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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

추연욱 2015. 9. 5. 17:23

금정산과 범어사(수정).ppt

 

 

금정산

   

 

 

금정산

금정산은 낙동정맥이 마지막으로 빚은 빼어난 산이다. 낙동정맥은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태백시 피재에서 갈라져 통고산, 백암산, 칠보산, 주왕산, 운주산, 사룡산, 단석산을 거쳐 가지산 등 영남알프스를 지난 뒤 부산의 금정산과 사하구 다대포 몰운대 벼랑까지 이어진다. 지도상 거리만 400가 넘고 실제 거리는 700가 넘는다. 부산의 낙동정맥은 지경고개, 계명봉, 산성고개, 동문, 쌍계봉, 백양산으로 이어진다.

금정산은 주봉 고당봉을 비롯하여 남쪽의 상계봉(638.7m, 주봉 북쪽의 장군봉(727m), 동쪽의 계명봉(642m), 남쪽의 의상봉(687m) 10여개의 봉우리들이 대천을 향하여 말굽모양의 능선을 따라 이어져있고 그 사이에 넓은 분지가 형성되어 있다.

 

금정산이란 이름은 금샘에서 유래한다. <동국여지승람> 23권 동래 금정산조에 금정산은 동래현 북쪽 경지에 있다. 금샘은 현의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산마루에 바위가 있으니 높이가 3길쯤 되고 위에 우물이 있는데 둘레가 10여척이고 깊이가 7촌쯤 된다. 물이 항상 가득 차있어 가물어도 마르지 않으며 빛이 황금과 같다. 세상에 전해 오기를 한 마리의 금색 물고기가 범천에서 오색구름을 타고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고 하여 금빛우물이라는 산 이름과 범천의 고기라 하는 절 이름을 지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다른 견해도 있다. 금정산의 본디 이름은 계명산이라는 것이다. ‘는 새벽을 뜻하는 ’, ‘은 음이 와 닮아 새미산이다. ‘쇠 또는 새’, ‘그래서 새미산이다. 또 어린이 대공원 서쪽에 있는 백양산(642m)은 금정산맥의 주능선에 솟은 산이다. 이산의 동쪽은 새미산인데. 사직동 사람들은 돌작동이라 했다. 산허리에 배틀굴이 있는데, 조일전쟁 때 주민들이 피신하여 목숨을 건졌다는 곳이다.

고당봉(801.5m)

금정산의 정상 명칭은 19944월 사찰관계자와 학계 인사로 구성하여, 본래 이름 찾기 고증작업을 통하여 姑堂峯으로 결정하였다.

정중환은 姑堂峯이라 주장하였다. 우리나라의 모든 산에는 산신이 있고, 산신은 여신이다. 그러므로 고당봉도 할미산이므로 할미 고()에 집 당()자를 써야 옳다고 주장하여 이 견해가 채택되었다.

이이 대해 주영택은 高幢峰이라고 주장했다. ‘고당이란 부처님의 화엄일승인 최고 법문을 높은 깃대에 세웠다는 의미로 금정산 제일 높은 봉우리인 범어사 배산에 깃발을 꽂아 세웠다는 뜻이다. 법의 당을 높이 세워 운집한 사부대중을 위해 일승법문을 강설한다는 의상대사의 뜻에 따라 붙은 명칭이라고 했다. 1947년의 <범어사 안내서>의 서언에 高幢주령이란 말이 있고, 금정8경에도 高幢歸雲으로 된 것을 근거로 들었다.

 

* 금정산산신각 고모영신당과 고당제에 대해서는 <梵魚寺書記潰留傳(1902)> 산령축에 기록이 있다. 지금부터 400년전 밀양박씨가 결혼에 실패하고 불문에 귀의하면서 범어사에 많은 보시로 화주보살이 되어 절 살림을 맡아보며 여생을 보냈다. 절에 있으면서 마을을 돌아다니며 병자들도 고치고 쌀, 보리를 받아와 여러 불사를 하여 사부대중 사이에 칭송이 자자하였다. 어느날 보살은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하고 저 고당봉에 姑母神靈을 모시는 산신각을 지어 고당제를 지내주면 높은 곳에서 수호신으로 범어사를 지키고 도와주겠다고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이 유언에 따라 고당봉에 산신각을 지어 1년에 두번(115, 55)씩 제사를 지냈으니 이것이 고당제이다.

제사는 두편으로 나누어 범어사를 출발한다. 한편은 원효암 寺基 표석을 지나 북문을 거쳐 미륵사로 가 고당봉으로 올라간다. 또 한편은 내원암을 지나 고당봉 뒤 범어사기 표석을 지나 산신각에 도착한다. 이것은 범어사 경계선인 표석을 확인하고 지신을 밟아 산신에게 고하는 의식이다.

고당제는 양기가 가장 왕성한 단오일 午時 제물 앞에서 한재와 수재, 병을 없애는 산령 신장 축문을 읽고 염불을 독송한다. 마치면 미륵사로 가 석간수을 마시고 범어사로 갔다고 한다. 그후 범어사는 아주 번창하였다고 한다.

 

금정산성(사적 제215)

금정산성은 금정구 금성동, 장전동, 남산동, 구서동, 북구 만덕동, 화명동, 금곡동, 동래구 온천동에 걸쳐있다. 또 금정산의 주요 봉우리 12개 중 10개 봉우리를 성곽이 지나고 있다. 산성은 길이가 17,337m, 성곽의 높이는 평균 1.5~3m 가량이다. 성내 면적은 2512,000(8.213)이다.

<동래부지>에는 조선 제18대 숙종(1674~1720 재위) 29(1703) 동래부사 박태항이 축성하였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현종실록> 16권에는 이보다 36년 앞선 현종 8(1667)에 금정산성이란 말이 나온다. 이로보아 금정산성은 이미 있었고, 허물어져 그 基址만 남아있었던 것을 숙종 때 다시 쌓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금정산성의 축성연대는 삼국시대로 볼 수 있는 근거들이 있다. 장봉골 끝에 있는 石門은 축성 양식이 조선조의 양식과는 다르다. 모퉁이 일부분을 장방형으로 돌출시키고, 그 돌출부의 목부분에 석문을 세운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성벽을 쌓고 眉石을 놓은 후에 성가퀴를 쌓는다. 이때 성벽은 경사지 단애를 활용하므로 성가퀴만 지표상에 융기되어 성을 지키는 군사의 몸을 숨기게 된다. 그런데 이 장봉골 석문의 성두 부분은 그런 일반형을 따르지 않고 성벽을 맞담 쌓듯이 지표상에 높직하게 쌓았고 그 높이에 맞추어 훤칠한 석문을 만들었다. 삼국시대의 성인 보은 삼년산성, 단양의 적성, 영춘의 온달성은 성벽의 높이가 지표보다 훨씬 높다.

 

금정산성은 조일전쟁으로 혹독한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동래읍민이 또다른 난리에 대비하여 피란과 전투를 위해 다시 쌓았다. 금정산성은 피란지로서 성내에서의 군량의 생산과 조달이 용이하고 또 험준한 산세를 끼고 있어서 장기전에 대비하기에도 좋았다. 따라서 산성 내에 관아건물, 내동헌 등 부사 집무소도 지었다.

 

1707년 산성이 너무 넓어 관리하기 어렵다하여 동래부사 韓配夏가 다시 둘레 5,643의 내성을 쌓고 시설을 정비하였다. 그뒤 순조 6(1806) 동래부사 吳翰源이 관리소홀로 피폐한 실정을 조정이 알리고 이듬해 동문을 신축하였다. 이어 서문, , 북문을 조성하고 성곽도 정비하였다.

 

* 금정산성 복설비(부산시 기념물 제15)- 장전동 금정초등학교에서 서쪽으로 200m쯤 떨어진 마을 골목 안에 있다.

순조 8(1808) 동래부사 吳翰源이 성문을 수축하고 성곽을 다시 쌓아 성곽의 면모를 새롭게 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다.

당시 산성 안에는 座起廳 6, 좌우행랑 각 5, 화약고 1, 내동헌 3, 別典廳 4, 將臺 中軍所, 겨련청, 僧將所, 山城倉 등이 있었다. 산성창에는 미곡 2,000석과 백목 56등을 비장하였다.

금정산성의 방위는 東萊獨鎭守城將을 겸하고 있던 동래부사가 맡았다. 숙종 때는 산성 안의 국청사와 해월사 승려 100여명과 범어사 승려 300여명으로 수비하게 하고 동래, 양산, 기장 3읍에 있는 수천 명으로 를 편성하여 유사시에는 이들을 모아 산성을 방어하게 하였다.일제강점기까지 산성마을에는 금정산성의 관아 건물과 방어용 무기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모두 일제가 무너뜨리고 약탈해 갔다.

산성의 4대성문과 망루 등은 1970년대 이래 복원되었다.

 

* 동문은 동래부사 오한원이 금정산성을 다시 설치한 사실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금정산성부설비>에 따르면 순조 7(1807) 10월에 준공하였다. 그후 일제에 의하여 엄청난 파괴와 훼손을 당했다. 현재의 동문은 부산시가 문화재 복원 계획에 따라 19728월부터 12월까지 남문루와 함께 준공한 것이다.

* 서문은 사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계곡에 세웠다. 서문 바로 옆으로 흘러내리는 대천(화명천)에 세 개의 아치를 이룬 수문을 큼직한 돌을 쌓아 만들었다. 낙동강 하구로 침입한 왜적들은 화명동에서 대천을 거슬러 이곳으로 공격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이곳은 방위상 매우 중요한 곳이다.

* 남문東帝峰(해발 545m)上鷄峰을 잇는 능선의 안부에 있다.

* 북문은 직사각형 석문 위에 누각과 성벽을 쌓았을 뿐 산성 4문 가운데 가장 투박하고 규모도 작다. 북문을 들어서면 넓은 산상분지 화엄벌이 있다. 신라시대에는 화랑도들이 이곳에서 무예를 닦았다는 신성한 곳이다. 또 승군들도 이곳에서 무예를 닦았다.

 

* 1망루는 상계봉 북쪽 해발 650m 生氣峰 정상에 있다. 이곳에는 금정산 전체와 동해 낙동강 하구가 한눈에 들어오는 조망이 뛰어난 곳이다.

* 2루는 남문 동쪽 동제봉에 있다. 동래 일대와 동해까지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1, 2망루는 타원형의 금정산성 남쪽 양단에 자리한 셈이다.

* 3망루는 동문 북쪽 약 1km 지점의 암벽 위 해발 550m 지점에 절묘하게 서있다.

* 4망루는 해발 620m의 주능선 상의 의상봉 바로 남쪽에 있다. 외성의 동쪽 성곽과 중성의 동쪽 끝이 만나는 삼각점이다.

 

금정산성 서문(사적 제215)-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금정산성 4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계곡에 세워졌다. 서문의 초루와 자 모영으로 조성한 성곽의 모습은 견고하고 아름답게 지어졌으며 낙동강과 구포, 김해방면으로 왕래한 성문이다. 서문은 홍예식문으로 정면 3,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단층문루 건물이며, 좌우에는 폭 4m, 길이 5m, 높이 5m 규모의 敵臺와 여장이 복원되어 있다. 서문 북측 대천천의 수문은 교량식 홍예형으로 촉이 약 250cm, 높이 약 300cm 규모의 수구(폭 약 230cm) 3개로 아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 수문은 금정산서에서 유일한 것으로 천연요새인 협곡에 서문과 수문을 만들었던 선저들의 지혜를 느낄 수 있다.

동래부사 정현덕(1867~1874)이 서문과 동문 재건에 힘을 쓰고 있을 때 이야기가 있다. 그는 성문을 아주 완벽하게 세우기 위해 이름난 석공을 수소문한 끝에 사제지간이 두 석공을 찾아 스승에게는 동문을, 제자에게는 서문을 짓게 하였다.

동문을 맡은 스승은 야욕과 욕심이 많아 웅대하게만 짓고자 하였으나 서문을 맡은 제자는 기술이 앞서 정교한 아름다움을 살려 스승보다 먼저 짓게 되었다고 한다. 스승은 제자의 뛰어난 기술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그 당시 사람들은 그 스승을 미워하고 제자의 기술을 칭송하였다.

그러나 이들 사제는 동문과 서문 공사가 끝난 뒤에는 힘을 합쳐 밀양 영남루 공사를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금정산성 연구의 가장 확실한 자료가 되고 있는 비로, 오한원이 이 산성을 복원한 순조 8(1808)에 세운 것이다.

우리나라 최대의 산성인 금정산성을 보수한 뒤 산성의 면모를 새롭게 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현재 금정초등학교에서 서쪽으로 약 200m지점의 주택지 가운데 놓여있는 큰 바위 위에 자리하고 있다.

금정산성은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숙종 29(1703) 감사 조태동이 동래부사 박태항으로 하여금 쌓게 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인 현종 8(1667) 통제사 이지형이 왕에게 금정산성을 보수할 것을 건의하는 기록이 있어 이보다 더 오래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 남아있는 산성의 기초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인 숙종 29(1703) 국방에 대한 새로운 인식 속에서 축성된 것이다. 그 후 순조 대에 동래부사 오한원이 성문을 수축하고 무너진 성곽을 다시 쌓아 새롭게 복원하였는데 이 비는 이때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비의 형태는 단순한 직사각형의 모습으로 윗모서리 양끝을 둥글게 처리했을 뿐 별다른 장식은 없다. 비의 앞면에는 금정산성을 처음 쌓은 것부터 다시 설치하게 된 경위와 부설공사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뒷면에는 공사를 감독한 사람들의 명단이 새겨 놓았다. 금정산성 연구의 가장 확실한 자료가 되고 있는 비로, 오한원이 이 산성을 복원한 순조 8(1808)에 세운 것이다.金井山城復說碑시도기념물 15

 

 

* 범어사 등나무군생지(천연 기념물 제176)는 범어사 일주문을 향하여 가다가 왼쪽으로 난 길로 들어가면 범어사 등나무군생지가 나온다.

등나무군생지는 면적이 5.6ha쯤 된다. 이곳에는 약 500여 그루의 등나무와 서어나무,

 

떼죽나무, 참나무, 소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5월초 보랏빛 꽃이 핀다. 그래서 이곳을 藤雲谷이라고도 한다. 등꽃이 구름처럼 모여있는 계곡이란 뜻이다. 등나무는 굵기가 아이들 손목만한 것도 있고, 어른 허벅지만한 것도 있다. 굵은 것은 지름이 1m나 되는 것도 있다. 이런 등나무 군생지는 희귀한 것이어서 1966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현재 475호까지 지정된 천연기념물 중 등나무는 경주시 견곡면 오류리에 있는 오류리의 등나무(89)와 이곳뿐이다.

 

 

 

 
금정산과 범어사(수정).p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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