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운대에서- 2010년 12월 31일
■ 몰운대(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7호)
沒雲臺는 낙동강 하구의 최남단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곳은 안개나 구름이 끼면 그 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다 하여 이런 이름을 얻었다.
16세기 까지는 몰운도란 섬이었는데, 그후 낙동강에서 내려온 토사의 퇴적으로 다대포와 연결된 것으로 전한다.
해안에는 기암괴석에 후박나무, 동백나무, 사철나무, 굴피나무, 때죽나무, 자귀나무 등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수목으로 빽빽이 들어서 있고, 주변에는 낙동강에서 떠내려온 모래에 의하여 형성된 다매등도, 장자도, 남, 북형제도, 목도 등 섬들과 동호섬, 쥐섬, 모자섬, 오리섬, 자섬, 동섬, 필봉섬, 금문도 등이 둘러싸 아름다운 경치를 만들고 있다.
<동래부지>에 동래부사를 지낸 李春元(1571~1634)의 시가 전한다.
浩蕩風濤千萬里 호방한 파도 천만리에
白雲天半沒孤台 흰 구름 덮이니 고대는 몰하고
扶桑曉日車輪赤 동쪽 하늘 둥근 아침해는
常見仙人賀鶴來 늘 선인이 학을 타고 오는 듯.
Grofe(1892~1972)
Grand Canyon Suite
4. Sunset
■ 다대포 객사(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호)
현재의 객사는 조선 후기 다대포첨절제사영 건물이다.
세종(1418~50 재위) 때 삼포(동래의 부산포, 진해의 제포, 울산의 염포)의 개항이 있은 후 이곳의 방어가 중요해져 부산포, 제포에 첨첨절제사영을 두었고, 부산포영 휘하에 다대포 등 10포에 만호영을 두었다. 이때 다대포영은 장림포에 있었다.
언제 다대포로 옮겼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명종(1545~1567 재위) 이후 수군의 제도를 개혁했는데, 이때 鎭, 堡제가 실시되고 부산포와 다대포는 중요시되어 진이 되었으며 종전의 좌도의 대부분의 만호영은 보가 되었다.
조일전쟁 이후 다시 군제를 고친다. 다대진은 부산진, 두모포, 개운포, 포이진, 서생진, 서평진과 함께 경상좌도의 칠진의 하나가 되었다. 다대진은 부산진과 함께 다른 진보다 중시되어 2배의 병선을 보유했으며, 다대진첨사는 평안도의 만포진첨사와 함께 정삼품당상관이 임명되었다.
다대진 객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조선 순조 25년(1825) 중수한 기록은 남아있다. 본디 다대초등학교 구내 첨사영에 있던 것을 1970년 이곳 몰운대로 옮겨 원형대로 복원한 것이다.
객사는 조선시대 지방관아 건물로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望拜를 드리며 때로 사신의 숙소이기도 하다.
■ 윤공단(부산광역시 기념물 제9호)
조일전쟁 때 전사한 尹興信(?~1592)과 전몰장병을 위한 제단이다.
전쟁이 끝난 후 동래부와 부산진에서 전사한 이들이 차례로 밝혀져 포상을 하고 단, 사묘도 세웠으나 다대진만은 당시의 사실을 아는 사람도 없고, 역대 첨사들도 사적을 밝히는데 무관심하여 사적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영조 37년(1761) 경상감사(1758) 趙曮(1719~1777)이 윤흥신의 사적이 기록된 문헌을 입수하여 조정에 포상을 건의하고 이에 따라 영조 41년(1765) 다대첨사 이해문이 단을 세웠다. 단이 있는 이곳은 다대객관 동쪽으로 윤흥신이 전사한 곳이라 한다.
본디 다대성내에 있던 것을 1970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단의 중앙에 있는 비는 높이 180cm 너비 60cm쯤 된다. 앞면에 “僉使尹興信殉義碑”, 뒷면에 공의 사적이 12줄로 기록되어 있다.
비의 양 측면에는 의사 尹興悌碑와 殉亂士民碑가 세워져있다.
1592년 4월 13일 대마도 오우라 항을 출발한 전선 700여 척에 1만 8700여 명이 타고 있었다. 그 중에는 대마도 도주이자 고니시 유키나카의 사위인 종의지(쇼 요시토모)가 거느린 5000여 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군은 이튿날 새벽 부산진을 점령하고 군대를 나누어 일부는 동래성, 일부는 서평포진(사하구청 주변)와 다대포를 습격해 완강한 저항을 꺾고 점령했다.
■ 다대포성지
성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조선 초 多大浦鎭이 장림포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곳에서 현재의 다대포로 옮긴 후 본격적으로 성을 쌓았을 것으로 보인다. <동국여지승람> 동래현 關防조에, “석성은 둘레가 1806척, 높이 13척, 수군만호 1명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일전쟁 이전 수축되어 전쟁에 대비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조일전쟁 중 크게 파괴되었다가 전후 다시 쌓아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동서남북에 성문이 있어 동문은 沛仁樓, 서문은 迎爽樓, 남문은 壯觀樓, 북문은 肅威樓라 했다. 성안에는 동헌, 객사를 비롯하여 무기를 넣어두는 창고, 군량을 저장하는 창고 등 여러 건물이 있었다.
문루터 5개소와 성벽 높은 곳은 3m, 낮은 곳을 1m쯤 남아있다.
각 도에 속한 병사들은 육군과 수군으로 나뉘는데, 육군을 지휘하는 관리를 병마節度使(병사), 수군을 지휘하는 관리를 수군절도사(수사)라고 했다. 병마절도사는 종2품관, 수군절도사는 정3품관이었다. 곧 육군사령관, 수군 사령관이다. 병사와 수사의 정원은 도에 따라 정해져 있었다. 정원이 1명인 경우는 관찰사가 겸했으며, 2명 이상인 경우는 관찰사 외에 별도로 병사나 수사를 두었다. 남쪽 바다에 접해 있으면서 왜구의 침입이 잦은 전라도와 경상도의 수사 정원은 3명이었다. 따라서 2명의 수사가 별도로 임명되었는데, 이들 수사는 각각 좌도와 우도를 나누어 담당했다. 재직 기간은 720일이다.
병영에는 절도사 아래로 병마僉節制使, 수영에는 수군첨절제사가 있었다. 첨절제사는 각 진영에 속했던 무관직이다. 태종 9년(1409)에 설치했으며 수군첨절제사는 세조 12년(1466)에 도만호를 개칭한 것이다. 牧·府의 소제지에서는 수령이 겸임하였다. 종3품관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다대포와 평안도 만포진에는 정3품으로 임명하였다. 수령이 겸임하지 않고 전문적인 무관으로 첨절제사를 두었을 때 한하여 첨사라 하였다. 첨절제사 아래 중군, 수군우후, 별감 총관 등이 있었다.
■ 정운공순의비
鄭運장군은 조일전쟁 때 부산포 해전에서 중군장으로 ‘沒雲’의 운자는 자신의 이름 ‘運’과 같다 하여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했다. 이를 기념하여 세운 비로 당시의 사적이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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