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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불심길 선암사, 송광사

추연욱 2014. 3. 28. 13:18

 

 

 

 

천년불심길 선암사, 송광사 

 

 

■ 선암사는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에 있다.

태고종의 총본산이다. 일제의 한국 불교 말살정책으로 대처승이 급증했다. 1954년 이승만정부는 ‘대처승은 절에서 물러가라’는 불교정화유시를 내린다. 비구승과 대처승의 다툼이 심해지자 정부는 1962년 비구와 대처를 통합한다는 형식으로 조계종을 새롭게 출범시켰다.

이에따라 대부분의 전통 사찰에서는 대처승들이 밀려나게 되자 이들이 반발하면서 우리 불교계는 비구승의 조계종과 대처승의 태고종으로 나뉘게 된다.

1970년 태고종은 태고 보우(1301~1382)를 종조로 하여 태고종을 등록하고 선암사를 태고종의 총림으로 발족시켰다.

현재는 조계종 소유의 절로 등록되어 있으나 분규사찰로 규정되어 조계종 · 태고종 어느 쪽에서도 관할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법적 재산 관리권은 순천시가 가지고 있다.

그런 까닭으로 다른 여러 절들이 불사에 열을 올려도, 선암사는 그럴 여력이 없어 다행스럽게도 전통적인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잇다. 

 

韓國佛敎太古宗19701월에 진종(박대륜)을 종정으로 하여 출범한 대한민국의 불교단체이다.

한국불교태고종은 해방 이후 대처승이 비구승과 분규하는 과정에 설립된 종교단체이다.

 

197048일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517에서 대종사振宗이 창종하였다.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太古 普愚(1301~ 1382)를 종조로,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삼는다.

宗旨는 석가세존이 자각 각여한 각행원만의 근본 정신을 봉체하고 태고 종조의 종풍을 선양하여 전법도생을 근본으로 한다.

 

1. 통일신라 말 도선국사가 호남을 비보하는 3대 사찰인 3암(광양 백계산 운암사, 영암 월출산 용암사,

조계산 선암사)의 하나로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성왕 7년(529)에 아도화상이 세운 비로암을, 통일신라 경덕왕 원년(742)에 도선이 재건했다는 설이 있다.

통일신라 말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이 있어 도선의 창건설이 더 설득력이 있다.

 

2. 고려 선종 9년(1092) 대각국사 의천이 크게 중창했다.

의천은 문종의 둘째 왕자로 출가한 뒤 천태종을 개창한다

선암사를 중창할 때는 대각암에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종이 의천에게 하사한 금란가사, 대각국사 영정, 의천의 부도로 전해오는 대각암 부도가 선암사에 전해온다.

 

3. 고려중기 산너머 송광사에서 보조국사 지눌이 불교계를 비판하여 정혜쌍수를 네세우며 불교 개혁을 부르짖고 있었다.

송광사가 사세를 떨치는 동안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것 같다.

4. 조선 선조 30년(1579) 정유재란으로 사찰이 거의 불타고 이후 조금씩 중수되었다.

 

5.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 약휴(1664~1738)에 의하여 크게 중창되었고, 교학이 융성하였다.

이후 크고 작은 화재를 만나 여러 차례 중창 불사가 있었다. 

 

6. 영조 35년(1759) 봄 화재를 당해 계특대사가 중창하였다.

화재 발생이 山强水弱의 지세 때문이라 하여 화재 예방을 위해 영조 37년(1761) 산 이름을 ‘淸凉山’, 절 이름을 ‘海泉寺’로 바꾸었다. 

 

7. 그런데도 순조 23년(1823) 다시 화재가 일어나자 해붕, 눌암, 익종 스님이 지휘하여 대대적으로 중창하여 옛 모습을 되찾았고,

산이름과 절 이름도 조계산과 선암사로 원래대로 바꾸었다. 현존하는 선암사의 건물은 대부분 이때 지은 것으로 당시에는 전각 60여동이 있었다고 한다.

 

9. 1948년 여순반란사건, 한국전쟁으로 많은 전각이 불타고 지금 20여동이 남아있다.

 

 

Ⅰ. 대웅전까지 가는길

1. 부도밭이 나온다. 부도 11기와 비석 8기가 있는데, 대부분 8각원당형이다.

그중에 화산대사 부도는 사자 네 마리가 삼층석탑을 지고 있다. 높이는 4.1m로 1928년 무렵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2. 장승 한쌍은 모두 남자상이다.

원래 이 자리에는 조형미가 빼어난 갑진년(1904) 나무장승이 있었다. 이 장승은 1907년이래 70년 동안 이 자리를 지킨 국내 최고의 나무장승이었다. 보통 나무장승은 10년 정도 지나면 썩어버리는데 이 장승은 조직이 치밀한 밤나무로 만들어 쉽게 썩지않았고, 지금은 설선당에 보관하고 있다.

 

지금의 것은 정묘년(1987)에 새로 세운 것이다. 역시 밤나무로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갑진년 나무장승을 모방했다. 몸통은 붉은색으로 칠했고, “護法善神․放生淨界”라는 글씨가 씌여있다. 호법선신 장승은 세 갈래의 수염을 동그랗게 꼬았고, 눈꼬리를 치켜 뜬 채 근엄하면서도 정겨운 얼굴을 하고 있다. 방생정계 장승은 세 갈래의 수염을 몸통까지 늘어뜨리고 있다.

 

 

 

 

3. 큰무지개다리[昇仙橋](보물 제400호)

먼저 작은무지개다리, 다음 큰무지개다리가 나온다. 두 다리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 뿐 축조 방법이나 모습은 같다.

큰무지개다리는 길이 14m, 높이 7m, 너비 3.5m로 길게 다듬은 30여개의 장대석을 연결하여 홍예석을 드리우고 홍예석 양쪽에 잡석을 쌓아 계곡 양쪽의 흙길을 연결했다. 기단부는 자연 암석을 그대로 이용하여 홍수에 쓸릴 염려가 없도록 하였다. 홍예석 중간에는 이무기돌을 돌출시켜 장식적인 효과와 재해를 막는 효과도 거두고 있다.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가 축조했고, 순조 25년(1825) 해붕스님이 중수했다. 보성 벌교의 홍예(보물 제304호)도 선암사 스님들이 축조했다고 전한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무지개다리 중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반원형의 승선교가 물에 비치면 완전한 원형을 이루며 그 안에 강선루가 있다.

 

 

 

 

승선교, 옛날 사진

 

 

 

4. 강선루 아래층은 정면 1칸, 측면 1칸이지만 2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인 팔작지붕집이다.

초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30년대에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측면 기둥 중 하나가 계곡에 담겨 있는 것이 특이하다.

 

 

 

 

 

5. 三印塘은 타원형의 못 가운데 알모양의 섬이 있다. 도선국사가 만들었다고 하지만 증명하기 어렵고 “大覺國師 重創建圖記(고려 의종 원년 1147)”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 후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단장되었다. 

삼인은 三法印(諸行無常, 諸法無我, 涅槃寂靜)을 말하고, 가운데 알 모양의 섬은 自覺自利, 긴 타원형의 못은 覺他利他를 상징한다. 계단 왼편 축대 아래 方池가 있다.

 

 

 

 6. 삼인당에서 일주문으로 오르는 모롱이에 야생 차밭이 있다.

 

선암사 건물 배치도

 

 

 

Ⅱ. 경내

1. 일주문은 용이 조각된 소맷돌이 있는 돌계단 위에, 굵은 배흘림 기둥 두개가 화려한 공포를 이고 있는 다포계 맞배지붕집이다.

일주문 안쪽에 걸린 현판에 산 이름과 절 이름을 청량산, 해천사로 바꾸었다는 사연이 적혀있다.

 

 

 

 

일주문과 종루 사이에 천왕문 · 금강문이 없다. 공간이 좁기 때문인 것 같다.

사천왕문이 없다. 조계산 주봉이 장군봉이므로 호법신인 사천왕상이 필요 없다.

 

2. 범종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이다. 

 

3. 만세루는 강당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집이다.

정면에 ‘六朝古寺’란 현판이 걸려 있다. 단청 없이 나무기둥 사이에 흰 벽을 두었다.

중국 선종의 제6조 慧能(638~713)이 조계산에 살았던 것처럼 선암사가 조계산에 위치한 인연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六祖를 六朝로 표기한 것으로 짐작된다.

글씨는 서포 김만중의 아버지 김익겸(1614~1636)이 썼다고 전한다.

 

 

 

  ※ 만세루를 돌아들면 대웅전 · 설선당 · 심검당이 있는 안마당이 대웅전 영역이다.  4. 동서 삼층석탑(보물 제395호)

두 탑은 외관상, 양식상 같다. 1986년 해체 복원 때 초층몸돌에서 사리장엄구가 나왔다.

서탑은 정방형의 지대석 위에 날렵한 기단부가 올려져 있다. 상 · 하층기단은 여러 개의 석재로 이루어졌고, 모서리기둥과 버팀기둥이 표현되어 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1매씩인데 몸돌에 모서리기둥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 층급받침은 4단이며 지붕돌 위에는 특이하게 弧形과 角形 두단으로 이루어진 몸돌받침이 있다. 대부분의 신라 석탑은 이 부분이 각형으로 한단 또는 두단이다.

지붕돌은 반전이 심하여 날카로운 인상을 주며 모서리에 풍경을 달았던 흔적이 8개씩 뚫려있다. 초층몸돌은 윗면이 아랫면보다 2cm 정도 좁고 3층몸돌 역시 윗면이 0.5cm 좁다. 이것은 탑이 높아 보이게 하는 수법이다. 상륜부는 노반만 남아있다. 높이는 4.7m이다. 

 

5. 괘불지주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괘불로 꼽히는 선암사 괘불(6.82m×12.15m)을 걸었을 것이다.

석가모니 한 분이 비단 한면에 가득차게 그린 그림으로 대웅전 후불탱화 뒤쪽 나무상자에 보관되어 있다.

1753년 제작된 이후 나라 안팎에 우환이 있을 때나 천재지변이 있을 때 또는 안전을 빌 때 내걸었다.  

 

6. 대웅전은 순조 25년(1825)에 중창했다는 기록이 있다.

정면,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집이다. 막돌을 1m 정도 쌓아올려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초석을 놓아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웠다.

 

대웅전 기둥에 주련이 없다. 개구즉착 開口卽錯 -- 입을 열면 틀리다깨달으면 말이 없다.

대웅전 어간문이 없다. 부처님처럼 깨달은 분만이 통과 할 수 있으므로 어간문이 필요가 없다.

 

"대웅전" 현판은 영안부원군 金祖淳(1764~1831)이 섰다. 글쓴 이의 이름을 두인처럼 썼다.

왕이나 할 수 있는 일을 이렇게 외람되게 하였다.

김조순은 순조대왕의 국구로 안동 김씨 세도정치를 시작한 인물이다.

내부는 층단을 이룬 우물천장이다.

 

 

 

 

 

*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독존으로 모셨다.

순조 28년(1828) 5월 龍岩 慧彦선사가 지은 글 <順天府曺溪山仙巖寺第六創建記>이 목판에 새겨져 대웅전 벽에 걸려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순조 23년(1823) 늦봄에 불이나 대웅전을 비롯한 절집 1천 1백여 칸과 불상과 불경도 모두 불타 버렸다.그러자 곧 절의 장로인 海鵬 展翎 대선사와 익종 선사, 용암 선사 등이 중심이 되어 곧 중창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5년만에 옛 모습을 능가하는 복원불사를 이루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이 석가모니불상도 이때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 대웅전 후불탱화는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불과 8대 보살, 10대 제자와 12명의 신장상을 그렸다.

영조 41년(1765)에 제작되었다. 이때 霜月 새봉(1687~1767)대사가 대웅전을 중창할 때 조성핸 것으로 보인다.

그뒤 재웅전이 불탈 때도 이 탱화만은 구한 것으로 생각된다.

가로 3.65m 세로 6.5m인 초대형 영산회상도이다. 화면 전체에 붉은색과 녹색이 대비되어 강렬한 인상을 준다.

 

7. 설선당은 외부에서는 단층으로 보이지만 내부는 중층인 口자형 건물이다.

1층은 스님들의 거처와 공양하는 곳이며, 위층은 수납공간이다.

심검당도 중앙에 조그마한 마당을 둔 口자 건물이다. 환기창에 ‘水’, ‘海’자가 투각되어 있다. 화재를 막기 위한 처방이다.  

 

※ 선암사는 화재 예방을 위해 애쓴 흔적이 많다. 예를 들면海天堂’이란 전각이 있는가 하면, 이곳에는 원래 석등이 없다.  

 

 선암사는 옛날부터 불이 잘 났다.

그래서 한때는 절 이름을 海泉寺하고도 했다.

절집 벽 군데군데 "海, 水" 등 글자를 새겼다.

군데군데 연못을 만들었다.

또 불과 관계있는 석등은 세우지 않았다.

 

 

 


 

 

8. 지장전은 정면 측면 3칸의 맞배지붕집이다. 명부의 10대왕상을 봉안했다. 응향각은 선방으로 일반인의 출입금지 구역이다.

 

9. 불조전은 정면 측면 3칸으로 과거 7불과 미래 천불의 불조신인 53불을 모셨다.

 

숙종 28년(1702)에 그린 그림으로 모두 7점의 탱화에 나누어 그렸다. 지금은 5점만 남아있다.

 

10. 팔상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집이다. 8상도를 모시고 있다. 정면 후벽에 화엄경변상도가 걸려있다. 이는 정조 4년(1780)에 가로 2.47m 세로 2.86m의 종이에 <화엄경>의 설법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우리나라에 세폭이 있는데, 송광사와 쌍계사에 있다.   11. 원통전은 정면 측면 3칸의 정방형의 몸체에 중앙 한 칸만 합각지붕을 내밀어 丁자형의 평면을 이루게 하였다.

내부는 보가 없는 무량구조이며 불단이 설치된 중앙 세 면에 벽을 두르고 문을 달아 집 속에 또 하나의 집을 지은 것 같이 보인다. 정면 어칸의 창호는 화려한 꽃창호이며 창문 아래 청판에는 계수나무 아래에서 방아 찧고 있는 달나라의 토끼와 파랑새로 장식했다.

조선 현종 원년(1660) 초창,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사 중수했으며 순조 24년(1824) 다시 중수해서 오늘에 이르렀다.

숙종 때 호암대사가 중창할 때, 중창불사를 위해 아무리 애를 써도 되지 않자 대장군봉의 배바위(배바위 곧 선암이다. 선암사라는 이름이 여기서 유래했다.) 밑으로 투신했다. 이때 코끼리를 탄 여인이 하늘에서 내려와 보자기로 대사를 받아 다시 배바위 위에 올려놓으며 “떨어지면 죽는 것인데 어찌 무모한 짓을 하는가!” 하고 사라졌다 한다. 이 여인이 관세음보살인 것을 뒤늦게 깨달은 대사는 친견한 모습대로 불상을 조성하여 丁자각 형태의 원통전을 짓고 봉안하였다 한다.

또 후사가 없던 정조는 이곳에서 100일기도를 드려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순조이다. 순조는 자신이 태어난데 대한 보답으로 ‘大福田’이라 써 주었는데 지금 원통전에 걸려있다. 후에 다시 ‘天’자와 ‘人’자를 더 써 주었는데 지금 보관하고 있다.

 

원통전 뒤에 620살정도 된 매화나무는 키 11m, 60cm 높이에서 줄기가 갈라져 사방으로 넓게 퍼졌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 선암매라 한다.

 

12. 장경각은 정면 측면 3칸의 팔작지붕집으로 각종 경전을 보관한다. 돌계단 소맷돌 에 사자와 해태가 새겨져 있다. 

※ 주경중 감독 영화 <동승>

칠전 수각에서 스님들 목욕 장면을 찍었다. 상탕은 부처님께 공양하는 찻물, 중탕은 마실물 쌀씼는 물, 하탕은 씻는 물이다.

 

 

 

 

 

※ 원통전 뒤 오른쪽 응진전 · 달마전 · 진영당 · 미타전 · 삼신각이 모여있는 응진전 영역이다

  13. 진영당은 아도화상 · 도선국사 · 대각국사 · 호암대사 등 선암사에 주석했던 스님들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 각황전 영역

14. 무우전ㄷ자형의 승방이다. 규모는 크고 형태는 소박하다.

무우전 앞 수령이 500년이 넘은 백매와 홍매가 있다.

 

15. 각황전은 단촐하지만 화려하고 날렵하다. 안에는 신라말 도선국사(827~898) 당시에 조성했다는 철불좌상이 있다.

 

※ 그 밖에도,

16. 창파당은 종무소와 강원으로 쓰고있다. 口자형 건물로 현대적 건축자재를 많이 썼고, 외벽도 유리창으로 마감했다.

 

17. 뒷간(解憂所)은 국내 최대 규모의 전통 해우소이다.

남녀 각각 8명이 한꺼번에 쓸 수 있다. 격실 칸막이가 목 높이밖에 안돼서 고개를 돌리면 옆 사람의 뒤통수가 보인다. 깊이는 10여m이다. 1층 바닥에도 햇빛이 들고 바람이 통하기 때문에 냄새가 나지않는다. 낙엽, 왕겨와 함께 자연 발효된 배설물은 퇴비로 쓴다. 삶과 죽음, 생명의 순환고리를 실생활에 구현한 곳이다.

아직까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해우소는 영월 보덕사, 송광사, 고산지대 바위틈을 이용한 강원도 홍천 수타사가 있다.

 

 

  

 

Ⅲ. 경내를 벗어나면

1. 넓은 차밭을 지나면 경내를 벗어난다.

2. 천불전은 무량수전이라고도 한다.

 

역시 口자형으로 교육원으로 쓰고 있다. 중앙에 마당이 있고 중층을 이루고 있다. 골격이 크고 웅장하며 이국적인 느낌이 든다.

이 건물들은 일제강점기에 증설되었다.보호함으로 호암이라 부른다는 내용도 있다. 숙종 33년(1707)에 세웠으며 귀부 · 비신 · 이수 모두 갖추고 있다. 선암사 사적비에는 아도화상이 초창했다는 것과 연혁을 상황을 상세히 적었다.

 

 3

. 고려시대 부도 3기

무우전부도(보물 제1185호)는 지대석 위에 안상이 새겨진 굄대가 놓여 하대석을 받치고 있다. 하대석에는 구름이 세밀하게 조각되었고, 중대석에는 물결무늬가 있다. 중대석과 하대석은 한 석재이다. 상대석에는 앙화가 조각되었는데 연꽃 안에 또 다른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높직한 굄돌 위에 올라선 몸돌은 위쪽이 아래쪽보다 좁은 사다리꼴이다. 각 면에는 문비와 무기를 든 신장상이 새겨져 있다. 문비의 자물쇠 부분에는 가릉빈가, 문비 아래에는 신방석도 새겼다. 지붕돌 낙수면의

경사는 매우 완만하여 지붕 면을 따라 내린 우동마루가 뚜렷하고 추녀 끝에는 귀꽃이 있다. 상륜부를 제외한 탑신부와 기단부의 비율이 1:1 정도이고 전체 높이는 3.3m이다. 무우전 부도로 불리지만 무우전과는 관계없고 누구의 부도인지 모른다.

 

선조암터 부도(보물 제1184호)는 무우전부도와 대체로 비슷하나 약간 작고 화려하다. 도선국사의 부도라하지만 믿기 어렵다. 10C경 고려 초기 것으로 보이며 전체 높이는 2.4m이다.

팔각지대석 위에 높직한 굄을 마련하여 상하 2단의 하대석을 두었다. 하단에는 사자상, 상단에는 운룡문을 새겼다. 운룡문 사이로 배수시설이 마련되었다. 굄대 위에는 안상과 꽃무늬가 장식된 고복형 중대석이 있으며 앙련 모양의 상대석은 중대석과 한 돌이다. 몸돌 각면에 우주와 창방, 전후면에 문비가 새겨져 있다. 문비 양쪽에는 인왕상이 있다. 지붕돌은 평박한 편이며 기왓골은 표현되지 않았다. 합각선의 우동마루가 뚜렷하고 추녀 끝에 큼직한 귀꽃이 있다. 상륜부는 노 · 노반 · 복발 · 보륜 · 보개가 있고 보주는 사라지고 없다.

 

대각암부도는 높이 2.5m의 팔각원당형으로 보존 상태가 좋다. 11C 후반에서 12C 초에 세워진 것으로 대각국사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단부는 지대석,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이 각기 1매씩의 석재로 되어있다.

네모난 지대석 위에 안상을 새긴 굄돌을 놓고 그 위로 구름이 장식된 하대석을 얹었으며 중대석 각 면에는 안상이, 상대석에는 활짝 핀 연꽃이 새겨져 있다. 몸돌에는 우주가 모각되었으며 앞뒤쪽 면에 문비가 조각되었다. 지붕돌 낙수면에는 우동마루가 표시되었고, 추녀 끝에는 큼직한 귀꽃, 상륜부에는 앙화․보륜․보주 등이 있다.

 

 

 

 

 

5. 대각암은 화엄종과 법상종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는 불교계를 개혁하고자 천태종을 개창한 의천이 선암사를 중창할 때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지금은 고시생들의 공부방으로 쓰고 있다.  ※ 600년 된 토종 매화나무가 있다. 홍매, 황매, 백매가 있다. 3월말부터 4월초에 핀다. 삼월 삼짇날 매화전을 만든다.     선암백매(무우전매) · 선암홍매(천연기념물 제488호)

선암백매는 칠전선원과 무우전 사이 길 한가운데 있고, 선암홍매는 무우전 돌담길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다섯 번째 나무다.

고려시대 중건한 <선암사 상량문>에 와룡송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때 소나무와 함께 백매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나이 600살이 넘고, 나무의 높이는 12m, 나무의 폭은 16m에 이른다. 현존하는 고매 중 가장 건강하고 웅장한 매화는 선암백매다. 이 선암백매는 전남대학교의 大明梅, 백양사의 古佛梅, 지실마을의 溪梅, 소록도 水楊梅와 함께 호남 5매로 꼽힌다. 

선암홍매는 모양은 백매를 닮았다. 유독 가지가 굵다. 나이는 550살쯤 된다.

 

 

 

 

선암백매 옆으로 차밭 가는 길에 자리한 담장으로 300살이 넘는 나무들이 여러 그루 있다.

대웅전 옆 계단에 있는 450살 된 매화,

선원 담장 앞의 400살 된 홍매화,

이 밖에도 350~ 500살 된 매화들이 70여 그루가 있다.

 

 

 

 

이들 토종 매화는 개량종 매화처럼 꽃잎은 많고 화려하게 달리지 않고, 작고 듬성듬성 자리하고 있지만 향기가 뛰어나고 그 도도한 기품은 개량종 매화나무와는 비교할 바가 아니다.

 

매화는 본디 중국 원산이지만 기원전에 이미 우리나라에 들어와 재배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오래 전부터 고택, 사찰, 서원 등에 관상용으로 재배되었고,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청초한 모습, 맑은 향기는 선비들이 지향했던 삶의 방식과 맞다. 퇴계는 죽음에 이르러 “저 매화에 물을 주어라”는 유언을 할 정도로 매화를 사랑했다.

 

梅화는 사군자의 한 가지로 용기와 고결을 상징하고,

蘭은 우정과 古雅를

菊은 장수를,

竹은 지조를 상징한다.

 

예로부터 매화는 五德-쾌락, 행복, 장수, 순리, 절개-을 간직하고 있다고 하였다.

 

강선루 안쪽 연못가에 전나무 3그루가 있다.

 

 

 

 

■ 송광사는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조계산(884m) 서쪽 기슭에 있다.

본디 신라말 혜련선사에 의해 창건된 길상사란 작은 절이었다. 고려 명종 27년(1197)부터 희종 원년(1205)에 이르는 시기에 보조국사 지눌이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정혜결사의 중심지로 삼음므로 큰절의 규모를 갖추게 된다.

보조국사는 절 이름을 정혜사로 바꾸고자 하였으나 가까운 곳에 정혜사가 있어 수선사로 바꾸었다. (정혜사는 순천시 서면 청소리에 있다. 경덕왕(742~764)때 창건되었고, 고려 말 원감국사 충지가 살았던 곳이다. 앞면 3칸 옆면 2칸 다포식 팔작지붕 보물 제804호 대웅전이 있다)

즉위 전부터 보조국사를 매우 존경한 희종이 길상사의 이름을 수선사로 고치도록 친히 글을 써주었다고도 한다.

고려 명종 때부터 80여동의 건물을 갖춘 대가람이었고, 보조국사 이후 2대 진각국사와, 조선 왕조가 성립된 직후 16대 고봉국사에 의해 각각 크게 중창된다. 조선 초기에 송광사로 바뀐다. 소나무가 많아 ‘솔뫼’라 불리던 송광산의 이름에서 따왔는데 송광산은 조계산으로 바뀌었다. 송광의 ‘松’을 파자하면 ‘十八公’이고 ‘廣’은 불법을 널리 펼친다는 뜻이다. 어른 열여덟 분을 배출할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름 풀이대로라면 16국사 이후 국사에 해당할 만한 큰스님 두분이 더 배출될 것이다. 16국사의 영정을 모셨던 국사전의 내벽이 18칸이다.

정유재란으로 크게 불타고 승려들이 쫓겨난다. 인적이 끊겨 폐사 지경에 이르렀던 절을 浮休大師(1543~1615)가 다시 명맥을 이었다. 이후 헌종 8년(1842)에 큰불을 만났고 그 이듬해부터 철종 7년(1856)까지 크게 중창되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파손되어 조금씩 복구 · 중창되었으며 근래에 대규모 불사가 있었다.

현재 50여동의 당우가 있다. 한국전쟁 이전까지도 그 규모가 유지되었다.

 

 

 

  ※ 보조국사 知訥(1158~1210)은 황해도 서흥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정씨, 법명은 지눌, 만년에 牧牛子라는 호를 썼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여러 가지 약을 구해 써도 병이 잘 낫지 않아 그의 부모가 부처님께 빌어 건강해지면 출가시키겠다고 맹세하였는데 병이 깨끗이 낫자 약속한 대로 8세에 출가시켰다. 8세 때인 1173년 굴산문 승려 宗暉에게 출가하였다.

일정한 스승 없이 창평(담양) 청원사, 안동 학가산 보문사 등으로 두루 옮겨 다니면서 종파에 구애됨이 없이 경전을 공부하고 수도하였다.

명종 12년(1182) 25세에 승과에 합격하였고 승려로서 출세할 기회를 잡았으나 당시 마찰을 빚던 교종과 선종의 조화와 개혁에 더 관심을 가졌다. 

곧 담양군 창평면의 淸源寺로 가서 그곳에 머물면서 <육조단경>을 탐독하였다.

그리고 개경 普濟寺에 머물면서 이때 개최된 談禪法會에 동참했던 승려들과 세속의 모든 명리를 버리고 산림에 은거하여 결사를 맺자고 약속하였다.

1185년 경상북도 의성에 있는 下柯山 普門寺에서 대장경을 읽다가 李通玄의 <화엄론>을 읽어 화엄의 요지를 파악하였다.

 

1188년 得才가 팔공산 居祖寺에 머무르면서 동지들을 모은 뒤 지눌을 청했으므로 거조사에 와 머물렀다.

그뒤 1190년 뜻을 같이 한 사람들을 모아 보제사에서 한 약속대로 定慧結社文을 반포하여 불교 결사인 정혜결사를 결성하였다. 정혜결사는 고려 후기 불교계가 밖으로는 정치와 밀착하여 순수성을 잃어버렸고, 안으로는 敎와 禪의 대립으로 혼탁해지자 기존 불교계를 반성하고자 하여 펼친 수행운동이다.

 

정혜결사가 큰 호응을 받자 정혜결사의 이론을 펴기 위해 좀더 내면의 깊이를 다지고자 하여 40세가 되던 해 제자 몇 명만 데리고 지리산 상무주암으로 옮겨 바깥 세상과 단절하고 수행에 힘썼다. 3년 후 은둔 생활에서 벗어나 대중과 함께 호흡할 곳을 찾아 조계산 길상사에 자리잡아 본격적인 정혜결사 운동을 벌였다. 이후 송광사는 정혜결사 운동의 본고장이며 희종의 격려에 힘입어 국가 공인을 받았다. 

53세에 설법 도중 제자의 질문을 받다가 석장을 잡고 열반에 들었다.

희종(1204~1211)은 佛日 보조국사란 시호를 내리고 국사로 추증하였다. 그리고 왕명으로 비명을 짓게 하였다. 송광사에 부도와 탑비, 국사전(국보 제56호)에 영정이 있다.

그의 제자인 眞覺 慧諶이 왕명으로 수선사 제2세 주가 되었고 이때부터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16명의 국사가 이곳을 중심으로 수선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나라 선종을 이끌어왔다.

 

지눌은 고려 초에 제기되었던 교선일치 사상을 계승하였다. 특히 현휘가 추구했던 선종을 중심으로 하여 교종을 통합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선 수행과 함께 지혜를 갖추는 定慧雙修와 頓悟漸修를 주장했다.

그는 깨달음 뒤에도 그 경지를 잃지 않도록 계속 수행해야 한다는 頓悟漸修와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아야 한다는 정혜쌍수를 주장하며 중국선의 답습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선풍을 일으켰다. 이는 교관병수로 교종을 우위로 선종을 통합한 대각국사의 사상과는 구별된다. 저서로는 <수심결>, <진심직설>, <간화결의론>, <원돈성불론>, <범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와 <권수정혜결사문>, <염불요문>이 있다. 

 

보조국사 진영/ 송광사 국사전 소장

 

 

 

송광사의 배치는 조계산 기슭에 기대 서향하고 있다. 산지의 비탈을 이용한 두 개의 큰 석축을 기준으로 위쪽이 수선영역,

가운데가 대웅보전 영역, 아래쪽 우화각에서 천왕문이 이르는 진입영역 이렇게 상 · 중 · 하  세 영역으로 나뉘며 전각 50여동이 대웅보전과 그 앞마당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듯이 모여있다.

여러 차례 중창을 거치면서 구조가 많이 바뀌었지만 변함없이 이어지는 정신이 있다. 그것은 선종에 바탕을 두고 화엄사상을 수용한 보조국사의 정혜결사의정신이다.

 

상 · 중 · 하 세 영역의 중심축이 일직선을 이루지 않고 조금씩 틀어져 있는데 이는 전체적인 틀을 따르면서도 부분적으로 자유로운 선종사찰의 한 특징이다.

선종사찰적 특징은 상단에 자리잡은 수선영역에서 드러난다. 해인사가 대웅전 뒤쪽 높은 곳에 경판전을 둔 것, 통도사가 대웅전 뒤쪽에 금강계단을 모신 것과 같은 맥락이다. 화엄사상을 수용한 면도 있다. 비가 와도 경내에서는 옷을 적시지 않고 다닐 수 있다는 이야기는 건물이 많아서 뿐만아니라 건물들이 <화엄일승법계도>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직선상의 진입과정에 따라 건물이 놓인 것이 아니라 대웅보전 영역을 기준으로 사방으로 확산되어 가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또 송광사에는 탑이 없고, 탑에 대한 기록도 없다. 탑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탑의 상징적 의미가 퇴색되고 금당 중심의 사찰로 변화되는 선종 초기 가람 배치 양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1. 진입영역

내를 가로지르는 누다리를 건너면 淸凉閣이란 정자가 나오고, 이어 측백나무숲을 지나면 비림이 있다.

송광사 역대 고승들과 공덕비를 모았다.

 

일주문은 조선 후기의 건물로 ‘대승선종조계산송광사’와 ‘승보종찰조계총림’이란 현판이 있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滌珠閣洗月閣이 있다. 죽은 사람의 위폐가 사찰에 들어오기 전에 세월의 때를 씼는 곳이다. 척주각은 남자, 세월각은 여자의 것이다.

 

 

 

 

옆에 높이 15m의 고사목은 보조국사가 꽂은 향나무 지팡이라 한다.

보조국사가 송광사를 다시 찾을 때 살아난다는 전설이 있다.

 

일주문 왼쪽 凌虛橋라는 무지개다리 위에 놓인 우화각을 지나 계류를 건너야 한다. 능허교 안쪽에는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이무기돌이 박혀있다. 장식적인 효과 뿐만아니라 재해를 막아주는 주술적인 기능도 있다.

 

우화각은 앞면 1칸 옆면 4칸짜리 문루로 숙종 26년(1700)무렵 세운 것이다. 영조 50년(1774)에 중수된 기록이 있다. 입구쪽은 팔작지붕이고 천왕문 쪽으로 이어지는 부분은 맞배지붕이다.

 

 

 

 

 

 

 

우화각/ 옛날 사진

 

 

 

臨鏡堂은 계류에 두발을 담그고 있는 口자형 건물로 지금은 종무소이다. 枕溪樓(사자루)는 앞면 7칸 옆면 4칸의 누각으로 스님들의 학습공간이다.

 

천왕문은 앞면 옆면 각각 3칸으로 광해군 원년(1609)에 초창되어 숙종 44년(1718)에 중수되었다.

사천왕상은 순조 6년(1806)에 채색되었다.

 

2. 종고루에서 대웅보전까지의 중심영역

종고루 아래로 난 계단을 지나 대웅보전 앞마당으로 간다. 종고루는 옛 해탈문이 있던 자리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중층 누각으로 1962년에 재건되었다. 2층에는 범종 · 운판 · 목어 · 법고가 있다.

 

약사전(보물 제302호)은 사면 모두 1칸씩 정방형의 팔작지붕으로, 현존하는 우리나라 법당 중 가장 작다.

건물의 규모에 비하면 기둥이나 평방과 같은 부재들은 굵직한 재목을 사용하였다. 내부 천장이 대들보 없이 공포와 도리만으로 되어있다. 1974년 중수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영조 27년(1751)에 중건되었다. 약사여래와 후불탱화가 있다.

 

영산전(보물 제303호)은 영조 13년(1737)에 중건된 앞면 3칸 옆면 2칸짜리 팔작지붕으로 내부는 기둥과 보가 없는 통칸이다.

영산회상도는 영조 원년(1725)에 의겸 등이 만든 불화로 진경시대의 화풍을 드러내고 있다. 나머지 세 벽에는 팔상도가 있는데 건축물과 풍경은 조선의 모습이며 인물이나 복식도 조선시대의 특색을 반영하고 있다.

 

순천 송광사 영산회상도 1폭과  팔상도 8폭을 국가지정 문화유산 국보로 지정했다. 송광사 영산전에 봉안하기 위해 일괄 제작되었다. 2003년 보무로 지정되었다가 2024년 2월 27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현재 송광사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지장전은 원래 명부전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을 1988년 중창때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앞면 3칸 옆면 3칸짜리 맞배지붕으로 증축하였다.

 

대웅보전은 1988년에 지은 앞면 7칸 옆면 5칸, 넓이 108평의 건물로 평면은 亞자형이다. 안에는 연등불, 석가모니불, 미륵불, 문수․보현․관음․지장보살이 있다.

 

뒤쪽에 앞면 5칸 옆면 3칸의 맞배지붕집 응향각이 있고 왼쪽에 관음전이 있다.

관음전은 원래 조선시대 왕실의 원당이었던 聖壽閣이었다. 현재의 관음전은 1902년 고종의 원당으로 지어진 건물로 1957년 이 자리로 옮겨왔다. 소맷돌을 장식한 돌사자 조각, 내부를 장식한 민화풍의 벽화, 천장에 조각된 물고기․게․거북 등이 있다.

 

관음전 뒤에 있는 보조국사부도는 고려말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높이 2.5m이다.

높직한 장방형 기단 위에 둥근 몸돌을 얹고 간략한 지붕돌을 올렸다.

옆에는 위창 오세창(1864~1953)이 쓴 ‘佛日普照國師甘露塔之碑’가 있다.

 

 

 

 

승보전은 앞면 옆면 각각 3칸 팔작지붕으로 중창 이전에 대웅전으로 사용되던 건물을 1961년 현재 자리로 옮겨 지은 것이다.

석가여래와 십대제자, 비구 1,250분을 모시고 있다.

처마 밑에 있는 비사리구시는 행사가 있을 때 썼던 나무밥통이다. 1724년 남원 송동면 세전골의 씨리나무로 만든 것으로 일곱 가마 분량의 밥을 담을 수 있다고 한다.

 

승보전 뒤에 효봉스님(1888~1966)의 부도가 있는 효봉영각이 있다. 부도는 아쇼카왕의 석주를 모방하여 1968년에 세웠다.

이 길로 불일암으로 간다.

성보각은 1997년 개관한 유물전시각으로 목조삼존불상 등이 있다.

 

* 목각 삼존불감(국보 제42호)은 보조국사가 허리춤에 차고 다니던, 나무로 만든 안경집 같이 생긴 통이다.

닫았을 때의 지름이 6.9cm, 원통의 높이 13.9cm이다. 열어 펼치면 한가운데 반원통의 본존불이 조각되어 있고, 양옆으로 두 쪽으로 반원을 이루도록, 마치 문을 열고 닫는 것처럼 삼각형으로 만들었다.

가운데 본존불 양옆으로 네 부처가 시립해있고, 앞에는 보상화 위로 두 보살이 의자에 앉아 본존불께 무엇인가를 공양하고 있다. 본존불의 등뒤에는 큼직한 신광이 새겨져 있다. 본존불은 전실 안의 상현좌 위에 결가부좌한 자세로 앉아있고, 전실의 앞쪽으로는 커텐이 걷어올려져 있다.

오른쪽과 왼쪽의 불감은 좌우 대칭으로 부처를 새겼는데, 사자의 등위에 대좌를 만들고, 대좌 위에 부처가 앉아있으며, 부처의 양옆으로 협시보살이 시립해 있다.

광배는 본존불과 흡사하나 머리에 보관을 쓴 것과 목에 목걸이를 하여 가슴까지 늘어뜨린 점은 본존불이 가사를 반쯤 걸치고 있는 모습과 대조가 된다.

감실의 앞쪽으로 장막을 드리웠고, 장막 위로 하늘을 나는 비천상 셋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불상에서 풍기는 인상이 이국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 木彫三尊佛龕은, 정교한 목조 불감이 한국에서는 좀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과 조각이 화려하다는 점을 들어 이 불감이 중국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학계에서는 보고있다.

1. 재질이 한국에서는 거의 찾기 힘든 白檀이고, 불감에 새겨져 있는 인물상의 배치 등으로 볼 때 唐대 중국의 山西省에서 만들어져 우리나라에 반입된 것이 분명하다.

2. 양식적 측면에서 볼 때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배치한 挾侍보살은 한국에서는 흔히 석가여래의 좌측에 문수보살, 우측에는 보현보살을 배치하지만 이 불감에서는 좌우가 바뀌어 있다. 이같은 양식은 중국의 산시성에서 흔히 발견되며 우리나라에서는 기록조차 찾기 힘들다. 문수, 보현보살의 위치가 바뀌는 경우는 실제 불상조성 등에서 없을 뿐만 아니라 시기적으로도 조선시대 들어서야 탱화에서나 발견되는 정도이다.

3. 일본 공고부지[金剛峰寺]에 소장하고 있는 같은 형태의 불감에는 ‘중국 당나라에서 들어왔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거의 圓形에 가까운 겉모습이 중앙아시아에서 시작해 주로 중국 산시성에서만 발견되고 있는 양식이라는 점 등이다.

 

姜友邦교수는 “불상의 옷주름이 두 줄로 나 있는 점과 조각상의 얼굴 형태 등을 두고 볼 때 이 불감이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은 분명하다”며 “불교가 전래될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뛰어나다”고 말했다.

중국에서 백단 등 나무로 원통 형태의 불감이 만들어지는 시기가 당대인 7~8세기에 몰려 있다.

 

보물 제1660호로 지정된 ‘순천 송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및 복장유물’은 송광사 관음전에 있는 목조관음보살좌상과 그 복장유물로 총 35점이다. 17세기 중엽을 대표하는 조각승 혜희와 금문의 작품이다.

조성 배경의 역사적 의미가 크고 불상 자체의 완성도가 높다. 게다가 옷가지들인 복장 유물은 당시의 직물, 염색, 민속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함께 나온 복장유물 가운데 <大方廣佛華嚴經合論> 등 중요 불교경전 8점은 보물 1661호 ‘순천 송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복장전적’으로 지정됐다. 간경도감본과 팔만대장경의 15세기 인본들로 희귀한 자료로 인정받는다.    3. 수선영역은 대웅보전 뒤편 석축 위에 조성되었다. 하사당(보물 제263호)은 조선 초기 건물로 현재 남아있는 승방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왼쪽 2칸은 툇마루가 있는 온돌방이고 오른쪽 한칸은 부엌이다. 솟을지붕은 부엌칸 지붕 위의 환기장치이다.

 

상사당(三日菴)은 조선 초기의 건물로 앞면 3칸 옆면 2칸 팔작지붕으로 조계총림 방장의 거처이다. 응진당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인조 원년(1632)에 지었다. 경종 4년(1724)년 의겸이 그린 영산화상도가 있다. 설법전은 한때 고려대장경을 봉안했던 곳이다. 1899년 해인사 고려대장경을 인쇄해 삼보사찰에 각각 하나씩 봉안하게 하였는데 통도사와 해인사는 아직도 잘 보존되고 있으나 송광사의 것은 1951년 불타버렸다. 현재의 건물은 1968년 재건된 것으로 강당으로 쓰인다. 수선사는 보조국사의 거처였는데, 1951년 화재로 불타고, 1969년 앞면 6칸 옆면 4칸으로 지은 선방이다.

 

* 국사전(국보 제56호)은 조선시대의 법당으로 나라를 빛낸 16국사들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으며, 慈蔭堂이라고도 한다.

옛날에는 참선을 하던 수선처였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일 통간 5량 맞배지붕이다. 앞은 겹처마 뒤는 홑처마이다. 건물내부 전체에 井자 천장이 가설되었는데 주심포양식의 그것과 같다. 단청은 건물 건립 당시의 것으로 생각되며, 천장의 연화문, 대들보의 용문 등 현재로는 보기 힘든 당시의 희귀한 단청문양이다. 고려말에 건립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건물의 양식으로 보아 조선 초기로 짐작되며 세종 2년(1420)에 중건되었다.

 

국사전 뒤쪽 언덕 鴟落臺는 보조국사가 절터를 물색할 때 모후산에서 나무로 깎은 새 한 마리를 날렸는데, 그 새가 날아와 이곳에 앉았다고 한다. 16국사가 이곳에서 배출되었고, 한국전쟁 때 국사전만 화를 면했다. 1995년 1월 16국사의 영정 중 13점이 도둑맞았다. 나머지 3점은 성보각으로 옮겼다.

 

楓巖影閣이란 편액이 걸린 진영각에는 조선시대 선승 풍암스님과 문하스님들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집이다.

 

 

 

   4. 화엄전영역화엄전은 보조국사의 정혜쌍수의 정신에 따라 선교통합을 연구할 때 화엄사상도 수용했다.  

안에는 영조 40년(1770)에 그린 후불탱화가 있다.

 

부속 암자로는 천자암 · 감로암 · 불일암 · 인월암 · 오도암 등이 있다.   천자암 뒤뜰에 있는 800살이 된 송광사의 곱향나무 쌍향수(천연기념물 제88호)는 서로 70cm쯤 떨어져 있다.

두 그루가 하나로 뭉쳐져 자라는 것처럼 보인다. 높이는 12.5m, 가슴 높이의 둘레가 왼쪽 것은 3.98m, 오른쪽 것은 3.2m이다. 줄기가 엿가락처럼 꼬여 마치 두 마리 용이 승천을 위해 또아리를 튼 모습이다.

보조국사가 중국 금나라의 왕자 담당을 제자로 삼고 돌아와 이곳에 머물 때 그들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둔 것이 뿌리내린 것이라 한다. 사제지간에 서로 절하는 모습이다.

 

古香樹는 일주문을 들어서면 바로 나타난다. 높이 15m로 매우 가늘다. 지눌스님이 짚고 다니던 걸을 때 되었던 지팡이는 스님이 편안하게 머물게 될 절집에 도착한 뒤 기존의 쓰임새는 수명을 다하고 이제 나무로서의 본성을 되찾는다.

 

스님의 지팡이가 자라난 나무들이 많다.

송광사 천자암의 곱향나무, 방한암 선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거꾸로 꽂아둔 것이 자라난 것이 오대산 중대 사자암의 단풍나무, 산신령이 꿈에 나타나 절터로 점지해 준 자리를 표시하게 위해 꽂아둔 지팡이가 자라났다는 충남 태안 흥주사 은행나무, 운문사 처진소나무. 원주 문막 반계리 은행나무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어떤 스님이 길을 가다가 목이 말라 우물가에서 물을 마시고 쉬다가 꽂아둔 지팡이라 하고, .

신림동 굴참나무는 강감찬 장군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 해인사 전나무는 최치원의 지팡이, 하동 범왕리의 푸조나무는 최치원이 세속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면서 꽂아둔 지팡이라 자란 것이라 한다.

 

절 북쪽 비탈에 삼나무 숲과 대나무숲이 있다.

우화각을 지나 절집 가장자리로 난 산길을 따라 오르면 나타난다.

대나무는 나무도 아니고 풀도 아니다. 한 해 동안 줄기가 자란 뒤에도 죽지 않으니 나무에 가깝지만 나이테도 없고 해를 거듭해도 더 굵어지거나 카가 커지지 않으니 풀에 가깝다.

대나무꽃은 60년 또는 120년 만에 한 번씩 핀다. 대나무의 수명은 20년이다. 이파리가 날 자리에 이파리 없이 꽃을 피운다. 꽃이 하나의 나무에서만 피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모든 나무에서 일제히 핀다. 그리고는 숲의 모든 대나무들은 나이에 관계없이 모두 말라 죽는다. 그리고 예전처럼 대나무 밭을 이루려면 10년 이상 걸리다.

그래서 예로부터 대나무꽃이 피면 불길한 것으로 여겼다. 특이하게도 부안 지방에는 풍연이 들 징조라 생각했다.

중국에는 竹醉日이라는 명절이 있다. 5월 13일이다. 대나무는 성질이 곧아 옮겨 심으면 잘 자라지 않는다. 그러나 이날만은 대나무가 술에 취한 것처럼 정신을 잃어버리는 날이어서 이사를 했는지 안했는지 모르는 채 뿌리를 잘 내린다 한다.

 

대나무 숲 건너편으로 삼나무숲이 이어진다.

일본의 특산식물인 이 나무는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절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한국전쟁의 화를 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