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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금강계단과 붓다의 사리

추연욱 2015. 1. 12. 21:25

 

 

 

통도사 금강계단과 붓다의 사리

 

■ 통도사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계곡을 따라 길게 펼쳐져 있다.

동쪽 곧 천왕문에서부터 下爐殿, 中爐殿, 이어 절의 중심이 되는 上爐殿으로 이어진다.

이 세 구역은 각각 낮은 축대를 경계로 독립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도 절 전체가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로전은 통도사의 가장 핵심인 금강계단과 대웅전이 있고,

대웅전을 ㄷ자로 둘러싸고 명부전, 나한전, 삼성각, 일로향각 등 건물이 있다.

 

* 금강계단(대웅전과 함께 국보 제290호)은 신라 선덕여왕 15년(646)에 통도사 창건과 함께 금강계단도 축조되었다. 

 

 

 

 

통도사 금강계단

 

 

 

통도사는 계율을 근본으로 하는 절이다. 이런 정신은 창건주인 자장율사에 의해 확립되었다.

자장율사는 당나라 유학 시절 종남산에서 3년을 지냈다. 종남산에 있는 지상사는 중국 화엄종의 초조 杜順(557~640)이 있었고,

풍덕사에는 계율종의 한 종파인 남산종을 연 道宣律師(596~667)가 있었다.

자장율사는 종남산에 머무는 동안 이들 중국 고승들과 교유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자장이 귀국한 후 <화엄경>과 <보살본계>를 강의한 사실로 알 수 있다.

 

자장율사는 귀국 후 대국통이란 최고 승직에 오른다.

대국통은 전 교단의 모든 기강과 규범을 세우고 승단의 제반사를 주관하고 통제하는 국민적 지도자였다.

이무렵 신라는 제도를 정비하고 율령적 질서를 지향하던 때인 만큼 계율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있었다.

자장율사는 이때부터 신라 불교의 체제 정비작업을 한다. 신라에는 이미 승단이 방대해져 이를 유지하기 위한 계율이 필요했고, 계율에 대한 충분한 이해도 있었다.

또한 이 시대 불교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불교의 계율사상도 승려의 청정행과 승단유지에 필요한 규범을 지킨다는 불교 내부만이 아니라 신라인의 국민정신을 계도했다.

 

자장율사는 부처님이 상주하는 기사굴산과 닮은 산을 삽량주(양산)에서 찾아 영취산이라 이름짓고 붓다의 사리를 봉안하여 신라에 그 불신이 상주하는 영취산이 있음을 표방한다.

여기에는 선덕여왕을 현세 보살로 받들어 그 왕권을 불교적 입장에서 공인받게 하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강계단은 영축산 상봉에서 작은 봉우리들이 남쪽으로 흘러오다가 머무는 곳에 있다.

그러므로 그 입지가 당연히 최고의 명당자리이다. 그래서 “천신이 옹호하는 곳으로 三災(물, 바람, 불의 재앙)가 들지 않으며 만대 불멸의 땅”이라 하였다.

자장율사는 이곳에 살고있던 아홉 용을 설법으로 내보내고 금강계단을 쌓았다.

아홉 용 중 이곳에 머물러 불법을 지키겠다는 서원을 세운 용 한 마리는 이곳에 살도록 허락하여,

지금 구룡신지라는 연못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구룡신지

 

 

 

 

계단은 수계의식을 행하는 곳이다.

대개 계단은 수계의식이 있을 때 흙으로 높이 단을 쌓고 의식을 행한 후 허물어버린다.

자장율사는 여기에 돌로 견고한 계단을 쌓아 영구성을 도모했다. 그래서 금강계단이라 했다. 금강계단의 ‘金剛’이란 말은 <금강반야바라밀경>에 “금 가운데 가장 굳세므로 금강이라 이름한다” 했으며 <열반경>에는 “어느 것이든 금강을 깨뜨릴 물건은 없지만 금강은 일체의 것을 다 깨뜨릴 수 있다”고 했다. 모든 번뇌와 망상을 깨뜨리는 지혜는 계 · 정 · 혜의 삼학으로 이룰 수 있다. 삼학 가운데 으뜸은 계다. 그러나 계는 그릇처럼 잘못 다루면 깨지기 쉽다. 그러므로 그릇을 금강과 같이 굳게 보존해야 한다.

그래서 금강삼매로 이루어진 붓다의 사리를 봉안한 금강계단 앞에서 계를 굳게 지키겠다고 서원한다.

이로 인해 통도사는 신라 불교의 계율의 근본도량이 된 것이다.

 

금강계단의 창건 당시의 모습은 <삼국유사 3권, 탑상 前後所將사리> 조에,

“통도사 계단에는 두 층이 있는데, 윗층 가운데에는 돌 뚜껑을 덮어서 마치 가마솥을 엎어놓은 것과 같았다.”라는 기록이 있지만 설명이 간략해서 구체적인 모습은 알기 어렵다.

 

 

금강계단의 현재의 모습은 이렇다.

이곳은 대웅전 북쪽으로 넓은 마당에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지대석을 깔아 만든 정사각형의 이중기단 위 중앙에 앙련과 복련으로 만든 대좌를 놓고 그 위에 석종형 부도를 모셨다.

울타리는 한 변의 길이가 13.7m, 하층기단은 한 변의 길이가 약 9.8m, 높이가 0.82m, 상층기단의 한 변은 길이가 7m, 높이 0.4m이다. 부도 대좌의 지름은 약 1.5m, 높이도 1.5m쯤 된다.

 

울타리 밖 정면 양쪽에 신장상이 새겨진 석물, 가운데에는 석등과 간주석이 놓여있다. 금강계단 정면의 석문에 신장상이 새겨져 있다.

하층기단의 네 모서리에는 각각 높이 1.12m, 폭 0.43m쯤 되는 사천왕상이 있고 면석에는 여래좌상, 천부좌상이 새겨져 있다. 상층기단 면석에는 비천상이 새겨져 있다. 부도의 몸통에 비천상이 새겨져 있다.

 

이 조각들은 대체로 표정이 굳어있고, 비례도 맞지 않아 예술성은 말하기 어렵다. 창건 당시의 모습도 아니다.

 

창건 이래 여러 차례 중수했다.

고려 우왕 3년(1337) 月松大師가 중수했다.

선조 36년(1603) 계단을 다시 복구했다.

효종 3년(1652)에 淨人이 중수했다.

숙종 31년(1705) 桂坡대사가 중수했다.

 

숙종 31년의 중수는 대대적인 중수로 본디 모습을 어느 정도 회복하는 것이었다.

敏悟란 사람이 지은 <康熙乙酉重修記>에 따르면, “상하 3단으로 된 계단 주변에 각각 40척, 그 가운데 석함을 두고 그 안에 석상을 놓고 그 위에 내외 함으로 된 세 개의 함을 늘어놓았는데, 한 함에는 3색 사리 4매를 봉안하였으며, 한 함에는 정골 수십 조각을 봉안하였으며 비라금점가사와 패옆경은 정골과 함께 보관한 후 덮개돌로 덮고 그 위에 연화석을 놓고 석종을 올려놓았으며, 사방과 네 귀퉁이에 팔부중을 줄지워 새겼다”고 하였다.

또 “금점비라가사는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고 하였다.

 

이때 모습은 지금의 모습과 대체로 비슷하다.

 

영조 19년(1743), 순조 23년(1823)에 중수한 기록이 있다.

그러다가 1911년 일본 기술로 축대를 쌓고 문비를 만들어 세웠다.

 

 

통도사 계단의 사리

① <삼국유사 3권, 탑상 前後所將사리> 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자장율사는 “부처의 머리뼈와 어금니와 사리 l00알, 부처가 입던 붉은 비단에 금색 점이 있는 가사[緋羅金點袈裟] 1벌을 가지고 왔는데, 사리를 셋으로 나누어,

하나는 황룡사 탑에 두고,

하나는 울산에 있는 大和寺 탑에 두고,

하나는 가사와 함께 통도사 계단에 두었으나,

그 나머지는 어디에 있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사리는 이미 신라 전역에 퍼져 있었다.

정선에 있는 정암사 수마노탑, 영월의 법흥사,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 설악산 봉정암 등지에 봉안되었다는 전설에 따라 통도사와 함께 오대 적멸보궁으로 확정되었다.

 

② “옛날 본조(고려)에서 전후로 두 안렴사(고려 때의 지방 장관)가 와서 계단에 예를 하고 돌뚜껑을 들고 들여다보니,

첫 번에는 긴 구렁이가 돌함 속에 있는 것을 보았고,

다음 번에는 큰 두꺼비가 돌 속에 쪼그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후부터는 그 돌 뚜껑을 감히 열어보지 못했다.”

 

③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려 高宗 25년(1235) 왕의 명을 받은 상장군 金利生 등이 몽골 군을 막기 위해 경상도 지방으로 와 군사들을 지휘할 때 통도사 계단의 돌을 들고 사리를 친견했다.

군사를 시켜 돌을 드니 그 속에 작은 석함이 있고, 함 속에 유리통이 들어있고 통 속에는 사리가 겨우 4알뿐이었다. 유리통이 조금 상한 곳이 있어 마침 가지고 있던 수정함에 넣고 그 사실을 기록해 두었다고 한다.

 

사리가 4알밖에 없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붙였다.

 

“古記에는 사리 100개를 세 곳으로 나누어 간수했다 하는데 이제 다만 4개뿐이라 한다. 이미 숨겨졌다 나타났다가 함이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니 수가 많고 적음은 괴이히 여길 것이 없다.”

“인연의 유무에 따라 사리가 나타나기도 하고 나타나지 않기도 하고 밝게 빛나면서 수정통 가운데 붙어 나오지 아니하며 혹은 절반만 있고, 절반은 없으며 혹은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며 때로는 순 금색이거나 또는 순 옥색이며 절반은 금이며 절반은 옥이며 그 크고 작음과 숨고 나타남이 같지 아니한 것이요…….”

 

④ 몽골에 항복한 뒤인 1264년 몽골 왕실의 사신들이 끊임없이 와서 사리를 친견하였다.

그래서 이들이 머무는 전각을 지어 皇華閣이라 했다.

 

⑤ 목은 이색의 <梁州通度寺釋迦如來舍利之記>에 따르면 고려 말 우왕 3년(1377) 4월 왜구가 와서 사리를 약탈해 가려 하므로 당시 주지인 월송대사가 이를 짊어지고 산속으로 달아나 겨우 화를 면했다.

그러나 그 안전을 보장할 수 없어 개경으로 이안하였다. 월송이 모셔온 것은 석가여래 정골 하나, 사리 넷, 비라금점가사 하나, 보리수 잎 약간이었다. 그러자 재상 이득분이 주선하여 왕실의 원찰인 개성 송림사에 봉안하였다. 이때 사리가 무수히 분신하는 기적을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전국의 단월(진리나 재물을 나누어 주는 사람)들이 귀천과 智愚를 막론하고 사리의 분신을 얻기를 기도하여 마침내 이득분이 3매, 영창군이 3매, 尹侍中이 15매, 회성공 황상의 부인 조씨가 30여 매, 천마산의 여러 납자(승려)가 3매, 성거산의 여러 납자가 4매, 황회성이 가까스로 1매를 얻었다. 마침 월송대사가 나와서 단월들에게 사리를 얻어갔는데. 그것은 다 알지 못한다…….”

 

⑥ <태조실록>, 제9권, 태종 5년 병자 2월조에,

태조가 송림사로 사람을 보내 가지고 오게 해서 정릉(태조의 壽陵)의 원찰인 흥천사의 석탑에 봉안한다.

 

⑦ <세종실록> 세종 원년(1419) 조에 명나라에서 칙사로 온 황엄이란 자가 사리를 요구한다.

 태종은 전국의 사리 558알을 모아 황엄에게 준다. 이때 흥천사에 모셔져 있던 통도사 사리도 모두 황엄의 손으로 들어가 중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여기에는 태종이 맏아들인 세자 양녕대군을 폐하고 셋째 아들 충녕대군(세종)에게 전위함으로써 명나라에서 시비할까 걱정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전위에 대한 시비는 없고 사리만 요구하니 오히려 감격하여 기대 이상의 사리를 준다. 또 여기에는 배불정책을 과시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통도사 금강계단에는 여전히 불사리가 모셔져 있다.

 

⑧ 통도사에 있는 <裟婆敎主釋迦如來靈骨浮圖碑>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조일전쟁이 일어나자 왜병들이 사리탑을 파괴하고 사리를 훔쳐갔는데, 동래의 白玉居士(또는 玉白居士)란 사람이 왜병의 진에 포로가 되어 있었는데, 이이가 사리를 찾아 가지고 도망쳐왔다.

 

그로부터 11년 뒤인 선조 36년(1603)에 사명당이 사리를 크고 작은 두 개의 함에 나누어 넣고 금강산에 계신 스승 서산대사에게 보낸다. 그러자 서산대사는 책망한다.

 

“어찌 영남만이 왜적의 핍박을 받겠는가. 이 금강산도 아울러 동해에 있으니 안전한 곳이 되지 못하니라. 다만 축서산(통도사)은 문수보살이 부촉한 곳이지만 불행히 如法하지 못한 자가 있으나, 왜구들의 마음을 관하니 그들이 얻으려는 것은 金珠요, 신보가 아니니 곧 구허를 수리하여 봉안하라.”고 하면서 함 한 개는 다시 돌려보내고 다른 함은 묘향산에 봉안하게 했다.

 

그리하여 금강계단에 다시 모신다.

이때 그의 제자 靑振이 사리 한 알을 달성 비슬산 용연사로 모셔 통도사 금강계단을 본떠 소규모 계단을 만들고 석종형 석가여래 부도탑을 세웠다.

 

 

용연사 석가세존 사리탑

 

 

 

그러므로 지금 통도사에는 사리가 3알만 있다. 계산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그것도 알 수 없는 일이다.

 

 

* 大雄殿(금강계단과 함께 국보 제290호)은 신라 선덕여왕 15년(646)때 처음 지어진 후 여러 차례 중건 중수를 거듭했다. 조일전쟁 때 완전히 불타버렸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인조 19년(1641)부터 인조 22년 사이에 友雲대사가 중건한 것이다.

 

처음 지었을 때의 모습은 알 수 없지만 기단은 창건 당시의 것이다.

기단은 지대석을 놓고 모서리기둥과 버팀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연꽃을 조각한 면석을 끼워넣었다.

다시 그 윗면에는 덮개돌을 놓았다.

 

대웅전은 남쪽면이 3칸, 동쪽면이 5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집이다.

다른 전각과는 달리 정면의 너비가 측면보다 좁은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대웅전의 동쪽에는 대웅전, 서쪽에는 大方廣殿, 남쪽에는 금강계단, 북쪽에는 寂滅寶宮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석가세존은 모셨으니, 대웅전, 진리의 몸인 법신 비로자나불이 상주하는 곳이니 대방광전, 영원히 깨어지지 않는 금강과 같은 계율을 지킨다는 뜻에서 금강계단, 붓다의 진신사리를 모셨으니 적멸보궁이다.

 

 

대웅전 편액

 

 

대웅전은 팔작지붕집이면서도 여느 팔작지붕집과는 달리 지붕의 북쪽을 제외한 3면에 합각면이 생겨 전체 모양은 T자이다.

조선시대 왕릉 앞에 제사지내는 집인 丁자각과 같은 모습이다.

 

금강계단은 당시 능묘로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은 금강계단을 참배하는 공간이므로 붓다의 사리를 모신 능묘인 금강계단 앞에 지은 정자각인 것이다.

내부 구조도 대체로 정자각과 같다. 대웅전 안에 불상을 모시지 않고 문 밖으로 붓다의 능묘인 탑신만 보이게 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상숭배를 중시하는 조선시대, 통도사는 붓다의 능묘를 모시고 있는 법장자의 자격으로 불지종가의 지위를 지켜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 지붕 위에 지름 70cm 되는 청동보주를 올리고, 또 그 위에 높이 30cm쯤 되는 찰주대를 세워 능묘에 제사지내는 집만이 아니라 부처님이 계신 절집임을 표시하였다.

 

 

통도사 대웅전은 건물이 커서 정자각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장릉(단종대왕 릉)의 정자각은 정자각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 금강계단 앞에 있는 일로향각은 상노전을 관리하기 위해 마련된 건물이다.

조선 영조 33년(1737)에 처음 지었고, 그후 여러 차례 중수했다. 1968년 중창하였다.

 

중창 전의 건물에는 향나무를 쌓아두는 창고가 딸려 있었다.

옛날 摩旨(부처님께 올리는 밥)를 지을 때 향나무를 태워 밥을 지었기 때문에 향나무를 쌓아두는 창고가 필요했다.

사명대사가 향적전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향적전이 향나무를 쌓아두는 창고였을 것이다.

 

향적전이라고도 하는 노전은 상노전에서 법당을 관리하고, 부처님께 향불을 올리는 스님이 거처하는 집이다.

보통 4~5명의 승려들이 거주하면서 제반 법요를 주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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