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답사도보 4차- 2010년 6월 30일
-냉골에서 용장골로-
냉골을 지나 금오산 능선을 거쳐 용장골로 내려가는 길에는 남산의 문화유산들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왕릉 3기, 불상 8체, 탑 1기, 절 1개소가 있다. 용장골 초입에 있던 약사여래좌상은 국립경주박물관 마당으로 옮겼다.
백일봉님, 비주류님, 찌릉소님, bonami님, 미산님, 산불조심님,
대구에서 오신 백연님, 양북에서 오신 행복햇살님,
그리고 나,
이렇게 9분이 함께했다.
삼릉 주변에는 경주 특유의 구불구불한 소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서있다. 목재로는 아무데도 쓸 수 없는 나무들,
신라 이래 좋은 나무들은 다 베어 쓰고 이런 쓸모없는 나무들만 살아남아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제 실용성보다 아름다움에 눈을 돌리는 시대가 되었다.
눈을 즐겁게 해 주는 이런 나무들이 한없이 고맙다.
부처님은 모든 "존재는 내가 없다[諸法無我]"라 했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空"이다. '삼라만상은 서로 어울려 조화롭게 살아아 한다.' 고 가르쳤다.
사람과 사람은 물론, 사람과 자연, 사람과 미물, 나아가서 사람과 귀신까지도.
이 못난 나무들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지 서로 기대고 살고있다.
Ⅰ. 냉골(삼릉골)
초입에 왕릉 3기가 있어 삼릉골이라 하고, 여름에도 시원한 냉기가 돌아 냉골이라고도 한다.
이 계곡은 금오봉(468m)에서 시작하여 북으로 흐르다가,
서쪽으로 굽어 약수골과의 분수령에서 흘러오는 작은 냉골과 삿갓골의 물을 합쳐 기린내로 흘러든다.
■ 삼릉(사적 제219호)
앞쪽의 것은 제54대 경명왕(917~924 재위)릉, 가운데는 경명왕의 아버지 제53대 신덕왕(913~917)릉,
안쪽은 제8대 아달라(154~184)니시금의 능으로 알려져 있다. 세 왕은 모두 성이 박씨다.
세 왕릉은 모두 원형 토분처럼 보인다.
그러나 신덕왕릉이라 전하는 가운데 능은 1953년과 1963년에 도굴당하여 내부를 조사한 결과 굴식돌방무덤이었다.
신라 왕릉으로는 특이하게도 돌방 동서 벽면 일부에 색이 칠해져 있었다.
신라 초기 왕릉은 주로 왕성 근처에 있는데 아달라왕의 능이 왜 이곳에 있는지는 의문이다.
또 <삼국사기>에 신덕왕릉은 "죽성에 장사지냈다"고 했으며, 경명왕릉은 "황복사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세 기의 왕릉은 알려진 것과 다를 수도 있다.
신라는 992년 동안 56명의 왕이 다스렸다.
이중 제30대 문무왕, 제34대 효성왕, 제37대 선덕왕 등은 화장해 능이 없다.
또 신라가 망한 후 개경에 살다가 죽어 철원에 묻힌 제56대 경순왕을 제외하면 52기의 능이 경주와 경주 주변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경주에서 왕릉으로 비정된 것은 38기다. 아직 능을 찾지 못한 왕이 16명이나 된다.
왕릉으로 비정된 38기 중에도 피장자가 확실한 것은 제29대 무열왕릉과 제42대 흥덕왕릉뿐이다.
그 밖의 36기 왕릉들은 구전이나 추정에 의한 것이므로 확실하지 않다.
박씨 10왕은 모두 능을 찾았고, 석씨 8왕은 제4대 탈해왕(57~80) 외에는 모두 왕릉의 위치를 알지 못한다.
김씨는 38왕 중 9명의 소재를 알지 못한다.
피장자를 알지 못하는 무덤 중 왕릉급으로 추정되는 것을 '총' 또는 '분'이라 한다.
■ 냉골 석조여래좌상(머리없는 부처)
높이 1.6m, 무릎 너비가 1.56m 되는 큰 좌불상이다.
1966년까지도 골짜기에 묻혀 있던 것을 발견하여 지금 장소로 옮겨 놓았다.
땅속에 묻혀있었던 까닭으로 마멸이 심하지 않고 옷주름도 뚜렷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머리와 손은 없어졌고, 두 무릎은 파괴되어 버렸다.
왼쪽 어깨에서 가사끈을 매듭지어 무릎 아래로 드리워진 두줄의 수실은 섬세하게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아래옷도 에쁜 매듭으로 묶었다.
낭골석조여래 좌상의 옷끈 매듭과 불상 뒷면의 옷주름
우리나라 고유의 장식인 매듭은 신라 때부터 전해 왔다는 것을 이 가사끈은 말해주고 있다.
이 불상은 용장사 삼륜대좌불처럼 가사끈이 있기 때문에 스님상이라는 견해도 있다.
당시 스님들의 복장이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여래상을 만들에 스님의 옷을 입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편안히 앉은 자세에 위풍당당 모습으로 보아 신라 전성기인 8세기 무렵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냉골 마애 관음보살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호)
기둥처럼 높고 낮게 솟아 있는 바위들 중 하나에 관음보살상을 새겼다.
보관에 화불이 있고, 왼손에 정병을 들고있어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다.
높이는 1.54m, 양 팔꿈치 너비가 0.45m로 우리나라 소년 소녀들의 키에 해당된다.
불상 뒤에는 길쭉한 바위가 비스듬히 높게 솟아있어 하늘과의 연결을 암시하고 있다.
살결이 풍만한 얼굴에는 화사한 미소를 머금었으며, 입술에 연지를 바른 것처럼 빨개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목걸이와 팔찌 등 여러 장신구들로 화려하게 몸을 꾸몄다.
왼손은 아래로 드리운 채 정병을 들었고,
오른손은 가슴께로 들어 설법인을 하고있다.
군의를 맨 끈은 배 앞에서 나비 날개처럼 매듭을 짓고 그 자락이 아래로 드리워져 있다.
사실적이며, 당당한 조각으로 보아 통일신라 때 만든 것으로 보인다.
■ 마애선각 석가 · 아미타삼존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호)
다듬지 않은 자연 암반 위에 자유로운 필치로 그린 그림을 선각으로 새겼다.
기법상으로는 조각이지만 불교 미술 양식으로는 그림이다.
동쪽(바라보아 왼쪽) 바위면에는 석가삼존상을 그렸다.
본존 석가여래는 넓은 연꽃 위에 앉고, 문수, 보현 두 보살은 본존의 좌우에 서있다.
여래상은 편단우견으로 오른손은 설법인, 왼손은 선정인을 하고있다.
원으로 표현한 신광과 두광은 단숨에 그은 것처럼 단순하고 시원하다.
왼쪽의 문수보살은 마멸이 심하여 모습을 잘 알 수 없으나 연꽃 위에 서서 오른손은 설법인, 왼손은 아래로 드리운 채 천의 자락을 잡고 있는 듯하다.
오른쪽 보현보살은 연꽃 위에 서서 손등을 밖으로 하여 손가락 끝을 아래로 드리우고 있다.
두 보살은 모두 세 개의 구슬을 꿴 목걸이를 걸고 팔과 손목에 팔찌를 끼었으며, 웃옷은 입지 않았다.
두 협시보살이 여래쪽으로 몸을 비스듬히 하여 전체 분위기는 따스해 보인다.
서쪽 바위의 아미타삼존상은, 본존여래는 연꽃 위에 서고 좌우 협시보살은 연꽃 위에 앉아있다.
아미타여래는 오른손 바닥을 아래로 하여 가슴에, 왼손 바닥은 위로 하여 배 앞에 들었다.
가사는 편단우견으로 몸에 걸쳤는데 신광은 없고 두광만 원으로 나타나 있다.
왼쪽의 관세음보살은 여래 쪽을 향해 윤왕좌(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는법)로,
오른쪽 대세지보살은 관세음보살과 반대의 모습으로 앉아 역시 꽃쟁반을 들고있다.
두 보살은 모두 둥근 구슬 목걸이를 걸었고 팔과 손목에는 팔찌를 끼었다.
여래는 서고 보살들이 앉아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생전에 아미타불을 잘 염불하고 착한 일을 한 사람이 죽으면 아미타여래가 보살들을 데리고 죽은 사람의 영혼을 맞으러 지상으로 내려온다.
그때 여래는 서고 보살들은 앉는데 이러한 모습을 내영아미타상이라고 한다.
이로 미루어 서쪽 삼존상은 아미타내영도임을 알 수 있다.
석가여래는 살아 있는 생명을 다스리는 부처이고 아미타여래는 극락의 부처이다.
이승에서의 생명이 다하면 아미타여래는 지상으로 내려와 석가여래로부터 생명을 인계받아 극락으로 데리고 간다.
이곳에 석가삼존과 내영아미타 삼존이 새겨져 있는 것은 이승에서 극락세계로 생명이 인계되는 장소라는 뜻이다.
신라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돌아가신 부모님들을 극락에 모시기 위하여 아미타불을 염불했을 것이다.
바위 위에는 홈을 파서 빗물이 바위면을 적시지 않게 물길을 돌려놓았다.
두 삼존상 가장자리에는 기둥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있고, 주변에는 많은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아 바위 위에 빗물을 가리는 간단한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이 된다.
이 불상의 제작 시기는 이상주의적 양식이 성행하던 8세기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 냉골 마애 석가여래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9호)
선각 석가 · 아미타여래상에서 약 200m쯤 동쪽으로 등성이를 따라 오르면 넓은 절벽 바위가 서쪽을 향하여 서있다.
그 암벽의 가로 금 아래쪽을 대좌로 삼아 지름이 2.5m 되는 연꽃을 새기고 그 위에 설법인을 한 여래상을 새겼다.
여래상은 얼굴만 돋을새김을 하고 몸체는 모두 선각으로 표현하였다.
두 눈썹과 눈은 아주 가깝고, 코는 길고, 볼과 입술은 두껍고 커서 얼굴의 균형이 맞지 않다.
조각이 세련되지 못하고 다리 부분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아 미완성 작품으로 보기도 한다.
대체로 통일신라 말기 또는 고려초에 제작한 것으로 보고있다.
■ 냉골 석조여래좌상(보물 제666호)
연화대좌는 하대석 없이 땅에 있는 자연석 위에 바로 나지막한 중대석을 놓고 그 위에 상대석을 올렸다.
연화대좌의 본디 모습은 상대석과 똑 같은 모양의 돌을 중대석 밑에 엎어 상대석과 대칭되게 하는 것이다.
8각중대석엔 면마다 眼象을 새겼다.
이 연화대좌 위에 여래가 앉아서 항마촉지인을 표시하고 있다.
목에는 부드러운 세 개의 주름(삼도)이 새겨져 있고 몸체는 풍만하다.
편단우견으로 입은 얇은 가사의 옷주름은 가늘고 섬세하다.
원형에 가까운 신광과 보주형 두광으로 이루어진 광배는 특히 아름답다.
두광에는 백호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고 그 주변에 꽃잎을 새겼다.
신광에는 두 줄기 넝쿨을 새기고 한쪽에 네 잎씩 넓은 나뭇잎들을 새겼다.
가장자리에는 타오르는 불길을 새겼는데 불꽃들이 춤추는 듯 약동하는 모습이다.
이 아름다운 광배는 일제강점기에 복원해서 1960년까지도 윗부분이 조금 상한채로 불상 뒤에 서 있었다. 그뒤 언젠가 아이들의 장난으로 땅에 떨어져 몇 개의 조각으로 깨져 버렸다.
얼굴은 깨어져서 윗부분만 남아 있던 것을 깨어진 부분에 시멘트를 발라 못생긴 얼굴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다가 최근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복원했다.
1960년대 이후 이런 모습으로 있었다.
최근 복원하여 이런 모습이 되었다.
작년 이맘때는 복원이 완성되지 않았더니 이제 완전히 복원되었다.
뒷쪽에 기도처가 있다.
■ 상선암에는 얼굴이 없는 보살상이 누워있다. 몸의 영락장식들이 보인다.
■ 상선암 마애여래대좌불(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8호)
광배모양의 암반에 새겨져 있다.
너비 4.2m 되는 큰 연꽃대좌의 연꽃은 두겹으로 피었는데 꽃잎마다 보상화로 장식되었다.
여래상은 높이는 5.21m, 이고 무릎 너비가 3.5m나 된다.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설법인을 표시하고, 초승달 같이 가늘게 뜬 눈으로 멀리 바라보고 있다.
입은 굳게 다물었고 턱은 군턱이 졌으며, 살이 붙은 뺨과 입술 언저리에 조용한 미소가 표현되었다.
삭발한 머리에 육계가 나지막하고 큰귀는 어깨까지 닿아 있다.
얼굴은 높은 돋을새김으로 사실적인데 비해 옷주름이나 손과 발은 선각으로 나타내었다.
몸체는 바위 속에 있고, 얼굴만 나타났다.
마애불은 돌 속의 부처를 드러내는 것이며, 바위 속에 잠든 부처를 깨우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위의 본디 모습이 부처의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태어난다.
신라 사람들은 하늘에 계신 부처님이 지상으로 내려와 산이나 바위속에 머물러 있다가 필요할 때 사람형상으로 나타나는데, 언제나 누추한 차림으로 나타난다고 믿었다.
이 불상은 부처님이 바위 속에서 나타나는 모습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에게 예배하는 사람은 바위에 예배하며 동시에 바위 속에 계시는 부처님에게 예배하는 것이다.
바위산인 남산은 부처님이 계시는 집이다. 신라 땅 남산은 부처님의 땅이다.
이런 믿음의 바탕에는 불교 이젼에 우리민족이 믿었던 바위신앙, 산악신앙과의 결합을 볼 수 있다.
■ 상사암
상사암은 높이 13m, 길이 25m쯤 되는 큰 바위이다.
옛날부터 상사병에 걸린 사람들의 병을 낫게하고, 아들 낳기를 바라는 부녀자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바위이다.
■ 상사암 동쪽면
동쪽면 중앙에 가로 1.44m, 높이 56cm, 깊이 30.3cm 되는 감실이 있다.
감실은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촛불을 켜기 위해 바위를 파냈다.
감실 아래에는 높이 80cm에 너비 35cm의 작은 석불입상이 있는데 머리는 없어졌고 여원시무외인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부처님도 믿고, 바위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생생력도 믿었음을 보여준다.
■ 상사바위 서면
암벽 서쪽에는 자연석으로 된 제단이 있고, 産神堂이라는 글씨가 새져져 있다.
‘함풍 6년(1856) 병진 4월에 기도를 올리고 다음해 정사년에 김응□이 아들을 낳았다’는 내용과 함께 김응□의 아들 6형제의 이름과 장손 두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사람들은 이 바위들을 남근석과 여근석으로 생각했다.
능선에서 상선암선각마애여래 대좌불을 바라본다.
Ⅱ. 용장골
고위산과 금오산 사이의 계곡으로, 7~8개의 절터와 석탑 7기, 불상 5좌가 있다.
■ 탑의 몸돌들이 모여있다.
■ 용장사터
일제강점기, 남산 계곡을 조사할 때, '茸長寺'라고 쓴 기와 조각이 발견되어 용장사터임이 확인되었다.
이 절은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로서 제35대 경덕왕때(742~765 재위) 瑜伽宗의 큰스님 大賢이 살았다.
조선 초기에는 김시습(1435~1493)이 이 절에 머물면서 <금오신화>를 썼는데,
이 때까지만 해도 용장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의 연혁은 전하지 않으며, 언제 廢寺되었는 지도 알 수 없다.
현재 용장사의 사역에 속하는 넓은 지역에 석불좌상, 마애여래좌상, 삼층석탑, 폐탑 등이 있다.
용장사터
8살난 아이 김시습, 그때까지도 말을 제데로 못했다. 그러나 동시의 수준을 훨씬 넘어선 수준급의 시를 지었다.
세종대왕의 무릎에 앉아 대왕과 시를 주고 받았다.
"童子之學 白鶴舞靑空之末 동자의 학문 백학이 푸른 하늘가를 날아서 춤추는 듯하도다."
"聖主之德 黃龍翻碧海之中 어진 임금의 덕은 황룡이 푸른 하늘 한가운데서 번득임과 같습니다."
대왕께서는 김시습의 자질을 알아보고 "자라면 크게 쓰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세조의 왕위 찬탈로 그의 꿈은 산산히 부서졌다.
읽던 책을 모두 불태우고 3일을 통곡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머리를 깎고 중의 행색을 하며, 10여년 동안 전국을 유람하며 짐짓 미친 척 세상을 희롱했다.
31세 때인1465년 이곳 용장사 자리에 집을 짓고 일생을 마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이곳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효령대군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돌아간다.
이 무렵 한국문학사상 처음으로 소설시대를 여는 <금오신화>를 짓는다. 남녀의 사랑을 애틋하고 아름답게 묘사했다.
김시습의 소설에서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이 아니라 독립된 인격체로 표현된다.
어느날 한강을 지나다가 한강변에 있는 압구정에서 한명회의 시,
“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 젊은 날 나라를 받들고 늙어서는 강호에 눕는다.”를 보았다.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의 주역 참모 한명회, 김시습은 분통이 터졌을 것이다.
두 글자를 고쳤다. “靑春亡社稷 白首汚江湖 젊은 날 나라를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힌다.”
■ 용장사터 삼층석탑(보물 제186호)
무너져 있던 것을 1922년 다시 세웠다.
높이 4.4m로 동시대 다른 탑보다 3분의 2정도 축소됐다.
그러나 다른 어느 탑보다 당차고 웅장해 보인다.
상륜부는 남아 있지 않고 3층몸돌 위에 찰주공만 있다.
2층몸돌 윗면에 15,2cm, 13,1cm의 사리공이 있었다.
절벽을 이루는 평평한 자연암반 위에 홈을 파서 2단의 괴임을 만들고 그 위에 바로 상층기단 중석을 올렸다.
바위산 전체를 하층기단으로 삼은 것이다. 환경에 맞추어 조형적 변형을 가한 것이다.
탑은 하나의 종교적 건축물이면서 기념비적 조형물이다. 신라인들은 온갖 정성을 들여 탑을 만들었다.
원칙은 지키면서 상황에 맞추어 변형을 가할 수 있는 창조능력 경직된 사회나 병든 사회에서는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자연에 인공을 가미하여 조화를 꾀하려는 신라인의 아름다운 심성의 표현이다.
또 이것은 불교의 우주관을 표현한 것이다.
하층기단인 바위산은 須彌山, 바위산 정상은 사천왕천, 상층기단은 忉利天, 그 위는 하늘이 층층으로 이어진다.
신라 사람들은 남산을 수미산, 도솔천, 곧 신라땅이 부처님 땅이라 생각했다.
탑신부의 각층 몸돌과 지붕돌은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1층몸돌은 상당히 높고, 2층몸돌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지붕돌의 추녀는 직선으로 내려오다가 끝에 가서 경쾌한 반전을 보이고 있다.
전망이 넓게 트인 산봉우리 위에 탑을 세운 사례는 신라시대에 가끔 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더욱 성행하게 된다.
상층기단에 버티기둥이 한개, 지붕돌받침이 4단인 것으로 보아 신라 하대의 탑이다.
■ 용장사터 마애석가여래상(보물 제913호)
높이 1.02m, 너비 1.1m로 마애불로서는 거의 완벽한 것이다.
나발에 두툼한 육계가 있고, 상호는 단아하고 원만하다.
얼굴은 볼을 두껍게 하고 턱에 군살을 묘사하는 등 비교적 풍만하다.
입은 꼭 다물어 입 양 끝에 보조개가 생겨 얼굴 전체에 은은한 미소가 어리어 있다.
항마촉지의 손모양은 비교적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수인으로 보아 석가모니불로 볼 수 있다.
앉은 자세는 결가부좌로 오른쪽 발만 보이는 길상좌의 자세이다.
통견의 법의는 매우 얇다. 법의는 잘게 주름이 잡혀 있으며, 가는 평행선으로 음각되어 있다.
광배는 두광과 신광을 각각 두 줄의 음각선으로 표현하였는데 광배 안팎에는 아무 무늬도 없다.
대좌에는 위로 향한 연꽃이 정면에는 크게, 양 옆으로 갈수록 점점 작게,
끝에는 구름같이 흐려지디가 사라져 버려 사실적이면서도, 한편으로 환상적으로 보인다.
긴장되고 활력에 찬 형태, 유려하고 세련된 선의 흐름, 깔끔한 새김 등에서 8세기 중엽에 성행했던 사실주의 양식을 볼 수 있다.
銘文이 있으나 해독할 수 없다.
얼굴이나 몸체, 몸을 감싸고 있는 물흐르는 듯한 자잘한 옷주름 등에서 굽타시대(320~647경) 마투라 불상들의 영향이 볼 수 있다.
왕정골 여래입상도 이런 점에서 닮았다.
■ 용장사터 삼륜대좌불(보물 제187호)
1923년 대좌에서 굴러 떨어진 몸체를 복구했다고 하며, 1932년 다시 도괴된 것을 그해 11월 제자리에 놓았다. 높이는 4.56m이다.
지면에 거대한 자연석을 깔고, 그 위에 간석과 대좌가 마치 탑의 몸돌과 지붕돌을 차례로 조립하듯이 3층으로 쌓아 대좌를 만들었다.
작은 대신과 넓은 대가 엇갈려 있는데 모두 특이히게도 둥글다. 이 대좌는 異形 삼층탑과 같은 모습이다.
삼층에 앙연화문을 새기고 그 위, 곧 탑의 相輪部에 해당하는 곳에 불상을 앉혔다.
불상은 불상이 앉아있는 상대석은 하나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어깨는 좁은 편이지만 당당함하며,
균형잡힌 신체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수인은 특이하게도 오른손을 오른쪽 무릎 위에 올려놓고 왼손을 왼쪽 무릎 위에 놓아 항마촉지인을 좌우로 바꾸어 놓은 모양이다.
통견으로 입은 옷은, 가슴에는 승각기(상내의)의 깃이 굵직하게 표현되어 있고 이것을 묶은 띠매듭[纓總]이 나타나 있다.
왼쪽 어깨에도 가사를 묶은 띠매듭이 있는데, 어깨 뒤쪽의 고리에서 어깨로 내려와 무릎 아래까지 이어져 있고,
그 끝은 수실로 장식되어 있다.
대좌를 덮어 내린 裳縣座는 앞과 양옆에만 상현이고, 뒤쪽에는 연화문을 표현하였다.
머리는 없다. 머리가 없으므로 불상의 이름과 양식을 분명히 알 수가 없어,
승려상이라는 설과 보살상, 불상, 미륵불상이라는 설 등 의견이 분분하다.
이 불상은 미륵불이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① 대좌로 미륵불이 계시는 도솔천을 상징한다.
곧, 기슭에서 200m 높이로 솟은 바위산은 수미산,
자연석 기단 위는 사천왕천, 첫 번째 원반은 忉利天,
둘째 원반은 야마천, 연꽃 송이로 된 셋째 층은 兜率天이다.
우리가 말하는 '하늘'은 욕계 6천이다. 욕계육천은 땅 위에 속하는 사천왕천과 도리천, 하늘에 떠있는 4개의 층이 있다.
② <三國遺事> 四권 賢瑜珈, 海華嚴 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유가종의 大德 大賢은 남산 용장사에 살았다.
그 절에는 慈氏(미륵) 석조 丈六佛이 있어 대현이 늘 돌았다.
대현이 항상 이 장육상을 돌면 장육상도 또한 대현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 경덕왕 때(천보 12년, 753년) 여름 가뭄이 심하여 대현을 내전에 불러 들여 <金光經>을 강하여 비를 빌게 하였다.
어느날 齋를 올리는데 바라를 열어놓고 한참 있었으나 공양하는 자가 淨水를 늦게 올리므로 監吏가 꾸짖었다.
이에 공양하는 자가 말하기를 ‘대궐 안 우물이 말랐기에 먼 곳에서 떠 오느라 늦었습니다.’
낮에 강론할 때 대현은 향로를 받들고 잠자코 있으니 얼마 아니하여 우물물이 솟아올라 그 높이가 일곱 길이나 되어 寺幢과 같아지매 궁중이 모두 놀라 그 샘을 金光井이라 하였다. 대현은 일찍이 스스로 부르기를 靑丘沙門이라 하였다."
대현이 돌았다는 "자씨 석조 장육불"은 미륵불상이고, 곧 이 삼륜대좌불이다.
여기서 뒤돌아 보았다.
■ 땅바닥에는 이런 유물들도 보인다.
■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 '설잠교'가 놓였다. 2004년 11월에 완성했다고 적었다.
雪岑은 김시습의 법명이다.
계곡에서 피곤한 발을 씼었다.
이경윤/ <고사탁족도>
냉골에서 용장골로 가는 길에 본 소나무들
용장마을에서 금년 들어 처음으로 자귀나무꽃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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