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둔사 大芚寺
대둔사는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九林里 長春洞에 있다..
▪ 대둔사를 품고 있는 두륜산,
① 두륜산의 본디의 이름은 ‘한듬’이었다.
고유어로 ‘한’은 ‘크다’란 뜻, ‘듬 또는 덤’은 ‘덩치가 큰 바위 또는 우둑 솟은 봉우리’란 뜻이다.
바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우뚝 솟아 있어 이런 이름을 얻었을 것이다.
② ‘한듬’이 한자어와 섞여 ‘大듬’이라 부르다가,
③ 나중에 ‘듬’을 한자 ‘芚’으로 표기하여 ‘大芚山’이라 불렀다.
따라서 ‘한듬절’은 ‘대듬절’로,
다시 ‘대둔사’가 되었다.
④ 뒤에 어떤 유식한 호사가가 나타나 대둔산은 (중국의) 崑崙山 줄기가 동쪽으로 흘러 백두산을 이루고 여기서 뻗은 태백산 줄기의 끝이라는 뜻에서 백두의 ‘頭’자와 곤륜산의 ‘崙’자를 따서 ‘頭崙山’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가,
⑤ 일제강점기 전국의 지명을 새로 표기하면서 ‘륜’자를 바꾸어 頭崙山은 ‘頭輪山’으로, 대둔사는 대흥사로 바꾸었다.
⑥ 1993년 다시 ‘頭崙山 大芚寺’로 이름을 도로 찾았다.
대둔사 산문 현판에는 "大芚寺"라 적었고, "대흥사"에서 대둔사로 바뀐 사연도 적었다.
그러나 아직도 "大興寺"라 적힌 곳이 많아 혼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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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둔사의 내력을 적은 것으로 <대둔시지- 조선 순조 23년(1823) 草衣선사와 袖龍선사가 편집한 책>가 있다. 이 책은 그전부터 내려오던 대둔사에 관한 여러 기록들을 소개하고, 고증한다.
<竹迷記>에는 신라 법흥왕 1년(514)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고 하였고,
<만일암고기>에는 신라 헌강왕 원년(875)에 도선국가 당나라에서 귀국한 뒤 나라 안에 절 500개를 짓는 게 좋다고 상소할 때 대둔사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고 하였다.
아도화상이 절을 지었다는 시기는 그가 활약한 시기(신라 미추왕 2년 265년)보다 300년 가까이 앞선다는 것,
도선국사는 당나라에 갔다는 기록이 없으며,
헌강왕 원년은 도선국사가 태어난 해라는 것 등 실사구시적 고증을 통하여 모두 부정하고,
대둔사 창건 연대를 신라 말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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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절 안에 있는 유물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응진전 앞 삼층석탑(보물 제320호)과 북미륵암 마애불(보물 제48호), 삼층석탑(보물 제 301호)이 신라 말 고려 초의 것으로 보아 이 절은 신라 말 고려 초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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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둔사는 국토의 남쪽 끝 변두리 지방의 작은 절이었다.
2. 대둔사는 조일전쟁에도 화를 입지 않았다.
3. 조선 선조 37년(1604) 1월 어느날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을 앞두고 마지막 설법을 한 淸虛堂 西山大師 休靜(1520~ 1604)은 제자인 泗溟堂 惟政(1544~ 1610)과 雷默堂 處英 스님에게 자신의 가사와 발우를 해남 두륜산에 두라고 부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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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께서 입적하시던 날 제자들에게 부탁하시기를 이제 내가 示寂한 후에 衣鉢을 호남도 해남현 두륜산 대둔사에 전하여 제삿날에 재를 받들게 하라. 두륜산은 모퉁이에 치우쳐 있고 비록 명산은 아니지만 나는 세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여 소중히 하는 것이다.
한 가지는 奇花異草가 언제나 빛나게 아름답고 옷감과 곡식이 항상 없어지지 않으니 내가 보건데 두륜산은 길게 뻗어 나갈 곳이다. 북쪽으로 월출산이 있어 하늘을 받쳐주고 남쪽으로는 달마산이 있어 지축을 서리서리 맺어주니 산과 바다가 둘러싸 보호하는데 골짜기는 깊고 그윽하므로 만세에 허물어지지 않을 땅이다.
또 한 가지는 왕의 덕화가 천리나 되면 미치지 못하여 모든 하늘 아래 땅이 王土 아닌 곳이 없으나 나라를 향한 충정이 일어나기 어렵다. 나의 공적이 비록 가히 일컬을 만한 것이 못 되나 성주께서 깊이 은혜를 베푸셨으니 이를 기대어 보고 느끼면 후세에 어찌 공적을 기린 소문으로 어리석고 아둔한 풍속을 깨우침이 없겠는가.
또 한 가지는 處英 및 여러 제자들이 모두 남방에 있으니 곧 나의 출가 초기에 두륜산(지리산)에서 법을 들은 사람들이다. 이것이 바로 宗統이 돌아가야 할 바이니라. 돌이켜 보면 소중하지 아니한가.
너희들은 내 유촉을 좇아서 의발 및 주상께서 하사하신 대선사 교지를 두륜산 중으로 옮겨 보관하고 입적한 날에 받들어 내어 재를 올리도록 하는데 제자로 하여금 이 일을 주관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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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대사는 자신의 영정에 뒷면에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 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라는 열반게를 적고는 결가부좌한 채로 입적하였다.
나이 85세, 법랍 65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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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은 스승의 시신을 다비하여 사리는 묘향산 보현사에 안치하고,
유골은 금강산 유점사 북쪽 바위에 봉안하고,
스님의 金襴袈裟와 발우는 대둔사에 봉안하였다.
사명당 저, <서산대사 행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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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대사의 의발이 전해진 이후 대둔사는 크게 일어난다. 서산대사는 조일전쟁을 겪은 승군 최고 지휘자가 되었고,
선교 양종 都摠攝이 되면서 선종과 교종이 단일 종파로 통합된다.
서산종이라 할 수 있는 유일한 종단으로 자리 잡았고, 그리하여 조일전쟁 후 거의 대부분의 승려들이 법맥을 서산일파에 이어갔다.
여기에는 조일전쟁 이후 불교가 민간신앙과 습합하여 중흥하는 시대상황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 절집들이 세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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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조선 순조 11년(1811) 2월 대둔사에 큰 불이 나서 극락전, 지장전, 천불전 등 여러 절집이 불탔다. 2년 후 완호스님이 다시 복원하였다.
현재의 모습은 그때 이루어진 것이다.
1. 절 입구에서 왼쪽으로 너부내를 끼고 10리 길을 걸어간다.
이 숲길은 해묵은 나무들이 터널을 이루고 있다. 소나무, 벚나무, 단풍나무, 이 숲은 대둔사 경내의 무염지 까지 이어져 있다. 숲 중간쯤에는 임업시험장에서 관리하는 편백나무와 삼나무 군식지도 있다.
2. 너부내는 대둔산 골짝골짝 흘러온 물을 모아 제법 근사한 계곡을 이루었다. 구림리 장춘동, ‘아홉 숲’에 ‘긴 봄’.
3. 피안교를 건너고, 일주문을 들어가고, 이어 천왕문을 들어가면,
천왕문이 해탈문이다.
4. 부도밭이다. 서산대사 부도를 비롯하여 대둔사에서 배출된 13대종사와 13대강사의 부도와 부도비 들이 모셔져 있다.
초의선사 부도는 위당 신관호가 썼다.
서산대사 부도와 부도비, 초의선사 부도 등이 있는데, 문이 잠겨 들어가지 못했다.
5. 천왕문(해탈문)을 지나면 대둔사 가람이 펼쳐지는데 절은 네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두륜산에서 흘러내린 금당천을 경계로,
대웅보전이 있는 북원과,
천불전이 있는 남원으로 나뉘고,
다시 남원 뒤편으로 좀 떨어진 곳에 서산대사의 사당 표충사 구역과, 대광명전 구역이 있다.
각 구역은 서로 떨어져 있고, 돌담으로 돌리어 얼핏 있어서 독립된 듯이 보인다.
해탈문으로 들어가면서 보아 가장 왼쪽 심진교 건너에 있는 건물들이 북원이다. 북쪽으로 보이지 않지만 대둔사는 입구가 서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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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침계루를 지나 북원 안마당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대웅보전이 남향으로 서 있고, 그 좌우로 명부전과 범종각, 응진전이 나란히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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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보전은 조선 고종 광무 3년(1899)에 불이 나 다 타버린 것을 뒤에 새로 지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집이다.
정면 계단 아래 소맷돌의 돌사자, 기단 위 쇠고리 뒤에 새져진 돌짐승이 특이하다.
대웅보전 현판은 員嶠 李匡師(1705~1777)가 썼다.
"대웅보전" 현판은 원교 이광사가 썼다.
秋史 김정희(1786~1856)
추사 김정희는 완도로 귀양 가는 길에, 전주 남원을 거쳐 해남 대둔샤에 들렀고, 친구 초의선사(1786~1866)를 만난다.
그는 대둔사에 걸린 員嶠 李匡師(1705~1777)가 쓴 "大雄寶殿" 현판 글씨를 보고는 ‘촌스러운 글씨’라고 하여 자신이 글씨를 써 주어 바꿔 달게 했다.
이광사는 동국진체의 완성자로 이미 명인의 반열에 오른 대선배이다.
동국진체는 민족적 색채가 강한 글씨이니 추사가 보기에는 촌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귀양살이 하는 도중 부인이 돌아갔으며, 환갑을 맞이해도 찾아주는 이 없었다.
산설고 물설은 만리타향 제주도에서 7년 3개월, 햇수로 9년 동안 귀양살고 1848년 12월 63세로 풀려난다.
돌아가는 길에 다시 대둔사에 들러 초의선사를 만난다.
"지난번에는 내가 잘못 생각하였소. 내 글씨를 내리고 원교의 글씨를 다시 걸어주시오."
지금 대웅전에 걸린 현판은 그때 내려졌다가 다시 거린 이광사의 글씨고,
추사가 쓴 현판 "無量壽閣"은 내려져 백설당 처마 밑에 걸려 있다.
귀양가는 주제에도 그 시퍼렇던 서슬은 사라지고 이제 인간으로, 예술가로 원숙한 경지에 들었다.
삶의 자세에, 눈을 떴고, 글씨도 완성했다.
그게 바로 추사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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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진전 앞에는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삼층석탑(보물 제320)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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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흥사 응진전전 삼층석탑(보물 제320호)은 높이는 4.3m이다.
1967년 1월 해체 수리 때에 상층기단 내부의 자연석 판석 위에 높이 12cm, 무릎너비 7.5cm의 동조여래좌상 1구가 발견되었다.
이 탑은 전하는 말로 신라 자장이 중국에서 가져온 석가여래의 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이라고 한다.
석탑의 양식은 부분적으로 간략화 되어 있으나 신라석탑양식의 전형적인 구조를 잘 나타내고 있으며 결구수법 역시 착실하다.
각부의 조각수법은 세련되고 정교하며 그 건립연대는 신라 하대로 추정되고 있다.
이 석탑은 두륜산 정상 부근에 세워진 대둔사 북미륵암삼층석탑과 함께 신라 하대에 이르러 신라석탑양식이 반도의 서남단 지방에까지 전파되었음을 알려주는 점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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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당 서쪽 건물은 승방 백설당이다.
백설당 지붕 밑에는 추사가 귀양 가기 전에 쓴 “無量壽閣”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무량수각',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썼다.
대웅보전 맞은 편 침계루도 원교 이광사의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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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남원은 가장 넓다. 법당으로는 천불전 하나가 있고, 동국선원과 강원, 승방 등 몇 채가 돌담으로 구획되어 있다. 너른 터에 초의선사가 만들었다는 無染池가 그 가장자리에 있다.
입구 가허루에 걸린 편액은 蒼巖 李三晩(1770~ 1845)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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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불전 일대의 남원은 조선 순조 11년(1811) 2월 화재로 9채의 절집이 모두 불타 버렸다.
천불전은 그후 완호스님이 다시 지었다. 정면, 측면 모두 3칸의 건물이다.
현판 글씨는 원교 이광사가 썼다. 현판 양 옆의 용머리 장식과 앞쪽 분할문살의 사방연속 꽃무늬 조각이 특히 아름답다.
안에는 불단 가운데 목조 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그 주위로 옥돌로 만든 불상 천 개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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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불전을 재건한 완호스님은 쌍봉사 화승 楓溪대사에게 경주 불석산에 가서 옥돌로 천불을 만들어 오게 했다. 장인 열 사람이 6년이 걸려 천불을 다 만들어지자,
순조 17년(1817) 11월 세 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경주 장진포에서 출발하였는데,
그 중 한척이 폭풍을 만나 천불 중 768구를 실은 채 일본 나가사끼현으로 흘러갔다.
옥불이 가득 실린 배를 맞이한 일본 사람들은 절을 지어 모시려고 했는데, 그들의 꿈에 불상들이 나타나 자기들은 원래 해남 대둔사로 가는 길이니 여기 머물 수 없다고 말했다.
이리하여 천불이 모두 봉안된 것은 순조 18년(1818)이다. 이때 일본으로 갔다 돌아온 불상 768구는 어깨 또는 대좌 아래에 ‘日’자를 써 넣어 표시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풍계대사가 편찬한 <日本漂海錄>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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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남원의 담장을 끼고 무염지 옆을 지나 왼쪽으로 돌아들면 표충사 구역이다.
이곳에는 제사 때 제물을 차리던 義重堂 등 제례와 추모행사를 위한 건물들이 있고,
다시 안쪽 작은 문 안에 표충사와 조사전, 비각이 있다.
▪ 대흥사 표충사(전라남도 기념물 제19호)은 조선 정조 13년(1789)에 처음 지었고, 지금 건물은 철종 12년(1861)에 다시 옮겨 지은 것이다. 조일전쟁 때 승병을 이끌고 활약했던 西山대사를 중심으로 그 제자인 泗溟堂 惟政, 뇌묵당 處英등 3대사를 봉안하고 제사지내는 곳으로 유교 형식의 사당이다.
금물로 쓴 현판 “表忠祠 ” 편액은 정조대왕이 쓴 것이다.
장대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주심포양식을 한 맞배지붕집이다.
영조 14년 2월 경상남도 밀양 表忠寺에 表忠祠란 사당에 세워져 조정으로부터 사액을 받아 서원 사찰의 형태를 갖추면서 표충사는 면세를 받고 제수는 관가에서 지급받게 된다.
이곳에는 사명대사를 주벽으로 하고, 그 스승인 서산대사를 왼쪽에, 기허당 영규대사를 그 오른쪽에 봉안하였다. 서산대사는 아직 조정에서 사액한 적이 없는데, 제자 사명대사의 사당이 먼저 사액을 받아 조정의 보호를 받게 됨으로써 스승을 제자의 사당에 배향시킨 것은 좀 이상하고, 또한 사명계를 제외한 서산 문중 문도들을 불만스럽게 했다.
이에 서산 문중에서는 서산 문중의 종찰 대흥사와 보현사에 서산대사의 사액 사당을 건립하는 노력을 한다. 그리하여 정조 12년(1788) 7월에 그 뜻이 이루어져 대흥사에는 表忠祠, 보현사에는 酬忠祠란 사액에 내려져 서원사찰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이듬해 봄 사당과 화상이 이루어지자 정조는 4월 사액을 내리고 제문을 보내 사액사당임을 공식으로 선포한다.
이리하여 대둔사는 서산 종문의 종찰로서의 위치를 찾았다. 조정으로부터 면세 혜택과 제수를 공급받을 수 있었으며, 인근 유생들의 침탈도 면할 수 있게 되었다.
▪ 표충사 구역 앞에 있는 유물전시관에는 가사와 발우, 친필 선시, 신발, 선조가 내린 교지 등서산대사의 유물과 정조가 내려 준 금병풍이 보관되어 있다. 또한 고려시대 종인 탑산사 동종(보물 제8호)도 있다.
탑산사 癸巳銘동종/ 탑산사는 전라남도 장흥군 천관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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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서산대사 성역화 작업의 하나로 유물전시관을 짓는다. 유물관은 대둔사 다른 절집에 비하여 엄청 큰 콩크리트 한옥 건물에 미색 페인트를 칠하여 이 절의 호방하면서도 아늑한 배치는 조화로운 배치는 깨어져 버렸다.
9. 표충사 뒤편으로 300m쯤 들어가면 대광명전 구역이다.
지금은 선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 대광명전과, 8칸짜리 일자집 보련각, 그리고 요사채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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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광명전은 조선 헌종 8년(1841)에 초의스님과 위당 申觀浩(1810~ 1884), 小痴 許鍊(1809~ 1892) 등이 힘을 합하여 추사가 유배에서 풀려나기를 기원하며 지었다. 초선사가 단청을 했다고 전한다. 해서체 편액에는 “申觀浩 印‘이란 낙관이 보인다.
대광명전은 정면 3칸의 법당이다. 안에는 佛報化 삼신불을 모셨다 중앙불은 훨씬 크고, 좌우 협시불은 작다.
천정에는 연화문과 운학을 그렸다. 색체와 문양이 아름다운 뛰어난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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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불탱화는 법신삼십칠존도이다. 헌종 11년(1845)에 그려졌다. 화주는 초의 의순, 대시주는 時任수군절도사 신관호다.
칠성탱화 역시 같은 시기에 같은 솜씨로 그려졌다. 중단의 지장 시왕탱은 절종 5년(1854) 초의대사가 증사가 되었다고 쓰여있다.
대광명전 왼쪽 뒤편에 누각 같은 일자 집은 보련각이다. 보련각이란 예서체 현판은 신관호가 썼다. 서산 종문의 대덕들의 초상화를 봉안하였다.
모두 144명의 초상화가 있다.
▪ 일지암은 대둔사 본절에서 대광명전을 지나 두륜봉을 바라보고 올라간다.
초의선사 당시의 집은 세월 따라 사라지고, 그 주춧돌 위에 새로 띠집을 지었다.
앞쪽 언덕에는 차나무가 푸르고, 뒤편 돌 틈에서 솟은 샘물이 대나무로 연결된 돌확을 거쳐 크고 작은 두 연못을 채운다.
샘 근처에는 찻잎을 다루는 맷돌이 놓여있고 마루 뒤편에는 찻물 끓이는 부뚜막이 있다.
절집과 연못 사이 얕은 석축에는 “茶龕”이라 새겨진 면석이 있다.
그 앞에 있는 넓적한 돌은 초의선사가 앉아 茶禪三昧에 들던 돌평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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艸衣禪師(1786~ 1866)
속세 성명은 張意恂, 전라남도 무안에서 태어났다.
5살 때 물에 빠져 죽게 딘 것을 어떤 승려가 살려 준 것이 인연이 되어,
16세 때, 나주 운흥사에 가서 중이 되었다.
월출산,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 등을 유람하며 선지식을 찾아 불법을 구하다가,
대둔사 조실이며 10대 강사인 玩虎 尹佑(1758~ 1826) 스님의 법을 받고 초의란 법호를 얻었다.
중년에 들어 초의선사는 자신의 이름이 점차 세상에 알려지자 큰 절의 번거로움을 피해 은거의 뜻을 두고 대둔사 두륜봉 중턱에다 일지암을 짓고 거기에서 두문불출, 40여 년 止觀에 전념한다.
81세, 법랍 66년으로 이곳에서 입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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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선사는 “모든 법은 서로 다르지 않다. 諸法不二”, “평상심이 곧 도다. 平常心是道”라는 명제를 기본자세로 삼았다. 또 “禪과 敎 어느 하나만 주장하는 것은 이롭지 못하다. 교와 선은 둘이 아니다”라 생각했다.
오로지 선에만 주력할 것을 주장한 선운사의 白坡선사(1767~ 1852)와의 논쟁은 조선 후기 선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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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선사는 승려이면서도 거기에 그치지 않고 유학, 도교 등 당대의 여러 지식을 섭렵하였다.
24세 연상이어서 스승으로 모셨던 다산 정약용, 자하 신위, 동갑내기로 유불과 승속을 넘나들며 깊이 사귀었던 추사 김정희 등 당대 고수들과 교류하였다. 초의선사는 귀양살이 하는 추사를 만나기 위해 제주도를 다녀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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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는 초의선사에게 차를 배웠다. 초의선사가 보내주는 차 마시기를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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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茶]의 헤택은 병든 위를 상쾌하게 하고 깨끗하게 하여 골수에까지 미치는데,
하물며 침울한 요즈음에 느끼는 차의 은헤는 어떠하겠습니까. 멀리 있는 사람에게까지 끼쳐 주시는 두터운 그 뜻은 평생토록 감사드려야겠습니다. ……
<완당선생전집>, 제5권
……편지를 보냈는데, 한 번도 답은 보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산중엔 반드시 바쁜 일이 없을 줄로 생각되는데, 그렇다면 나 같은 세속 사람과는 어울리고 싶지 않아서 나처럼 간절한 처지도 외면하는 것입니까.…… 나는 스님을 보고 싶지도 않고 또한 스님의 편지도 보고 싶지 않으나 다만 차와의 인연만은 차마 끊어버리지도 못하고 쉽사리 부수어버리지도 못하여 또 차를 재촉하니 펴지도 필요없고, 다만 두 해의 쌓인 빚을 한꺼번에 챙겨 보내되 다시는 지체하거나 빗나감이 없도록 하는 게 좋을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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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가 스스로 만든 차를 보내 왔는데, (중국의 유명한 차인) 몽정과 로아보다 더하지 않다. 이 글씨를 써서 보답하는 바, (한나라 때의 비석인) 백석신군비의 필의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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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가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는,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창작과 비평사, 1993.
85~ 7쪽에서 재인용.
초의선사가 보내 준 차를 받고 그 고마움에 보답하여 써 보낸 글,
대략 추사 말년에 썼다.
대둔사 에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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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선사에게는 차와 선은 별개의 것이 아니고, 한가지였다.
그는 茶禪一味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다도 이론을 정리하고 차를 만들어 널리 펴 전래의 차문화를 중흥시켰다.
그가 지은 <東茶頌>은 차의 효능과 산지에 품질, 차를 만들고 마시는법 등을 적은 책으로 차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책이다.
▪ 북미륵암마애여래좌상(보물제 제48호)은 북미륵암의 암벽에 조각된 고려시대의 마애불좌상으로 높이는 4.2m이다. 연화좌에 결가부좌한 본존은 두광과 신광이 모두 표현되어 있다.
광배는 삼중의 원으로, 두광과 신광의 밖에는 화염문을 선각으로 새겼는데, 그 안에 4구의 비천상을 대칭으로 배치시킨 것이 특징적이다.
전체적으로 풍만하게 표현된 이 불상은 상체에 비하여 하체가 빈약하게 처리되는 등 비례가 잘 맞지 않아 안정감이 없으며, 힘없는 손이나 부자연스런 발 등 세부의 묘사도 빈약하게 처리되었다. 대좌는 간략하게 앙련의 연화문을 조각한 것이다.
이와 같이 본존의 신체에는 앞시대의 조각수법과는 다른 고려시대의 특징적인 모습이 많이 드러나고 있다. 비천상도 본존과 마찬가지로 하체가 짧은 둔중한 신체로, 이 불상은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유려한 수법이 아직도 남아 있어 당대의 巨佛群을 대표하는 우수한 작품인 동시에, 고려시대 불상조각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불상이다.
현재 이 마애여래좌상 앞에는 목조전실이 있는데, 그 명칭이 용화전이어서 근년에 미륵불좌상으로 알려진 것 같다.
▪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301호)은 높이는 4m이다. 2층기단 위에 3층의 옥개를 지닌 신라시대 일반형 석탑의 형식을 취하였으나 각부의 양식은 매우 간략화 되었다.
석탑의 각 부 양식 및 석재의 결구 역시 시대적 차이를 나타내고 있으나 신라석탑 양식을 착실히 따르고 있다. 따라서, 그 조성연대는 고려초기로 추정된다.
대흥사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301호)
북미륵암에는 삼층석탑이 하나 더 있다.
북미륵암 동삼층석탑(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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