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가야문화유적 답사- 2014년 3월 5일
■ 구지봉(사적 제429호) 김수로왕 탄생설화의 현장이다. 거북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龜首峰이라고도 한다. 수로왕비릉이 있는 쪽이 거북의 몸이고, 서쪽으로 뻗어 구지봉이 거북의 머리에 해당한다. 일제강점기 거북의 목덜미에 해당하는 곳을 잘라 도로를 내는 바람에 끊어졌다가 근래에 육교를 만들어 이었다. 지금 수로왕비릉에서 구지봉으로 건너갈 수 있다. 구지봉에는 1907년에 세운 기념비가 있고, 구지봉 아래 <구지가>가 새겨진 비석이 있다.
|
伽倻, 駕洛, 弁韓의 '변'은 모두 가라, 갈의 음훈차자인데 가라는 '分, 岐'의 뜻이다.
마한이 남한, 진한이 동한임에 대하여, 변한은 '가라한' 또는 '가라신한[弁辰]'으로 호칭되었는데,
‘변한, 가라’ 제국은 원래 진 · 마한의 中分적 위치에 있거니와 특히 낙동강 하류 분기지대에 있음으로 이 칭호를 얻은 것이다.
낙동강 하류는 강류가 여러 갈래로 분기됨으로 歧音江[가람, 강의 고어, 가람은 이에 연원됨]의 칭이 있다.
양주동, <고가연구>, 일조각, 1970,349쪽.
'加羅'는 城邑을 뜻하는 '가라로'의 표기로 보았다.
이는 '고구려' 또는 '구려'가 성읍의 이름에 기원하는 것과 한가지다. 가야는 가라가 구개음화한 것이다.
이병선, <한국고대국명지명연구>, 형설출판사, 1982, 81쪽.
구지봉은 옛날에는 바다에 가까운 나즈막한 산이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만을 막아 간석지로 만들어 지금은 그 앞에 너른 들이 펼쳐져 있다.
옛날에는 제사를 지내는 곳, 축제를 벌이기 좋은 곳이다. 신성한 제사터이자 신나는 놀이터였을 것이다.
신석기시대나 청동기시대에는 부족장들의 묘지였을 것이다. 지금 구지봉 머리 부분에 고인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짐작할 수 있다.
고인돌 덮개돌에 한석봉이 썼다고 전하는 "구지봉석"으로 보아 조선시대 사람들이 고인돌에 대한 지식이 없어 구지봉 제단의 床石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구지봉은 뱀이 서려있는 형상이기도 하다. 뱀은 거북의 머리와 함께 남성의 성기를 상징한다.
성기신앙은 다산과 풍요를 비는 마음에서 나왔다.
따라서 이곳은 제의 장소로 알맞은 곳이다.
3월 계욕지일에 이곳에서 春耕祭나 풍어제를 지냈을 것이다.
이때 벌인 굿판은 출산에 대한 의례도 있었을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난 아이(수로)가 처음 나라를 열었다고 했다.
한 종족의 시조신, 또는 나라를 처음으로 연 왕이 하늘에서 내려 왔다는 것은, 그들이 토착민이 아니고, 이주민이라는 것이다.
그 이주민이 토착 집단을 완전히 장악할 만큼 강하지 못하기 때문에,
토착집단의 부족장[九干]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점은 하늘에서 알로 내려온 신라 시조 혁거세가 6촌장들에 의해 추대된 점과 같다.
그러나 단군신화의 환웅천왕은 알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하늘에서 신단수를 타고 수직하강한다.
환웅으로 대표되는 고아시아족은 북방 유목민이기 때문이다.
북방유목민의 신화는 시조신 또는 시조왕이 하늘에서 수직하강,
남방농경민의 신화는 알로 태어난다.
하늘에서 알로 내려오는 것은 유목민이 농경민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하고, 서로 협력하여 나라를 연다는 것을 뜻한다.
1. 천손계 신화는 하늘, 산(나무) 등 높은 곳에서 낮은 인간세계로 수직하강한다.
몽골, 브리야트, 에벵키족, 스키타이 지역의 여러 종족 등 북방 유목민의 신화로 적석묘, 석관묘와 같은 지역이다.
2. 난생신화는 알, 바가지, 상자, 배로부터 나온다.
대만의 파이완족, 인도네시아 자바족, 타이족, 인도의 문다족 등 동남아 농경민, 황하문화권으로 지석묘와 같은 지역이다.
신라왕들은 금관총, 서봉총, 천마총 등 유목민계 적석묘에,
동남아적인 난생신화의 주인공이다.
혁거세, 알지는 천손신화이면서 난생신화이다.
표암은 표주박 모양의 바위로 난생신화 계열이다.
그러므로 천손계 5인과 난생신화계 인물 하나가 초기 신라 주민 구성비이다.
첫 임금을 양산 나정에 붉은 말이 알을 놓고 간다.
탄생지가 알평의 동네인 나정이다. 난생신화 계열이다. 메신저는 백마이다.
소수의 통치자들이 다수의 주민을 거느려야 할 때 말썽이 없으려면 통치계급이 백성들의 사유세계 내지는 사상체계를 흡수해야 한다.
로마식은 사상 체계가 아래로부터 위로 상승하는 것이고, 게르만식은 그 반대이다.
우리는 새로운 사상이 들어올 때 로마식을 취한다. 주몽, 혁거세, 김수로 등이 그 예이다.
낙동강 하류 지방에 있던 변한 12국에서는 서력기원 전후한 시기 철기문화의 발달에 힘입어 새로운 연맹왕국이 출현한다.
이들이 6가야로 불리는 가야연맹이다.
6가야연맹의 중심세력은 김해에 자리잡은 금관가야(구야국 또는 본가야)였다.
그 시조 김수로왕은 서기 42년 금관가야국을 열고 왕위에 올라 다섯 가야를 통솔하여 초기 가야 연맹체를 이끌었다.
금관가야가 6가야의 주도권을 잡게 된 것은 이 지역에 鐵이 많이 생산되고,
벼농사가 잘 되었으며,
해상교통을 이용한 대외무역이 활발한 까닭이었다. 특히 일본의 규슈[九州]지방과 가까와 그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하여,
소국들을 건설하였는데, 이들은 倭라는 이름으로 가야지방에 왕래하면서 교역활동을 전개하였다.
가야연맹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금관가야는,
400년 신라의 요청을 받아 내려온 고구려 제19대 광개토호태왕(391~412 재위) 군대의 공격을 받아 큰 타격을 입었다.
이 틈에 낙동강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했던 대가야는 고령의 여러 세력을 통합하여 새로운 맹주로 떠오른다.
이때부터 금관가야가 주도권을 잡았던 전기가야와 구별하여 후기가야라 한다.
신라 제23대 법흥왕(514~540 재위) 19년(532),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제10대 구형왕 김구해(521~532 재위)가 왕비와 아들 셋과 함께 나라의 보물을 가지고 신라에 와 항복하였다.
이로써 금관가야는 42년 나라를 세워 520년 만에 망한다.
금관가야로부터 주도권을 이어받았던 대가야도,
이미 강대국으로 성장한 신라와 백제의 전쟁의 틈에 끼여 신음하다가,
낙동강 유역을 장악한 신라의 공격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신라 제24대 진흥왕 23년(562)에 망한다.
신라에 통합되었던 가야 사람들(김해 김씨) 중에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주도한 큰 공을 세운 김유신 같은 인물도 있다.
구지봉에 수로왕을 비롯한 5가야의 시조가 알로 태어나는 것을 상징하는 알 5개와,
9간을 상징하는 용 9마리가 돌에 조각되어 있었는데, 수로왕릉으로 옮겼다.
지금은 이런 이상한 돌이 서있다.
■ 고인돌
깬돌 너덧개로 가로, 세로 2.5m, 두께 0.3~0.4m쯤 되는 뚜껑돌을 받친 바둑판식 고인돌이 한 기 있다.
뚜껑돌에는 “龜旨峰石”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한석봉의 글씨라 한다.
구남문은 수로왕비릉 정문이다.
■ 수로왕비릉(사적 제74호)은 수로왕릉과 조금 떨어진 구산동에 있다.
원형봉토분으로 둘레에 아무런 장식이 없다.
조선 인조 25년(1647)에 세운 비와, 제사를 지내기 위한 몇 채의 건물들이 있다.
비에 "駕洛國首露王妃 普州太后許氏陵"이라 썼다.
■ 허황옥
|
공주가 타고 온 배의 돛과 깃발은 붉은색과 주황색이었다.
당시 가락국 사람들은 돛은 원색으로 하고, 깃발은 달지 않았다.
인도의 종파들은 자기 집단을 표시하기 위해 붉은색과 주황색 깃발을 주로 썼다고 알려져 있다.
수로왕과 허황옥이 처음 만나 하는 대화에는 상당한 지식과 교양이 어우러져 있다.
신부 허황옥은 공주에 걸맞는 품위를, 신랑 수로왕은 왕자의 위엄을 보이고 있다.
또 수로왕은 신랑으로서 궁궐에서 나가 신부를 맞이했고, 신부는 대등한 위치에서 혼례를 치른다.
이들 신혼부부는 첫날밤을 임시 궁궐에서 지냈다. 이틀밤과 하루 낮을 보내는데, 이것은 유교식 혼례의 三日于歸를 지킨 것이다.
"삼일우귀"란 신부의 집에서 혼례를 치른 뒤 신랑이 먼저 떠나고 신부는 사흘 뒤 시집으로 오는 절차를 말한다.
공주 일행이 예물로 가지고 온 물건들은 비단, 능라 같은 옷감과 금, 은, 옥 같은 보배였다.
초기 철기문화가 시작되는 후진적 농경사회인 가락국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물건들이다.
수로왕은 고구려나 신라와는 달리 토착세력과의 결혼을 거부한다.
이것은 왕위가 안정되고 지배권이 강화되었음을 뜻한다. 궁궐을 짓고 제도를 정비한 뒤에 간집단을 신하로 만들어 나갔을 것이다.
■ 허황옥은 자신을 阿踰陁國의 공주라고 소개했다.
Ayodhia는 갠지스강 상류인 Sarayu강변에 있다.
기원전 1000년경부터 기원전 5세기까지 태양왕조가 있었다.
수우리야(태양 왕조)의 군주 Manu가 마련한 이 도시는 그의 아들인 힌두교 중흥 시조 Rama 탄생지이다.
정복할 수 없는 땅이라는 뜻이다.
이땅의 주민들은 서기전 6세기 경 Khosal(Kosala)이란 왕국을 세우고 이곳을 수도로 삼았다.
성은 물고기 모양으로 설계되어 있다.
가락국 수로왕 비머리/ 가운대 태양이 보인다.
BC 317년에 일어난 마우리아 왕조(4~2C BC)가 갠지스강 중하류에 있는 파트나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 당시 16개 나라를 통일하였다.
아소카왕 때에 이르러 북으로 아프가니스탄부터 남으로 마이솔에 이르기까지 불교문화권이 된다.
서기전 186년 숭가 왕조가 새로 일어나면서 수도를 아요디아로 정한다.
코살라국에 이어 두 번째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된다.
서기전 165년 쿠산왕조라는 기마민족 연합 집단인 박트리아인이 북으로부터 침입하여 숭가왕국은 남쪽으로 이동했고,
아요디아는 2세기 동안 무정부 상태가 된다.
쿠산이 지배하게 되자 원래 이 지방을 지배하던 司祭 계급과 왕족들은 쫓겨나게 된다.
서기 78년 불교신자인 카니시카왕의 등장으로 다시 불교가 지배하게 된다. 9세기 회교도의 침략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현재는 힌두교 성지로 유명하다.
김병모 교수는 쿠산 왕조의 지배시에 쫓겨난 아요디아의 왕족, 사제 계급의 사람들은 중국의 서남쪽 보주 땅으로 이주하였다고 보았다.
그 근거로 <崇善殿誌>의 기록과 “駕洛國 首露王妃 普州太后許氏陵”이란 비문(현재의 비석은 仁祖 25년(1647년)에 세웠다)과 보주땅의 쌍어문이다.
그리고 서기전 3세기 때 아소카가 운남 지방 대리국에 왕자를 보낸 일, 보주에 허씨 집성촌이 현재에도 있는 점을 들고 있다.
태국의 도시 Ayuthya는 13세기에 생긴 도시라 하여 부정하고 있다.
* 보주는 지금 사천성 안악현 땅이다. 허황옥의 생존 기간인 1~2세기에는 後漢이었고, 蜀이라 불렀다.
▪ 보주지방에도 쌍어문이 있다.
사천지방 제기 받침, 운남성에서 발견된 한 나라 때의 벽돌(사원 건축에 쓰인 것), 무창의 구리로 만든 그릇 바닥 등에 보인다.
▸ 허황옥은 AD 32년에 태어났다.
BC 165년쯤 허황옥의 6대 또는 7대 선조들이 고향인 아요디아를 떠났을 것이다.
이들은 사라유강을 따라 하류로 흘러 내려가 갠지스강 본류를 거쳐 갠지스강을 동류하여 뱅골만으로 해서 동뱅골에 이르면,
아삼 지방에서 서남쪽으로 흘러온 Jamuna강과 만난다. 이 강의 상류는 중국 서남부인 운남성이다.
허황옥의 조상은 이 강줄기를 타고 대리국으로 이동하였을 것이다.
<後漢書>에, “광무 23년(47년) 촉 땅에서 토착민(南蠻)이 봉기하여 한나라 정부에 대항하였다.
반란군 세력이 강하여 정부는 진압군을 파견해 진압하였다. 반란의 주동자와 700명을 江夏界(오늘날의 무창 지방)로 이주시켰다.”
“50년 후 또 토착 민족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그 주모자가 한군에게 항복했는데 그 주모자 이름이 許聖이다.”
'許'는 성이 아니고 세습되는 직업 무사이다.
※ 허황옥은 첫 번째 반란이 실패했을 때 강제 이주당한 지도자급 가계의 여인으로 그들은 정착했던 양자강 중류의 무창지방을 거쳐,
양자강을 따라 상해 지방으로 간 다음 바다를 건너 김해의 가락국으로 갔다고 보았다.
허황옥이 도착한 곳은 主浦란 곳이다. 김해부 남쪽 40리 지점이라 하였다. 山外別浦津頭는 후일 별포로, 다시 주포로 승격된다.
지금 녹산면 생곡리 장각나루이다. 이곳에서 益山山城이 보인다.
■ 바지를 벗어 신령에게 예물로 바치는 행위는 한국 민속에는 없는 辟邪 행위이다. 이것은 미혼을 청산하고 결혼하려는 통과의례이다.
인도에서는 처녀들은 바지(kameei) 위에 원피스(salwal)를 입다가 성숙한 처녀가 되면 저고리(sattai)에 긴치마(pavadai)를 입는다.
바지를 벗어 신령에게 폐백을 드린 곳이 高嶠이다.
<삼국유사>에 綾峴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하였다. <대동여지도>에는 명월산 줄기라 하였는데, 지금 명월산의 위치는 알 수 없다.
■ 능 앞 작은 전각 안에 파사석탑이 있다.
파사석탑
|
|
|
파사석탑은 물론 파사석으로 만든 석탑이다.
<本草綱目, 명나라 李時珍이 1596년에 지은 책>, 石部에 “선박들이 이 돌이 나는 산 밑을 왕래할 때 그 돌을 사랑하여 더듬어 잡는다는 데서 摩裟石이라 한다.……파사석과 유사한 것이 있으니 돌을 물에 갈아 닭 벼슬의 피에 담아보아 물이 되는 것이 진짜다.……태우면 유황 냄새가 난다.”고 하였다.
이 점은 허명철이 이미 실험하여 진짜 파사석임을 증명하였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가야불교> 참고)
탑은 현재 가장 아래층은 방형으로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나머지는 그저 돌덩어리를 쌓아둔 것 같은 모습니다.
이 탑은 鎭風塔이라 하여 후대 사람들이 이 탑의 돌을 가지고 항해나 고기잡이를 하면 파신의 노여움을 싸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몰래 조금씩 떼어가 이런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일연스님은 이 탑을 보고 그 모습이 “매우 기묘”하다고 적었다.
수많은 탑을 본 일연스님이 기묘하다고 한 것은 까닭이 있다.
파사석탑은 파사석으로 만든 축소형 스투파이거나 스투파 상단 입주일 것이다. 원래 스투파는 거대한 봉분 모양이다.
인도 석굴 사원의 스투파라면 상단 부분이 넓고 하단 부분이 좁으므로 이 파사석탑은 거꾸로 엎어야 한다. 축소형 불상이 조각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무불상시대(BC 5세기에서 AD 1세기 사이)의 것으로 보인다.
탑을 재배열 하면 구성과 형태가 인도의 스투파와 같다. 이점은 허명철님이 밝혔다.
| ||
이 탑은 원래 虎溪寺(고종 10년 1873년 폐사)에 있던 것을,
김해부사가, “허황후께서 인도 아유타국에서 가지고 온 것이니 허황후 능 곁에 두어야 한다.”고 하여 허황후 능 앞으로 옮겼다.
■ 수로왕릉(사적 제73호)
수로왕릉 정문 숭화문
홍살문을 지나,
2층누각, 가락루로 들어간다.
친절하게도 "東門入 西門出"이란 글을 써 두었다.
바라보아 오른쪽을 동쪽으로 친다.
가락루를 들어서서 내다보면
영신루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숭신각 안에는 김수로왕 신도비가 있다.
|
|
쌍어무늬
|
|
왕릉 이외의 대부문의 건물들은 제사를 위한 시설이다.
숭정각 안에는 수로왕과 왕비 허황옥의 영정이 있다.
숭정각 안에 모신 수로왕과 왕비의 영정
|
김수로왕(42~199 재위)과 왕비 허황옥(33~189)은 제도를 정비하고 고대국가의 기틀을 다져 나갔다.
이들 부부는 2대왕 거등왕을 비롯하여 아들 열, 딸 둘을 낳았다.
허왕후는 189년 157세로, 수로왕은 199년 158세에 세상을 떠났다.
수로왕릉은 흔히 볼 수 있는 원형봉토분이다. 왕릉이 언제 축조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고려 문종 때 부분적인 수리가 있었고,
조선 세종 때 정비했다. 선조 13년(1580) 당시 영남관찰사이던 허엽이 대대적으로 개축했다.
조일전쟁 때 도굴당했고, 그뒤 다시 봉토를 높였다.
인조 25년(1647) 왕명으로 능 앞에 묘비를 세웠으며,
고종 15년(1878) 나라에서 숭선전을 중수하였다.
■ 봉황동 유적(김해패총과 함께 사적 제2호)
|
새 궁궐을 짓고 부지런히 정사를 보살피고 있을 즈음 수로왕의 왕자리를 빼앗으려는 도전자가 나타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꾀 많고 교활한 사나이 석탈해다.
|
봉황대는 금관가야의 왕궁터라 한다. 지금 이곳에 왕궁터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봉황동 일대는 중간에 우뚝 솟은 봉황대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에 조개더미가 분포되어 있어 가락국 초기 생활 중심지였음은 분명하다.
■ 여의각은 여의라는 낭자의 정절을 기리는 사당이다.
사진/ 백일봉
여의각 안에 여의의 영정이 걸려있다.
여의각은 1973년 회현동 주민들이 이 사당을 건립하여 매년 단오날 추모제를 지낸다.
현재의 건물은 2002년 봉황동유적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보수정비하였다.
여의낭자와 세장군의 애틋한 사랑의 사연이 전한다.
금관가야 제9대 鉗知王(492~521 재위) 때 출정승의 딸 여의와 황정승의 아들 세가 살고 있었다.
이들의 아버지인 두 정승은 여의와 세를 낳기 전에 이미 사돈간이 되기로 약속한 터였다. 그러나 그후 지체와 세력이 더 높아진 출정승은 마음이 변해 딸 여의를 사내아이처럼 꾸며 세와 함께 서당에서 글공부를 하게 하였다. 여의는 사내아이처럼 꾸몄지만 자라면서 여자임을 감추기 힘들었을 것이다. 세는 여의를 의심하여 여의에게 소변 멀리 누기와 멀리 뛰기 시합을 제의했다. 이를 눈치 여의는 자신의 본색을 감추기 위해 달아나 버렸다.
결국 여의는 세에게 자신이 여자임을 털어놓았고, 둘은 사랑하게 되었다. 출정승도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둘을 약혼시켰다.
그후 어느날 세가 가락국을 침입한 신라군에 맞서 싸워 나라에 큰 공을 세우게 되자 왕은 세를 사위로 삼았다.
세는 이미 약혼녀가 있었으나 왕명을 거역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여의는 왕의 사위가 된 세를 잊지 못하였고 그 괴로움에 세상을 하직하고 만다. 이 소식을 들은 세 역시 여의를 잊지 못하다가 곧 죽는다. 이렇게 되고 보니 세의 아내인 공주 역시 세상을 비관하고 출가하여 불도를 닦다가 세상을 떠났다.
편액은 菁南 吳濟峯이 썼다.
사진/ bonami
또 사람들은 여의와 세의 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나무를 심어 여의목과 황세목이라 이름지었고,
큰 바위 위에 작은 바위를 얹어 여의돌과 황세돌이라 했다.
황세돌과 여의돌
그리고 두 사람과 인연이 있는 곳을 기리며 망해대라 하던 산 이름을 여의대로 고치고 제각을 지어 위령제를 지냈다.
여의대라는 산은 이제 봉황대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 김해패총은 김해 회현리패총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봉황동이지만 옛 이름은 회현동이다.
김해패총은 1907년 일본인 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처음 발견하였다. 그후 1914년부터 1935년까지 6차례나 발굴하였다.
1914년부터 17년까지 3차례 발굴하여 보고서도 내지 않고 있다가 1920년 다시 조사하여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에 따르면 돌로 만든 유물, 짐승 뼈로 만든 유물, 토기와 철기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貨泉이란 新나라(8~25) 王莽이 10년에 발행한 화폐가 출토되었다.
이를 통해 김해지역은 가락국 성립이전부터 중국과 왕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본 학자들은 김해패총을 1세기경에 형성된 것이라 하였다.
또 석기와 철기가 함께 출토되었으므로 한반도에는 청동기시대가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와같은 이론은 광복 후에도 줄곳 인정되어 오다가 1960년대에 들어서 비로소 청동기시대의 존재를 밝혔다.
또 조개무덤 속에서 탄화된 쌀도 한 주먹 나왔다.
한반도의 쌀농사가 시작된 시기를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자요다.
1935년 발굴조사에서는 조개무지 아래층에서 고인돌과 독무덤, 돌널무덤, 움집자리 등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김해패총은 앞선 시기의 무덤터와 이후 조개더미로 이루어진 생활유적지 등 2개의 문화층이 겹친 삼한시대의 유적지임이 밝혀졌다.
김해패총
아곳에서 출토된 김해토기
■ 수릉원에는 "茶祖 普州太后 許黃玉像"과,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시집올 때 가지고 온 차나무인 '장군차' 나무가 있다.
차[茶]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2대 흥덕왕 3년(828)> 조에,
"……12월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김대렴이 차종자를 가지고 왔으므로, 왕은 지리산에 심게하였다.
차 마시는 풍속은 이미 선덕(여)왕 때부터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성행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곳이 지리산 쌍계사 근처이다.
허황옥이 차나무를 가지고 왔음이 분명하다.
騎馬人物形土器(국보 제275호)
|
|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 분산성(사적 제66호)
항아리, 또는 화분처럼 보여 이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만장대는 봉수대다.
대원군의 글씨 萬丈臺
왼쪽의 대원군 낙관
해은사 대왕전에 모신 수로왕과 왕후의 영정
이 그림은 지금은 없어진 聖祖寺에서 가지고 왔다 한다.
|
|
남방불교의 스투파다.
불상 아래쪽에 있는 부조들은 힌두교의 신들이다.
우리나라 탑의 상층기단에 있는 팔부신중과 같다.
MBC 드라마 <철의 제왕 김수로> 촬영장
'문화유산 > 문화유산 답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외씨버선길 09, 춘양목 솔향기길 답사- 2014년 5월 10일 (0) | 2014.04.09 |
---|---|
천년불심길 선암사, 송광사 (0) | 2014.03.28 |
[스크랩] [부산/2월22일(토)]부산의 근대문화유산도보 (0) | 2014.02.24 |
부석사 (0) | 2013.10.31 |
화양구곡 (0) | 2013.10.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