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발발 시골 선비들 조선왕조실록을 구하다
조선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아침 8시경.
왜선 700여 척에 탄 조선 침략 선봉군 제1진 18,700명이 부산에 상륙하면서 닥치는 대로 살인, 방화, 약탈을 저질렀다. 이 와중에 한양의 궁궐에 있는 춘추관, 충주, 성주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이 모두 불에 탔다. 유일하게 왜군이 들어가지 못한 전주사고의 실록만 남아 있었다.
전주사고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모두 1,344책이 보관되어 있었다. 또 전주사고 옆에 있는 경기전에는 조선왕조를 창건한 태조의 어진이 걸려 있었다.
그해 6월 왜군 제6진이 성주, 금산, 남원을 거쳐 전주로 진격하고 있었다. 왜놈들이 몰려온다는 소식에 경기전 참봉 오희길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실록과 어진을 산속 길은 곳으로 옮기려면 말 20여 필과 많은 인부들이 필요한데……”
그의 머릿속에는 이 지역사회에서 학문적으로나 인격적으로 명망이 있었던 전라도 태인에 사는 유생 손홍록이 떠올랐다. 바로 달려가 간청했다. “나라의 역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실록을 보관해야 하는데, 저 혼자서는 역부족입니다. 부디 뜻을 같이 하십시다.”
손홍록은 흔쾌히 동의하고 학문을 같이 했던 고향친구 안의와 함께 하인 30여 명, 수십 마리의 말을 데리고 전주로 달려갔다. 이때 손홍록의 나이는 58세, 안의의 나이는 64세로 고령의 노인들이었다. 오희길은 실록을 숨길만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 정읍 내장산 은봉암이 적격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이들 세 사람은 태조부터 명종 때까지 13대에 이르는 180년의 기록을 47개 상자에, <고려사>등 다른 서책을 15개 상자에 담아 수십 개의 수레에 싣고 전주를 떠났다.
은봉암에 도착한 것은 이레만인 1592년 6월 22일. 다음날에는 태조 어진과 제기들을 용굴암으로, 다음달 14일에는 실록을 더 깊숙한 곳인 비래암으로 옮겼다. 이들은 책들을 일일이 지게에 지고 한발 한발 내닫으며 산으로 올라갔다.
이들은 소식을 듣고 달려온 영은사(지금의 내장사)의 희묵스님과 무사 김홍무, 이름 없는 사당패에 이르기까지 자발적으로 나선 100여 명과 함께 실록을 지켰다. 이렇게 실록과 어진을 조정에 인계할 때까지 보관했던 기간은 14개월에 달한다.
후일 안의가 쓴 <닌중일기>에는 안의와 손홍록이 함께 자리를 뜨지 않고 실록을 지킨 날이 53일, 안의가 혼자 지킨 날이 174일, 손홍록이 혼자 있는 날이 143일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기상, <신념과 용기로 문화재를 지켜낸 사람들>, 문화재 사랑, 통권 127호, 문화재청, 2015년 6월.
역사의 기록과 보존
<삼국사기> 태종무열왕 7년부터 월별 기사에서 탈피하여 날짜별 기사 등장
<고려사> 춘추관
이때 편찬된 실록들이 조선 초까지 현존했다.
고려 때부터 전왕이 승하하면 감수국사 이하 편수관을 임명하여 실록을 vusc나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감수국사 최보순, 수찬관 김양경, 임경숙 등이 19대 명종실록을 편찬하여 춘추관과 해인사에 보관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렇게 귀중한 기록물은 원본과 부본을 만들어 분산 보존하였다.
왕이 사망하면 임시로 실록청을 설치한다.
실록청에는 영의정 이하 정부의 주요 관리들이 領事 監事, 수찬, 편수관, 기사관 등의 직책을 맡아 실록 편찬을 집행하였다.
실록청에서는 사관들이 작성한 史草와 時政記 등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실록의 편찬에 착수하였다.
실록을 기록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을 사관이라 하였다. 좁은 의미의 사관은 예문관의 전임관원인 奉敎 2명, 待敎 2명, 檢閱 4명으로 이들을 翰林이라 하였다. 한림 8원은 춘추관 기사관으로 사관이 되어 입시, 숙직, 사초의 작성, 시정기 작성 실록편찬, 실록 보관을 위한 포쇄 등 임무를 수행하였다.
사관에 결원이 생기면 춘추관 당상 6품 이하의 문신 가운데 경서와 사기 및 문장을 시험하고, 또 그 문벌을 조사하여 흠이 없는 사람을 뽑아 임명하였다. 사관 8명은 번을 나누어 왕명을 출납하는 승지와 함께 궁중에 숙직하고 조회, 조참, 경연 등 국왕이 참여하는 모든 행사와 중신회의 기타 임금과 신하가 만나는 중대 회의에도 대부분 참석하여 그 내용을 기록하였다.
사초는 사관이 국가의 모든 회의에 참여하고 보고 들은 내용과 자신이 판단한 논평까지 그대로 기록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함께 당대 사관들의 역사인식까지 담겨져 있다. 또한 사초는 사관 이외에는 국왕조차 볼 수 없게 하여 사관의 신분을 보장하였고 자료의 공정성과 객관성에 만전을 기허였다.
사초는 사관들이 일차로 작성한 初草와 이를 다시 교정하고 정리한 中初, 실록에 최종적으로 수록하는 正草의 세 단계 수정작업을 거쳐 완성하였다. 초초와 중초는 물에 씻어 그 내용을 없앴다. 이러한 작업을 세초라 하였다. 조선시대 사초를 주로 세척하던 장소가 세검정 일대의 개천이었다.
遮日巖이란 널찍한 바위 위에서 물에 씻은 종이를 말렸으며, 말려진 종이는 造紙署에서 새로운 종이로 재활용되었다. 세초를 마치면 이를 축하하는 세초연을 베풀었다.
관청별 업무일지 일기 혹은 등록이란 이름으로 전해진다.
승정원일기를 비롯하여 일성록 의정부등록 비변사등록 등이 그것이다.
승정원일기는 왕명을 출납하는 국왕 비서실 일기이다. 1629년부터 1910년까지의 왕명을 출납, 제반 행정사무 의례적 사항들이 기록되어 있다. 일성록은 1752년부터 1910년까지 국왕의 동정과 국정의 제반사항을 기록한 일기체 연대기이다. 비변사등록은 조선 중 후기 최고 의회기관이었던 비변사의 업무일지이다. 오늘날 국무회의 기록과 비슷하다. 의정부등록은 조선 중기 이후 의정부에서 행한 각종 정사와 전례를 기록한 것으로, 1646년부터 1859년까지 214년 간의 기록이다.
시정기는 서울과 지방의 각 관청에서 시행한 업무들을 문서로 보고받아 춘추관에서 그 중요 사항을 기록으로 남긴 것으로 <관상감일기>, <춘추관일기>, <의정부등록>, <승정원일기> 등이 이에 해당한다. 시정기는 매년 책으로 편집하여 국왕에게 보고하였으며, 보관된 시정기는 실록의 주요 자료로 활용되었다.
이렇게 이루어진 실록은 1대 태조로부터 25대 철종까지 472년(1392~1863)간의 기록을 편년체로 서술한 조선왕조의 공식 기록이다. 총 1893권, 888책이다.
실록은 편찬의 완성만을 총재관이 국왕에게 보고하고 춘추관에서 봉안의식을 가진 후
편찬이 완료된 <실록>은 궁궐 안의 춘추관에서 봉안하는 의식을 치룬 후 춘추관과 지방의 史庫에 보관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춘추관을 비롯하여 충주 전주 성주 등 지방의 중심지에 보관하였다.
1592년 조일전쟁이 일어나자, 춘추관 · 충주· 성주의 사고는 모두 불타 버렸다. 인구가 밀집한 읍지에 소재한 사고들은 왜적의 침입루트에 있었기 때문이다.
전주사고본의 책들은 사고 參奉 吳希吉(1556~16232)과 전주 지역 유생 孫弘綠(?~?), 安義(1529~1623) 등이 내장산까지 옮겨, 보존될 수 있었다.
조일전쟁이 끝난 후 새로이 5부를 만들어 지역중심지에서 험준한 산 위로 옮겨 보관하게 된다.
광해군대 이후 조선의 사고는 5사고 체제로 운영되었다.
서울의 춘추관 사고, 강화도의 마니산 사고, 평안도 영변의 묘향산 사고, 경상도 봉화의 태백산 사고,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 사고가 그것이다. 춘추관 사고를 제외한 4군데의 사고는 지역별 안배를 한 후 험준한 산지에 배치한 것이다.
그러나 1624년 이괄(1587~1624)의 난으로 춘추관 실록은 불탔고,
오대산 본은 일제강점기 동경제국대학에서 보관하다가 관동대지진 때 거의 소실되었다.
또 장서각에에서 보관하던 적상산본은 한국전쟁 당시 행방불명이 되었으나, 김일성 종합대학에 소장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그후 묘향산 사고는 후금(뒤에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적상산성이라는 천연의 요새로 둘러싸인 전라도 무주의 적상산 사고로 옮겼으며, 강와도의 마니산 사고는 조청전쟁으로 크게 파손되고, 효종 4년(1653) 불이 나서 현종 1년(1660) 인근의 정족산 사고로 옮겼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의 4사고는 정족산, 적상산, 태백산, 오대산으로 확정되어 조선 멸망 때까지 지속되었다.
사고에는 왕실족보인 선원보를 비롯하여 중요 기록물들도 함께 보존했다.
그리고 주변에 수호사찰을 배치하여 보다 안전하게 사고를 지키게 하였다.
전등사는 정족사 사고를,
안국사는 적산산사고를,
각화사는 태백산 사고를,
월정사는 오대산 사고를 각각 담당하였다.
실록은 통풍이 잘 되는 건물에다 일정 분량으로 나누어 나무 상자에 넣어 보관했다.기록물들을 붉은 보자기로 싸고, 부식을 막기 위해 다시 기름종이로 덮었다. 그런 다음 충해를 막기 위해 천궁이나 창포가루 같은 약재를 함께 넣었다. 책과 책 사이에는 草注紙를 두 장씩 놓고 포갰는데, 습기나 다른 피해를 막기 위해서이다.
실록의 관리에 있어서 3년을 주기로 曝曬 작업을 했다.
포쇄는 책을 바람에 말려 습기를 제거하여 부식 및 충해를 방지하는 것이다.
왕명을 받은 전임 사관들은 사고로 가서 포쇄를 하는 전 과정을 모두 기록하였다. 포쇄로 인해 <조선왕조실록>이 대부분 원형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정족산본 실록은 조일전쟁을 겪으면서 유일하게 보존된 원본 실록이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1997년 10월 1일 유네스코에서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