮑石亭에서 왕비와 궁녀, 친척들과 함께 연회를 베풀고 있었다.
경애왕이 이렇게 질펀하게 놀고 있는데 갑자기 견훤이 군사들을 이끌고 들이닥쳤다. 경애왕은 아연실색해 왕비와 더불어 후궁으로 달아났고 미처 피하지 못한 신하와 궁녀들 그리고 악공들은 현장에서 살해됐다.
궁궐을 점령한 견훤은 왕과 왕비, 후궁들을 잡아오게 해 왕을 자결하게 했으며 왕비를 욕보이고 부하들을 풀어 비첩들을 유린하게 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경애왕 4년(927년) 왕이 술잔치를 벌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헌강왕이 남산신을 보았다는 기록과, <화랑세기>에 포석사(사당)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포석정은 성지이다. 성지인 남산에 있기 때문이다. 또 신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곳은 신과 만나는 곳이다.
포석정은 남산 밑에 있다. 남산성은 당시 신라 군사의 심장부였다. 왕이 남산성을 순시하고 나라를 위해 애쓰는 충신, 장수들을 위로하는 잔치를 이곳에서 베풀었다.
견훤이 쳐들어오자 위급해진 경애왕은 시조신을 모신 포석사에서 호국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이곳에 왔을 것이다.
<화랑세기> 8세 풍월주 문노조에,
진평왕과 6세 풍월주 세종이 참석한 가운데 문노와 윤궁이 포석사에서 결혼을 告하는 길례를 행했으며, 포석사에 문노의 화상을 모셨다는 기록이 있다. 문노는 삼한을 통합해 당시 신라인들의 상징적인 영웅이었다. 문노의 화상을 포석사에 모신 것은 포석사가 나라의 안녕을 비는 행사가 치러지던 곳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노의 화상 외에 선대 왕들의 화상도 같이 모셔 국가의 중대사와 왕족들의 혼인서약등을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화랑세기>에는 포석정이 아니라 사당사[祠]자를 써서 鮑石祠라고 기록되어 있다.
12세 풍월주 보리공조에도 보리공과 만룡공주가 혼인하기로 하자 만룡의 어머니인 만호태후가 친히 포석사에서 두 사람이 결혼한다는 길례를 했으며,
김춘추도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와 함께 포석사로 가 결혼을 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이로보아 포석정보다 먼저 포석사가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신라는 BC 57년 남산 나정에서 시작해서 935년 남산 포석정에서 끝난다.
오른쪽 나무 아래 제단터가 있고,
포석정의 초가을 풍경(2009년 10월 20일)
제단 돌에 알터가 있다.
샘을 이렇게 돌로 덮었다.
포석정은 공사 중이다. 본디 영역을 찾는 공사인것 같다.
■ 경덕왕릉은 내남면 부지리에 있다.
왕릉 호석의 십이지신상
신라 제 35대 경덕왕(742~765 재위)은 742년에 즉위하였다.
경덕왕은 제33대 성덕왕의 아들이다. 효성왕의 아우이다. 효성왕이 아들이 없어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에는 "모지사 서쪽 산"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모지사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언덕이라고는 여기밖에 없어 200년쯤 전에 경주 김씨 문중에서 이곳을 경덕왕릉으로 지정했다.
경덕왕은 신라 절정기의 왕이다.
통일신라 문화가 최고의 경지에 이른 시기 민족사상 최고의 예숲작품들을 완성하였다.
불국사는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김대성이 창건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이르러 80여동의 목조 건물이 들어선 큰 절로 완성되었다.
불국사에는 다보탑(국보 제20호), 불국사삼층석탑(국보 제21호), 불국사연화교 칠보교(국보 제22호), 불국사 청운교 백운교(국보 제23호), 불국사 금동비로나나불좌상(국보 제26호), 불국사 금동아미타불좌상(국보 제27호), 불국사 삼층석탑 출토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제126-6호),
그리고 석굴암(국보 재24호) 등.
왕 19년(760) 2월 궁성의 남쪽 문천 위에는 월정교 春陽橋 두 다리를 놓았다.
그러나 절정은 짧다.
시원찮은 자식을 낳았는지, 낳은 자식이 지원찮았는지는 몰라도 아들 제36대 혜공왕(765~780)을 마지막으로 무열왕계 왕통은 끊어지고 다시 내물왕계가 등장한다. 늠름하고 찬란했던 신라 중대는 종언을 고하고 이제 왕족 진골끼리, 집안 사람들끼리 서로 죽이고 죽는 권력싸움이 시작된다.
경덕왕릉 주변의 소나무
지나가는 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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