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문화유산 답사자료

낙산사

추연욱 2009. 6. 23. 00:36

낙산사

 

 

1. 낙산사는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진전리 오봉산(낙산)에 있다.

 

2. 신라 제30대 문무왕(661~681 재위) 11(671) 의상대사(625~702)가 창건하였다.

그는 661년 당나라 終南山 至相寺로 가서 중국 화엄종의 제2智儼(602~668)에게 화엄학을 공부하다가 48세 되는 671년에 귀국한다. 그는 급하게 귀국하는데 당나라의 신라 침공 계획을 신라에 알리려고 귀국한 것이다.

<송고승전>에는 화엄대교를 펴기 위한 것이다고 했다.

 

의상은 귀국하자 곧 낙산 해변을 찾았다.

낙산 해변은 관음의 진신이 상주하는 곳이었고, 의상은 관음진신을 친견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의상은 이곳에서 관음의 진신을 친견한다.

 

<삼국유사-3권 탑상 제4,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 조에,

 

옛날 의상법사가 처음 당나라에서 돌아와 관음보살의 진신이 이 해변 어느 굴 안에 산다는 말을 듣고,

洛山이라 이름했으니, 대개 서역에 寶陀洛伽山이 있는 때문이다. 이것을 小白華라고도 했는데, 백의대사(백의관음보살)의 진신이 머물러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빌어다 이름지은 것이다.

 

여기에서 의상이 齋戒한 후 7일 만에 坐具를 새벽 물 위에 띄웠더니 천룡팔부의 시종들이 굴속으로 안내해 들어감으로 공중을 향해 참례하니 수정으로 만든 염주 한 꾸러미를 내준다. 의상이 받아가지고 물러나오니, 동해의 용왕이 또 여의보주 한 알을 바치므로 의상이 받아가지고 나와서 다시 7일 동안 재계하고 나서 비로소 관음의 참모습을 보았다.

座上의 산마루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곳에 불전을 짓는 것이 마땅하다의상이 듣고 굴에서 나오니 과연 대나무가 땅에서 솟아 나왔다. 여기에 금당을 짓고 관음상을 만들어 모시니 그 둥근 얼굴과 고운 바탕이 마치 천연적으로 생긴 것 같았다. 대나무가 도로 없어지므로 그제야 비로소 관음의 진신이 살고 있는 곳임을 알았다.

이 때문에 그 절 이름을 낙산사라 하고, 의상은 자기가 받은 두 구슬을 성전에 봉안하고 그곳을 떠났다.

 

<화엄경-입법계품>에 선재동자가 28번째로 만난 선지식이 관세음보살이다.

 

착한 남자여, 여기서 남으로 가면 補怛洛迦山이 있고 거기 보살이 있으니 이름이 觀自在니라.

그대는 그에게 가서 보살이 어떻게 보살의 행을 배우며 보살의 도를 닦느냐고 물으라.

그리고 偈頌으로 말하였다.

 

바다 위에 산이 있고 성인이 많으니 / 보배로 이루어져 매우 깨끗해

꽃과 과실나무들이 우거져 섰고, / 샘과 못과 시냇물이 갖추어 있는데

용맹하고 장부이신 관자재보살 / 중생을 이익케 하려 거기 계시니

너는 가서 모든 공덕 물어 보아라. / 그대에게 큰 방편을 일러 주리라.

 

그리하여 동자는 관음을 찾아서 다시 길을 떠난다.

문득 바라보니 서쪽 골짜기에 시냇물이 굽이쳐서 흐르고 수목은 우거져 있으며 부드러운 향풀이 오른쪽으로 쓸려서 땅에 깔렸는데 관자재보살이 금강석 위에 가부좌하고 안았고,

한량없는 보살들도 보석 위에 앉아서 공경하여 둘러 모이셨으며,

관자재보살이 대자대비한 법을 말하며 그들로 하여금 중생을 거두어 주게 하시고……

 

현장의 <대당서역기>에는,

인도 남방 말라구타국 포탈락가산[布呾락가] 꼭대기 연못에 石天宮이 있는데, 관세음보살이 거기 왕래하므로 친히 보고자 하는 이들이 험한 산세를 아랑곳하지 않고 어렵게 본다고 하였다.

 

이런 기록들은 관음 신앙인들에게 마치 이 세상 어느 곳에 관음이 머물고 있는 이러한 땅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불러 일으켰다. 중국인들은, 浙江省 寧波의 동쪽 바다에 있는 주산열도에 普陀山이 있는데 이곳의 紫竹林中에 관자재보살의 거소가 있다고 생각했다.

티베트인들는 Lhassa가 관음정토라 믿고 Potalaka사원을 지었다.

 

신라로 돌아온 의상은 그와 비슷한 관음의 성지 보타락가를 이땅에서 찾으려 돌아다니다가 양양 해변에서 찾았다.

그리고 그는 보타락가산을 줄인 낙산이란 이름을 이곳의 본디 이름인 오봉산에 덧붙이고,

절을 창건하여 이름도 낙산사라 하였다.

Potalaka라는 산스크리트어를 음역하여 寶陀洛伽라 한다. 보타락가를 줄여 洛伽, 洛山이라 한다.

 

이렇게 의상에 의하여 낙산이 관음보살의 주처라는 생각,

낙산사가 관음 도량이라는 생각이 신라 사회에 뿌리내리게 된다.

이것은 신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올 때부터 대두되었던 신라땅이 본디 붓다와 인연이 있는 국토 곧 불국토라는 생각이 다시 확인된 것이다.

원효대사가 다시 낙산사를 찾아 관세음보살을 친견함으로써 확인된다.

 

……그후 원효법사가 뒤를 이어 와서 여기에 예를 올리려 하였다. 처음에 남쪽 교외에 이르자 논 가운데서 흰 옷을 압은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 법사가 희롱삼아 그 벼를 달라고 청하니, 여인은 벼가 잘 영글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또 가다가 다리 밑에 이르니 한 여인이 月水帛을 빨고 있었다. 법사가 물을 달라고 청하자 여인은 그 더러운 물을 떠서 바친다. 법사는 그 물을 엎질러 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서 마셨다. 이때 들 가운데 있는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그를 불러 말한다. ‘醍醐스님(불성을 비유하는 말)은 쉬십시오.’ 그리고는 갑자기 숨고 보이지 않는데 그 소나무 밑에는 신 한 짝이 벗겨져 있었다. 법사가 절에 이르자 관음보살상의 자리 밑에 또 전에 보던 신 한 짝이 벗겨져 있으므로 그제야 전에 만난 성녀가 관음의 진신임을 알았다.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관음송이라 했다. 성굴로 들어가서 다시 관음의 진용을 보려고 했으나 풍랑이 크게 일어나 들어가지 못하고 그대로 떠났다.

 

<삼국유사-3권 탑상 제4,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 조에,

의상이 손수 만들었다는 관세음보살상의 영험담이 기록되어 있다.

 

옛날 서라벌이 서울이었을 때 世逵寺(世達寺의 잘못으로 지금의 경기도 개풍군 백룡산 밑에 있는 절로 뒤에 흥교사로 바꿈)의 장원이 명주 날리군에 있었는데, 本寺에서 중 조신을 보내 장원을 맡아 관리하게 했다. 조신은 장원에 와서 []김흔공의 딸을 좋아해서 아주 반하게 되었다. 여러 번 낙산사 관음보살 앞에 가서 남몰래 그 여인과 살게 해 달라고 빌었다. 이로부터 몇 해 동안에 그 여인이게는 이미 배필이 생겼다. 그는 또 불당 앞에 가서, 관음보살이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며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다가 생각하는 마음에 지쳐서 잠깐 잠이 들었다. 꿈속에 갑자기 김씨 낭자가 기쁜 낯빛을 하고 문으로 들어와 활짝 웃으면서 말한다.‘저는 일찍부터 스님을 잠깐 뵙고 알게되어 마음속으로 사랑해서 잠시도 잊지 못했으나 부모의 명령에 못이겨 억지로 딴 사람에게 시집갔다가 이제 부부가 되기를 원해서 왔습니다.’ 이에 조신은 매우 기뻐하여 그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녀와 40여 년간 같이 살면서 자녀 다섯을 두었다. 집은 다만 네 벽뿐이고, 좋지 못한 음식마저도 계속할 수가 없어서 마침내 꼴이 말이 아니어서 식구들을 이끌고 사방으로 다니면서 얻어먹고 지냈다. 이렇게 10년 동안 초야로 두루 다니니 옷은 여러 조각으로 찢어져 몸도 가릴 수가 없었다. 마침 명주 해현령을 지나는데 15세 되는 큰 아이가 갑자기 굶어죽자 통곡하면서 길가에 묻었다. 남은 네 식구를 데리고 그들 내외는 우곡현에 이르러 길가에 모옥을 짓고 살았다. 이제 내외는 늙고 병들었다. 게다가 굶주려서 일어나지도 못하니, 10세 된 계집아이가 밥을 빌어다 먹는데, 다니다가 마을 개에게 물렸다. 아픈 것을 부르짖으면서 앞에 와서 누웠으니 부모도 목이 메어 눈물을 흘렸다. 부인이 눈물을 씻더니 갑자기 말한다. ‘내가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는 얼굴도 아름답고 나이도 젊었으며 입은 옷도 깨끗했었습니다. 한 가지 맛있는 음식도 그대와 나누어 먹었고, 옷 한 가지도 그대와 나누어 입어, 집을 나온 지 50년 동안에 정이 맺어져 친밀해졌고 사랑도 굳어졌으니 가위 두터운 인연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는 쇠약한 병이 날로 더해지고 굶주림과 추위도 날로 더해오는데 남의 집 곁방살이에 하찮은 음식조차도 빌어서 얻을 수가 없게 되어, 수많은 문전에 걸식하는 부끄러움이 산과도 같이 무겁습니다. 아이들이 추워하고 배고파해도 미처 돌봐주지 못하는데 어느 겨를에 부부간의 애정을 즐길 수가 있겠습니까. 붉은 얼굴과 예쁜 웃음도 풀 위의 이슬이요, 지초와 난초같은 약속도 바람에 나부끼는 버들가지입니다. 이제 그대는 내가 있어 더 누가 되고 나는 그대 때문에 더 근심이 됩니다. 가만히 옛날 기쁘던 일을 생각해 보니, 그것이 바로 근심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대와 내가 어찌해서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뭇 새가 다 함께 굶어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짝잃은 난새가 거울을 향하여 짝을 부르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추우면 버리고 더우면 친하는 것은 인정에 차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나아가고 그치는 것은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헤어지고 만나는 것도 운수가 있는 것입니다. 원컨대 이 말을 따라 헤어지기로 합시다.’ 조신이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각각 아이 둘씩 데리고 장차 떠나려 하는데, 여인이 말한다. ‘나는 고향으로 갈 테니 그대는 남쪽으로 가십시오.’

이리하여 서로 작별하고 길을 떠나려 하다가 꿈에서 깨었다. 타다 남은 등잔불은 깜박거리고 밤도 이제 새려고 한다. 아침이 되었다. 수염과 머리털은 모두 희어졌고, 망연히 세상일에 뜻이 없다. 괴롭게 살아가는 것도 이미 싫어졌고 마치 한평생의 고통을 다 겪고 난 것과 같아 재물을 탐하는 마음도 얼음 녹듯이 깨끗이 없어졌다. 이에 관음보살의 상을 대하기가 부끄러워지고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을 참을 길이 없다. 그는 돌아와서 꿈에 해현에 묻은 아이를 파보니 그것은 바로 석미륵이다. 물로 씻어서 근처에 있는 절에 모시고 서울로 돌아와 장원을 맡은 책임을 내놓고 사재를 내어 정토사를 세워 부지런히 착한 일을 했다. 그후에 어디서 세상을 마쳤는지 알 수 없다.

논평해 말한다. ‘이 전기를 읽고 나서 책을 덮고 지나간 일을 생각해 보니 어찌 調信師의 꿈만이 그렇겠느냐. 지금 모두가 속세의 즐거운 것만 알아 기뻐하기도 서두르기도 하지만 이것은 다만 깨닫지 못한 때문이다.’

 

이 설화를 소재로 춘원 아광수(1892) 소설 <꿈>을 썼다. 텔레비전 드마로로 제작되어 방송하기도 했다.

 

3. 헌강왕 2(853) 범일국사가 중건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정취보살을 친견하고 그 보살상을 모셨다.

<삼국유사-3권 탑상 제4,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 조에,

 

그 뒤에 굴산조사 범일이 太和년간(827~835)에 당나라에 들어가 명주 開國寺에 이르니 한 중이 왼쪽 귀가 없어진 채 여러 중들의 끝자리에 앉아있다가 조사에게 말한다. “나도 또한 한 고향 사람으로, 내 집은 명주 경계인 익령현(강원도 양양) 덕기방에 있습니다. 조사께서 다음 날 본국으로 돌아가시거든 모름지기 내 집을 지어주셔야 합니다.” 이윽고 의상조사는 총석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염관(항주의 진국해창원이 있던 제안선사)에게서 법을 얻고 847년 본국으로 돌아오자 먼저 굴산사를 세우고 불교를 전했다.

대중 12년 무인(858) 2월 보름밤 꿈에, 전에 보았던 중이 창문 밑에 와서 말한다. “옛날 명주 개국사에서 조사와 함께 약속을 하여 승낙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렇게 늦는 것입니까조사는 놀라 꿈에서 깨자 사람 수십 명을 데리고 익령 경계에 가서 그가 사는 곳을 찾았다. 한 여인이 낙산 아래 마을에 살고 있으므로 그 이름을 물으니 덕기라고 한다. 그 여인에게 아들 하나가 있는데, 나이 겨우 8세로 항상 마을 돌다리 가에 나가 놀았다. 그는 어머니에게 말한다. “나와 같이 노는 아이들 중에 금빛이 나는 아이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이 사실을 조사에게 말했다. 조사는 놀라고 기뻐하여 그 아이와 함께 놀았다는 다리 밑에 가서 찾아보니 물속에 돌부처 하나가 있는데, 꺼내 보니 왼쪽 귀가 없어진 것이 전에 보았던 중과 같았다. 이것은 곧 정취보살의 불상이었다. 이에 간자(점치는 댓조각)를 만들어 절 지은 곳을 점쳤더니 낙산 위가 제일 좋다고 하므로 여기에 불전 3칸을 지어 그 불상을 모셨다.

그 뒤 100여 년이 지나 들에 불이 나서 이 산까지 번져 왔으나 오직 관음 정취 두 성인을 모신 불전만을 화재를 면했다.

 

正趣보살은 화엄경-입법계품에 등장한다. 선재동자가 53 선지식를 찾는 과정에 29번째로 만나는 보살이다. 그는 선재동자에게 해탈법문을 설법해 준다. 정취보살은 물론 관세음보살의 33응신 중 하나일 것이다.

 

<삼국유사-3권 탑상 제4,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 조에 실려있는 세 개의 관음영험담에 대하여,

조동일은 다음과 풀이하였다.

 

의상과 범일은 불법을 구하러 중국에 갔었다. 그런데 보살은 신라땅 동해변에 있었다. 이런 설정은 이른바 불국토 사상을 나타내 준다. 신라는 원래 과거불이 활동하던 고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부처나 보살의 진신이 자리를 잡고 있는 숭고한 영역이다. 그런 줄 모르고 밖에 나가 불법을 구한 것은 잘못일 수 있다. 관심을 안으로 가져야 자기 발견에 의한 각성을 이룩할 수 있다는 말이다.

 

보살은 아무나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상은 목욕재계하고 온갖 정성을 다 하여 보살을 만나러 갔다. 그런데도 처음에는 보살을 옹위하고 있는 무리가 주는 구슬 따위나 받아왔을 따름이었다. 보살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시 정성을 갖추자 비로소 보살의 진용을 보았다. 하지만 모습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고 들린 소리만 적어 놓았다.

절을 지을 곳을 알려주는 소리였다.

 

이처럼 의상은 숭고한 것을 숭고하게 추구했다.

그러자니 숭고한 것은 아득하기만 하다. 아득할수록 받들어 섬겨야 한다면 관심을 안으로 가져 자기 발견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무엇인가 의심스럽게 된다. 우리 자신은 아득하고 숭고한 것과의 거리 때문에 더욱 비속하게만 느껴지고 만다면 무슨 보람이 있는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귀족불교의 노선이라면 반발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원효가 다시 갔다.

원효는 정성을 들이지 않았는데도 보살이 스스로 나타났다.

보살은 벼 베는 여자거나 개짐을 빨고 있는 여자이다. 숭고하지 않고 전혀 비속하기만 하다.

의상이 갔던 경우와는 다르게 모습을 다 드러내놓고 있었으며 원효와 우스개 소리를 주고받았다. 벼를 달라고 하니 쭉정이뿐이라고 했고 물을 달라고 하니 개짐 빤 더러운 물을 주었다.

 

이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태이다. 그 가운데 진실이 있다.

숭고한 것과 비속한 것은 둘이 아니다. 숭고하다고 받들어 온 보살이 그렇게까지 비속하다고 해야 숭고에 집착되지 않고 진실을 발견할 수 있으며, 비속한 사람이 자기 각성에 이른다.

원효는 그와 같은 새로운 불교를 열었다고 생각되어서 이야기가 의상의 경우와는 전혀 반대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원효는 개짐을 빨던 여자가 더러운 물을 떠주자 마시지 않고 버렸다. 비속한 것을 피하고자 하는 생각이 아직 남아 있으니 보살의 경지에는 이르지는 못했다.

그 물을 그대로 마셨더라면 더욱 크게 깨달았을 것인데 안타깝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범일이 정취보살을 만났다.

보살은 어느 보살이든 상관없다. 어느 경우나 진실을 상징한다고 보아도 좋다.

범일이 만난 보살은 왼쪽 귀가 잘라지고 없는 어린 중이었다. 모습이나 지위가 비속한 쪽이라 알아보지 못했다. 나중에 다시 찾았을 때에는 산다는 곳이 어느 촌락, 범속하기만 한 여자의 집이었다. 그 집에 겨우 여덟 살 된 아이가 있어서 자기가 동무삼아 같이 노는 상대인 금빛 동자를 일러주었다. 가서 보니 왼쪽 귀가 잘려진 돌부처였다.

 

이 경우에는 누가 보살이라는 말인지 명확하지 않다. 그 여자도 보살일 수 있다.

그저 그렇게 사는 삶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보살의 길이다. 돌부처를 동무삼이 논 천진난만한 아이도 보살일 수 있다.

 

보살이란 그 이상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그런가 하면 다리 밑 물속에 버려져 있는 왼쪽 귀가 잘려진 돌부처는 보살의 모습을 하고 있다. 누가 보살이라고 했건 범속한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바로 진실임을 말해 주는 데는 차이점이 없다.

 

그래서 원효의 경우와도 다르다. 원효는 비속한 것을 애써 찾아 숭고한 것을 파괴하고자 했다면,

범일은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아무런 전제나 의도 없이 인정했다 하겠다.

 

보살이라는 이름의 진실을 의상은 높이 올리기만 하고,

원효는 아주 끌어내리기만 했다면,

범일이 나서서 제자리에 두었다는 말이다.

 

의상의 길, 원효의 길, 범일의 길은 같은 시기에도 논란이 될 수 있다.

나날이 살아가면서 자기 발견의 진실에 이르고자 할 때 그 어느 길을 택해야 할 것인가 고민일 수 있다.

그 세 사람을 두고 한 이야기는 이런 고민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절실한 느낌을 준다. 그런가 하면 신라 불교사는 의상의 길, 원효의 길, 범일의 길을 각기 어느 시대의 특징으로 삼으면서 전개되어 왔다. 귀족불교가 위세를 떨치자 원효가 나서서 민중불교로의 길을 열었다.

그래도 달라진 것이 없게 되었을 때 범일을 위시한 선승들이 다시금 혁신을 시도했다.

(조동일, <한국설화의 민중의식>, 정음사, 1985. 53~57)

 

4. 고려 태조가 고려를 세운 직후 봄 가을로 낙산사에 사자를 보내 재물을 보내고 이를 일상사로 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 고려 명종 15(1185) 당시 병마사였던 유자량이라는 사람이 굴 앞에서 분향예배하자 청조가 꽃을 물고 날아와서 갓 위에 떨어뜨린 일이 있다고 하였다.

 

5. 1231년 몽고의 침입으로 폐허가 되었다.

당시 주지였던 아행이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가지고 도망하려 하였는데, 절의 노비였던 걸승이 목숨을 걸고 그것을 빼앗아 땅에 묻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전쟁이 끝나고 두 보주는 관가에 보관하였고, 절도 재건하였지만 옛날 같은 영화는 아니었다.

 

역시 <삼국유사-3권 탑상 제4,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 조에,

 

몽고의 병란이 있은 이후인 계축 갑인년간(1253~1254)에 두 성인의 참 얼굴(관음 · 정취보살상)과 두 보주(수정염주와 여의보주)를 양주성(양양)으로 옮겼다. 몽고군이 몹시 급하게 공격하여 성이 장차 함락되려 하므로 주지선사 아행이 은으로 만든 합에 두 구슬을 넣어 가지고 도망가려 하자 이것을 절이 있는 종 걸승이 빼앗아 땅에 묻고 깊이 맹세했다. “내가 만일 병란에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면 두 구슬을 끝내 인간세상에 나타나지 못해서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요, 내가 만일 죽지 않는다면 마땅히 이 두 보물을 받들어 나라에 바칠 것이다.”

 

갑인년(1254) 1022일에 이 성이 함락되어 아행은 죽음을 면치 못했으나 걸승은 죽음을 면했다.

그는 적의 군사가 물러가자 이것을 파내어 명주도 감창사에게 바쳤다.

이때 郎中 이녹수가 감창사였는데, 이것을 받아 감창고 안에 간직해 두고 교대할 때마다 서로 전해서 이어 받았다.

 

무오년(1258) 11월에 이르러 본업의 늙은 중, 기림사 주지 대선사 覺猷가 임금께 아뢰었다. “낙산사 두 보주는 국가의 神寶이온데, 양주성이 함락될 때 절의 중 걸승이 성 안에 묻었다가 적병이 물러간 뒤에 파내어 감창사에게 바쳐서 명주성의 창고 안에 간직하여 왔습니다. 지금 명주성도 지킬 수 없사온즉 마땅히 어부로 옮겨 모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임금은 이를 허락하고 야별초 10 명을 내어 걸승을 데리고 명주성에서 두 보주를 갖다가 내부에 안치해 두었다. 그때 사자로 간 10명에게는 각각 은 1근과 쌀 5석을 주었다.

 

이때 두 보주는 참화를 면했으나 관음상은 형체만 남고 복장은 모두 몽고병에게 약탈당하고 만다.

1284년 수정염주와 여의보주는 佛牙와 함께 군신과 대중들에게 널리 공개하여 예배하는데,

이 불아는 의상이 당나라 종남산 지상사에서 공부할 때 도선율사(596~667)와 교유하면서 도력을 겨누다가 天帝에게 청하여 빌려온 것이라고 <삼국유사-3권 전후소장사리> 조에 기록되어 있다.

 

이규보 등이 이 소식을 듣고 다시 복장을 갖추어 관음상을 모시게 되었다.

이규보가 지은 <낙산사관음복장중수보문>心圓鏡 2, 五香, 색실, 비단 주머니 등 여러 가지 물건을 갖추어 관음상의 복중을 완전히 채우고 겉모습도 복구하였다.

 

6. 세조는 왕 12(1446) 오대산 상원사를 참배하고 태자(예종)와 함께 낙산사에 들렀다.

세조는 1448년 학열을 중창주로 삼아 중건에 착수하였다. 당시의 중건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입구의 홍예문, 원통보전을 두르는 담장, 탑 등이 남아있었다.

탑은 의상이 창건 당시 3층이던 것을 7층으로 올리면서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탑 속에 안치했다고 한다.

홍예문은 서쪽에서 진입하는 낙산사 입구에 세웠는데, 화강석 26개를 장방형으로 다듬어서 반월형 문을 만들었다. 당시 강원도에는 26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세조의 뜻에 따라 각 고을의 군수가 석재 하나씩을 모아서 지었다는 전설이 있다.

 

원통보전의 담장은 붉은 빛이 나는 흙으로 만든 기와와 화강석을 배열한 것으로 전체 높이 4m, 둘레는 30m에 이른다.

 

 

7. 이로부터 3년 후 성종 2(1471) 선학이라는 사람이 다시 중건하였다.

이때 퇴락한 전각과 누각을 수리하고, 용선전, 영산전, 어제루, 승당 등을 보수하고 단청하였다.

4년 후 불이 나서 승당이 불탔는데 학선이 다시 중건하였다.

 

성종은 낙산사에 토지를 더 내리고 주변에 민가를 짓지 못하게 하고, 주위 바다에서 고기를 잡지 못하게 하고,

산에 나무도 하지 못하게 하는 등 사찰 보호 교지를 내리고 이울러 한계희로 하여금 낙산사를 중건하게 하여 사적을 기록해 남긴다.

 

1485년 남효온은 낙산사를 관람하고 <遊金剛山記>라는 글을 남겼는데,

이 글이 <속동문선 21>에 실려있다. 이 글에, “관음전을 참배하였다. 그 관음상은 제작한 기술이 극히 정밀하고 교묘하여 영혼이 들어있는 듯하였다. 전 앞에 정취전이 있고, 전 안에는 금불 셋이 있다 고 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의상이 손수 만들었다는 관음소상이 관음전에 안치되어 있었고, 그 앞 정취전에는 세 금상이 있었으며, 관음굴에는 조그만 동불이 안치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남효온은 관음굴에 동불이 있다고 하였다. 이 불상은 물론 몽고의 병란 후 복장을 새로 모신 옛 불상일 것이다.

정취보살은 옛 것이 아닐 것이다. 범일국사는 왼쪽 귀가 잘려진 석상을 모셨다고 했는데, 남효온은 금불삼체라 했기 때문이다.

 

8. 조일전쟁 · 조청전쟁 때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관음전, 관음상, 정취전 등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의상이 만들었다는 관음상도 흙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후 광해군 11(1619) 관음굴을 중건하고,

인조 9(1631) 종밀이, 인조 21(1643) 도원이 중건했다.

 

9. 고종 9(1905) 경은이 중건하였다.

선당, 후각 등 몇몇 당우의 재건에 불과했다.

 

10. 한국전쟁 때 다시 폐허가 되었다.

19534월 당시 제일군단장 이형근이 원통보전, 범종각 등을 복구했고, 1976년 원철이 중건했다.

 

11. 200544일 밤 1150분 강현면 사교리 야산에서 산불이 일어났다.

51120분쯤 일단 진화되었다. 2시쯤 다시 번졌다.

이 불로 낙산사는 건물 18동 중 홍련암, 보타암, 의상교육원, 의상대 등을 제외하고 건물 13동이 불탔다.

동종(보물 제479)은 완전히 녹아버렸고 칠층석탑은 일부 파손되었다.

 

 

 

금당은 원통보전이었는데,

2005년 불로 몽땅 타버렸다. 안에 봉안되어 있던 건칠관음보살좌상과 탱화는 미리 대피했다.

 

洛山寺乾漆觀音菩薩坐像(보물 제1362)은 금속으로 만든 8각 대좌 위에 독존으로 봉안되어 있었다.

네모꼴에 가까우면서도 각지지 않는 두툼한 얼굴에는 세련된 기품이 배어있다.

허리를 곧추 세우고 고개만 앞으로 약간 숙여 마치 굽어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목에는 三道가 뚜렷하고, 가슴은 두드러지게 표현되었다.

오른손은 가슴에 올리고 왼손은 배에 두었으며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모양을 하고 있는데,

가냘픈 듯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양 어깨를 덮은 옷은 주름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렸고, 내의 깃이 가슴 밑을 수평으로 가로지르고 있다.

 

온몸에는 화려한 구슬장식이 드리워져 있다.

이러한 모습은 당대 왕비나 공주의 풍모라 한다.

특히 보관은 송나라 태후의 보관을 닮은 고대 이래의 보관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서 보관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 관음상은 한국전쟁 후 폐허가 된 절을 복구하면서 20km 떨어진 설악산 관모봉 자리에 있는 영혈사에서 옮겨 온 것이다. 고려 문화의 전성기인 12C 전반기에 만든 것으로 보고있다.

 

보타암2005년의 불길을 면했다.

안에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千手觀音 · 聖觀音 · 十一面觀音 · 如意輪觀音 · 馬頭觀音 · 准堤觀音 · 불공견색관음 등 7관음상과 32응신상, 천오백관음상이 봉안되어 있다.

관음신앙의 성지답게 모든 관음상이 봉안된 것이다. 1500관음상 한 분 한 분의 천수천안과 32응신상을 곱하면 그 수가 5천만 정도인데, 그것은 곧 5천만 우리 민족의 인구수와 비슷하다.

곧 우리 5천만 민족의 구원과 해탈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관음상은 모두 백두산에서 자라는 紅松으로 만들었다.

 

홍련암은 의상이 관음을 친견하고 대나무가 솟은 곳에 지은 불전이다.

일설에는 의상이 이곳을 참배할 때 푸른 새를 만났는데, 새가 석굴 속으로 자취를 감추자 이상히 여겨 굴 앞에서 밤낮으로 7일간 기도하였다고 한다. 7일 후 별안간 바다 위에 홍련이 솟아 그 가운데 현신한 관음보살을 친견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이 암자를 짓고 홍련암이라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초창은 문무왕 12(672)이다.

 

바닷가 암석굴 위에 자리잡은 이 암자는 현존하는 유일한 양식의 법당이다. 법당 마루에 지름 10cm 정도의 구멍을 뚫어 마루 밑으로 바다를 볼 수 있게 했다. 의상에게 여의주를 바친 용이 불법을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한 조처일 것이다.

감은사 법당은 용으로 화현한 문무왕이 출입할 수 있도록 역시 법당 밑에 바닷물이 통하도록 하였다.

 

신라 · 고려 때의 중창 기록은 남아있는 것이 없다.

 

조일전쟁 이후 복구 기록이 있다.

영조 28(1572) 덕린이 중수했고,

정조 21(1797) 혜근이 다시 중수했다.

순조 2(1802) 청호 운흥 두 승려가 다시 중수했고,

1975년 주지 원철이 중수하여 옛 모습을 복원하였다.

현재는 높이 7.5m 측면 8m, 정면 6m의 목조관음전을 본당으로 하고 요사가 동향으로 서있다.

 

해수관음입상19725월 착수하여 1977116일 점안했다.

조각가 권정환이 화강암 750톤으로 만들었다. 높이는 16m로 동양 최대의 해수관음상이라 한다.

 

의상대1926년 만해 한용운이 낙산사에 머물고 있을 때 장엄한 낙산일출을 바라볼 정자가 없는 것을 아쉬워 해 육각정을 짓고 의상대라 하였다. 의상이 수도하던 곳이라 한다. 의상대는 관동팔경의 하나로 이곳의 해돋이는 절경이다.

 

정자를 세울 때 대들보로 쓸 굵은 나무가 없어 애를 먹던 중 거센 바람이 몰아쳐 소나무가 넘어져 부러진 소나무를 이용해 지었다. 지은 지 10년 후 큰 폭풍으로 무너졌다가 다시 세웠다. 현재의 것은 1975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동종(보물 제479)1496년 예종이 아버지인 세조의 뜻을 받들어 만들었다.

높이 1.58m, 입지름이 98cm로 음관이 없고 종신과 용뉴로 되어있다. 용뉴는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머리를 반대 방향으로 향해 몸을 엮고있는데, 뿔이 유난히 크다. 부리부리한 눈은 아래로 향하고, 입은 꼭 다물고 있다.

종신의 어깨 부분에는 상대가 없고 귀꽃이 있는 연화문을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며 중간선의 윗부분에는 선 세 개를 그어 상하를 구분하였다. 중간선의 윗부분에는 연곽은 없고 보살상 네 구를 양각하였다. 보살상은 36.8cm의 입상으로 두광과 보관, 천의 등이 새겨져 있는데, 두광은 큼직하고 얼굴 표정은 원만하며, 양쪽 어깨와 팔에 아름다운 천의가 걸쳐져 있다. 가슴 앞에 손을 들어 합장하고 있고, 팔찌도 잘 어울린다. 보살상 사이사이에 일정한 간격으로

4자씩 모두 16자의 梵字가 양각되어 있고 윗부분에도 12자의 범자가 일정한 간격으로 양각되어 있다.

종 아랫부분에는 하대가 없이 물결무늬 띠를 이루고 있으며, 그 위쪽에 장식 문양 대신 범종의 조성 연대와 관계자의 이름을 적은 명문을 양각했다.

당좌는 없고, 素文帶에 타종한 흔적이 있다.

이 종은 우리나라 범종의 형태인 신라나 고려의 양식을 따르지 않고 각부에 중국풍을 많이 도입한 조선의 종이다.

2005년 화재로 몽땅 녹아버렸다.

 

 

칠층석탑(보물 제499)은 낙산사 본당인 원통보전 앞에 있다. 높이 6.2m에 칠층을 이루며 귀퉁이가 깨어져 나갔지만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20054월 불이 나 일부 파손되었다.

의상이 창건할 당시에는 3층이었던 것을 세조 13(1467)에 칠층으로 다시 만들었다 한다. 몽고 침입시 걸승이 지켰다는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탑 속에 모셨다고 한다. 그 뒤 한국전쟁 때 손상되었다가 1953년 재건할 때 함께 재건되었다.

하대석 위쪽 한면에 꽃잎 6개씩 24개 잎을 가진 복련을 장식하였다. 이런 수법은 신복사터삼층석탑, 월정사 89층석탑에서 볼 수 있는 양식으로 매우 특이하다.

탑신부는 별다른 체감을 보이지 않는 각층의 몸돌 아래에 몸돌보다 넓은 괴임돌을 하나씩 끼워넣었다. 괴임돌과 몸돌은 두께가 거의 같고, 모서리기둥을 새기지 않은 점이 특이하다. 지붕돌은 경사가 별로 없이 편편하고 아래 층급받침이 각층 3단을 보이고 있다. 이는 약화된 특성으로 통일신라나 고려때에는 볼 수 없는 조선시대 다층석탑의 양식적 특징이다. 추녀는 매우 얇고, 추녀 밑과 지붕돌의 합각머리에 반전이 있어 경쾌하다.

상륜부에는 몸돌받침과 같은 형태의 돌과 화강암으로 된 노반을 올렸다. 노반 위에는 찰주를 중심으로 청동제 복발과 중첩된 보륜을 조성하였는데 이 수법 역시 고려 이후부터 나타나는 청동제 상륜으로 원나라의 잔재를 보이고 있다.

 

 

 

 

 

수월관음도

1232년 徐九方이 그렸다. 일본센오쿠박물관에 있다.

 

낙산사.hwp

 

 

 

낙산사.hwp
2.26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