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문화유산 답사자료

추사고택

추연욱 2015. 8. 8. 10:31

 

 

완당선생 초상

小癡 許鍊(1808~ 1893) 그림

 


추사고택(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3)백송추사묘 는 충청남도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있다.

나지막한 언덕들에 둘러싸여 있는 추사고택은 내포 땅의 특질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풍수전문가들은 추사고택은 文字香書卷氣가 감도는 명당이라고 말한다.

 

추사의 증조부 부마 월성위 김한신(1720~1758)이 건립하다고 한다. 이 집을 지을 때 서울에서 경공장(한양에서 나라의 건축을 맡아 하는 목수)을 불러다 했다고 한다. 비용은 충청도 53개 고을에서 한칸씩을 부조하여 53칸짜리 저택을 지었다고 하니 당시 추사 집안의 세도를 알 만하다.

지금은 전체가 80.5평으로 대문채와 사랑채, 안채, 사당채, 솟을대문 등이 있는데 본래 곳간 채가 더 있었다. 대문채와 사당채는 1977년에 집을 복원할 때에 다시 세운 것이다.

현재의 추사고택은 그다지 화려하지 않은 양반가 주택의 모습이다. 추사의 직계손이 끊어져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던 사이에 헐렸기 때문에 변형도 꽤 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건물은 서에서 동으로 길게 배치되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높은 계단 위에 앉아있는 위압적인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먼저 사랑채가 남향하여 있고 안채와 대청이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자형으로 별당채의 성격을 가지고 안채와는 엄격히 구분되는 조선시대 건축 관념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앞쪽은 높은 주추 위에 누마루와 같이 돌출하여 있어서 매우 권위적이다. 두칸의 온돌방이 있고 나머지는 대청과 마루로 연결되어 있으며 문짝을 들어올리면 모든 공간이 하나로 트이는 개방성을 갖추었고, 이것을 통로로 서로 내왕할 수 있게 하였다. 대청과 안방, 건너방, 부엌, 문간, 헛간, 청지기방이 연이어지는데 이 구성은 집안의 대소사나 손님접대, 기타의 사회활동이 이 사랑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마루공간을 열린 구조로 만들고, 문짝을 내렸을 때의 보온과 폐쇄를 위해서는 문이 두꺼운 맹장지(벽지를 안팎으로 두껍게 발라 어둡게 만든 문이나 창)를 달았다. 그러면서도 빛이 통하도록 중간에 창을 내어 창호지를 바른 불발기창(빛이 통하도록 문 중간에 낸 창)을 냈다. 이러한 개방과 폐쇠를 거듭하면서 편리와 예의를 고려한 전통적인 한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기둥마다 판각되어 걸려 있는 글씨들은 원래 것이 아니고 보수하면서 추사의 글씨들을 붙여 놓은 것이다.

그중 안채 정면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 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세상에서 제일 가는 반찬은 오이와 새앙과 나물이며 / 세상에서 제일 가는 모임은 부부와 아들 딸 손자들의 모임이라)은 추사가 늘그막에 쓴 글씨로 유명하다. 사랑채 큰방에는 歲寒圖복제본도 걸려 있다.




 

 

사랑채 댓돌 앞에는 石年이란 글씨가 새겨진 돌기둥 하나가 서있다. 이 돌기둥은 그림자 길이로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 추사가 제작한 일종의 해시계이다.






그 뒤로 돌아가면 안채가 나온다. 안채는 가운데 안마당을 중심으로 사방이 완전히 밀폐된 자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서쪽 중앙부분에는 3x 2칸 대청이 동향하고 있으며 앞 반칸 통을 툇마루로 꾸몄는데, 대청과의 사이에는 4분합의 띠살문을 달았다. 본래 중문으로 들어서는 곳에 내외벽이라는 벽이 문간에 있어 안채가 바로 들여다보이지 않게 되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다. 안마당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넓은 대청이 있고 오른쪽에는 안방과 거기에 부속된 공간들은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왼쪽으로는 안사랑과 작은 부엌이 마주하고 있다. 대청과 대향하여 동쪽에는 2칸 규모의 중문과 1칸의 행랑방이 있으며, 대청은 육간대청이다. 대청 뒤쪽은 칸마다 문짝과 창이 달렸는데 중앙간 분합문짝을 열면 사당으로 통하는 계단이 이어져 있다.

안사랑은 젊은 도령이나 신방을 차린 서방님이 기거하는 방으로, 바깥마당 쪽에 툇마루를 달아 안방 쪽에 인기척을 내지 않고 드나들기 편하게 했다. 작은 부엌에는 쪽문이 나 있어 바깥 마당으로 통하며 바로 밖에는 우물이 있다.

지붕은 홑처마에 팔작지붕을 주로 하여, 지형의 고저차가 생긴 곳에서는 맞배지붕으로 처리하여, 지형에 따라 층을 지게 적절히 처리하였다.











 

* 추사의 무덤은 고택을 바라보아 왼쪽에 계곡 하나 지난 자리에 있다. 봉분도 나지막하고 석물 치장도 화려하지 않다. 오른쪽으로는 둔덕을 하나 넘으면 추사의 증조할머니가 되는 영조의 딸 화순옹주 묘가 있다. 무덤에 이르기 전에 있는 집은 그 묘막으로서, 정조가 내린 열녀문이 대문 앞에 있다.








 

* 백송(천연기념물 제106)은 추사의 무덤에서 길을 따라 한참 가면 나오는 추사 집안 어른들의 무덤 앞에 서있다. 나이가 200년이 채 안되는 이 백송은 김정희가 아버지를 따라서 청나라에 갔던 1809년에 연경에서 종자를 얻어 와 고조부 묘소 앞에 심어 키운 것이다. 기후와 풍토가 잘 맞지 않아서인지 또는 200년이면 거의 수명을 다한 편이라 그런지 무성하지 못하다.




 



추사 金正喜(정조 10(1786 ~ 1856)

자는 원춘, 호는 추사, 완당, 예당, 시암, 노과, 농장인, 천축고선생 보담재등 백여가지에 이른다. 한말 글씨의 명인이며, 청나라 고증학을 기반으로 한 금석학자이며, 실사구시를 제창한 경학자이다.

예산 출신으로,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의 사위가 되어 훈척 가문이 된 경주 김씨 문중에서, 병조판서 노경과 기계 유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나, 큰아버지 노영 앞으로 양자로 들어갔다. 그의 가문은 안팎이 종척으로 그가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권세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예술성(특히 서도)을 인정받아 楚亭 朴齊家(1750~1805)의 눈에 띄어 그의 제자가 되었고, 그로인해 추사의 실학은 박제가에게서 비롯한다.

25세에 아버지가 동지부사로 청나라 연경으로 가게되었을 때에 그 자제군관으로 동행하게 되면서부터 그의 예술이 본궤도에 오른다. 그는 스승 박제가에게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당대 석학인 翁方綱(1733~1818)阮元(1764~1849)을 만나 이들로부터 한나라와 송나라때의 비첩을 기준으로 한 고증학과 실사구시학을 배운다. 당시 78세로 청나라 제일의 석학이었던 옹방강은 이 젊은 청년을 經術文章海東第一이라 칭찬하였다. 추사는 이 인연을 소중히 여겨 호를 옹방강의 호 覃溪寶蘇齋를 본떠 寶覃齋라고 하였으며, 완원의 자를 따서 阮堂이라고도 하였다.

1819(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 대제, 호서안찰사(충청도 암행어사)를 거쳐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금석학 연구에 몰두하고, 금석자료의 수집과 보호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옹방강에게 옛 비문의 탁본을 보낼 겸 많은 옛 비를 조사하였는데, 그 중에 함흥 황초령에 있는 신라 진흥왕순수비를 고증하였고, 1816년에는 북한산 비봉에 있는 비석이 무학대사가 세운 것이 아니라 진흥왕순수비라는 사실도 밝혔다. 그리하여 금석학에 일가를 이루었고 金石過眼錄같은 책을 내었다. 그후 깊은 연구를 바탕으로 후학을 지도하여 조선금석학파를 성립시켰는데, 그 대표적인 학자들로 신위, 조인영 등이 있다.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이 즉위, 순원황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그는 아버지 노경이 1830년 윤상도 옥사의 배후 조종혐의으로 연루되어 추사도 일시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순조의 배려로 다시 복귀하게 된다. 그리고 조인영, 권돈인과 삼두체제를 이룰 만큼 정치적으로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1840년에는 동지부사로서 연행에 다시 오르게 되나, 풍양 조씨의 득세에다 다시 반격을 가한 안동 김씨가 10년만에 다시 윤상도 옥사를 거론하여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된다.

추사는 제주도로 귀양을 가는 길에 해남 대둔사에 들러 초의선사(1786~1866)를 만난다. 초의선사와는 귀양살이 가운데에도 차를 받는 등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그때에 그는 대둔사에 걸린 원교 이광사의 大雄寶殿현판 글씨를 보고는 촌스러운 글씨라고 하여 자신이 글씨를 써 주어 바꿔 달게 했다. 이광사는 동국진체의 대가로 글씨에서는 겸재 정선과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鄕色이 나는 글씨가 추사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9년여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다시 대둔사에 들른 추사는 지난번에는 내가 잘못 생각하였다면서 자신의 글씨를 내리고 다시 원교의 글씨를 걸게 하였다. 유배생활이 주는 삶의 깊이가 그의 눈을 뜨게 했을 뿐만아니라 글씨도 완성시켰던 것이다.

추사체는 그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완성되었다. 이는 모든 서체의 장점을 바탕으로 해서 보다 나은 독창적인 길을 창출한 것이 바로 졸박청고한 추사체이다. 고도의 이념미의 표출로, 거기에는 일정한 법식에 구애되지 않는 법식이 있었다.

18481263세로 귀양이 풀려 돌아왔다. 1851년 영의정이었던 친구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어 북청에 유배되었다가 2년만에 풀려난다. 그는 더 이상 벼슬을 하지않고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기거하면서 봉은사를 오가며 여생을 보내다가 185671세로 죽었다.

그의 화풍은 소식으로부터 이어지는 시, , 화 일치의 문인화풍을 존중하였다. ‘문자향과 서권기가 있는 연후에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쓴다고 하여 기법보다는 심의를 중시하였는데, “不二禪圖는 그의 이러한 서화관을 잘 보여준다. “墨蘭(不作蘭)”이란 시에 不作蘭花二十年 偶然寫出性中天 閉門覓覓尋尋處 此處是維摩不二禪(난화를 안 그린지 아마 스무해 / 무심코 그련 본 건 천성 때문인가 / 문을 닫고 깊이깊이 찾아드는 예가 유마의 불이선일세)’라 하였다. 글씨나 그림이나 법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도에 이르면 자연히 우러나온다고 하였는데 이런 생각은 양반 중심의 사고를 낳아 이후 그의 영향이 거의 절대적이었던 서화계에 보수화의 물결을 일으켜 놓았다. 이러한 그의 예술은 조희룡, 허유, 이하응, 전기, 권돈인 등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조선 후기 예원을 풍미하였다.

현재 전하고 있는 그의 그림은 제주도 유배시 그린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라는 歲寒圖”(국보 제180)모질도”, “不二禪圖등이 있다.

전각이 단순한 印信의 의미를 넘어서 예술의 한 분야로 등장한 것은 명나라 중기였다. 청나라의 비파서도가 낳은 등석여에 이르러 크게 면목을 새롭게 하였는데, 그는 등석여의 전각에 접할 수가 있었고, 그밖에 여러 학자들로부터 인각을 새겨 받음으로써 청나라의 전각풍에 두루 통달하였다. 그의 전각 수준은 청나라와 어깨를 겨누었다. 그의 별호가 많은 만큼 전각을 많이 새겨 서화의 낙관에 쓰고 있었는데, 추사체가 확립되어 감에 따라 독특한 자각풍인 추사각풍을 이룩하여, 졸박청수한 특징을 드러내었다.

그의 문학작품은. 편지형식을 빌린 것이 많은데, 이들은 수필과 평론의 양식에 속한다. 그의 문집은 대부분이 편지글이라고 할만큼 평생동안 편지를 많이 썼고, 그를 통해서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였다. 한글 편지도 많이 썼는데, 현재까지 발굴된 그의 친필 언간이 39통에 이른다. 제주도 귀양살이 중에 부인과 며느리에게 쓴 것이 많다. 그 결과 그는 단순한 예술가, 학자가 아니라 시대의 전환기를 산 지식인으로서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왕조의 구문화체제로부터 신문화의 전개를 가능하게 한 선각자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는 문물과 사람을 지나치게 숭상하게 되었다. 그는 조선을 답답하고 촌스러운 나라로 여기며 끊임없이 연경의 화려한 문물을 그리워하였다. 추사가 실학파적인 측면이 있었음에도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었던 것은 그의 가문이 노론에 속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자기가 처한 현실에 기반하여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주체성 없이 선진문물을 숭앙하는 이런 면도 작용했던 듯하다.

그는 불교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예산의 저택 근처에 화암사라는 가족의 원찰을 두고 어려서부터 당대의 고승들과도 친교를 맺고 있었다. 특히 초의선사와 친교가 깊었으며, 많은 불경을 섭렵하여 백파선사(1767~1852)와 서간으로 논쟁을 벌였고, 조사선에 대해 비판을 가할 정도로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다.

추사의 유물은 생전에 지니던 인장과 벼루 등과 편지와 서첩, 이한철이 1857년에 그린 추사영정을 일괄하여 보물 제547호로 지정하였는데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추사의 한글 편지

추사 한글 편지전시(2004525~627일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40(원본 32통 사본 8)이 전시되었다. 30대부터 50대까지 20년에 걸친 이 편지들의 발신지는 서울·대구·평양·제주 등 다양한다.

옛 한글 편지를 연구해 온 건국대 김일근 명예교수의 멱남서당소장품이 대부분이다.

한글 편지는 대부분 아내에게 쓴 편지다. 구어체의 현장감 있는 표현인 한글편지에는 자잘한 욕심과 결점, 희로애락을 그대로 드러내는 솔직한 남자의 모습이 드러난다. 종손으로서 제사와 혼사 등 집안 대소사를 깐깐하게 챙기고, 음식 투정을 부리는가 하면 유배지에서의 애환을 그대로 드러낸다.

편지 속 30대 초반의 추사는 생기와 애교가 넘치는 남자. “暑物(여름과일)이 한창때이오니 부디 참외 같은 것 많이 잡수시게”(181864). “내행(內行)이 곧 올 것이라(당신이 오시시라) 생각되는데 어떻게 차려 오십니까. 어란 많이 얻어 가지고 오십시오. 웃어봅니다”(1818926). 평양 기생 죽향이와의 염문에 대해서는 딱 잡아뗀다. “나는 일양이오며(잘 있고) 집은 여도 잇고 잇사오니 임자만 하여도 다른 의심하실듯 하오나다 거짓 말이오니 고지 듣지 마십시오”(18291126).

양자를 들이고는 ‘60이 돼서야 부모 소리를 들었다고 기뻐하고 며느리에겐 무엇보다 제사를 잘 모셔야 한다고 강조하고 손자가 태어나자 이름을 지어 보내기도 한다.

추사는 먹는 것, 입는 것에 대해 매우 까다로웠다. 당시에는 서울에서 제주까지 빠르면 두 달, 늦으면 일곱 달이나 걸렸던 것으로 편지에 나오는데도 부인에게 밑반찬 일체를 보내게 했다. 김치 보내라는 아우성에, 음식이 변질됐다고 불평하고, 소금을 넉넉히 친 김치를 보내면 너무 짜다고 잔소리다. “인절미는 모두 썩어 버렸습니다외 쟝과(장아찌)는 괜찮고 무우 쟝과는 또 변미하였습니다. 젓 무는 조금 쉬었으나 먹을 수 있겠습니다”(1841420). “민어를 연하고 무롬한 것으로 가려서 사 보내게 하십시오. 나려온 것은 살이 셔여 먹을 길이 업습니다. 겨자는 맛난 것 있을 것이니 넉넉히 얻어 보내십시요”(1841622).

추사의 편지들은 한글이라 해도 고어투성이에 자유분방한 흘림체로 적혀 있다.





 


봉은사(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수도산)金正喜가 말년에 당대의 선지식 대접을 받으며 이곳에 머물렀다. 大雄殿板殿의 편액은 추사의 글씨이다. 판전의 편액은 기교를 전혀 부리지 않고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무기교의 澁筆인데 이 편액에는 七十一果 病中作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추사가 숨을 거둔 것은 71세 때인 18561010. 이것으로 보아 봉은사에 남아있는 이 글씨는 추사의 마지막 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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