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시집

李陸史의 시 <喬木>, <강건너간 노래>와 <꽃>

추연욱 2009. 5. 23. 18:31

 李陸史의 시 <喬木>과 <꽃>


           喬木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 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이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 속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교목 이육사 

 

 

 

 

喬木

 

이육사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 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이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 속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육사시집>, 1946.  

 


 

 

 

 

강건너간 노래

 

이육사

 

섯달에도 보름께 달밝은 밤

앞 내 강 쨍쨍어려 조여든 밤에

내가 부른 노래는 강건너 갔소

 

강건너 하늘 끝에 사막도 닿은 곳

내 노래는 제비같이 날아서 갔소.

 

못잊을 계집애 집조차 없다기에

가기는 갔지만 어린 날개 지치면

그만 어느 모래벌에 떨어져 타서죽겠죠

 

사막은 끝없이 푸른 하늘에 덮여

눈물 먹은 별들이 조상오는 밤

 

밤은  옛일을 무지개보다 곱게 짜내나니

한가락 여기 두고 또한 가락은 어디멘가

내가 부른 노래는 그 밤에 강건너 갔소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쟎는 그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여.


한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 성에는

나비처럼 취하는 회상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육사시집>, 1946.