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어사 범어사에 관한 현존 최고의 기록은 최치원(857~?)의 <唐大薦福寺故寺主翻經大德法藏和尙傳>이다. 이 책의 十山세주에 화엄십찰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그후 <삼국유사>에도 역시 화엄십찰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밖에는 이렇다할 기록이 없다. 범어사는 조일전쟁 당시 가장 먼저 왜군에게 함락당한 동래부 중에 있었고, 또한 전통적으로 대외 방비의 책무를 지고 있었던 사찰이었으므로 난중에 철저히 파괴되어 전래의 기록도 남김없이 사라졌다. 범어사의 창건은 신라 문무왕 19년(679)이다. 동계라는 이가 지은 <梵魚寺創建事蹟>에 다음과 같은 창건설화가 있다. 신라 흥덕왕 10년(835) 왜인이 십만 병선을 거느리고 동쪽 해안에 침공해 오자 왕이 이를 걱정하던 중에 비몽사몽간에 신인이 나타나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이렇게 가르쳐 준다. ‘태백산 속에 의상화상이란 분이 있다. 이분은 金山寶蓋여래의 제7후신으로 항상 聖衆, 梵衆, 鬼衆 각 일천씩 삼천 대중을 거느리고 華嚴義持 법문을 연설하고 있어 화엄신중 40법체와 제신 천왕이 늘 따라다니며 보호한다. 또 동해변에 금정산이란 산이 있고, 그 산정에는 바위가 높이 솟아 있는데, 그 높이가 50여척이고 그 위에 샘이 있으며 물빛이 항상 금색인데 사시에 마르지 않고 금빛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범천으로부터 내려와 그 속에서 헤엄쳐 노닌다. 대왕이 의상대사를 모시고 함께 그 산에 가서 금정암 밑에서 칠일칠야 동안 화엄경을 독송하고 신중정근하면 미륵여래가 금색신을 나타내어 보현 ․ 문수보살과 香花동자 및 40법체 신중과 제신 천왕을 거느리고 각각 병기를 가지고 倭를 제압할 것이니 왜병은 자연 물러갈 것이다. 만약 후대에 왜병이 일어나도 이곳 바위 아래서 화엄정근을 하면 자손이 끊어지지 않고 병난이 영원히 그칠 것이다.’ 이에 왕이 사자를 보내 의상대사를 모시고 와서 일러준 대로 하니 말과 같이 제불보살이 천왕 신중이 나타나 병기로 위협하고 바다를 뒤집어 놓으며 바람과 불로 공격하여 일거에 왜선을 물리쳤다. 이에 왕은 대단히 기뻐서 의상대사를 銳公大師로 봉하고 금정암 아래 2층 미륵전을 짓고 미륵석상과 좌우보처 및 사방 천왕이 병기를 들고 있는 모습을 조성 봉안하고 미륵전 서쪽에는 비로전을 지어 비로자나불상과 문수 ․ 보현보살 및 향화동자상을 조성 봉안하는데 모두 병기를 들게하는 등으로 범어사를 창건하여 부처님의 은덕에 보답한다. 이때 미륵전 동쪽에 대장전을 지어 팔만대장경과 화엄삼본을 봉안하기도 하였다 <梵魚寺創建事蹟>는 연대에 착오를 보이고 있다. 제42대 흥덕왕(826~836)대는 의상대사(625~702)가 죽은지 이미 130년이 지난 뒤이다. 흥덕왕을 제30대 문무왕(661~681 재위)의 오기로 보면 대략 맞아 들어간다. 문무왕 19년은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지은지 3년이 되던 때이었다. 당나라 군사를 신라땅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실질적인 삼국통일을 완성하고 통일신라가 안정기에 들어가는 시기이다. 다만 고구려, 백제 유민들이 몰려가 있는 왜국의 침입만 나라의 유일한 불안요소가 되어 있던 때였다. 그런 까닭으로 의상대사와 그의 제자들이 지은 화엄십찰의 하나로 통일신라 왕국의 영토를 수호하는 진호사찰로 지은 절이다. 고려시대의 연혁은 전하지 않고 조선 선조 25년(1592) 조일전쟁으로 몽땅 불탔다. 그뒤 폐허로 있다가 선조 35년(1602) 觀禪師가 중건하였으나 다시 불탔다. 광해군 5년(1613) 妙全 등이 법당, 요사채를 중창했다. 그뒤 많은 큰스님들이 배출되면서 절의 규모를 넓혔다. 禪刹大本山이란 이름 아래 오늘에 이르렀다. 2012년 11월 범어사는 총림으로 승격되었다. 총림은 선원, 강원, 율원 염불원을 갖춘 사찰을 말한다. 최고 어른인 방장스님이 주지를 임명하는 등 자치권이 크게 확대된다. 이변에 대구 동화사, 하동 쌍계사와 함께 승격되었다. ※ 화엄십찰 - 신라 화엄종의 초조 의상(625~702)과 그의 제자들이 화엄종을 통일신라 전역에 전파시키기 위해 세운 절이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정복지를 교화 회유하여 사회 통합을 이루어야 했다. 그 새로운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圓融무애를 근간으로 하여 모든 것을 하나로 귀의시킨다는 화엄사상을 널리 펴고자 한 것이다. 十刹의 대부분은 옛 백제나 고구려 지역의 지방 중심지이면서 反신라적 성향이 강한 지역이다. 최치원(857~?)의 <唐大薦福寺 故寺主 翻俓大德 法藏和尙傳>(904년 효공왕 8년, 당나라 화엄종의 제3대 조사 賢首 法臟(643~712)의 전기)에는, 화엄십찰이란 말은 없고 “海東華嚴大學之所有十山”이라 하여 중악 공산의 미리사, 남악 知異山 화엄사, 북악 부석사, 강주 가야산 해인사와 보광사, 웅주 가야협의 보원사, 계룡산 갑사, 朔州 華山寺(刮地志에 말하는 鷄籃山은 바로 화산사라는 註가 있다), 양주 금정산 범어사, 비슬산 옥천사, 전주 모악 국신사, 한주 부아산 청담사 등 12개 절을 들고있다. 이들 12절 중 가야산 해인사는 의상이 죽은 후 100년이 지난 802년에 의상이 법손 순응이 창건한 것이다. 따라서 의상의 傳敎十刹은 의상대사 당시에 모두 건립된 것이 아니며 꼭 10개의 절로 고정된 것도 아니다. 의상은 전교십찰의 건립을 悟眞, 智通, 表訓, 眞定, 眞藏, 道融, 良圓(혹은 亮元), 相源(혹은 相圓), 能仁, 義寂 등 10대 제자와 3천 문도들에게 부탁하였을 것이고, 그 문도들은 종조의 유지를 받들어 각 지방의 지정학적 요충지에 화엄 전교십찰의 건립을 표방하여 옛절을 중창하기도 하고, 새절을 짓기도 하여 화엄종 확산의 거점을 마련해 갔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수는 10도, 12도 될 수 있으며, 최치원 시대에는 12개 정도 되었을 것이다. <삼국유사-제4권> 의상전교조에는, 태백산 부석사, 원주의 비마라사, 가야산 해인사, 비슬산 옥천사, 금정산 범어사, 남악 화엄사 등 여섯이 기록되어 있다. * 일주문(보물 제1461호)은 약간의 배흘림이 있는 4개의 투박한 둥근 돌기둥에 짧은 나무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맞배지붕을 올렸다. 문 중앙에 ‘曹溪門’, 바라보아 왼쪽에 금정산범어사, 오른쪽에 ‘禪刹大本山’이란 현판을 걸어 禪修道 도량임을 나타낸다. 1912년 10월 15일 범어사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선찰대본산이란 종지를 받는다. * 천왕문 숙종 26년(1700) 자수스님이 건립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집이다.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익공식 가구의 특징을 보인다. 안에는 목조사천왕상이 걸려있는데, 장흥 보림사의 목조사천왕상을 그대로 본떠 만들었다. 수입한 나무를 썼는데 두 토막을 이었다. 트는 것을 막기 위하여 손가락 끝까지 파내어 속을 비워놓았다. 오른쪽부터 안쪽이 지국천왕이다. 푸른 얼굴에 몸은 약간 푸른빛을 띠고 왼손에 비파를 잡고 오른손가락으로 비파줄을 튕기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 오른쪽 입구쪽은 남쪽의 증장천왕이다. 왼손으로 칼을 잡고 오른손은 펴고 있다. 왼쪽 입구는 광목천왕이다. 오른손으로 용을 잡고 왼손은 위로 들어 엄지와 중지로 용의 입에서 빼낸 여의주를 살짝 쥐고 있다. 왼쪽 안쪽이 다문천왕이다. 오른손에 당 삼지창을, 왼손 위에는 보탑을 받들고 있다. 2010년 12월 15일 9시 59분께 불이나 모두 불탔다. 이날 불로 지난 1989년 중수돼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천왕문과 천왕문 안에 있던 사천왕상 등이 불에 타 1억여 원의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 불이문 이 문 좌우 기둥 주련에는 ‘神光不昧萬古輝猶 入此門來莫存知解’라 쓰여있다. 진리의 그림자를 찾기 위해서는 누구나 자기의 아집과 편견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불이문은 숙종 25년(1699)에 자수스님이 천왕문과 함께 창건하였다. 낮은 기단 위에 원통형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앞뒤의 각 주칸에 문틀을 짜서 쌍여닫이의 판장문을 달았다. 정면 3칸, 측면 한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집이다. 해탈을 추구하는 사람이 천왕문을 지나 불이의 경지를 상징하는 불이문으로 들어간다. 불이의 진리로서 모든 번뇌를 벗어버리면 해탈을 이루어 부처가 된다고 하여 해탈문이라 고도 한다. * 보제루 <범어사사적기>에 의하면 숙종 25년(1699)부터 이듬해까지 창건하였다. 이 시기는 조일 ․ 조청 양대 전쟁 후유증을 어느 정도 극복하고 문화회복기에 들어선 때이었다. 이때 조선의 대부분의 절들이 중창을 하는데 범어사도 그 첫 불사로 보제루를 중건하였다. 이때 僧統 自修스님이의 주관하에 밖으로는 동래부사 李世載와 多大浦僉使 李時番, 안으로는 釋瓊, 文印, 眀學, 最善 등 대중의 시주를 받아 이 건물을 지었다. 범어사가 동래부 일원을 관장하는 승군의 지휘소이고 왜적을 방비하는 소임이 있었으므로 관에서 그 중창에 적극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본디 이층누각이었을 것이나 지금은 가파른 석축 위에 지어진 일자형 단층 팔작집이다. 원래 정면에 걸려있을 普濟樓 현판은 뒤에 걸려있고 정면에는 범어사 현판이 걸려있다. 보제루 현판 밑에는 金剛戒壇이란 현판도 걸려있다. 이곳을 수계하는 계단으로 사용했던 듯하다. 그뒤 순조 13년(1813년)에 信定스님이 주관하고 萬岑, 寬式스님과 민간 장인들이 도목수가 되어 중수하였으며, 다시 1827년에도 중건했다. 지금의 건물은 1813년이나 1827년에 중건한 것으로 보인다. 창방과 장혀 사이에는 覆花盤 1구식을 얹고 나머지 부분에는 화벽 마감 위에 벽화를 그렸다. 정면에서 왼쪽 측면 중앙에 1974년에 만봉스님이 그린 십우도가 있다. 이 십우도는 普明禪師의 십우도이다. 1단계는 未牧(아직 기르지 못하다), 2단계는 初調(처음으로 다스리다), 3단계는 受制(제약을 받아드리다), 4단계는 廻首(머리를 돌리다), 5단계는 馴伏(길이 들다), 6단계는 無碍(걸림이 없다), 7단계는 任運(흐르는 대로 맡김), 8단계는 相忘(둘다 잊음), 9단계는 獨照(비춤), 10단계는 雙泯(둘다 소멸함)이다. * 보제루 오른쪽에 2층 종루가 있다. 본디 심검당 앞에 있던 것을 근래에 옮겼다. 승군 지휘소의 역할과 대왜 방비를 위해 매우 큰 규모로 지어졌다고 한다. * 미륵전은 종루를 지나 왼쪽에 있다. 범어사의 방향이 동향이므로 중심 축 왼쪽에 있는 미륵전은 남향집이다. 불상은 정면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오른쪽 벽을 등지고 앉았다. 숙종 40년(1714) 봉상이란 사람이 쓴 <미륵조상중수기>에 이 까닭을 자세히 적어 놓았다. 조일전쟁으로 범어사가 불타고 나서 남은 승려들이 초막을 짓고 살았는데, 선조 35년(1602)에 갑자기 미륵전터에 부처님 얼굴 반쪽이 나타났다. 원래 이 미륵전에는 동서남북 네 면에 미륵이 봉안되었는데 서, 남, 북은 석조 미륵이고, 동쪽만 목조였다. 석조 미륵은 모두 없어지고 목조 미륵만 10년 풍상에도 땅 속에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에 인조 16년(1638) 인흡이 보호각을 세우고 1641년에 선각이 개금하였으며 숙종 40년(1714) 명학이 돈을 내어 미륵전을 중수하고 미륵불상도 조성하여 서향으로 봉안한 것이다. 이는 일본을 방어하는 상징으로 왜국을 등지고 앉은 것이다. 대좌는 8각 석조대좌로 신라말기 양식이다. 복련 위에 배가 약간 부른 중대석을 놓고 앙련은 나무로 만들었다. 불상은 허리를 약간 구부린 자세이다. 목이 짧으며 네모난 얼굴에 콧등이 납작한 큰 코가 붙어 있고, 굳게 다문 입가에 엷은 미소가 있다. 약간 거친 나발에 육계는 둥글고 계주가 강조되었다. 귀는 늘어져 어깨까지 닿는다. 아미타수인을 취하고 있으며 비교적 사실적인 각 손가락 끝마디와 엄지손가락 근육부분, 양쪽 귓볼과 정상 계주에 각 한 개씩 나발이 붙어있는데, 이는 이 불상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불상은 조일전쟁 때 불타지 않았다고 하였으나 조일전쟁 이후의 양식이다. * 명부전 서쪽에 비로전이 있다. 안에는 비로자나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효종 9년(1658)에 해민선사가 주성하였다 하는데 좌우 보처보살은 문수 보현보살일 것이다. * 비로전 서쪽으로 계단을 오르면 관음전이다. 본디 대웅전 남쪽 사리탑이 있었으나 1938년 7층 석가세존사리탑을 세우면서 금어선원 자리인 이곳으로 옮겨지었다. * 대웅전(보물 제434호) 최초의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일전쟁 때 병화를 입어 선조 35년(1603) 觀禪師가 재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뒤 잇단 화재로 소실되었다. <동래부범어사법당중창겸 단호기>에 의하면 광해군 6년(1614) 묘전화상이 건립한 것을 숙종 39년(1713) 흥보화상이 중수했다. 숙종 46년(1720)에 대준, 우화, 처환스님 들이 片手가 되어 석재를 수리하고 불상을 개금하였으며, 1814년에 改瓦, 1817년에 단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정면, 측면 3칸의 다포식 맞배지붕집이다. 겹처마에 부연이 유난히 길게 뻗었으며 다포식이면서도 맞배지붕인 탓에 앞면에만 공포를 짜고 측면에는 주두 아래 창방뻘목을 첨차로 만들어서 장혀와 도리의 뻘목을 받게 하였다. 불단에는 화문과 비천을 조각하고 그 위의 닫집은 아자형 평면에 다포식 지붕을 가구한 보개로 용과 봉황이 구름 속에 노니는 모습을 조각하였다. 석가여래와 좌협시 갈라보살, 우협시 미륵보살상을 모셨다. 이 삼존불은 효종 9년(1658)에 해민스님이 모셨다. 동, 서벽 상면에 동방 약사삼존과 서방 미타삼존을 그려 본존 석가삼존과 함께 삼계여래를 상징한다. * 대웅전 앞 삼층석탑(보물 제250호) 통일신라 9세기 전형양식을 보이는 탑으로 높이는 4m이다. 지대석 위 하층기단 면석에는 각 면마다 3구씩 안상을 새겼고, 갑석 상면에는 2단받침이 있어 상층기단을 받치고 있다. 상층기단의 면석은 높고 크며 각 면에 큼직한 안상이 한구씩 조각되어 있다. 옥개석과 옥신석은 한돌로 이루어졌으며 옥개석 받침은 4단이다. 반전을 강조하여 경쾌하지만 2층 이상의 탑신 높이나 폭이 급격하게 줄어들어 고준하지만 안정감이 부족하다. 상륜부는 노반과 보주만 남아있는데 보주는 후대에 만든 것이고 노반은 거꾸로 놓여있다. * 7층석탑 본래 대웅전 왼쪽에 있던 것을 최근에 이곳으로 옮겼다. 근세의 작품이다. 기단은 3층이다. 일층기단 네 모서리에 사천왕상을 새기고 사방 정면에는 석인상을 세웠다. 옥개석의 층급은 5단이지만 매우 얇아졌다. 인도스님이 가지고 온 불사리를 봉안하였다. 대한불교 조계종 범어사는 사찰 내 7층 석탑에서 석가모니 진신사리 2과와 사리호를 발견했다고 6일 밝혔다. 범어사는 지난달 29일 오전 7층 석탑 해제작업을 하던 중 탑신부에서 석가모니 진신사리 2과와 사리호를 발견했다. 사리호에는 옥기류, 금속류 등 각종 장식물 8종54점이 들어있었다. 사리함은 금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경전은 습기에 의해 심하게 훼손돼 정확히 글씨를 판독할 수 없었다. 범어사 석가여래사리탑 비명에 '석가모니 진신사리가 7층 석탑안에 봉안돼 있다'는 기록이 실제 확인된 셈이다. 이번에 발견된 진신사리는 인도 달라파라 스님이 간직했던 것으로 1938년 범어사 주지 운호 스님이 7층 석탑을 건립해 봉안한 것이다. 범어사 7층 석탑은 범어사 문화광장 조성을 위해 이전 해체하는 중이었다. 범어사는 이달 중에 박물관 앞으로 이전하는 석탑에 사리를 다시 봉안할 계획이다. 범어사에는 7층 석탑과 함께 3층 석탑에도 석가모니 진신사리 10여 과가 봉안돼있다. 2012년 2월 6일 부산일보 * 팔상전 ․ 독성전 ․ 나한전 정면 7칸, 측면 1칸의 긴 건물 안에 팔상전 ․ 독성전 ․ 나한전이 들어있다. 하나의 건물에 세 불전을 모신 예는 극히 드문 매우 특이한 건물이다. 왼쪽 3칸이 팔상전, 중앙 아치형 문이 있는 곳이 독성전, 오른쪽 3칸이 나한전이다. 1902년에 조사된 자료에 따르면 가운데 천태문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팔상전과 나한전이 별개의 건물로 있었다. 그러다가 1905년 학암스님이 팔성, 나한, 독성각을 중건하고 제 성상을 새로 조성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팔상전 안에는 석가모니불과 좌우 협시로 제화갈라, 미륵불을 모셨다. 본존의 크기는 높이가 80cm, 무릎폭이 62cm이다. 목이 쑥 들어간 모습으로 얼굴은 네모에 매우 딱딱하다. 나발의 머리는 육계가 둥글고 계주가 크며 두 귀는 짧게 어깨 위로 드러나 있다. 통견에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으며, 좌우 협시는 높이가 각각 70cm, 무릎의 폭이 47cm로 모두 같다. 통견에 보발이 어깨위로 흘러내리고 있다. 독성전은 문틀을 하나의 나무를 구부려 반원으로 만들었다. 삼각형 벽채에는 넝쿨 형식을 초각하였으며 창호도 꽃무늬 창살로 꾸몄다. 나한전에는 정면 좌우에 별도의 단을 마련하여 입상의 아난과 가섭과 판관 및 사자, 좌우에 16나한상을 안치하였다. 아난은 93cm, 가섭은 95cm이다. 16나한상은 높이가 모두 53cm이다. 스님머리 형태와 모자를 쓴 형태가 있고, 웃옷을 벗었거나 가슴을 열어젖힌 모습, 그리고 우견편단 형태의 상이 있다. 자세도 결가부좌와 무릎을 세운 자세가 있고, 손의 모양도 해태 모양의 사자를 무릎에 안고 쓰다듬고 있는 모습, 옷자락 속에 집어넣은 모습, 세운 무릎을 감싸 깍지를 찌고 있는 모습도 있다. 판관상은 관을 쓰고 합장을 하거나 소맷자락 속에 손을 집어넣고 있으며, 사자상은 두건을 쓰고 손을 앞에 모아 소매 속에서 맞잡고 있는 것과, 입을 약간 벌리고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어 무엇인가를 잡고서 말을 하는 듯한 인상들이 있다. 판관상은 86cm, 사자상은 73cm이다. ※ 16나한은 석가여래의 제자로 석가의 열반 뒤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열반에 들지 않고 이 세상에 남아서 불법을 수호하도록 위임을 받은 분들이다. 16나한은 핀돌라브하라드바아쟈 · 카나카밧사 · 카나카브하라드바아쟈 · 수빈다 · 나쿨라 · 브하드라 · 카리카 · 바즈라푸트라 · 지바카 · 판타카 · 라후라 · 나가세나 · 앙가쟈 · 바라나밧시 · 아리타 · 쿠다판타카이다. 16나한은 개개의 인격체가 아니라 집단으로 숭앙받으며, 넓은 의미로는 이승에 거하며 부처의 정법을 지키는 석가모니의 제자를 상징하는 뜻을 가지고 있다. 16나한은 당나라 때 현장법사에 의해 중국에 전해지면서 숭앙의 대상이 되었고, 이 신앙은 우리나라와 일본에 전해지면서 크게 성행했다. 이에 따라 나한상을 그림으로 그려 숭앙하는 풍습이 생겼으며, 곳에 따라서는 나한상을 만들어 불전에 봉안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8세기 후반에 이르러 16나한에 대한 숭앙이 성행하였으며, 신라의 사불산(四佛山)에 16나한의 상이 봉안된 이후 많은 불화나 탱화로 그려졌다. * 돌구시는 승군의 쌀 씻는 그릇이다. 당시이곳에 300여명의 승군이 있었다. 부역 승군의 자격은 가족이 있어야 한다. 달아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 조엄거사 공덕미는 부당한 부역을 줄여 절이 유지되게 하였다. 김해의 배소(配所)에서 병사할 때까지 영조를 보좌하여 산업 발전과 국가 재정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고구마를 가져온 사람이다. 조엄(1719~1777)은 1752년 庭試 乙科에 급제한 이후 암행어사로도 나갔고, 대사헌 · 이조판서 등 중앙 관직과 東萊府使 · 경상도 관찰사 등 지방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영조 36년(1760)에는 창원 · 진주 · 밀양에 3개 지방에 조창의 증설을 건의함으로써 이제까지의 세곡 수송의 민폐를 덜고 공물 수납의 공정으로 국고를 충실히 했다. 영조 39년(1763) 도쿠가와 이에하루의 쇼군 취임을 축하하는 통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올 때 고구마 종자를 가지고 와서 국내에 최초로 제주도에서 재배하였다. 정조의 즉위 직후 홍국영 등의 무고로 김해에 유배되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 갑계비는 18C부터 광복까지 60여개의 계가 있었다. 갑계 운영으로 폐사될 위기를 면했다. 계원은 같은 절의 비슷한 나이의 승려들이다. 6세 차이는 동년배로 쳤다. 사찰계는 1564년 사명대사가 처음으로 만들었는데, 이때는 신앙계였다. 시립박물관제 2전시관 한일 관계사 일본은 1607년 막부가 형성되고 통신사를 보낸다. 회답경세환사는 국교재개 조건 1418명의 포로 송환. 李安訥(1571~1637) <來山錄>에 金井山梵語寺次漢陰李相國韻 步入石門逢晩晴 석문을 걸어 들어가니 松林五月風冷冷 오월의 솔숲은 바람이 맑구나. 老僧相對坐溪上 늙은 스님 마주하여 시냇가에 앉으니 日暮雲生山更新 저녁 구름 일어나며 산 더욱 푸르네. 惠晶長老에게 준 오언율시의 각자가 산신각 밑에 남아있다. 금샘 <세종실록 지리지>에, “금정산 금샘은 동래현 서북쪽에 있다. 산마루에 세 길 정도 높이의 돌이 있는데, 그 위에 우물이 있다. 둘레가 10여 척이며, 높이는 7척쯤 된다. 물이 항상 기득 차 있어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빛은 황금색이며 그 아래 범어사가 있다. 세상에 전해오기를 한 마리 금빛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梵天(하늘)에서 내려와 그 속에 놀았다 하여 금정산이라는 산 이름을 지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이와 비슷한 기록이 있다. 금샘 바위는 남근석이다. 범천은 우주의 장조의 원리, 물은 창조의 상징이다. 금어는 생명의 본질이다. 금샘은 초월적인 우주와 지상계가 소통하는 통로이다. 금정산성 안에는 죽전 중리 공해라는 3개의 자연 마을이 있다. 竹田은 화살을 만드는 대나무가 많아, 中里마을은 중성문이 있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公廨는 관청이란 뜻이다. 산성 안에 좌기청, 군기고, 화약고, 내동헌, 별전청 등 관청이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산성마을의 유래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대략 300년쯤 전 군용물자 저장소로 사용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산성마을은 풍수적으로 옥녀금반형, 옥녀가 소반을 받쳐 든 형상. 마을은 옥녀가 다리를 벌린 사이에 자리하기 때문에 음기가 강하다고 한다. 그래서 여자들이 생활력이 강하고 그래야 잘 된다고 한다. 지금 중요한 생계수단인 음식점 역시 여성의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금강공원 식물원 입구에서 금성마을 가는 길이 누룩길이다. 금강식물원의 소나무 군락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소나무재선충이 발발한 곳이다. 삼밭골은 과거 산삼이 많아 산삼골짜기로 불렸다. 대형 떡시루의 소유권을 둘러싼 부산시와 범어사 간 3년여의 법정 공방이 부산시 측의 승리로 끝났다. 대법원 1부(주심 이인복 대법관)은 30일 대한불교 조계종 범어사가 부산시를 상대로 이 절에서 반출된 유제(鍮製)시루(사진)를 돌려달라는 내용으로 제기한 유체동산인도 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밝혔다. 범어사 유제시루는 조선 현종 6년(1664년)에 만들어진 지름 110㎝, 무게 180㎏의 대형 떡시루로 1993~1994년 범어사에서 진행되던 각종 공사 과정에서 반출됐다. 이 시루는 이후 고미술품과 골동품 수집가들 사이에 몇 차례 매도과정을 거치다가 2000년 부산박물관이 골동품 업자에게서 1억3천만 원에 사들였으며, 다음해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됐다. 범어사는 2004년 부산시의회에서 이 유제시루의 도난 의혹이 제기되고, 부산박물관 관계자가 이 시루를 구입하는 과정에서 골동품 업자로부터 2천 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자 2008년 12월 부산지법에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1·2심 재판을 맡은 부산지법, 부산고법은 "문화재인 유제시루를 감독관청의 허가를 받지 않고 처분한 것은 무효지만 피고가 주장하는 선의취득 등에 이유가 있어 소유권이 부산시에 귀속됐다"며 잇따라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부산일보 2012년 1월 30일 금정산성은 총길이 1만8 천845m로 국내 산성 중 가장 길다. 1703년 축성된 이후 1971년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후 연차적으로 정비 및 복원이 진행되고 있다. 2009년부터는 종합정비계획에 따라 2020년까지 745억 원의 국가 예산으로 산성 복원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여기에는 성벽 복원은 물론이고 금정진 · 장대망루 등의 시설 복원, 산책로 정비, 화장실 등 부대시설 확충 등이 포함돼 있다. 지난해에는 동문에서 남문을 연결하는 성곽을 53년 만에 다시 연결하기도 했다. 올해에도 성곽 450를 새로 쌓는 등 20억 원이 투입되는 정비가 계속된다. 현재 금정산성 문화재구역 내 토지 132필지 81만 8천177㎡ 중 사유지는 무려 60만 2천 238㎡(18만2천평)에 달한다. 비율로는 73%이다. 기초지자체 심의위에 맡겨져 있던 금정산성의 현상변경 심사권은 2010년 말부터는 국가단위 기관인 문화재청으로 넘어갔다. 허용기준도 새로 만들어져 보존 1구역인 200m 이내에선 문화재 보존 · 관리 시설에 한해서만 1층 규모의 건축물이나 시설물 설치가 가능하게 됐다. 공공성이 담보된 경우에만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농지로 개발하겠다면 막을 길이 없게 된다. 문화재 반경 200m 이내 거리에 있는 보존 1구역이라도 땅 주인이 사유지임을 내세워 농사를 짓겠다며 현상변경 허가 신청을 하면 막을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한 쪽은 밭 복원, 한 쪽은 산성 복원.' 하지만 성곽과 불과 2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선 울창한 야산이 농지로 개발되고 있다. 난개발이 우려되는 현상변경을 허용하면서 또 한쪽에선 산성을 체계적으로 정비하고 관리하겠다며 막대한 돈을 쏟아 붓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울창한 수목이 잘려나가는 것도 문제다. 지목이 임야가 아닌 이상 농사를 위해 부지에 있는 나무를 잘라내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A 씨 부지에는 보호수인 소나무 몇 그루만 달랑 남은 채 수 백 그루의 나무들이 몽땅 잘려나갔다. 일각에서는 농지로 사용하다 슬그머니 비닐하우스를 설치, 판매시설 등 상업용 목적으로 전환하려는 게 아닌지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자연공원법은 일정기간 농사를 지으면 농업용 비닐하우스를 설치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미륵사 좌선바위 염화전 뒤의 거대한 바위는 스님이 좌선하고 있는 모습 같다. 해가 지면 바위와 바위 사이 금이 보이지 않을 때 하나로 보인다. 좌선바위 뒤편에 미륵불을 닮은 미륵바위가 있었는데, 거대한 바위가 미륵불을 향해 좌선을 하고 있는 형상이었다. 현재는 미륵바위를 없애고 그 자리에 독성각을 세웠다. 독성각 처마 한 모서리 뒤 자연 암석에 미륵바위의 장삼자락을 양각한 흔적이 있다. 장삼 왼쪽 자락의 부족한 부분을 조각한 것이다. 독성각 돌계단 4각형 샘에 쌀바위 전설이 있다. 부산에서 가장 영험한 물이라 한다. 독성각 옆에 장군기를 끼우는 구멍. 염화전 뒤의 샘물도 영험한 약수로 유명하다. 고종 때 동래부사 鄭顯德이 이 물을 마시고 병을 고쳤다고 한다. 삼층석탑은 일제가 보수했다. 기단이 3층, 노반이 뒤집어져 있다. 장봉골 석문 고당봉에서 서문쪽으로 흐르는 서남릉 끝에 있다. 좌우 돌담은 사라지고 문만 서있다. 이 석문은 장방형으로 돌출한 건물지의 구조물로 드나들게 된 출입문일 것이다. 지연석을 쌓은 석문에는 문지두리홈과 문빗장홈이 있어 문을 열고 문을 걸고 잠그었을 것이다. 이곳에는 정면 2칸, 측면 1칸의 집이거나 망루,또는 장대로 사용했을 것이다. 문지두리홈에 문비가 덜려있었을 것이다. 현존하는 금정산성은 조선 숙종 29년인 1703년 쌓았다. 일주문 현판 壬子小春下浣 소춘은 음력 10월, 하완은 하순이다. 1912년 10월 하순, 七十八翁海鹵堂 해로당이 78세 때 썼다. 1912년 10월 15일 범어사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선찰대본산이란 종지를 받는다. 해로당(海士) 金聲根(1835~1919)은 조선 고종 때 전라감사, 예조판서를 지냈다. 육화행료 款識에 庚申之中秋 菁南 七十三歲之作 吳濟峰(1908∼1991), 1980년이다. 주지실 출입문에 布德攝衆, 眞空妙有
그동안 100억 원의 돈을 투입해 북문 기둥과 단청 복원을 끝냈고, 태풍으로 무너진 제2 · 3 망루도 다시 세웠다.
전체 성곽의 30%도 이미 보수를 끝냈다. 성곽은 상태가 좋은 5천806m를 뺀 나머지 구간이 전체 혹은 부분적으로 보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